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이상한 나라의 심리학

김병수 지음 | 인물과사상사
이상한 나라의 심리학



김병수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19년 5월 / 208쪽 / 13,500원





part1 솔직히, 돈은 중요하다



돈으로 행복을 사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을까?” 진부하지만 여전히 궁금증을 자극하는 질문이다. 우리는 흔히 “돈이 중요한 게 아니야,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사는 게 행복의 지름길이지”라고 한다. 무소유까지는 아니라도 버리고 비워야 행복할 수 있다며 “물질보다 마음을 챙겨야 한다”고 외친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의 속내도 진짜 그럴지 의심스럽다.

차라리 “행복하려면 돈이 많아야지!”라고 쿨하게 인정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오히려 이것이 더 옳은 말 아닐까? 복권에 당첨되면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진다고 알려졌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영국에서 실시한 연구를 보면 1,000~12만 파운드(약 145만~1억 7,500만 원) 사이의 복권에 당첨된 사람은 그보다 적은 금액이 당첨되거나 아예 당첨되지 않은 사람보다 2년 후 정신적 웰빙 수준이 유의미하게 높았다. 복권이 가져다준 부로 새롭고 다양한 삶의 기회를 얻게 되어 이전보다 행복해졌다는 것이다. 물론 벼락부자가 되어도 행복 수준은 오래 지속되지 않고, 오히려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꼭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돈만 있으면 행복해진다는 단정도 아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궁핍한 것보다는 어느 정도 부유할 때 행복할 가능성도 크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국가 간 비교를 해보면 부와 행복 사이의 관계가 조금 더 분명하게 보인다. 부자 나라 국민이 대체로 더 행복하다. 흔히 부탄이 행복지수 1위라고 하지만 모든 조사에서 그런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갤럽이 156개국을 대상으로 발표한 2014 2016년 행복 순위에 따르면 1위부터 5위는 노르웨이, 덴마크, 아이슬란드, 스위스, 핀란드였다. 이들 국가는 비교적 부유하고, 평화롭고 자유로운 나라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지만 행복 순위는 1위가 아니었다. 그래도 14위에 들었다. 반대로 가장 행복하지 않은 나라는 대부분 가난한 아프리카 국가가 차지했다. 꼭 그런 것은 아니라도, 잘사는 나라일수록 국민이 행복하고, 못사는 나라 국민일수록 불행할 가능성이 크다.

개인과 가계의 연 소득과 행복의 상관관계를 조사한 연구를 보아도 같은 결론에 이른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대니얼 카너먼 교수가 미국 거주자 45만 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는데, 연 소득이 높을수록 삶의 만족도와 정서적 웰빙 수준도 높았다. 다만 수입과 행복의 비례는 연 소득 7만 5,000달러까지만 유효했다. 그 이상으로는 수입이 늘어도 행복 수준은 높아지지 않았다. 이 연구는 2012년에 발표된 것이니, 물가상승률을 고려하면 지금은 행복의 임계점에 도달하는 연 소득이 그보다 높아졌을 것이다. 대략 연 소득 1억 원이 될 때까지는 소득이 늘어날수록 행복 수준도 높아진다는 이야기다.

최근 한국노동연구원이 발표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가구 총 소득이 연 1억 800만 원이 될 때까지는 행복도가 높아졌다. 하지만 시간당 임금과 가구 소득이 더 오르더라도 이를 넘어서면 행복도가 정체되는 ‘이스털린의 역설’이 감지됐다. ‘이스털린의 역설’이란 소득이 일정 수준을 넘어 기본 욕구가 충족되면 소득이 증가해도 행복은 더 이상 증가하지 않는다는 이론이다. 이 기사가 이스털린의 역설(easterlin paradox)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엄연한 사실은 우리나라에서도 연 가계소득이 1억 원이 될 때까지는 소득과 행복 수준이 비례한다는 것이다. 돈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최고의 수단이다. 돈은 삶의 질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의식주, 교육, 의료)을 튼튼하게 받쳐준다. 돈이 사회적 지위와 존중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돈이 많으면 위험을 감수하고 새로운 도전을 하기도 쉽다. 실패해도 삶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다.

삶을 즐기려면 돈이 든다. 돈 없이도 행복을 추구할 수 있지만 돈이 많으면 더 다양한 방식으로 자기 취향대로 즐기며 살 수 있다. 은퇴 후의 행복도 개인의 재정 상태에 영향을 받는다. 가난해도 마음만 부자면 된다고들 하지만 노후에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고 느낀다. 이게 사실이다.

돈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근원적인 이유는 돈이 ‘삶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돈은 자기 결정권을 뒷받침해준다. 스트레스의 본질은 삶에 대한 통제권이 내게 없다고 느끼는 데에서 온다.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낀다. 힘들어도 스트레스를 덜 받고 만족하며 사는 사람은 ‘내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돈이 스트레스를 줄이고 행복 수준을 올려주는 것은 통제 소재와 자기 결정권을 지켜주기 때문이다. 돈과 행복의 관계에서 돈의 더 중요한 역할은 위기에서 개인을 보호해준다는 데 있다. 돈이 불행을 막아주지는 못해도 불행이 닥쳤을 때 돈이 충분하면 견디기 쉽다. 불운이 찾아왔을 때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게 지켜주는 버팀목이 되어준다는 것이 돈의 중요한 역할이다.

실제로 경제적 요인이 개인의 삶과 행복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으면 더 좋은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고 가족의 지지도 훨씬 용이하게 이끌어낼 수 있다. 치료 예후도 좋다. 우울증이 생겨서 일을 그만두고 쉬어야 하는데, 당장 가족의 생계가 곤란해진다면 정신적 고통에 생활고까지 겹쳐서 증상은 악화되고 예후는 나빠진다. 경제 사다리의 아래에 있는 사람일수록 인생에 뜻하지 않은 불운이 닥쳤을 때 비참해질 가능성이 클 수밖에 없다.

부부 싸움을 하고 자녀 교육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아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으면 정서적 고통이 덜하다. 쇼핑이나 여행으로 마음을 달랠 수 있기 때문이다. 집세 내고 세금 내고 교육비 내고 났더니 삶을 즐길 만한 돈은 남지 않았다면, 스트레스를 풀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돈 안 드는 스트레스 해소법을 찾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인스타그램만 보아도 스트레스 풀고 힐링하려고 해외여행 다녀오고 맛있는 것 먹고 쇼핑한 것 자랑하는 사진이 넘쳐나는데, 돈 안 드는 산책만 하면서 “나도 행복해요!”라고 말할 만큼 멘탈이 강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직장에서 스트레스 받아도, 재산이라도 좀 모아두었으면 ‘까짓 때려치우고 내 일이나 해보자’고 마음먹을 수 있으니 심리적으로 여유가 생긴다. 돈이 실직 공포를 막아주는 것은 아니지만, 스트레스는 덜 받게 해준다. 위기에서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것도 어쩌면 사람보다 돈이다. 다른 사람의 위로가 정신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은 맞지만, 일상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돈이다.

평범한 직장인, 최저 시급을 받으며 아르바이트하는 학생,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람은 소득이 오르는 만큼 행복도 확실히 커진다. 백만장자에게 한 달에 고작 몇 십만 원 더 준다고 행복을 느끼지 않지만, 매월 월세 걱정하는 사람에게 이 돈은 그만큼의 행복을 가져다준다. 국가의 복지도 소득과 무관하게 일률적으로 지원하는 것보다 경제 수준이 낮은 사람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 연구팀은 2010년 영국인 1만 2,000명을 대상으로 수입과 행복의 관계에 대한 연구를 했다. 이 결과에 따르면 부의 총량이 늘어도 행복도가 높아지는 것은 아니지만 슬픔은 확실히 줄어든다고 했다. 연구팀은 “돈은 행복을 얻기 위한 도구라기보다는 슬픔을 줄이는 데 유용한 도구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돈이 삶에서 겪게 되는 곤란한 상황들을 처리하는 데 쓰이기 때문이다. 세금을 꼬박꼬박 내고, 제때 월세를 내고, 관리비와 교통비를 쉽게 낼 수 있다고 해서 더 행복해진다는 보장은 없지만, 적어도 이런 일을 편하게 처리할 수 있다면 스트레스는 확실히 줄어든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는 없어도 불쾌한 감정을 덜 느끼도록 막아주는 역할은 제대로 한다고 연구팀은 결론지었다.

세상이 혼란스러우면 위험에 대비하려는 절박감이 커진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예측 가능성이 떨어지고,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나라에 살려면, 위험 대비가 필수다. 행복보다 위기 상황을 버티는 것이 중요해진다. 갑작스럽게 트라우마를 겪고, 중병에 걸리고, 가족을 잃고 혼자가 되었을 때 돈만큼 확실하게 나를 보호해줄 수 있는 것이 없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지 않은가? 친구도 가족도 국가도 나를 지켜주지 못한다면 돈이라도 붙들고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아무리 사랑하는 가족이 있어도 그들에게 의지하기 어려워진 세상에 돈만큼 든든한 것이 어디 있으랴. 1인 가구로 혼자 살고 있다면 돈은 버팀목이다. 국가가 개인을 보호해준다는 믿음이 사라진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최고의 방법은 저축이다.



part 2 왜 인간관계는 쉽지 않을까?



왜 나쁜 관계를 끝내지 못할까?



인도 마디아프라데시 주 내무장관 고팔 바르가바는 거하코타 지역에서 집단 결혼식을 올린 신부 700여 명과 가족에게 빨랫방망이 1만 개를 선물했다. 거하코타 지역에는 알코올중독자가 많은데, 남편이 술 마시고 가정 폭력을 저지르면 이 방망이로 대응하라고 바르가바는 말했다.

남편이 술을 마시고 가정 폭력을 저질렀을 때 아내는 방망이를 휘둘러 남편의 못된 버릇을 고쳐 놓아야 할까?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 정답은 방망이가 아니라 이혼이다. 아내의 헌신과 사랑으로 남편은 변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좌절감만 깊어진다. 따라서 이혼이 답이다. 그러나 상담하다 보면 이혼하는 것이 맞는데도 그러지 않고 계속 사는 부부를 종종 본다. 가정 폭력이 대표적인 경우다. 알코올 문제가 겹쳐 있으면 더 심각하다. 남편의 폭력이 반복되는 데도 참고 살면서 이런저런 이유로 이혼할 수 없다는 여성이 많다. 그들은 “아이가 대학 갈 때까지는 참고 살겠다”, “자식이 결혼 할 때 흠 잡힐 수 있으니, 결혼 시키고 나서 이혼하겠다”고 한다. 많은 경우 “나는 이혼하고 싶지만 남편이 이혼해주지 않는다”며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한다. 성가신 법률 절차나 타인의 시선도 이혼을 가로막는다. 그런데 과연 이런 것들이 이혼을 하지 못하는 진짜 이유일까? 끊어야 하는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는 또 다른 심리가 작동하고 있지 않을까?

사람은 항상 인간관계에 투자한 비용과 그 관계에서 얻게 되는 보상을 비교한다. 비용보다 보상이 크면 관계는 지속되고 그렇지 않으면 종결된다. 이를 사회 교환 이론(social exchange theory)이라고 한다. 사회 교환 이론은 부부나 연인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를 관통하는 원리 중 하나다. 폭력 남편에게 학대 받고 사는 아내는 관계에서 얻는 보상은 적고 결혼을 유지하는 비용은 (정서적 상처를 포함해서)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그런데도 부부 관계를 청산하지 못한다. 이 상황은 사회 교환 이론만으로 이해할 수 없다. 이를 설명하려면 자존감이라는 또 다른 변수가 필요하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인간관계에서 얻을 보상에 대한 기대가 애당초부터 없거나 매우 낮다. 낮은 자존감 때문에 자신은 타인에게 사랑 받을 자격이 없다고 여기거나, 학대 받더라도 자기 탓이라고 믿는다. 맞고 살면서도 이혼하지 못하는 사람은 배우자에게 아주 적은 보상만 얻더라도 그것이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최대치라고 믿는다. 자존감이 타인에 대한 기대나 관계에서 얻게 될 보상 수준을 미리 결정해버리는 것이다. 기대가 없으니, 학대 받아도 관계를 청산하지 않는다. 관계란 으레 그런 것이라는 뿌리 깊은 믿음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관계 경험이 쌓일수록 자존감은 더 낮아지고 자신은 관계를 끝낼 능력조차 없다고 인식한다. 관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절박감도 사라지고 만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자신은 다른 사람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자격이 없다고 여긴다. 새로운 연인을 만나도 더 나아질 것 없다는 비관적 전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린 시절 학대 받은 경험이 있다면, 관계의 질이 낮아도 안주해버린다. 양육자와의 애착 경험은 성인이 된 이후 대인 관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어린 시절 부모와 좋은 관계를 맺었던 추억보다 학대 받았던 기억이 많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새로운 관계를 맺어도 별다른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쯤 되면 현재의 나쁜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정당화한다. 고통 받으면서도 관계를 유지하려고 투자한 시간과 노력을 생각한다. 배우자와 공유하는 경제적 조건도 중요한 고려 대상이다. 관계가 끝나면 지금까지 쏟아온 노력과 과거의 시간은 사라진다. 시간과 많은 자원을 쏟아 넣은 인간관계는 아무리 절망적이라도 쉽게 끝내지 못한다. 매몰 비용 오류(sunk cost fallacy)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부부 관계나 연인 관계를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는 것은 긍정적 환상, 소위 말하는 ‘콩깍지’다. 학대를 받으면서도 관계의 올가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배우자의 부정적 특성은 과소평가하고 긍정적 특성은 과대평가한다. “술은 마시지만 깨고 나면 착한 사람”이라거나 “폭력적이지만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사람”이라고 인지를 왜곡한다. 이런 아내는 끝까지 ‘내 사랑으로 남편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흔히 대선을 리더(지도자)를 뽑는 선거라고 하지만 이 또한 적절한 말은 아니다. 우리와 함께 새 길을 떠날 수 있는 동반자를 선택하는 날이다.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을 뽑을 때 지도자를 찾는 일이라기보다는 애인이나 배우자를 고르는 일이라고 여겨보면 어떨까? 선거는 리더를 뽑는 것이 아니라, 동반자를 선택하는 일이라고 말이다. 세상이 지금과는 달라져야 하고 개혁이 필요하다면, 과거의 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배우자를 찾아나서는 것이 답이다. 기존의 배우자를 뜯어고치겠다고, 인도의 바르가바 내무장관이 추천했던 것처럼 방망이를 휘두른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알코올에 절어 폭력을 휘두르는 습성을 애정만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 예전에 선택했던 정치인에게 당하고도 또다시 습관적으로 비슷한 정치인에게 투표했다면, 이혼이 답인데도 폭력 남편과 관계를 끊어버리지 못하고 매 맞으며 사는 아내의 심리를 떠올려보기 바란다. 그놈이 그놈이라는 생각으로 대안을 찾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은 것은 아닌지, 새로운 사람을 찾아도 또 당하고 말 것이라는 생각에 변화에 대한 기대조차 버린 것은 아닌지 자신을 돌아봐라. 지금까지 한 정파를 응원하며 투자했던 시간과 노력이 아까워서 무능해도 참고 견디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정치인 물갈이는 유권자의 자존감이 높아지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잘못 뽑은 정치 동반자를 단호하게 갈아치운다. 건강한 자존감을 가진 사람은 함부로 사람을 고르지 않는다. “나처럼 괜찮은 사람이라면 정치인도 내 수준에 맞는 사람을 뽑아야지”라며 신중해진다. 폭력 남편이 “술김에 실수했다, 잘못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용서를 구해도 달라지지 않는 것처럼, 한 번 배신한 정치인은 또다시 배신한다. “이번은 달라질 테니, 나를 계속 지지해 달라”는 선거 구호에 속지 않는다. 관계에 투자한 자원이 아까워도 과감히 청산할 줄 안다.



part 3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기



2002년 대통령 선거 열기가 뜨거웠을 때, 나는 정신과 전문의 시험을 준비 중인 전공의 4년 차였다. 공부에 몰두하던 시기였지만, 시간만 나면 인터넷에서 선거 관련 기사를 찾아 읽었다. 그 당시 나도 지지하던 후보가 있었다. 공공연하게 그를 지지한다고 말하고 다녔다. 이런 나를 두고 정신과 교수님 한 분께서는 “사람 보는 눈이 그렇게 없어서…”라며 한심하다는 듯 말씀하셨다. ‘정신과 의사의 자질과 정치적 견해가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라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사단이 나고 말았다. 회식 자리에서 누가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 누구는 안 된다는 이야기가 오갔다. 술이 좀 들어가고 경계가 낮아지자 그 교수님과 나는 대통령 선거 이야기를 평소보다 좀 더 솔직하게 주고받게 되었다. 술에 취해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특정 후보가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던 것 같다. 결국 내가 지지하던 후보가 당선되었지만, 그의 임기 내내 나는 회식 자리에서 교수님의 안줏거리가 되었다. 대통령의 지지율이 떨어지거나 비판을 받을 때마다 “그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 정신과 의사 제대로 하겠냐”는 말을 들어야 했다. 그 뒤부터 웬만하면 정치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특정 정치인에 대한 호불호는 더더욱 말하지 않게 되었다.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