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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이 흔들린다 느껴진다면

남희령 지음 | 책이있는풍경
내 인생이 흔들린다 느껴진다면

남희령 지음

책이있는풍경 / 2019년 7월 / 264쪽 / 14,800원





1 휴먼 프로그램 작가로 살아간다는 것



부끄러운 기억도 쓸모가 있다

고백하건대 방송작가인 나는 대학생이 되기 전까지 독서를 모르고 살았다. 그때까지 내가 한 독서는 오로지 국어 국정교과서의 지문을 읽는 게 다였다. 그야말로 시험에 필요한 독서 말고는 전혀 하지 않고 살았단 얘기다. 그랬던 내가 방송작가로 긴 시간 살 수 있었던 건 우연한 경험 덕분이었다.

대학교 3학년 때, 자유선택으로 국어국문학과 수업을 들었다. 이 또한 국어국문학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다. 절친인 동아리 친구가 국문과라는 이유 하나였다. 비평 수업인지라 내용도 따라가기 빠듯한데 에세이를 쓰라신다. 아… 에세이라….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배우던 경수필, 중수필을 말씀하시는 것이던가. 수필이라고는 써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주제는 아무거나 좋으니 편한 대로 쓰면 그게 수필이 된다고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막막한 마음에 창밖을 쳐다보고 있자니 아침부터 내리고 있는 빗줄기에 눈길이 갔다. 그 순간, 나의 기억은 7년 전의 비 오던 어떤 날로 되돌아갔다.

때는 중학교 2학년 여름. 장마철이었다. 마지막 7교시 수업을 받고 있는데 억수같이 비가 쏟아졌다. 장마철인 걸 뻔히 아니 우산을 미리 준비해서 등교를 했으면 좀 좋을까마는 그런 날은 머피의 법칙처럼 우산을 챙긴다는 걸 꼭 잊는다. 그날도 그랬다. 분명 저 비를 뚫고 집에 갔다가는 속옷까지 옴팡 젖을 그런 비였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두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엄마가 우산을 들고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면 하는 생각과 차라리 엄마가 오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

나는 늦둥이 막내다. 아빠 나이 마흔셋, 엄마 나이 마흔넷에 내가 태어났다. 그러다보니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엄마는 이미 흰머리 성성한 할머니였다. 더군다나 옻이 심하게 올라 염색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친구들 앞에서 할머니에 가까운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종례까지 끝나고 교문을 나서는데 교문 앞에 가득한 학부모들 사이로 엄마가 보였다. 그것도 우산살까지 보기 좋게 부러진 우산을 쓰고서 말이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엄마를 외면한 채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도착하고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엄마는 집에 도착했다. 눈에 불을 켜고 쳐다봐도 우리 막둥이를 못 봤다며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냐고 엄마는 한없이 미안해하셨다.

국문과 수업을 듣던 그날 아침도 비가 내렸다. 어둑한 날씨 탓에 늦잠을 잔 터라 부리나케 준비를 해서 집을 나섰다. 한참 골목길을 뛰어 내려가고 있는데 오르막 골목 중턱에 엄마가 우산을 쓰고 앉아있었다. “엄마! 여기서 뭐 해?” “아이고, 오르막이 힘들어서 쉬는 중이다. 학교 가냐? 얼른 가.” “갔다 올게. 엄마도 얼른 집에 가.” 무심하게 부탁드리고 지하철역을 향해 정신없이 뛰는데 늙은 엄마가 창피하다며 엄마를 외면하고 장맛비를 뚫고 집에 왔던 장마철의 풍경이 오버랩되었다. ‘아, 지금에 비하면 그때 우리 엄마는 늙은 게 아니었는데…. 내가 왜 그때 엄마를 부끄러워했을까.’

수필은 비와 엄마에 관한 이틀의 풍경이었다. 그리고 그 수필로 나는 점수 짜기로 유명한 교수님으로부터 국문과 학생이 아닌 타과생 중, 유일하게 A학점을 받았다. 부끄러운 기억이 쓸모가 있다는 걸 난 그때 처음 알았다.

나는 교양 프로그램 중에서도 유난히 휴먼 다큐멘터리를 많이 했다. 지금은 종영된 KBS의 <피플 세상 속으로>가 그렇고, SBS의 <리얼코리아>가 그렇고, 요즘도 방송되고 있는 KBS의 <인간극장>이 그렇고, MBC의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가 그렇고, 10년째 하고 있는 KBS의 <아침마당>도 모두 사람 얘기고 인생 얘기다. 생각해보면 내가 오랜 시간 휴먼 다큐멘터리나 토크쇼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나의 유년 시절 체화된 감추고 싶은 기억 덕분이지 싶다. 늙은 부모님의 정서는 물론, 터울 많은 언니, 오빠들로부터 그 세대의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었다.

나와 나이 차이 한참 나는 그들이 어떤 때에 감동하고 어떤 때에 슬퍼하는지, 어떤 때에 부끄러워하고 어떤 때에 벅차하는지를 피부로 느낀다. 밥상에 올라온 생선 한 토막을 차마 드시지 못했던 엄마의 마음을 느끼고,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취업을 해서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해야만 했던 큰언니의 상처를 느낀다. 셋방살이 시절, 집주인 앞에서 전세금을 조금이라도 깎아보려고 늦둥이 어린 막내딸을 옆에 앉혀놓고 읍소하던 부모님의 슬픔을 느낀다. 사십대 중반의 딸이 손녀를 낳자 엄동설한에 먹고살기도 빠듯한데 또 애를 낳으면 어쩌냐며 타박했다는 것 때문에 돌아가실 때까지 손녀에게 미안해하셨던 외할머니의 마음을 느낀다. 부끄러워 감추고 싶었던 그런 기억들과 감정이 내가 다른 이들의 삶을 이해하고 글로 표현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걸, 방송작가로 살면서 점점 더 느끼고 있다.

죽음과 맞닥뜨린 순간, 떠오른 유일한 생각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는다. 하지만 살면서 죽음의 문턱을 밟았다가 다시 돌아온 사람들은 많지 않다. 나에겐 고맙게도 그 희귀한 경험이 있다. 고맙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은 죽음의 문턱에 다녀오기 전과 다녀온 후의 나는 너무나 달라졌기 때문이다.

긴 고민 끝에 임신한 둘째 아이가 자연 유산이 되고 난 후, 몸의 이상을 느끼면서도 병원에 갈 여유가 없었다. 결국 몇 달의 방치 아닌 방치 끝에 드디어 마지노선에 다다랐다고 느낀 날, 과감히 프로그램에 사표를 냈다. 마지막 원고를 마무리하고 담당 피디에게 이메일 전송을 마친 순간 하혈이 시작되었다. 제일 먼저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오빠, 난데….” 우물쭈물하는 나와 달리 남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나 회의 중이야, 이따 전화할게.” 뚜뚜뚜뚜. 순간 멍~ 했고 거실은 온통 피바다가 되고 있는데 난 그 와중에도 다른 걱정을 했다. ‘엄마한테 전화를 해야 하나? 안 돼. 늙은 엄마는 고혈압인데 내 전화를 받았다간 쓰러질지도 몰라.’ 그다음으로 떠오른 사람은 10분 거리에 살고 있는 시어머니였다. ‘어머님께 전화할까? 아니야, 안 돼. 어머님은 어린 외손주를 둘이나 보고 있는데 여기 올 상황이 아니지.’

지금 생각해보면 죽음을 코앞에 둔 주제에 오지랖도 그런 오지랖도 없지 싶지만 그게 나였다. 어쨌든, 그 다음 떠오른 인물은 한 달에 최소 한두 번은 나와 술자리를 갖는 시누이였다. “아가씨…. 나 지금 집인데 하혈을 하고 있어요. 엄청 심하게….” “오빠랑 연락했어요?” “그게…. 회의 중이라고 끊어버리네요.” “그럼 119는 불렀어요?” “아… 119가 있었지….” “언니! 미쳤어요? 빨리 119부터 부르세요. 그리고 ○○병원으로 데려다주라고 하세요. 내가 지금 바로 사무실에서 병원으로 출발할게요.”

다급해하는 시누이와 달리 내 정신은 점점 흐려지고 몸은 눈에 띄게 굼떠지고 있었다. 겨우 119에 전화를 하고 10분이나 지났을까. 나의 몸은 붕~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폭신한 구름 위를 걸으면 그런 기분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의외로 죽음에 다다른 기분은 불쾌하지도 괴롭지도 않았다. 마침내 눈앞에 보이던 익숙한 물건들이 빠른 속도로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딱 한 사람, 유치원에 가있는 다섯 살 딸아이가 떠올랐다. ‘이제 우리 딸, 어쩌지, 어쩌지….’ 거기에서 내 기억이 끊어졌다.

몇 시간이 지났는지 며칠이 지났는지 모르지만 내가 눈을 떴을 땐, 중환자실 침대 위였다. 생과 사의 접점 지대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는 환자들과 간호사들이 보였고, 흰 가운을 입은 의사들이 뛰어다니며 질러대는 소리가 내 귀에 고스란히 들렸다. 그제야 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살아났구나….’ 내 몸 곳곳에 주렁주렁 달린 피주머니와 약주머니, 그리고 꼼지락거려지는 손가락, 발가락을 느끼며 그제야 내가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른 첫 번째이자 유일한 생각이 무엇이었는지 아는가! ‘다시는 이렇게 내 몸을 망치며 살진 않겠어!’

곧바로 난 몇 가지 규칙을 머릿속에 정하기 시작했다. 첫째, 청소는 매일 하지 않겠다. 쓰는 건 이틀에 한 번, 닦는 건 더럽더라도 일주일에 한 번만 하겠다(쓰러지기 전까지만 해도 난 출근 전, 출근 후, 하루에 두 번 청소를 했다. 그리고 걸레는 무조건 흰색이어야 했고 삶아서 사용을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둘째, 주중엔 반찬은 무조건 사 먹고, 주말에만 반찬을 만들겠다(쓰러지기 전까지만 해도 난 전기밥솥 대신 그때그때 밥을 해야 하는 솥단지 압력솥을 사용했으며 회식을 마치고 12시에 귀가하더라도 집에 와선 매일 한두 가지라도 다음 날 먹을 신선한 반찬을 만들었었다).

병원에서 퇴원을 한 이후, 난 두 가지 규칙을 10년이 지난 지금도 너무도 잘 지키며 살고 있다. 그사이 집은 지저분해졌고, 냉장고엔 먹을 게 없는 날이 많아졌지만 그만큼 난 여유가 생겼고, 스트레스를 덜 받게 됐다. 그 사이에 중학생이 된 딸은 “엄마, 먹을 게 너무 없는 거 아니에요?” 하고 가끔은 투정을 부리지만, ‘배고프면 김치 하나에라도 먹겠지 뭐’ 하면서 똥배짱을 부리게도 되었다.

죽음은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니며 생각보다 느닷없이 누구에게나 닥쳐올 수 있다. 그러하기에 어느 날 갑자기 날 찾아올 죽음 앞에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면 나를 위한 삶에 충실해야 한다. 조금은 이기적이라는 핀잔을 들을지라도 세상에 온전히 나의 것은 내 삶뿐이며, 나를 위할 사람은 나 자신뿐이니 그 정도 핀잔! 그 정도 눈치! 무시해버려도 괜!찮!다!



2 결핍 있는 인생이 아름답다



세상은 그렇게 굴러간다

2014년 겨울, 연말 특집을 준비하면서 그 남자를 만났다. 신문 한 귀퉁이에 난 작은 기사를 보고 난 후였다. 지방에서 우유 대리점을 하고 있는 남자가 1억 기부의 약정서에 사인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도대체 우유 대리점이 얼마나 잘되면 소시민이 1억이나 기부를 약속할 수 있었을까. 알고 보니 그 남자가 더 대단했던 것은 자신의 재산에서 1억을 쾌척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일을 하면서 앞으로 5년간 매달 일정 정도의 기부를 함으로써 1억 원을 채우겠다고 미리 약속을 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기부 빚’을 진 셈이다.

막상 도착한 그 남자의 우유 대리점은 생각보다 규모가 작았다. 그런데 어떻게 그 엄청난 일을 저지르게 된 건지 인터뷰가 시작됐다. 그 남자의 전직은 평범한 노동자였다. 대기업 자동차 회사에서 20년 가까이 생산직 노동자로 일했던 그 남자는 2009년 느닷없이 대량 해고의 희생자가 되었다. 네 식구를 책임지던 가장에서 하루아침에 백수가 된 남자. 가족을 위해서 다시 일자리를 구해야 했지만 사십대 중반에 느닷없는 해고자가 된 그는 일할 곳을 새로 찾기란 쉽지 않았다. 어렵사리 친척의 도움을 받아 우유 대리점 일을 배우기 시작했고 그러길 3년 만에 작게나마 독립을 하게 된 것이다.

대리점을 열고 1년 동안은 자리를 잡기도 바빴으므로 누군가를 도울 엄두를 못 냈다고 한다. 하지만 2년이 지나 어느 정도 단골 고객이 확보된 다음부터 소소하게 기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아예 더 크게 일을 저질러버렸다. 있는 돈을 기부하는 게 아니라 벌어서 계속 기부를 하겠다는 약속을 해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자녀들을 다 키워놓은 상태도 아니었다. 그 당시 그 남자의 큰아이는 고3, 둘째 아이는 고2, 그야말로 제대로 돈이 들어갈 상황이었다. 하지만 남자의 철칙은 단호했다. 첫째, 아이들은 대학교 입학금까지만 대준다는 것. 둘째, 자기가 번 돈은 100% 자기 것이 아니니 아예 매달 200만 원은 빼고 자기 돈이라 생각한다는 것! 있는 돈을 기부하는 것도 아니고 기부 빚을 진 건데 부담스럽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오히려 기부 약속 때문에 더 열심히 일을 할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마치 신나는 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처럼 그 남자의 눈빛은 설렘과 생기로 가득 차있었다.

난 이런 사람들을 인터뷰할 때마다 가슴이 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실종된 지 오래고, 모 대기업 오너 일가의 슈퍼 갑질이 연일 뉴스를 장식하는 걸 보면서 우리가 진짜 배워야 할 삶의 가치는 소시민의 삶에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느낀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살맛나게 하는 건, 이런 사람들이다. 힘들었던 자신의 과거를 잊지 않고 누군가의 미래를 위해 자기 몫의 일부분을 기꺼이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며, 누가 뭐래도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세상을 굴러가게 한다. 당신도 그중의 한 사람이다.

꼴찌? 그게 뭣이 중헌디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오로지 엄마의 기대치를 채우기 위해 학창시절 내내 모범생으로 살아온 은주라는 소녀가 있었다. 그런 그녀 앞에 공부와 담을 쌓은 소년 봉구가 나타난다. 자신과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봉구의 순수한 열정에 이끌려 잠깐의 일탈을 경험하면서 은주의 성적은 뚝뚝 떨어진다. 그래봤자 1등에서 7등으로 추락. 하지만 단 한 번도 1등을 놓친 적 없는 은주와 부모님에게 7등은 거두절미하고 행운의 숫자가 아닌 실패의 숫자일 뿐이었다. 결국 은주는 옥상에서 투신을 한다.

‘이미연’이라는 하이틴 스타를 배출하면서 꽤 큰 흥행을 이뤘던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의 줄거리다. 당시 고1이었던 나도 그 영화를 보면서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따라 외쳤다. ‘맞아,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야.’ 그런데 벌써 개봉한 지 30년이 다 된 이 영화에 대해 요즘의 부모님들은 억눌린 자녀들보다 더 큰 목소리로 외친다. “웃기는 소리 말라고 해. 행복은 성적순이야. 아니, 성적순대로 정확히 가진 않아도 대충 비슷하게 가. 그러니 입 다물고 가서 공부나 해.”

<아침마당>을 집필하면서 꼴찌들의 반전 성공기를 많이 소개했던 건, 30년이 지난 지금도 은주가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던진 절절한 메시지를 많은 부모님들이 못 알아듣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긴 부모님들 탓만도 아니다. 강산이 세 번 변할 시간 동안, 개천에서 용 나던 시절은 오히려 끝나버렸고 가진 것 없이 출발한 인생의 성공은 점점 더 요원해졌으니 부모님 입장에서야 당신들이 살아온 방법대로 오로지 공부를 강조할 수밖에….

하지만 과연 정말로 그 방법밖에 없을까? ‘오페라’와 ‘드라마’를 합친 형태인 ‘오페라마’라는 독특한 영역을 개척해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성악가, 정경 교수님은 꼴찌 반전 성공 사례를 잘 보여주는 분이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오로지 운동이 좋아 운동만 하며 육상 선수로 활동했던 정경 교수님은 갑자기 찾아온 부상으로 더 이상 운동을 할 수 없게 되었고, 평생 공부 대신 운동만 했으니 성적이 바닥인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대학은 가야겠고 성적으로 갈 자신은 없고 당시로선 실기만 본다는 대학을 찾아 1년간 죽어라 성악을 배웠다. 그리고 지금은 유학파가 판치는 성악 분야에서 몇 안 되는 국내파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이 외에도 내가 만난 꼴찌 인생은 수도 없이 많다. 그들을 보며 느낀 건, 학창시절 꼴찌가 인생의 꼴찌는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공부 머리와 사는 머리는 따로 있는 건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오히려 내가 만난 꼴찌들은 공부에는 노하우가 없을지언정 삶의 노하우는 풍부했다. 1등들이 공부에만 신경을 쓰느라 다른 경험이 미미한 반면, 꼴찌들은 달랐다. 쉽게 말해, 이론은 약했지만 실전은 강했다. 그런 경험들이 어느 날, 폭발하기 시작하면 무섭게 폭발한다는 걸 그들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더군다나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공부만이 답이라는 생각은 너무 위험하다. 대부분의 일을 인공지능이 다 해내는 시대에는 다양한 경험으로 축적된 창의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창의성은 가르친다고 배울 수 있는 게 절대 아니다. 실제로 어린 시절, 창의적인 그림을 그렸던 아이들이 미술을 전공하기 위해 미술학원을 다니기 시작하면 창의성을 잃고 천편일률적으로 그림을 그려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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