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오늘처럼 하느님이 필요한 날은 없었다

프란치스코 교황 지음 | 가톨릭출판사
오늘처럼 하느님이 필요한 날은 없었다



프란치스코 교황 지음

가톨릭출판사 / 2019년 4월 / 332쪽 / 15,000원





제1장 눈물을 보일 수 있는 용기



우리 아빠는 천국에 계실까요?



[임마누엘] “못 하겠어요. 할 게 없어요.”

교황님께 질문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임마누엘이라고 하는 어린아이는 무대에 오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어요. 그러자 교황님은 그를 손짓하며 부르셨죠.

[교황님] “괜찮아요, 괜찮아. 이리 오세요. 내 귀에 대고 나에게만 말해 줄래요?”

임마누엘은 훌쩍이면서 교황님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교황님에게 귓속말을 했죠. 교황님은 임마누엘에게 몇 가지를 더 물어보신 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이 아이처럼 마음속에 근심을 품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근심 때문에 임마누엘과 같이 울지도 모르지요. 임마누엘은 아빠와 우리 앞에서 자신이 용감해지기를 바라며 눈물을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임마누엘의 마음속에는 아빠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하니까요. 전 임마누엘에게 허락을 구하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임마누엘의 아버지는 얼마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무신론자였지만, 자녀 네 명은 모두 세례를 받게 하셨답니다. 임마누엘은 아버지가 인자하고 좋은 분이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에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우리 아빠는 천국에 계실까요?”

자녀가 “우리 아빠는 좋은 분이셨다”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 아름답지 않나요? 사실 자녀들이 “우리 아빠는 좋은 분이셨어요.”라고 말할 수 있다는 건, 그분이 정말 좋은 분이었다는 증거니까요. 아버지의 힘을 물려받은 자녀의 증언만큼 정확한 것은 없습니다. 더불어 우리 모두 앞에서 눈물을 보일 수 있는 용기를 지녔다는 것 또한 대단한 것입니다. 자녀가 이렇게 행동한다면, 그 자녀의 부모는 정말 좋으신 분이 맞습니다! 그렇고말고요! 그분이 비록 신앙의 선물을 지니지 못했고, 신자가 아니었지만 자신의 자녀들에게는 모두 세례 받도록 하셨습니다. 그분은 정말 선한 마음을 지니셨던 분일 것입니다. 이 아이는 아빠가 신자가 아니었기에 하늘나라에 계시지 못할까 봐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하늘나라에 가는지 말씀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이 아버지를 보시는 하느님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요? 하느님의 마음은 바로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네, 하느님은 바로 아버지의 마음을 지니셨습니다. 그래서 비록 신자는 아니었지만 자녀들에게 세례를 받게 하고 신앙을 물려준 임마누엘의 아버지를 하느님은 멀리하실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용기를 갖고 큰 소리로 말해 보세요. 하느님께서 그 자녀들을 내버려 두실 수 있을까요? “아니요!” 그 자녀들이 선한 마음을 지녔음에도 하느님이 멀리하실까요? “아니요!”

교황님은 질문을 한 임마누엘을 보시면서 말씀을 계속하셨습니다. 임마누엘, 이것이 바로 대답이에요. 하느님은 분명 아버지를 기특하게 여기셨을 거예요. 사실 신자인 부모보다 신자가 아닌 부모가 자녀를 세례 받게 하는 게 조금 더 어려운 일이니까요. 분명 하느님은 우리 임마누엘의 가정을 좋아하셨을 거예요. 우리, 그 아버지를 위해 기도합시다. 임마누엘, 고마워요. 정말 용감했어요.

꼰대와 어른의 차



요새 우리는 잘못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과 훈계를 미덕으로 여기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여 이렇게 생각해 보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곧, ‘나는 나 자신을 꾸짖는가? 아니면 남들을 비난하는가?’ 하고 말입니다. 남들을 비난하며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타인에 대해서는 추상같이 비판하면서, 저 자신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거죠. 고해성사를 드리러 갈 때, 그저 앵무새와 같이 입으로만 죄를 고백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네, ‘이래저래 해서 이 일도 했고 저 짓도 했습니다’라고 말만 할 뿐, 자신이 한 일들이 정작 마음을 건드리지는 않는 거죠. 네, 많은 경우 그러합니다. 소위 마치 화장이나 분장을 하러 가듯 고해성사를 하러 가는 셈입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총이 우리 마음속으로 온전히 들어갈 수 없죠. 우리에게 아직 저 자신을 돌아보고 비판할 능력이 없기에 예수님의 은총이 들어갈 자리를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르는 이들의 특징은 남들을 비난하고 험담하며 타인의 삶에 도끼눈을 치켜뜨는 것이 습관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스스로에게 ‘내가 이런 짓을 했던가?’라는 물음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 주님께 은총을 청합시다. 네, 그분 앞에 설 수 있는 은총과 우리가 죄인임을, 구체적으로 깨달을 수 있는 은총을 구합시다. 마치 베드로가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라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 늘 남을 비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비판 받는다고 해서 스스로 반성해야겠다는 생각이 쉽사리 들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든 죄의 고백과 고발 그리고 비판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남의 허물을 완성으로 이끌어 주고자 하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고해성사를 통해 우리가 체험하는 것은 죄의 고발로 끝이 나는 게 아니라, 그 죄를 사랑으로 치유 받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이것이 꼰대와 어른의 차이가 아닐까요? 똑같은 꾸지람을 듣더라도 그 반응이 다를 수밖에 없는 까닭이죠.



제2장 제대로 살기 위한 탈출의 시작



우리의 신앙은 ‘동사’입니다



동방 박사의 세 가지 몸짓은 오늘날 모든 민족을 위한 빛이자 구원으로 드러나신 주님께로 우리의 여정을 이끕니다. 곧, 동방 박사들은 ‘별을 바라보았고, 여정의 길을 걸었으며, 예물을 드렸습니다.’ 여기서 ‘별을 바라본다’는 것이 바로 출발점입니다. 그런데 왜 오직 동방 박사들만이 별을 바라보았을까요? 그건 아마도 소수의 사람만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기 때문일 겁니다.

사실 우리는 주로 땅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그러니까 건강이나 돈, 얼마간의 흥미 따위로 충분한 거죠. 이에 저는 이렇게 묻고자 합니다. “우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볼 줄 아는가? 우리는 하느님을 꿈꾸고 기대하는 법을 알고 있는가? 그분의 새로움을 기다리며 그분에게 삶을 변화시켜 주십사고 내어 맡길 줄 아는가?” 그런 점에서 동방 박사들은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사는 삶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진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보다 고귀한 목표가 있어야 함을 느꼈던 겁니다. 바로 그래서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봐야 함을 알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이 남습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이들 중에서도 왜 많은 이가 ‘그분의 별’을 따르지 않았을까요? 그건 아마도 그 별이 다른 별들보다 특별히 더 반짝이는 별이 아니기 때문일 겁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그 별은 동방 박사들이 동방에서 이미 ‘봤던’ 별이었을 뿐이니까요(마태 2,9). 예수님의 별은 눈을 멀게 하거나 정신을 잃게 할 정도로 거칠고 강렬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부드럽게 초대하는 별이죠. 따라서 우리는 삶 속에서 어떤 별을 선택해야 할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물론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눈부신 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참된 여정으로 이끌어 주지는 못합니다. 예를 들면 인생의 목적으로 추구되는 성공, 돈, 경력과 명예, 흥밋거리들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별똥별일 뿐이니까요. 잠깐 환히 빛나기는 하지만 이내 곧 그 빛을 잃고 사라지고 말죠. 이것들은 추락하는 별들로, 길을 알려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이에 반해 주님의 별은 눈부신 것은 아니지만 언제나 거기에 있습니다. 은은하게 삶 속에서 우리의 손을 이끌며 함께합니다. 아울러 이 별은 물질적인 보상을 약속하지 않지만 평화를 보장하며, 동방 박사들에게 그랬듯이 ‘더 없는 기쁨’(마태 2,10)을 줍니다. 그리고 길을 나설 것을 요구하죠.

동방 박사들의 두 번째 행위인 ‘여정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뵙기 위한 아주 본질적인 행위입니다. 그분의 별은 길을 나설 결단과 그 여정에서 매일 노력할 것을 명하시니까요. 더불어 여정에 방해가 되는 불필요한 짐과 번거로운 사치를 치우고 평온하고 정적인, 삶의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은 예상치 못한 일들을 받아들일 것을 요청하시죠. 예수님은 당신을 찾는 모든 이에게 당신을 만날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다만 그분을 찾기 위해서는 우리가 길을 나서고 움직여야만 합니다. 그분을 뵈려면 가만히 멈추어 있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세상의 편안함이라는 안락의자와 자신만의 안전 보장이라는 개인 벽난로의 온기에서 벗어날 것을 제안하십니다.

사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단순히 존경 받을 만한 의전이 아니라 제대로 살기 위한 탈출의 출발이니까요. 이집트 탈출 사건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을 해방시키시고, 당신의 별을 따르게 함으로써 새로운 백성을 부르신 하느님은 오직 그 여정 중에 자유를 선사하시며 기쁨을 나누어 주십니다. 예수님을 뵙기 위해서는 이러저러한 일에 엮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떨쳐 내야 합니다. 지금 있는 곳이 도착지라는 만족감과 삶에 안주하려는 나태함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아기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죠. 왜냐하면 아기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상냥함과 사랑을 발견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을 되찾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길을 나선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에 복음은 여러 인물을 통해 이를 보여 줍니다. 우선 헤로데(『신약 성서』에 등장하는 유대의 통치자)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왕의 탄생을 두려워하며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모임을 소집하고 정보를 모으기 위해 사람들을 파견합니다. 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문을 닫아걸고 궁 안에 머물러 있었을 뿐이었죠. 또한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분명 아기가 태어날 장소를 알고 있었고, 고대 예언서를 인용하여 그것을 헤로데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들 역시 알고는 있었으나 베들레헴을 향해 걸음을 옮기지는 않았죠. 알지만 행하지 않는 것, 곧 이미 알고 있는 것들로 신앙을 말하지만, 정작 주님을 위해 개인적으로 엮이기는 싫은 것이죠. 말은 하지만 기도하지는 않는 겁니다. 안 좋은 일에 대해 불평만 할 뿐, 좋은 일은 하지 않는 거죠. 이에 반해 동방 박사들은 말은 적게 했지만, 많은 행동을 했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그분께 경배하러 왔고’(마태 2,2) ‘길을 떠나, 들어가, 엎드리고, 돌아갔습니다(마태 2,9-12).’ 그들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다음으로는 ‘예물을 드리다’입니다. 긴 여정 후 예수님께 다다른 동방 박사들은 그분과 같이 행동했습니다. 바로 ‘선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선사하기 위해 거기에 계시니까요. 그래서 그들은 황금과 유향,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그러고 보면 복음은 삶의 여정이 누군가를 위한 선물로 이어질 때 비로소 현실이 됩니다. 주님을 위해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무상으로 내어 주는 것, 이것이 예수님을 만났다는 확실한 징표입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따라서 계산 없이 우리는 선행을 베풀어야 합니다. 설령 아무것도 얻는 게 없고, 심지어 우리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하느님이 이렇게 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작아지셨기에 당신의 보다 작은 형제들을 위해 우리에게 무언가 내어 주기를 청하십니다.

자, 그렇다면 작은 형제들이란 누구일까요? 바로 우리의 선행에 보답할 수 있는 이들이죠. 도움이 필요하고 굶주린 나그네와 보살핌이 필요한 이와 가난한 이들입니다(마태 25,31-46). 따라서 예수님께 예물을 드린다는 것은 아픈 이를 돌보고, 어려운 이를 위해 시간을 낸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이며, 우리를 화나게 한 이에게 용서를 베푸는 일이죠. 이러한 것들이 예수님께 드리는 예물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결코 제외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상기해 주실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이교도처럼 행동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마태 5,46-47).

그러므로 사랑이 텅 빈 우리의 손을 자주 바라봅시다. 바로 오늘, 대가를 받을 수 없지만 우리가 내어 줄 수 있는 선물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분명 이것은 주님을 기쁘게 할 예물이 될 것입니다. 더불어 그분께 청합시다. “주님, 저에게 ‘주는 기쁨’을 알려 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 동방 박사처럼 살아 봅시다. 높은 곳을 바라보며 길을 나서 여정에 올라 대가 없이 선물을 내어 주는 삶 말입니다.



제3장 우리는 같이 잘 살 수 있습니다



제게 그런 말씀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보다 취약한 지경에 있는 우리 형제자매들의 상황을 깊이 인식하고 있습니다. 하여 이 순간 저는 각별히 지난날 특정한 고난을 겪었던 자매들과 어린이들을 기억합니다. 더불어 당시 교회 시절에 맡겨졌던 고아들도 생각합니다. 실상 보다 취약한 현실을 고려할 때, 저는 오히려 그런 이들을 보호하고 교육해야 할 임무를 맡은 아일랜드 교회의 관계자들이 아동 학대를 자행했다는 위중한 추문에 대해 깊이 통감합니다. 교회 당국의 실패……. 네, 주교와 장상 그리고 사제와 그 밖의 교회의 책임을 맡은 이들이 이러한 역겨운 범죄에 합당하지 못하게 대응한 것은 뭇사람들의 정당한 분개를 일으키며 가톨릭 공동체 안에 치욕과 고통의 씨앗으로 남았습니다. 이에 저 자신 또한 이러한 감정들을 함께 나누는 바입니다.

제 전임자이신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하여 이러한 신뢰를 배신한 데 대해 응답으로 ‘진정으로 복음적이고 정당하며 효과적인’ 조치를 취할 것을 명하셨죠. 이러한 그분의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개입은, 과거의 실수를 바로잡고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엄격한 규정을 적용하여 교회 당국이 계속 노력하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최근 ‘하느님의 백성에게 보내는 서한’을 통해 저는 교회 안의 이러한 ‘전염병’을 제거하기 위한 교회의 막중한 임무를 재확인했습니다. 그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러한 도덕적 해이와 고통을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실상 모든 어린이는 보호 받고 응원 받아야만 하는 하느님의 값진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네, 우리는 그 선물을 개발시켜 영적으로 성숙하고 충만한 인간성을 지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분명 아일랜드 교회는 과거와 현재에 있어 어린이들의 이러한 성장을 돕는 크나큰 역할을 해 왔습니다. 하여 많은 이의 실망을 불러 온 성적 학대라는 추문의 심각성을 제가 언급하는 까닭은 전체 공동체의 한 부분으로 취약한 환경에 놓인 어린이와 성인에 대한 보호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것이기도 합니다.

※ 변화는 진정 어린 사과로부터 시작된다고 저는 믿습니다. 사실 자신의 치부에 대해 인정하고 돌아보는 것이 쉽지 않지요. 더욱이 어떤 자리에 있는 분이 치부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모습을 보기 힘든 요즘, 저는 교황님이 저런 인정과 사과를 하시고, 게다가 공개적인 자리에서 다시금 저런 사안을 꺼낸 이에게 ‘고맙다’고 응답하시며 공개적인 참회까지 해주신 교황님의 모습에서 감히 그 변화의 시작을 느낍니다. 그리고 응원합니다.



제4장 세상의 바이러스를 이겨 낼 복음의 항체가 있습니다



신앙은 도피처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 복음 구절(마태 14,22-33)은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일화를 전해 줍니다. 밤새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기도하신 다음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를 향해 물위를 걸으신 일이죠. 당시 배는 심한 맞바람으로 호수 위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 다가오시는 모습을 보자 마치 유령을 본 것처럼 몹시 두려워했죠. 이에 그분은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시며 그들을 도닥여 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평소 충동적인 성격대로 다음과 같이 말하죠.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이에 예수님은 “오너라.”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위를 걷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거센 바람을 보고 두려워진 베드로는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라고 소리를 질렀고, 예수님은 손을 뻗어 그를 붙잡으셨죠. 복음서의 이 대목은 개인적인 믿음이든 교회 공동체적인 믿음이든 우리의 신앙에 대해 돌아보게 만듭니다.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