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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시

임상희, 정진아 지음 | 나무생각
맛있는 시



임상희, 정진아 지음

나무생각 / 2019년 4월 / 192쪽 / 12,800원





1장 위로맛 詩 - 토닥토닥, 너만 그런 거 아니야



꽃밥_ 엄재국



꽃을 피워 밥을 합니다



아궁이에 불 지피는 할머니



마른 나무에 목단, 작약이 핍니다



부지깽이에 할머니 눈 속에 홍매화 복사꽃 피었다 집니다



어느 마른 몸들이 밀어내는 힘이 저리도 뜨거울까요



만개한 꽃잎에 밥이 끓습니다



밥물이 넘쳐 또 이팝꽃 핍니다



안개꽃 자욱한 세상, 밥이 꽃을 피웁니다



『정비공장 장미꽃』, 애지



담양에서 태어났지만 갓난아이 때 이사 온 후 쭉 서울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아궁이에 커다란 가마솥을 걸어놓고 밥을 짓는 풍경은 텔레비전을 통해서 본 게 전부. 당연히 가마솥 밥을 먹어본 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더, 이 시의 매력에 빠져든 것 같습니다.

시를 읽고 또 읽으며 아궁이에 마른 장작을 밀어 넣어봅니다. 불이 붙은 나무에서 함빡함빡 목단, 작약이 피어납니다. 나무는 활활활 꽃을 피워 내며 한 생을 다합니다. 그 뜨거운 생을 받아든 가마솥이 밥을 끓입니다.

살아가는 일도 마찬가지겠지요. 씨앗처럼 작은 생명으로 세상에 와서는 한 시절 줄기를 뻗고 잎을 틔우고 활짝 꽃을 피웁니다. 그러다 때가 되면 마른 장작처럼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기도 하겠지요.

삶을 다하는 마지막 순간에 누군가의 생명을 이어주는 꽃밥이 될 수 있다는 것, 그 또한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요? 곁에 있는 사람에게 실망해서 마음에 시린 바람이 불고 있다면 꽃불로 끓여낸 가마솥 꽃밥을 먹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밥알 하나하나에 고인 뜨거움이 마음에 부는 시린 바람을 다사로운 훈풍으로 바꿔줄 거예요.

짜장면을 먹으며_ 정호승



짜장면을 먹으며 살아봐야겠다

짜장면보다 더 검은 밤이 올지라도

짜장면을 배달하고 가버린 소년처럼

밤비 오는 골목길을 돌아서 가야겠다

짜장면을 먹으며 나누어 갖던

우리들의 사랑은 밤비에 젖고

젖은 담벼락에 바람처럼 기대어

사람들의 빈 가슴도 밤비에 젖는다

내 한 개 소독저로 부러질지라도

비 젖어 꺼진 등불 흔들리는 이 세상

슬픔을 섞어서 침묵보다 맛있는

짜장면을 먹으며 살아봐야겠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열림원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의 대표작 [해변의 묘지] 한 구절입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읽고 매료되었던 구절이기도 합니다. 대학 입시에 실패했을 때, 사랑이 끝났을 때, 입사 시험에 떨어졌을 때…… 절망의 고비에서 이 구절을 읽으며 힘을 냈습니다.

주저앉고 싶을 때, 살아볼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음식 하면 짜장면을 빼놓을 수 없지요. 검고 빛나는 소스에서 풍겨 나오는 향은 식욕을 자극하고 삶의 의욕까지도 끌어냅니다.

짜장면, 참 많이도 먹었습니다. 생애 첫 외식 날, 입학식과 졸업식, 새 집으로 이사하던 날, 김장을 하느라 바쁠 때도 짜장면을 시켜 먹곤 했습니다. 야근을 할 때도 간단하지만 든든하게 속을 채워주는 짜장면을 배달시켜서 먹었어요. 입맛이 없을 때도 주머니가 가벼울 때도 짜장면 한 그릇이면 모든 게 해결됐습니다. 짜장면 하나면 충분히 행복했던 어린 날처럼 삶의 무게 때문에 힘겨울 때 짜장면을 먹으며 살아봐야겠습니다. 행복하게 잘 살아갈 마음을 품어야겠습니다.



2장 사랑맛 詩 - 사랑한다, 사랑한다, 나 너를



설렁탕과 로맨스_ 정끝별



처음 본 남자는 창밖의 비를 보고

처음 본 여자는 핸드폰의 메씨지를 보네

남자는 비를 보며 순식간에 여자를 보고

여자는 메씨지 너머 보이는 남자를 안 보네

물을 따른 남자는 물통을 밀어주고

파와 후추와 소금을 넣은 남자는 양념통을 밀어주네

마주앉아 한번도 마주치지 않는 허기

마주앉아 한번 더 마주보는 허방

하루 만에 먹는 여자의 국물은 느려서 헐렁하고

한나절 만에 먹는 남자의 밥은 빨라서 썰렁하네

남자는 숟가락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여자는 숟가락을 들고 늦도록 국물을 뜨네

깜빡 놓고 간 우산을 찾으러 온 남자는

여전한 여자를 처음처럼 한번 더 보고

혼자 남아 숟가락을 들고 있는 여자는

가는 남자를 처음처럼 한번도 안보고

그렇게 한번 본 여자의 밥값을 계산하고 사라지는 남자와

한번도 안 본 남자의 얼굴을 계산대에서야 떠올려보는 여자가



단 한번 보고 다시는 보지 못할 한평생과

단 한번도 보지 못해 영원히 보지 못할 한평생이

추적추적 내리네 만원의 합석 자리에

시월과 모래내와 설렁탕집에



『와락』, 창비



누구나 로맨스를 꿈꾸지만 현실에서의 로맨스는 드라마 속에만 존재하는 이야기입니다. 낯선 여자가 낯선 남자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합석을 했습니다. 두 사람은 같이 밥을 먹었지만 아무런 말도 없이 헤어집니다.

다음 날 두 사람이 또 우연히 만납니다. 남자는 여자의 밥값을 계산해주고 사라집니다. 그다음 날 두 사람은 또다시 만나고, 이것은 필연이라며 사랑에 빠집니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사랑은 다릅니다.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이 다시 만날 확률부터 희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여자와 남자도 만나고 사랑을 합니다.

세상의 모든 연인에게는 서로 다른 사랑의 방식이 있습니다. 설렁탕처럼 오랜 시간 우려낸 사랑,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하지만 금방 녹아버리는 사랑, 잘 구워낸 쿠키처럼 고소하지만 좀 딱딱한 사랑, 솜사탕처럼 허망한 사랑, 전복죽처럼 속 편한 사랑도 있습니다.

사랑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분홍물이 듭니다. 이렇게 좋은데 왜 사랑하지 않는 걸까요? 부디 사랑하세요. 진심을 다해 사랑하고, 가슴에서 출렁이는 사랑의 말을 입 밖으로 꺼내서 자주자주 들려주세요. 말하지 않고 표현하지 않고 마음에만 담아둔 사랑은 사랑을 깨뜨리는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평양냉면_ 신동호



열두 살 때, 아버지 손에 이끌려 요선동 평양냉면을 첨 먹어봤다. 친구가 없던 아버지는 복더위에 삼계탕이나 개고기를 드실 때 꼭 날 데려갔다. 냉면 맛은 참 밍밍했다. 아버지 인생이 그랬다. 전쟁 통에 청각이 포격 소리와 함께 진흙탕에 묻혔다. 낚시찌처럼 강물 위에서 말없이 흔들리는 게 인생이었다.사랑이랍시고 절망에 몸부림치거나 시대에 모든 걸 바친다고 유치장과 감옥을 들락거렸으니 , 꽤나 드라마틱한 삶 같지만 결국은 고만고만한 게 인생이다. 분노도 삭고 열등감 따위 아무것도 아니란 걸 알았을 때 냉면집 문턱이 닳도록 다니게 되었다. 양념 하나 없는 투명한 육수가 오래된 친구들 같아서 낮술에 자주 쓰러지던 시절, 전투력 없이도 툭툭 끊어지는 면발 앞에서 자주 무너지던 나이였다. 참으로 밍밍한 게, 뭐가 잘난지도 모르게 된 내 맘 같았다. 서른일곱 살 때, 첨 대동강변에서 평양냉면을 먹어봤다. 유산 한 푼 없이 낚싯대 몇 개 남기고 간 아버지의 인생, 가끔이었지만 그 원망스러운 날들이 밍밍하게 희석되는 경험을 하고 말았다. 인생과 인생이 만나서 얼마나 더 질기게 한을 남겨놓겠는가. 고명들처럼 소박하게 어울리는 게 인생이다. 우리만 한 마음이 수두룩한 평양이었다.

『장촌냉면집 아저씨는 어디 갔을까?』, 실천문학사



평양냉면, 좋아하세요? 슴슴하고 밍밍한 맛의 평양냉면은 극명하게 호불호가 갈리는 음식 중 하나예요. 기대했던 것만큼 실망의 쓰나미가 몰려들기도 하죠. 그런데 이게 한번 맛을 들이면 자꾸만 생각나는 별난 음식입니다.

한국전쟁 후 고향을 떠나온 평안도 사람들에게 평양냉면은 고향의 맛이면서 어머니 그 자체였을 겁니다. 하지만 어린 소년에게는 참으로 난감한 맛이었겠지요. 전쟁 통에 청각을 잃어버린 아버지, 강물 위에서 말없이 흔들리는 낚시찌처럼 고요하게 생을 이어가는 아버지를 보면서 소년은 다른 삶을 꿈꿉니다. 아버지처럼은 살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드라마틱한 삶을 선택했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사랑 때문에 몸부림치고 시대를 위해 많은 걸 바친 후 고만고만한 게 인생이라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어, 세상을 떠난 아버지 대신 아버지의 땅에서 고향을 맛봅니다. 후루룩- 냉면을 삼키며, 아버지가 애틋하게 그리워져 가슴이 저몄을 겁니다. 그러면서 아들을 떠올렸을 겁니다. 이제 아버지와 같이 먹던 평양냉면을 아들과 먹겠지요.

밀가루 반죽_ 한미영



냉장실 귀퉁이

밀가루 반죽 한 덩이

저놈처럼 말랑말랑하게

사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동그란 스텐그릇에

밀가루와 초면(初面)의 물을 섞고

내외하듯 등 돌린 두 놈의 살을

오래도록 부비고 주무른다

우툴두툴하던 사지의 관절들 쫀득쫀득해진다

처음 역하던 생내와

좀체 수그러들지 않던 빳빳한 오기도

하염없는 시간에 팍팍 치대다보면

우리 삶도 나름대로 차질어 가겠지마는



서로 다른 것이 한 그릇 속에서

저처럼 몸 바꾸어 말랑말랑하게

사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물방울무늬 원피스에 관한 기억』, 문학세계사



결혼 생활은 한마디로 밀가루 반죽이었습니다. 어쩌자고 시작했을까요? 하얗고 부드럽고 후- 불면 날아가는 고운 밀가루로 살지, 동그란 스텐 그릇에는 왜 뛰어들었을까요? 물이 부어진 후 뒤섞여 하나가 된다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던 거겠지요.

고운 가루가 한 덩이 반죽으로 완성되기까지 울기도 많이 울고 싸우기도 많이 싸우고 고함을 지르던 날도 셀 수 없습니다. 그 시간들로 팍팍 치대 완성한 말랑말랑한 반죽. 자, 이제 어떡할까요? 국수를 삶을까요? 빵을 구울까요?



3장 인생맛 詩 - 간장, 소금, 설탕, 된장, 고추장, 인생의 기본 맛



식탁_ 이성복



아이들이 한바탕 먹고 떠난

식탁 위에는 찢긴 햄버거 봉지와

우그러진 콜라 패트병과

입 닦고 던져놓은 종이 냅킨들이 있다

그것들은 서로를 모르고

가까이 혹은 조금 멀리 있다



아이들아, 별자리 성성하고

꿈자리 숭숭한 이 세상에서

우리도 그렇게 있다

하지만 우리를 받아들인 세상에서

언젠가 소리 없이 치워질 줄을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이다



『래여애반다라』, 문학과지성사



직업을 물어서 ‘방송 작가’라고 대답하면 상대방의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입니다. 화려하고 멋진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거든요. 밝고 강렬한 조명들이 찬란하게 켜진 무대가 있고 신기할 정도로 예쁜 사람과 함께 일한다는 점, 또 마이크와 카메라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멋진 공간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실제 현장은 그렇게 화려하지는 않습니다. 방송이 끝나서 카메라와 조명이 꺼지고 나면 나무판에 불과한 세트가 원래 모습을 드러냅니다. 화려한 조명 뒤의 그 모습이 초라하기 그지없어서 마음이 울적해지는 날도 있습니다.

음식으로 가득했던 식탁 위도 마찬가지겠지요. 따뜻하고 정겨운 자리였지만 다 먹고 떠나고 난 후에는 밥찌꺼기와 설거지거리만 남습니다. 누군가는 두 팔을 걷어붙이고 식탁 위를 깨끗하게 치우겠죠.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시인은 말합니다. 지금은 한창 자신의 삶을 꾸려가고 있지만 언젠가 소리 없이 치워질 거라고요. 그래요. 살다 보면 별자리 성성하고 꿈자리 뒤숭숭한 이 세상을 떠나는 날이 옵니다. 그건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길이에요. 다만, 그날이 나를 찾아오는 날, 조금이라도 덜 후회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밥_ 천양희



외로워서 밥을 많이 먹는다던 너에게

권태로워서 잠을 많이 잔다던 너에게

슬퍼서 많이 운다던 너에게

나는 쓴다.

궁진에 몰린 마음을 밥처럼 씹어라.

어차피 삶은 너가 소화해야 할 것이니까.



『그리움은 돌아갈 자리가 없다』, 작가정신



루쉰의 소설 [아큐정전]의 주인공 아큐는 동네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툭하면 매를 맞곤 합니다. 이렇게 무시를 당하면서도 아큐는 ‘정신적 승리법’이라는 이론에 자신을 적용시킵니다. 그리고 자신이 모든 사람을 다 이겼다며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루쉰은 아큐의 태도를 통해 중국 사회를 비판하고자 이 작품을 썼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아큐의 ‘정신적 승리법’이 필요한 순간이 있습니다. 특히 마음이 궁지에 몰렸을 때는 ‘정신적 승리법’으로 내가 나를 어루만져주고 격려합니다.

코코 샤넬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가장 용감한 행동은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큰 소리로.” 맞습니다. 조금은 부끄럽고 쑥스럽더라도 내가 나를 헐뜯고 끌어내릴 필요는 없습니다. 가끔은 용감하게 오로지 나 자신만을 위해서 나를 두둔해주세요. 궁지에 몰린 마음을 밥처럼 씹어 삼키면서 정면 돌파하는 것! 이게 방법일 때도 있습니다. 다른 생각 말고 온전히 나를 위한 선택을 하세요. 인생의 모든 순간에 나는 나 자신을 먼저 챙겨야 합니다. 그 누구도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4장 엄마의 맛 詩 - 그리움이 피어오르는 시간



흰죽_ 고영민



무엇을 먹는다는 것이 감격스러울 때는

비싼 정찬을 먹을 때가 아니라

그냥 흰죽 한 그릇을 먹을 때

말갛게 밥물이 퍼진,

간장 한 종지를 곁들여 내온

흰죽 한 그릇



늙은 어머니가 흰쌀을 참기름에 달달 볶다가

물을 부어 끓이는

가스레인지 앞에 오래 서서

조금씩 조금씩

물을 부어 저어주고

다시 끓어오르면 물을 부어주는,

좀 더 퍼지게 할까

쌀알이 투명해졌으니 이제 그만 불을 끌까

오직 그런 생각만 하면서

죽만 내려다보며

죽만 생각하며 끓인



호로록,

숟가락 끝으로 간장을 떠 죽 위에 쓰윽,

그림을 그리며 먹는



『사슴공원에서』, 창비



가끔, 쓸쓸할 때 꺼내 읽으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시입니다. 밋밋하고 소박한 흰죽은 오래 아팠다가 막 기운을 차리는 사람에게 딱 어울리는 음식입니다. 아픈 딸을 위해 또는 아들을 염려하며 늙은 어머니가 오래오래, 세상의 좋은 기운을 죄다 끌어모아서 끓인 것 같은 맑은 시를 읽으니, 마음 한 켠에 수액처럼 눈물이 차오릅니다. 아, 우리는 여직 사랑받고 있구나……. 잊었던 그 사랑을 느끼며 다시 살아갈 힘을 냅니다. 헛헛하고 외로울 때마다 꺼내 드세요. 위로와 사랑의 흰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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