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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추억

이낙연 외 지음 | 메디치미디어
어머니의 추억



이낙연 외 지음

메디치미디어 / 2018년 5월 / 215쪽 / 12,000원





큰딸 연순이의 추억



어머니의 입술



2006년 1월이 어머니의 팔순이었습니다. 저희 7남매는 어머니의 팔순을 보내며, 어머니의 한없는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잊지 못할 소중한 선물을 해드리기로 했습니다. 바로 이 책입니다. 저는 글재주도 부족해 걱정부터 앞서지만, 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어머니의 모습을 회상해봅니다. 저는 이상하게도 어린 시절의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입술입니다. 그것도 예쁜 입술이 아닌, 다 헤지고 터져서 피가 나는, 계란의 속껍질처럼 하얗게 부풀어 오른 입술입니다.

50여 년 전, 제가 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는 남색 치마에 분홍 저고리를 입은 여성 한 분을 집에 데리고 오셨습니다. 지금 말로 표현하자면 그 분은 둘째 부인, 즉 작은 여자였습니다. 요즘 시대에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겠지만 저희 어머니는 그 작은 여자와 중매쟁이에게 따뜻한 밥을 지어 주셨습니다. 어머니는 그 날 밤부터 저와 동생들을 데리고 시어머님(저의 친할머니)과 방을 함께 쓰셨고, 아버지께서는 작은 여자와 한 방을 쓰셨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어머니는 아침 일찍 일어나 아버지와 온 가족을 위해 아침밥을 지으셨고, 제게는 아버지께 진지드시라 여쭈라며 심부름을 시키시곤 하셨습니다.

그때는 제가 너무 어리고 철이 없었나 봅니다. 저는 아버지의 방문을 열고 본 것을 어머니께 그대로 말씀드리곤 했습니다. “엄마! 작은 엄마가 아빠 팔 베고 잔다!” 하지만 어머니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고 그대로 밥상만 차리고 계셨습니다. 그 후로도 어머니는 변함없이 시어머니와 남편을 공경하며 작은 여자에게도 따뜻하게 대해주셨습니다. 어머니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작은 엄마는 얼마 지나지 않아, 더 이상 어머니께 죄를 지을 수 없다며 떠나셨습니다.

제가 좀 더 철이 들었을 때 어머니께 그 일에 대해 여쭈어 보았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추호의 미움도 없이 아버지께 한결같이 잘하실 수 있었느냐고. 그러자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자신이 있었다. 내게는 너희들이 있었으니까. 아버지가 언젠가는 돌아오실 것이다 믿으며 용기를 가졌다.”

어머니는 오히려 그 여자가 불쌍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남편 없이 혼자 사는 여자였는데, 좋은 ‘홀아비’가 있다는 중매쟁이의 말에 속아 시집을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도 덧붙이셨습니다. “너희 아버지는 전쟁통에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잃고, 다 키운 아들도 잃고, 속이 상해 허전함을 달래려고 그러셨던 게다. 너희는 아버지를 항상 존경해야 한다.” 하지만 여자로서의 어머니는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어머니의 다 터진 입술이 말해줍니다.

며느리가 나보다 행복하면 그만



저희 어머니는 농사철에 농사를 지으시며 틈나는 대로 열무와 배추, 들깨 등을 텃밭이나 콩밭, 깨밭 사이에 심으셨습니다. 그리고 매일 저녁에 그걸 뽑아다 손질하여 다음 날 새벽닭이 울면 광주리에 담아 5km 떨어진 시장에 내다 팔곤 하셨지요. 저도 몇 번 어머니를 따라 가보기도 했지만 그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잘 팔리면 다행이지만, 잘 팔리지 않는 날이면 집집마다 들러서 싸게 줄 테니 조금만이라도 사달라며 돌아다녀야 했습니다. 그냥 안 사면 그만인 것을, 어떤 사람들은 대놓고 문전박대를 하며 반말로 핀잔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저는 요즘도 할머니들이 길가에 야채를 펼쳐 놓고 파시는 모습을 보면, 어머니의 초라한 옛 모습을 떠올리곤 합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왕복 10km를 걸어 지친 모습으로 돌아오시다가도 자식들이 책가방 메고 학교 가는 모습만 보면 피로가 다 풀리고 힘이 나더라고 하셨습니다.

장사에서 돌아오신 어머니는 늦은 아침을 대충 드시고 곧장 논으로 밭으로 일을 하러 나가셨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모이면 저희 어머니더러 “그렇게 입지도 먹지도 않고 자식들 가르쳐 놓아봤자 남의 딸 좋은 일만 시키는 짓”이라며 흉을 보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얘기를 들으실 때마다 어머니는 “며느리가 나보다 낫게 살면 좋은 일 아니냐?”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래도 자식들에게는 “부모가 못나고 능력이 없어서 너희가 고생이 많다!”고 하시며 늘 미안해 하셨습니다.

저도 자식을 키우다 보니 조금은 어머니의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어머니의 마음을, 중심을 다 보셨나 봅니다. 어머니에게 착한 며느리도 주셨고, 각자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자식들도 주셨습니다. 맏이인 저는 어머니께 효도를 다하는 동생들을 보면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큰아들 낙연이의 추억



어머니는 초능력자?



가을농사를 마치면 어머니는 게를 잡으러 다니셨습니다. 이듬해 여름까지 가족들이 먹을 밑반찬을 장만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어머니가 그렇게 잡아서 만드신 간장게장은 맛이 기막혔습니다. 어머니는 새벽에 도시락을 두 개 만들어 머리에 이고 게를 잡으러 가셨습니다. 물론 모든 길을 걸어서 다니셨습니다. 어머니가 주로 다니신 곳은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 해변’이었습니다. 저희 집에서 6~7km 떨어진 곳입니다. 그러다가 백수 해변에 게가 없어지거나 하면, 어머니는 전라북도 고창군 ‘심원 해변’에까지 다니셨습니다. 당시에 저희들은 심원이 멀다는 것만 알았지, 얼마나 먼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가본 적도 없고, 누구에게 물어본 적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희 고향 주변에도 최근에는 도로가 정비되고 도로 표지판이 잘 세워졌습니다. 동생 하나가 어느 날 고향 인근의 도로 표지판을 보고 충격을 받았답니다. 도로 표지판에 적힌 거리를 따져보니, 저희 시골집에서 심원까지는 국도로 달려도 23km나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국도가 뚫리기 전에 어머니가 다니셨을 구불구불한 길로는 대체 몇 km나 됐을까요. 어머니는 그 길을 걸어서 가셨다가, 거의 얼어붙은 도시락으로 두 끼니를 잡수시고 게를 잡아 다시 걸어오셨다는 얘기입니다. 왕복 50km가 훨씬 넘었을 그 길을 말입니다. 어머니의 그 괴력이 저는 지금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며느리를 다루는 지혜



막내 남동생이 결혼한 직후 아버지의 기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모처럼 저희 4형제가 부부 동반으로 시골집에 모였습니다. 아버지 생전의 아픈 기억이 떠오르셨을까요? 갑자기 어머니는 며느리 넷에게 남자의 외도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람피우는 것, 천하에 못난 남자들이 그런 짓 한다. 내가 낳은 자식들 중에는 그런 못난 자식 없을 것이다.” 어머니는 먼저 이렇게 아들들에게 쐐기를 박았습니다. 그리고 며느리들에게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겪어보니 결국은 여자 못난 탓이더라. 내가 못나서 그런 것이지야. 느그들은 그런 일 당하지 말고 살아라.”

참으로 묘한 방법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아들들과 며느리들을 그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어디에서 그런 지혜가 나왔는지 저는 잘 알지 못합니다.

참기름 불



장남인 저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지극 정성’을 뛰어넘었습니다. 원래 제 위로 형이 두 분 있었는데 모두 어려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형들과 달리 제 누나는 어려서부터 건강했습니다. 아버지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 모양입니다. 딸은 건강하게 잘 자라는데 아들은 계속해서 죽는 것이 아버지는 영 싫으셨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외도가 시작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때에 제가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로서는 당신의 모든 것이 걸린 아들이었겠지요. 저에 대한 어머니의 정성이 커진 데에는 그런 영향도 꽤 있었을 것입니다.

어린 시절 제 생일이면 어머니는 작은 시루에 떡을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그 떡시루를 안방 윗목에 모셨습니다. 그리고 시루 속의 떡 위에 불을 켜고 한참씩 기도하셨습니다. 그 불은, 작은 종지에 참기름을 담고 실 심지를 넣어 붙인 것이었습니다. 불도 작고 예뻤지만, 냄새도 참 고소했습니다. 다른 형제자매의 생일에는 어머니가 그렇게 하지 않으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제 생일이면 어머니는 어김없이 시루떡 위에 참기름 불을 켜놓고 무언가를 비셨습니다.

어머니의 이중성(?)



저희 집 어른들은 술, 담배에 대해 묘한 태도를 지니고 계셨습니다. 몇 가지 에피소드를 적어보겠습니다.

저희 할머니는 큰손자인 저를 드러내놓고 편애하셨습니다. 제 동생들의 항의 따위는 할머니의 안중 에도 없었습니다. 저에 대한 할머니의 사랑이 이렇게 표현된 적도 있었습니다. 제가 중학교에 들어가자 할머니는 “너도 이제 담배 피워라” 하시며 제게 담배 한 갑을 주셨습니다. 제가 깜짝 놀라자 할머니는 “남자는 담배를 피워야 점잖아진다” 하시는 겁니다. 할머니의 ‘점잖다’는 말씀은 ‘어른스러워 보인다’는 뜻이었을 겁니다. 할머니는 제가 빨리 어른이 되는 걸 보고 싶으셨나 봅니다. 요즘의 눈으로 보면 빗나간 사랑일까요?

저희 아버지는 술을 몹시 즐기셨고 담배도 끊지 못하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날까지도 술을 드셨고 담배를 피우셨습니다. 아버지는 “담배는 백해무익이여, 느그들은 배우지 마라.” 하시면서도 당신은 끊지를 못하셨습니다. 제가 대학에 들어간 뒤에 시골집에 가면 아버지께서는 제가 자는 방에 담배 한 갑을 조용히 넣어주시곤 했습니다. 그런 아버지께서 하루는 제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술 담배 잘 끊는 놈들과는 깊게 사귀지 마라. 사람이 그렇게 독하면 배신도 할 것 아니냐.” 그러나 그 말씀은, 술과 담배를 끊지 못하시는 당신에 대한 자기변명이라는 것을 저는 그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대학생 때부터 담배를 피우기 시작해 마흔아홉에 끊었습니다. 그러나 술은 아직도 마시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기준에 따르면 저는 ‘절반쯤 독한 놈’인가요?

아버지의 과도한 음주에 어머니는 평생 질린 채 살아오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나는 느그들이 무엇을 하든 상관없다만, 술 먹는 것은 반대다” 하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어머니의 ‘이중성’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정치인이 되기 전 신문기자 시절에 저는 시골집에 가면 조금은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그럴 때면 어머니께서는 어디에선가 소주나 막걸리를 받아오셔서 제게 “한잔 할래?” 하고 물으시는 겁니다. 제가 “그것 어디서 나셨어요?” 하며 한 잔 마시면, 드디어 어머니는 본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술 많이 먹지 마라. 나는 네가 하는 것은 다 좋다마는, 술 먹는 것은 안 좋다.” 제가 술 마시는 게 싫다고 하시면서도 술을 권하시는, 그러면서도 술 많이 마시지 말라고 충고하시는 어머니의 마음은 무엇일까요?

저는 마마보이가 되고 싶습니다



삶이란 참 어렵고 외롭더군요. 살아갈수록 더욱 그렇게 느껴집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망설여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별한 까닭도 없이 마음이 그냥 휑한 때도 적지 않습니다. 요즘 제가 어머니를 자주 뵙는 진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어머니께 제 고민을 털어놓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외롭다거나 허전하다고 말씀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어머니께서 제게 이것저것을 가르쳐주시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말씀으로 저를 위로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어머니를 뵙는 것만으로 저는 위안을 받습니다. 어머니의 짧고 일상적인 말씀, 제게는 너무도 익숙한 어머니의 표정만으로 저는 격려를 받습니다. 어머니의 그런 격려와 위안이 좋아서 저는 어머니를 자주 뵙는 것입니다. 쉰을 훨씬 넘긴 제가 다시 어리광을 부리는 걸까요. 요즘엔 제가 어쩌면 ‘마마보이’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요즘 저는 차라리 마마보이가 되고 싶어졌습니다. 어머니께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졌습니다.

아버지와 제가 가장 어려운 국면에 처했을 때 가장 큰 영향을 주신 분은 바로 어머니였습니다. 그것은 어머니의 학식도 논리도 아닌 ‘심지’였습니다. 요즘도 저는 어머니를 뵐 때마다 어머니의 그런 심지를 느낍니다. 제가 어머니를 뵙는 것만으로 위안과 격려를 받는 것은 어머니께서 감추고 계신 심지를 느끼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 아버지는 일흔을 조금 넘기고 작고하셨습니다. 고향에서는 아버지가 평생 야당 외길을 걸으신 분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도 한 번은 흔들리셨다고 합니다. 어머니로부터 들은 얘기입니다.

아버지는 청년기와 중년기를 야당의 지방당원으로 지내셨습니다. 아버지는 어떤 야당 정치인을 도우셨지요. 그 정치인의 아드님이 정치를 이어받자 아버지는 다시 그 아드님을 도우셨습니다. 그러나 그 아드님은 전두환 정권 출범과 함께 야당을 떠나 여당인 민정당에 합류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께도 민정당에 함께 가자고 권유하셨던 모양입니다. 아버지도 흔들리셨다고 합니다. 그런 아버지에게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내가 당신을 만나 소박맞은 것도 참고, 시앗 본 것도 참았지만, 자식들을 지조 없는 사람의 자식으로 만드는 것은 아무래도 못 참겄소.” 그렇게 아버지의 여당행을 막으신 겁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말씀을 따르셨습니다.

운명은 묘한 것입니다. 제게도 비슷한 상황이 닥쳤습니다. 제가 대변인으로서 모셨던 노무현 대통령께서 민주당을 버리고 신당(열린우리당)에 동참하셨습니다. 그 무렵 노 대통령께서는 두세 번쯤 사람을 보내 저의 신당 동참을 권유하셨습니다. 장관직 얘기도 있었습니다. 저는 분당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고민했습니다, 2003년 민주당 분당 직후의 어느 날 아침이었습니다.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나다. 신당 가지 마라 잉!” 어머니는 그 말씀만 하시고 전화를 끊으셨습니다. 시골 노인들이 으레 그렇듯이, 어머니도 전화가 엄청나게 짧습니다. 전화요금이 무서워 당신 하실 말씀만 하시고, 상대편 말은 듣지도 않은 채 전화를 끊어버리시는 겁니다. 나중에 어머니를 뵙고 왜 그렇게 생각하셨는지를 여쭈어봤습니다. 어머니의 대답은 역시 짧았습니다. “사람이 그러면 못쓴다.”

저는 때때로 ‘어머니’라는 한 인간을 곰곰 생각해보곤 합니다. 아버지와 저는 어머니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두 남자일 것입니다. 두 남자 모두 여당에 갈 수도 있는 처지였습니다. 그런 두 남자에게 여당에 가지 말고 야당에 그대로 있으라고 권유하신 어머니의 판단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런 어머니께서 2006년 5.31 지방선거 직후에 제게 전화를 주셨습니다. 지방선거는 제게 좋지 않은 결과를 안겨주었습니다. 저는 이런저런 번민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것을 알아채셨을까요? 어머니는 민주당 분당 직후의 전화 이래 처음으로 제게 다시 전화를 거셨습니다. 어머니의 말씀은 단 한 마디였습니다. “길게 봐라.” 어머니께서 제게 전화를 거시는 것은 2~3년에 한번 꼴입니다. 그런 통화마저도 한 문장으로 끝내십니다. 농축이라고나 할까요. 2~3년에 한 문장 외의 말씀은 모두 증발 또는 풍화시키시는 모양입니다. 어머니의 그런 심지가 존경스럽습니다. 좀더 길게 설명해주시면 좋으련만, 어머니는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어머니를 뵙고 느끼는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제가 어머니를 자주 뵙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저는 마마보이가 되어 있습니다.



둘째 딸 금순이의 추억



친정 걱정



어머니는 맏이라서 그랬는지 늘 친정 걱정을 하셨다. 친정뿐 아니라 여섯 명의 동생들 집안은 물론 그 자손들까지 일일이 챙기시며 걱정하셨다. 외조부와 외조모가 돌아가신 후에는, 이후 3년 동안 초하루보름만 되면 삭망을 지내신다며 꼭두새벽에 그 먼 길(약 3km)을 걸어서 다녀오시곤 했다. 체격도 왜소하신 분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셨는지……. 전등불도 없는 캄캄한 시골길이 무섭지도 않으신지. 험한 산길인 데다 하필이면 공동묘지를 지나야 갈 수 있는 길이었다. 우리가 잠자는 사이에 어머니는 그 먼 길을 혼자 다녀오곤 하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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