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한 문장이 남았다
허연 지음 | 생각정거장
그리고 한 문장이 남았다
허연 지음
생각정거장 / 2019년 3월 / 247쪽 / 13,800원
1부 고독이라는 내면
정치적 불운 속에서 추사체 완성한 금석학 대가
추사 김정희가 일곱 살 때 일이다. 어려서부터 글씨와 문장이 뛰어났던 소년 김정희는 한양 통의동 집 대문에 ‘입춘첩(立春帖)’을 써 붙인다. 같은 날 우연히 이곳을 지나던 영의정 번암 채제공이 이것을 보고 김정희의 부친을 찾는다. “이 아이는 반드시 명필로 이름을 떨칠 것이네. 그러나 그 길을 가면 운명이 기구해질 것이니 절대 붓을 잡지 못하게 하게.”
채제공의 예언은 들어맞았다. 추사 김정희 생애는 불운의 연속이었다. 그는 이름은 얻었지만 행복을 얻지는 못했다. 추사 김정희는 병조판서 김노경의 자제로 1786년(정조 10년) 태어난다. 운명은 태생부터 순탄치 않았다. 모친 기계 유씨는 한양에 창궐한 천연두를 피해 충남 예산으로 피신해 몸을 풀었다. 이렇게 태어난 김정희는 곧바로 아들이 없었던 큰아버지 김노영의 양자가 된다.
김정희의 10대 시절은 주변인들의 죽음으로 점철된다. 10대 초반 집안의 기둥이었던 조부 김이주와 양부 김노영의 죽음을 경험했고, 열여섯 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데 이어 열아홉 살 때는 부인 한산 이씨가 요절하고, 그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박제가가 사망한다. 집안은 흉사로 점철됐지만 학문적으로는 큰 기회를 얻는다. 사마시에 합격한 김정희는 동지부사였던 친부 김노경의 청나라 연경 출장에 동행하게 된다. 이곳에서 견문을 넓힌 그는 북학파의 맥을 이어 실사구시 학문을 정립한다. 연경에서도 김정희의 글씨는 인기였다. 중국 제일의 학자였던 옹방강은 추사의 비범함에 놀라 “경술문장 해동제일”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이 무렵 김정희는 「실사구시설」이라는 논문을 완성한다. “바른 길을 버리고 오묘한 곳에서만 도를 찾으려 한다. 허공을 딛고 왕마루에 올라가 창문의 빛과 다락의 그림자로 방 아랫목 물 새는 곳을 찾으려 하니 끝내 찾을 수가 없다.”
용마루에 올라가 어떻게 방 아래 물 새는 것을 찾겠느냐는 추사의 지적에서 공론보다는 실천을 중시한 그의 학풍이 읽힌다. 김정희의 관운은 오래가지 않았다. 벼슬이 호서안찰사를 거쳐 병조판서에 이를 무렵인 1830년 첫 유배를 떠나게 된다. 권력을 쥐고 있던 안동 김씨를 공격한 상소로 윤상도가 처벌받은 사건이 있었는데, 이 상소의 배후 조종자가 김정희라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결국 김정희는 안동 김씨 세력에 밀려 제주도로 유배를 떠난다. 유배 방식은 가시울타리를 치고 죄인을 그 안에 가두는 ‘위리안치’였다. 유배 생활 9년 동안 김정희는 쉬지 않고 글과 그림을 남긴다. 조선 최고의 걸작 <세한도(歲寒圖)>가 이 때 탄생한다. 유배 시절 유일한 힘이 되었던 두 번째 부인 예안 이씨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이런 시를 바친다.
어찌하면 월하노인 시켜 저승에 호소하여
내세에는 그대와 나 자리 바꿀까
내가 죽고 그대가 천 리 밖에 산다면
이 마음 이 슬픔을 그대가 알 터인데
1849년 유배가 끝나고 서울로 돌아온 그는 절친했던 권돈인의 예론 논쟁에 휘말려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떠난다. 2년 귀양살이에서 돌아온 그는 경기도 과천에 머물다 일흔한 살의 파란 많은 생을 마친다. 평생 10개의 벼루에 구멍을 내고, 1000자루의 붓을 망가뜨렸다는 김정희. 인간의 글씨체가 아니라는 ‘추사체’는 불운이 그에게 준 선물이었을까.
2부 숨지 않은 감정의 고귀함
욕망에 충실했던 신의 어릿광대
“매일매일 인간은 가장 고귀한 충동들을 도살한다. 우리 안에 대가가 있지만 우리는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어린 싹을 밟아 죽인다. 우리는 모두 왕, 시인, 뮤지션의 일면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할 일은 스스로를 열고, 이미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을 찾아내는 일이다.”
평소 이런 말을 하고 다닌 헨리 밀러는 문제적 남자다. 그는 충동을 억누르지 않는 삶을 살았다. 규칙에 반발해 학교를 그만두었고, 마치 여행가방 싸듯 여덟 번이나 결혼했다. 온갖 직업에 종사하면서 미국을 방랑하던 그는 마흔 살 무렵 무일푼으로 유럽행 배를 탔다. 그가 파리 뒷골목을 전전하면서 써낸 소설들은 발표하는 족족 발매 금지처분을 받았다.
훗날 《북회귀선》, 《남회귀선》 등으로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올랐지만 사람들은 그의 작품보다 인생사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절정은 그가 76세이던 1967년 46세 연하의 일본 배우 도쿠다 호키와 결혼을 발표했을 때였다. 세상은 온통 그의 애정 행각만을 이야기했다. 그에게는 위대한 문호라는 수사보다는 ‘욕망대로 사는 유명한 노인네’라는 수사가 붙어 다녔다.
생각해 볼 것이 있다. 내킨 대로 사는 게 과연 쉬운 삶이었을까? 헨리 밀러의 삶은 정말 행복했을까? 어쩌면 내키는 대로 사는 것이 규범대로 사는 것보다 더 힘들 수도 있다. 상대적으로 더 많은 스트레스와 위험성과 비난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거의 알려지지 않은 헨리 밀러의 작품 《신의 광대 어거스트》를 우연히 읽게 됐다. 일종의 철학 우화로도 볼 수 있는 책인데 곡마단의 광대인 어거스트가 참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이 책을 읽으며 무릎을 쳤다. 헨리 밀러가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던 이유, 그 단서를 발견한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는 ‘신의 광대’로 살고 싶어 했다. 밀러의 바람대로 신은 바이러스가 숙주를 이용하듯 그에게 재능을 심어 주고 그를 숙주로 활용했다. 사실 모든 창조적 행위에는 그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헨리 밀러가 뿜어져 나오는 욕망에 솔직했던 것은 신이 심어 놓은 프로그램 때문이 아니었을까. 신은 위대한 작품을 위해 그를 이용한 것이 아니었을까. 책에서 주인공 어거스트는 말한다. “너는 이것이 되려고, 저것이 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고, 위대하게 혹은 소박하게, 혹은 현명하거나 어리석게 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어. 단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하기만 하면 되는 거야.”
어거스트가 싫어하는 ‘노력하는 삶’이 사실은 인간적인 삶일 수도 있다. 자기 의지를 가지고 목표를 향해가는 것, 그것이 인간다운 삶에 더 가깝다. 반대로 이런 노력을 거세한 삶은 자유분방해 보이기는 하지만 작품만 남고 삶은 피폐해지는 경우일 수도 있다. 소설의 주인공 어거스트는 방황을 하다가 깨닫는다. 광대는 사람들을 즐겁고 기쁘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신이 준 재능을 펼쳐 보이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쯤 되면 분명해진다. 헨리 밀러는 자신을 ‘신의 광대’라고 생각했다. 그는 세상이 어떤 손가락질을 하더라도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았다. 그가 그렇게 산 건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작품을 탄생시키기 위한 수단이었을지 모른다. “예술이나 스포츠는 결국 타고난 놈들이 하는 것”이라는 말을 흔히 한다. 타고난 놈들을 헨리 밀러 식으로 말하면 결국 신의 어릿광대가 아닐까.
감정도 공적 판단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재판정 풍경이 종종 뉴스가 된다. 특히 이런 경우가 눈길을 끈다. 재판을 받는 미성년자에게 판사가 큰 소리로 “어머니 사랑합니다”를 외치게 했다든지, 사고로 자식을 잃고 실의에 빠진 가난한 여인을 위해 미국 판사가 벌금을 면제해주면서 “희망을 잃지 말라”는 이색 판결을 내렸다든지 하는 이야기다. 이런 법정 스토리가 화제가 된 이유는 객관성만 존재할 것 같은 공간에서 ‘감정(感情)’이 힘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재판에 감정이 개입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감정을 가진 인간이 감정을 가진 인간을 재판하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마사 누스바움이라는 학자를 기억해야 한다. 법철학, 고전학, 여성학 분야 세계적 석학인 그는 “감정도 신념의 복합체로서 공적 판단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법전과 판례는 객관화한 기준일 뿐 재판정에 선 사람 한 명 한 명의 삶을 설명해줄 수 없다. 따라서 정확한 재판을 위해서는 재판관이 상상력을 동원해 사건이 발생한 상황으로 들어가 관련된 개인의 서사를 이해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흔히 재판이나 교육, 혹은 정치 같은 공적 영역에 감정이 개입되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살아간다. 이것은 허상이다. 감정이 개입되는 것이 지당한 일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감정이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을 위해 소모되지 않고 더 나은, 더 정확한 결과를 만드는 것에 기여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누스바움은 저서 《시적 정의》에서 감정의 힘을 역설한다. “공리주의적 계산으로만 세상을 보려는 경제학적 사유는 맹목적이다. 이런 맹목적 태도는 세계의 질적인 풍성함 인간 존재의 개별성과 내면적 깊이, 희망, 사랑, 두려움 같은 걸 보지 못하게 한다. 또한 인간으로서 삶을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의미 있는 삶은 어떤 것인지 등을 알지 못하게 한다.”
사실 정치라는 것도 감정 행위의 대표적 사례다. 독일의 폭탄이 런던에 연일 떨어지던 제2차 세계대전 때 처칠은 이젤을 펼치고 템스 강변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 모습을 보고 한심하다고 생각한 영국인은 없었다. 처칠의 여유 있는 모습은 절대적인 신뢰를 얻었고, 그는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동력을 얻었다.
재선에 도전한 클린턴은 지지율이 답보 상태를 보이던 어느 날 시름에 빠져 허름한 술집에서 셔츠를 걷어붙인 채 색소폰을 불었다. 이 사진이 보도된 직후 그의 지지율이 급등했다. 정책과 아무 상관없는 색소폰 연주가 대중의 정치적 결정을 좌우한 것이다.
누스바움은 세상을 숫자로 보지 말고 감정으로 보자고 말한다. 이성 중심의 서양철학에 감정을 입히자는 것이다. 단, 감정을 중시하면서도 혐오와 수치심이라는 감정은 배제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약자를 차별하는 폭력성에서 기인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즉 가난한 사람을 혐오하는 것은 자신이 가난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한 폭력성에서 기인한 것이다.
누스바움은 뉴욕에서 태어나 뉴욕대학에서 연극과 서양고전을, 하버드대학에서 고전철학을 공부했으며 현재 시카고대학 석좌교수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르티아 센과 함께 유엔이 국내총생산 (GDP)의 대안으로 제시한 인간개발지수(HDI)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기도 했다. 사실 가장 아름다운 지성은 감정과 결합한 지성이다. 인간의 얼굴을 한 지성 말이다.
3부 저항의 미학에 관하여
문명의 어두운 이면 파헤친 선원 출신 대문호
문학사에 남은 작가들 중 선원 출신 작가가 꽤 있다. 해양소설 불후의 명작 《모비딕》을 쓴 허먼 멜빌이 선원이었고, 《강철군화》, 《바다의 이리》 등을 쓴 잭 런던도 선원 생활을 했다. 비행 기술이 발달하기 전, 배는 세상으로 나가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다. 세상을 보고 온 선원 출신 작가들은 골방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상상력으로 개성 넘치는 작품을 써냈다. 그들의 작품에는 묘한 신비스러움이 담겨 있다.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명의 선원 출신 문호가 조지프 콘래드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의 원작소설 《암흑의 핵심》을 쓴 바로 그 작가다. 콘래드의 작품에 가까이 가기 위해선 그의 파란 많은 삶을 먼저 만나야 한다.
콘래드는 1857년 당시는 폴란드 영토였던 우크라이나 베르디 체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러시아에 저항하는 독립운동가이자 작가였다. 콘래드가 네 살 때 아버지는 체포되어 유배를 가게 된다. 곧이어 어머니가 결핵으로 죽자 콘래드는 외삼촌 집에 맡겨진다. 외삼촌 집에서 콘래드는 아버지가 번역한 책들을 읽으며 작가의 꿈을 키운다. 열일곱 살이 되던 해 콘래드는 조국이 처한 절망적인 상황에 염증을 느끼고 프랑스로 가 선원이 된다. 그는 난파와 선상 폭동을 경험하기도 하고, 도박에 빠지기도 하며, 무기 밀수선을 타기도 하고, 한 여인을 놓고 결투를 벌이기도 한다.
질풍노도의 삶을 살던 콘래드는 20대 중반에 선장 자격시험에 합격하고, 영국으로 귀화하면서 달라지기 시작한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탐험에서 만난 것들을 작품에 녹였다. 《암흑의 핵심》은 아프리카 콩고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항해를 한 경험을 바탕으로 썼다.
“세계의 정복이라고 하는 것이 대부분 우리와 피부색이 다르고 우리보다 코가 낮은 사람들을 상대로 자행하는 약탈이 아닌가. 그러므로 그 행위를 곰곰이 들여다보면 아름다운 것이 못 된다고.” “모든 기약, 위대함, 관대함, 고귀함 중에서 이제 남은 게 없군요. 기억밖에는….”
이런 문장들에서 짐작할 수 있듯 소설에는 식민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이 깔려 있다. 줄거리는 선장인 말로가 기선을 몰고 벨기에 식민지였던 콩고에서 왕국을 건설해 살아가는 커츠라는 백인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콘래드는 이성과 과학으로 무장한 문명사회에서 온 커츠가 온갖 만행을 저지르면서 지배자로 군림하는 모습을 통해 문명의 이면을 파헤친다. 선교니 학술 연구니 계몽이니 하는 주장으로 치장한 서구인들의 아프리카 침략을 비판하는 것이다. 《암흑의 핵심》은 사실 읽는 소설이라기보다는 ‘사색하는 소설’이다. 그만큼 깊고 난해하다. 묘사나 줄거리 진행보다는 상징과 암시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커튼처럼 둘러선 밀림 뒤쪽에서 우리 머리 위를 선회하듯 북소리가 허공에 걸려 있었다. 그 북소리가 의미하는 것이 전쟁인지 평화인지, 아니면 기도인지 우리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이 문장은 읽고 또 읽어도 새롭다. 전쟁과 평화와 기도가 아프리카라는 대륙에서 어떻게 한 통에 담겨 혼재되어 있는지 사유하게 해준다. 전쟁도, 평화도, 기도도, 결국 백인들이 가지고 온 것들이었다. 그것이 결국 아프리카의 정체성과 리듬을 파괴했다. 파괴의 씨앗은 자금도 남아 있다. 소설에서 커츠가 죽으면서 한 말이 생각난다. “무서워라. 무서워라.”
가미카제 특공대원들은 용감하지 않았다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던 가미카제 특공대원들은 모두 천황에 대한 충성으로 무장한 인간병기였을까. 영화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그들은 어떤 두려움이나 의심 없이 비행기를 몰고 미국 군함에 돌진했을까.
사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다. 가미카제 특공대원들이 출격 직전에 남긴 일기가 공개된 적이 있다. 특공대원들은 징집되기 전 베토벤을 듣고 릴케를 읽으며 연애편지를 쓰던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출격하기 전 죽음의 공포에 떨었고, 어머니를 그리워했으며, 두고 온 애인을 보고 싶어 했다. 일제는 그들을 속이고 협박해 희생양으로 만들었다. 걷지도 못하고 오줌을 지리는 어린 조종사를 비행기 조종석에 밀어 넣은 사례도 실제로 있었다.
오오카 쇼헤이의 소설 《포로기》에는 태평양전쟁에 참여했던 일본군의 민낯이 잘 그려져 있다. 저자이자 작품의 주인공인 오오카는 명문 교토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한 엘리트였다. 번역가이자 작가로서 인생을 살던 그는 태평양전쟁 말기에 36세라는 늦은 나이에 징집된다. 패망에 직면한 일본 군부가 징집 연한을 늘려 마구잡이로 병사들을 끌어모으던 시기였다. 필리핀 민도르 섬에 배치된 오오카는 제대로 된 전투도 해보지 못 한 채 말라리아에 걸려 정글을 떠돌다 미군의 포로가 된다. 영어를 할 줄 안다는 이유로 수용소 통역을 맡은 그는 중간자적 시각으로 일본군 포로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여기서 묘한 아이러니가 등장한다. 포로가 된 일본군들은 오히려 행복해 보였다. 그들은 일본군 신분으로 전쟁을 할 때보다 미군 포로가 된 이후 훨씬 인간다운 삶을 살았다. 일본 군부는 충성만 강요했을 뿐 아무것도 해준 게 없었다. 쥐를 잡아먹어야 할 정도로 배급은 형편없었고, 군 내부의 학대와 폭력은 적군의 포탄보다 끔찍한 것이었다. 하지만 미군 포로가 된 이후 일본군의 생활은 달라졌다. 먹을 것이 풍족했고, 제네바 협정에 의거 한인도주의적 대우를 받으며 평화로운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물론 핵심 수뇌부는 전범재판에 회부됐다. 오오카는 이곳에서 일본군의 민낯을 마주한다. 좋은 음식을 먹고 의료서비스를 받으며 시간을 보내는 일본군은 그냥 평범한 인간 군상일 뿐이다. 그들은 제국주의자가 주입한 명분을 흉내만 냈을 뿐 세상 어디에나 있는 그저 그런 생활인들이다. 통조림 깡통 몇 개에 행복해하는 이들이 얼마 전까지 전쟁을 수행한 군인들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결국 문제는 위정자들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