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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나무가 되지요

문태준 지음 | 마음의숲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나무가 되지요



문태준 지음

마음의숲 / 2019년 6월 / 304쪽 / 14,800원





1부 꽃은 맑게 준비되어 우아함을 내밀었다



유자와 한알의 시



시를 쓰려고 할 때마다 나는 이상한 곳에, 알 수 없는 곳에 있게 되는 기분이다. 언어를 처음 배우는 곳에 앉아 있는 것 같고, 또 어느 때에는 세상의 언어를 다 잃어버려 치료를 받는 곳에 앉아 있는 것 같다. 엉클어진 덤불 앞에 앉아 있는 것 같고, 또 어느 때에는 무너진 것들의 무더기 앞에 앉아 있는 것 같다. 물론 깨끗한 시내가 앞으로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때도 있고, 시원한 속도로 어딘가를 향해 옆으로 혹은 상방으로 마구 내달리고 있는 때도 있고, 또 누군가를 기다리는 곳에 설레며 서 있는 때도 있다. 그리고 유자나무 곁에 서 있는 것만 같을 때도 있다.

시는 열매 맺는 자리가 각각 다른 듯하다. 얼마 전 유자를 따는 부부를 보았는데, 서로 다른 높이에 서로 다른 빛깔과 굵기로 매달린 유자처럼 한 편 한 편의 시가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유자마다 단맛의 정도가 다르고, 껍질의 두께가 다르다.

다만 유자와도 같은 시가 있어 그 시들이 바구니에 담겨지더라도 개중에 한두 개의 시는 나무의 가지 제일 끝에 매달려 거둬들여지지 않고 남겨져도 좋겠다. 그러면 그 남겨진 시는 햇살과 바람의 일부가 되거나, 새의 일부가 되거나, 별과 허공의 일부가 되거나, 벌레의 일부가 되거나, 툭 떨어지거나 그곳에 시가 매달려 있었다는 기억이 사라질 때에 함께 사라질 것이다.

끝까지 가본다는 것



밀란 쿤데라는 시인이 되는 일은 어떤 것의 끝까지 가보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 바 있다. 행동의 끝, 희망의 끝, 열정의 끝, 절망의 끝까지 말이다. 밀란 쿤데라는 왜 끝까지 가보라고 우리에게 권유하는 것일까. 중도에 포기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일까. 중도에 셈을 하지 말라고, 이득의 규모를 따지지 말라고 말하는 것일까. 어떤 일이든지 그 끝까지 가보았을 때에야 진정으로 그 일의 진면목을, 그 일의 고유한 가치와 효력을 그리고 그 일로 인해 파생될 나중의 것까지 알 수 있다는 뜻이 담겨 있는 듯하다.

‘일관一貫’이라는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다는 뜻이다. 처음과 끝을 꿰뚫어 하나로 꿴다는 뜻이다. 하나의 생각, 하나의 의지, 하나의 원리로 꿴다는 뜻이다. 이렇게 뜻을 새겨 본다면 이 말은 수심修心의 차원에 있기도 하다. 일심一審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마치 수행자들이 잠깐이라도 쉬거나 그만두는 일이 없이 다니고, 머물고, 앉고, 눕고 하는 일상의 움직임 속에서도 심지어 꿈속에서도 번뇌나 장애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어떤 일의 진행이 종결되도록 그 끝까지 가보는 일은 마음을 닦는 일이기도 하다. 흔들리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마음을 정려하게 잘 단속하는 일이기도 하다. 스스로를 믿어 스스로를 안심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자신自信하는 일이기도 하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나무가 되지요



한 방송사의 프로그램을 재미있게 보았다. ‘자발적 고립 다큐멘터리’라는 부제가 붙은 이 프로그램은 출연자가 자연 속 작은 집에 살면서 홀로 밥을 지어 먹고, 홀로 잠을 자면서 단순하고 느리게 생활하는 일과를 기록한 것이다. 이 프로그램의 촬영지는 제주도의 한 오프그리드 하우스(Off-grid house, 에너지 독립형 주택)로 알려져 있다. 오프그리드 하우스에 대한 시청자들의 관심도 높아지고 있는 것 같다. 오프그리드 하우스는 전기와 수도, 가스 공급 등이 외부로부터 차단이 되어서 스스로 자급자족해야 하는 시스템이라고 한다. 전기는 태양광으로 해결하고, 수도는 정해진 물의 양만큼만 쓸 수 있다고 한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출연자는 주어진 미션을 수행해야 하는데, 미션의 종류는 다양했다. 세 가지 새소리 녹음하기, 계곡의 물소리 담아오기, 갖고 있는 물건의 수량을 절반으로 줄이기, 하루에 하나의 반찬으로 밥 먹기,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하기 등이었다.

흥미로운 미션들이었다. 이 미션들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함께 시도해볼 만한 일이기도 하다. 가령 계곡에 내려가서 물소리를 듣고 녹음하는 동안 돌돌돌 흐르는 물소리와 부드럽게 굴러가는 물의 바퀴와 물의 유연함이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차게 될 것이다. 새소리를 들을 때도 마찬가지다. 까마귀와 방울새, 직박구리, 꿩이 우는 것을 듣는 동안 우리는 새가 앉은 나뭇가지, 새의 부리, 깃털, 몸집의 크기, 울음의 높이 등 한 마리 새의 모든 것을 보고 듣게 된다. 그러면서 새가 우리의 마음속에서 앉고 날갯짓하고, 우는 것을 고스란히 경험하게 된다. 내 내면에 다른 존재의 공간이 생겨나는 것을 수용하게 된다. 그 공간이 매우 새롭다는 것도 곧 알게 된다.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하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하고 있는 그 일에만 온전하게 정성을 다하라는 것일 테다. 밥 먹을 때는 밥맛만을 알라는 것일 테다. 걸을 때에는 걷기만 하라는 것일 테다. 단둘이 있을 때에는 마주앉은 그의 마음을 읽으려고 애쓰라는 것일 테다. 보고 듣고 생각하고 있는 그것에 마음을 쏟으라는 뜻일 테다. 그러나 집중하고 골몰하는 일은 참 어렵다. 마음은 구름처럼 잘 흩어지고, 빠르게 이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불교에서는 어미 닭이 알을 품듯이, 고양이가 쥐를 잡듯이 지금의 순간에 집중하라고 가르친다. 어미 닭이 알을 품되 알의 온기가 늘 이어지도록 품는 것처럼 하고, 고양이가 쥐를 잡을 적에 생각과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을 바쁘게 살고 있고, 내 몸 하나 챙기기에도 벅차다. 날카로운 의견을 주고받고, 또 모욕감마저 느끼게 된다면 지치고 나른해져서 일어나기 어려운 형편에 놓이게 된다. 이러할 때에는 나의 전원을 잠시 꺼두어야 한다. 나를 느슨하고 단조로운 여건 속에 있게 해야 한다. 펼친 것을 접을 필요가 있다. 접으면 잠잠해지고 잠잠해지면 마음에 풋풋하고 넉넉한 공간이 생겨난다. 이 경험은 매우 유익하다.

시인 김용택 선생님의 인터뷰 내용을 읽은 적이 있는데 선생님은 눈 오는 날 마루에 걸터앉아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무는 눈이 오면 그냥 받아들여요. 눈이 쌓인 나무가 되는 거죠.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나무가 되지요. 새가 앉으면 새가 앉은 나무가 되는 거죠. 새를 받아들여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는 거죠.”

이승훈 시인은 시 <바람>을 통해 바람이 풀밭에 가면 “풀들의 몸놀림을” 하고, 나뭇가지에서는 “나뭇가지의 소리를” 낸다고 노래하기도 했다. 바람은 풀밭에 가면 풀의 몸이 되고 나무에게 불어가면 나뭇가지가 되어 흔들린다는 것이다. 바람이 이처럼 풀이 되고 나뭇가지가 되는 것은 ‘나’라는 완고한 생각을 버렸기에 가능할 것이다. 나라는 생각을 버리고 다른 것에 맞췄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무엇인가에 맞춰서 하되, 그냥 하기만 하되 집착 또한 없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내 내면에 다른 존재의 공간을 만드는 연습을 하다 보면 나를 에워싸고 있는 것에 대해 알게 될 것이다. 나를 구성하고 있는 배음背音, 나의 기다림, 조용함, 쓸쓸함, 즐거움 같은 것을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다른 것이 되어보는 경험은 내가 나를 다시 들여다보는 경험이 된다. 자신을 자발적으로 간소한 삶의 조건 속에 놓아두려고도 할 일이다. 그러는 동안 우리의 마음이 깨끗한 계곡의 물소리에 의해, 맑은 날의 새소리에 의해 회복될 것이다.



2부 웃음으로 서로 바라볼 뿐



걱정이 없는 시간



바깥에는 여름 장마가 지나가고 있다. 억수비가 잦다. 유배 생활을 했던 추사 김정희가 초의 선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늘에 구멍이 뚫렸는지 대지는 마를 사이가 없고 풍토병이 만연하니 청량한 바람이 불어서 날씨가 쾌청해졌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합니다”라고 쓴 대목이 생각난다. 추사는 초의 선 사가 보내준 차로 마음의 적적함과 풍토병을 다스렸다고 한다. “물을 평評하여 차를 다리던 때를 회상하니 눈앞의 속진이 사라진 듯합니다”라고도 썼으니 폭우와 폭염이 번갈아 소용돌이치는 즈음엔 번다한 바깥을 끊고 담담한 내심을 얻고자 한 잔의 차를 가까이 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티베트 수행자들은 행복해지는 수행법을 스승들로부터 배운다고 하는데 그 내용은 간단하다. 단순하게, 자연과 더불어,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일을 해보는 것이 다름 아닌 행복의 비결이라는 것이다.

나는 호흡을 헤아리는 수식관數息觀 수행을 틈이 날 때마다 하고 있다. 한 스님께서 말씀하신 ‘걱정이 없는 시간’을 보내기 위함이고, 매 순간을 깨어 있고자 위함이지만 사심과 잡0념이 골짜기의 비구름처럼 생겨나서 좀처럼 맑고 조용하고 편안한 마음을 얻기가 쉽지 않다. 진각 혜심 스님이 쓴 선시 에 이런 시구가 있다.

못가에 홀로 앉아

물 밑의 그대를 우연히 만나

묵묵히 웃음으로 서로 바라볼 뿐

그대를 안다고 말하지 않네.



못가에 앉아 있던 스님은 우연하게도 수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던 모양이다. 마치 거울을 보듯이 자신을 마주보게 되었을 때에 스님은 말없이 잠잠하게 웃으며 화답한다. 스스로에게 자상하고도 친절하게 미소를 보냈던 것이다. 이 장면을 머릿속에 짐작해보면 볼수록 이와 같은 마음의 상태야 말로 평정된 마음의 상태가 아닐까 싶다. 자신에 대한 수긍과 신뢰와 맡김 등이 평정된 내면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저녁의 시간을 맞으며



그리스 시인 사포가 쓴 <저녁별>이라는 시를 오늘 읽었다. 시는 짧았다. “저녁별은 / 찬란한 아침이 / 여기저기에다 / 흩뜨려놓은 것을 / 모두 제자리로 / 돌려보낸다 / 양을 돌려보내고 / 염소를 돌려보내고 / 어린이를 그 어머니 손에 / 돌려보낸다.”

이 시는 참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우리들의 일상에서 아침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낮에 우리는 무엇을 욕망하는지를, 본래의 자리 즉 제자리가 어디인지를 그리고 내가 저녁마다 돌려보내야 할 것의 목록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타고르가 저녁에 대해 노래한 문장도 매력적이다. “당신은 나의 다망한 날의 여행을 통해서 나를 나의 저녁의 고독에로 이끌어주세요. 나는 밤의 고요함을 통해서 고독의 의미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저녁은 빛이 스러지는 때다. 빛은 서서히 사라진다. 모래가 바람에 흩어지듯이. 그리고 깊은 데로 들어간다. 내면이라는 곳으로, 혹은 제자리라는 곳으로. 그러므로 저녁의 시간은 돌아오고, 돌아가는 시간이다.

나는 저녁의 시간에 많은 것을 기다렸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들판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초저녁별이 우리집 지붕 위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풀밭에서 염소를 몰고 돌아오기도 했다. 아버지로부터 소를 받아 집으로 몰고 오기도 했다. 내게 저녁의 시간은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고, 또 손수 맞이하는 시간이었다.



3부 또 다른 내일이 온다



내 속의 거인을 깨워라



감성은 오관五官을 통해 세계를 감각하는 능력이다. 오관은 눈, 코, 귀, 혀, 피부를 말한다. 그러므로 감각 기관을 바깥을 향해 활짝 열 때 감성은 활발하게 작동하고, 감성을 통해 얻게 되는 내용물도 많아지게 된다. 이리저리 감성과 관련된 책을 찾아보니 그 수를 헤아리기도 어려울 지경으로 많다. 감성을 주목하는 시대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하석 시인의 시집 『연애 間』에 실린 ‘시인의 말’을 읽었을 때 이것이야말로 감성을 얻는 방법을 이르고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서서 흐르는 시간을 냇물 밑에 웅크린 까만 돌처럼 느끼면서”라고 시인은 썼다. 냇물이 흐르고 그 냇물 속에 물돌이 하나 있다. 냇물이 흐르는데 그 냇물은 물돌의 입장에서 보면 서서 흐르는 것만 같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흐름은 시간의 경과를 뜻하는 것이겠다. 시간이 흘러감을 온몸으로 느끼는 “냇물 밑에 웅크린 까만 돌처럼” 우리도 이 우주의 냇물 아래 웅크린 하나의 까만 돌이다. 냇물의 흐름은 우주 생명 세계의 모든 변화, 우주 생명 세계의 생겨남과 자라남과 사라짐을 말하는 것이겠다. 우리의 처지가 이러함을 알 때 감성은 움직이지 않으려고 해도 움직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감성도 상상력과 마찬가지로 ‘보통의 조건’에서 벗어날 때 풍성해진다. ‘보통의 조건’이라 함은 분별하고, 등수를 정하고, 지금의 때에 여지가 없고, 다가올 시간에 대해 극히 확률적으로 예측하고,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하고, 디지털 시계처럼 감정을 사용하고, 극도로 각박한 것 등을 의미한다. 이런 상태에서는 잠재된 감성이 깨어나지 않는다. 잠이 든, 거인 같은 감성을 깨울 수 없다.

감성은 어떻게 살려낼 수 있을까. 우선은 우리의 내면이 무언가 자라나는 곳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자라난다는 것은 움직인다는 의미다. 구름떼처럼 눈보라처럼 복잡하게 불규칙하게 생겨나고 사방으로 밀리면서 옮겨간다는 것이다. 이러고 보면 우리의 내면은 하나의 화분이라고 말해도 좋겠고, 하나의 어장漁場이라고 말해도 좋겠고, 언제 분화할 줄 모르는 하나의 화산이라고 말해도 좋겠다.

다만 이러한 우리의 내면이 바깥의 세상을 만날 때에는, 접촉할 때에는 보다 유심한 상태여야 한다. 바깥 세상과 만날 때에 생겨나는 우리 내면의 속뜻을 주의깊게 읽어야 한다. 속뜻을 읽으려면 내 생각을 낮춰야 한다. 그리고 바깥 세상과의 만남과 접촉을 내가 일방적으로 종료하지 않고 그 끝을 가만히 기다려야 한다. 이러할 때 우리 내면은 그 스스로의 여린 떨림을 느끼게 되고 이내 감격하게 된다. 내 속의 거인이 깨어나는 순간이다.

노랗고 울퉁불퉁한 모과



시를 쓰는 공간에 여러 사물들을 놓아둔다. 가까운 꽃집에서 사온 생화나 여러 날 말린 꽃이 있고, 만년설을 찍은 사진이 있고, 미술관에서 구매한 그림엽서가 있고, 속초 바닷가에서 주워온 하얀 조개껍질이 있고, 부엉이와 올빼미 등의 작은 동물 조각상이 있다. 물론 음악도 시내처럼 흐르게 한다. 그 리고 색감이 뚜렷한 물건들을 때에 맞춰 접시 위에 놓아둔다. 대개는 계절을 대표하는 높은 빛깔의 과일들이다.

요즘에는 접시에 모과를 놓아두고 있다. 멀리 시골엘 다녀올 때에는 그곳에서 딴 모과를 몇 개 사서 온다. 언젠가는 농원에 갔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모과를 우연히 주워온 적도 있다. 자연에서 막 자란 야생의 것일수록 향기가 진하다. 모과는 모든 방위에 향기가 있다. 또 그 향기가 일정하다. 처음과 끝의 향기가 나란하다. 향기는 훌쩍 달아나지 않고 둘레에 가만히 서 있다. 모과는 참으로 온화하고 배려하는 성품이다.

모과는 노란빛과 둥그스름한 외양으로 차분하게 앉아 있다. 순하고 순한 얼굴이다. 속마음을 감출 줄을 몰라 얼굴의 표정에 그대로 드러난다. 겨울 내내 이 모과를 보면서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들을 생각이다. 눈보라가 세차게 불어치는 날에는 이 모과를 바라보고, 쥐고, 또 만지고 있을 생각이다. 그러면 모과는 마치 난롯불처럼 내 마음의 체온을 따뜻하게 해줄 것이다. 모과는 창을 통해 들어온 고운 겨울빛을 두 손 바닥으로 쓸어 모아놓은 것만 같다. 금모래를 쌓아놓은 것만 같다.

말쑥하고 반드러운 모과보다는 그 생김새가 울퉁불퉁한 모과를 더 선호한다. 면이 고르지 않고 들쑥날쑥한, 울퉁불퉁한 모과를 찬탄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에게 모과는 여리고 부드러운 것의 매력을 알게 한다. 백색의 겨울에 이 그윽한 노란빛은 보는 이의 마음을 은근하게 끌어당긴다.



4부 나는 문득 그대의 얼굴을 만난다



마음은 산같이 자라네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 뜨거운 태양이 우리를 향해 굴러오고 있는 것만 같다. 여름이 되면 에밀리 디킨슨의 시가 생각난다. “산들은 눈치채지 못하게 자란다”라는 시구다. 산이 자란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짙푸른 녹음을 드리우며 산이 그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를 향해서도 커가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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