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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류시화 지음 | 더숲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류시화 지음

더숲 / 2019년 03월 / 256쪽 / 15,000원



1



새는 날아서 어디로 가게 될지 몰라도

한 여성이 남편을 잃고 딸과 함께 살았다. 딸은 성년이 되었지만 아직 직장을 구하지 못했고, 그녀 자신도 건강이 좋지 않아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소유한 물건들을 하나씩 팔아 생계를 이어 나갔다. 마침내는 가장 소중히 여기는 남편 집안 대대로 물려 내려온 사파이어 보석 박힌 금목걸이마저 팔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여성은 딸에게 목걸이를 주며 그 도시에서 가장 뛰어난 어느 보석상에게 가서 팔아 오라고 일렀다.

딸이 목걸이를 가져가 보여 주자 그 보석상은 세밀히 감정한 후 그것을 팔려는 이유를 물었다. 처녀가 어려운 가정 사정을 이야기하자 그는 말했다. “지금은 금값이 내려갔으니 팔지 않는 것이 좋다. 나중에 팔면 더 이익이다.” 그런 다음 보석상은 처녀에게 약간의 돈을 빌려주며 당분간 그 돈으로 생활하라고 일렀다. 그리고 가능하면 내일부터 보석 가게에 출근해 자신의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면 어느 정도 생계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래서 처녀는 보석 가게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녀에게 맡겨진 임무는 보석 감정을 보조하는 일이었다. 그녀는 뜻밖에도 그 일이 자신의 적성에 맞는다는 것을 발견했고, 빠르게 일을 배워 얼마 안 가서 훌륭한 보석 감정가가 되었다. 그녀의 실력과 정직성이 소문나 금이나 보석 감정이 필요한 사람들이 멀리서도 그녀를 찾아왔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보석상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하루는 보석상이 처녀에게 말했다. “알다시피 지금 금값이 많이 올랐으니 어머니에게 말해서 그 사파이어 금목걸이를 가져오너라. 지금이 그것을 팔 적기이다.” 그녀는 집으로 가서 어머니에게 목걸이를 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보석상에게 가져가기 전에 이번에는 자신이 직접 그것을 감정했다. 그런데 그 금목걸이는 순금이 아니라 도금한 것이었다. 가운데에 박힌 사파이어 보석도 미세하게 균열이 간 저급한 등급에 불과했다.

이튿날 보석상이 왜 목걸이를 가져오지 않았느냐고 묻자 처녀는 말했다. “굳이 가져올 필요가 없었어요. 배운 대로 감정해 보니 전혀 값어치 없는 목걸이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어요.” 그러면서 그녀는 보석상에게 목걸이의 품질을 처음부터 분명히 알았을 텐데 왜 진작 말해 주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보석상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만약 내가 그때 말해 줬다면 내 말을 믿었겠느냐? 아마도 너 와 네 어머니의 절박한 상황을 이용해 내가 값을 덜 쳐주려 한다고 의심했을 것이다. 혹은 헛된 희망을 품고 더 좋은 값에 목걸이를 팔려고 보석상들을 돌아다니거나 절망해서 살아갈 의지를 잃었을 것이다. 내가 그때 진실을 말해 준다고 해서 우리가 무엇을 얻었겠느냐? 아마도 네가 보석 감정가가 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너는 보석에 대한 전문 지식을 익혔고, 나는 너의 신뢰를 얻었다.”

경험을 통해 스스로 가짜와 진짜를 알아보는 눈을 갖는 일은 어떤 조언보다 값지다.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자신의 판단력을 갖게 된 사람은 남을 의심하거나 절망하느라 삶을 낭비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길을 갈 뿐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그 길에 이르는 과정을 섣부른 충고나 설익은 지혜로 가로막지 말아야 한다. 경험하지 않고 얻은 해답은 펼쳐지지 않은 날개와 같다. 삶의 문제는 삶으로 풀어야 한다. 삶은 설명을 듣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다. 경험은 우리 안의 불순물을 태워 버린다. 새는 날아서 어디로 가게 될지 몰라도 나는 법을 배운다는 말을 나는 좋아한다.

살아 있는 것은 아프다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은 당신이 알지 못하는 상처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서로에게 친절해야 한다.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누구나 저마다의 방식으로 삶을 여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르두어를 사용하는 파키스탄과 인도 무슬림 문화권에서는 상대방에게 인사를 할 때 “캬 할 헤?”라고 묻는다. ‘지금 너의 가슴은 어떤 상태인가?’라고 안부를 묻는 것이다. 얼마나 많이 벌고, 얼마나 일이 많고, 얼마나 넉넉한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 존재가 다른 인간 존재에게 ‘지금 너의 가슴에 기쁨이 있는가? 너의 영혼에 생기가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북인도 바라나시의 뒷골목에 내가 종종 가는 찻집이 있다. 작고 허름하지만 짜이 맛이 좋아서 현지인뿐 아니라 외국 여행자들도 북적인다. 두 살 터울의 형제가 운영하는데, 그림 실력이 뛰어난 동생은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어느 날 아침, 찻집 안쪽 나무 걸상에 앉아 지역 신문에 난 음악회 일정을 살펴보고 있는데 한 인도인 남자가 가게 앞에 나타났다. 얼핏 보기에도 짜이를 마시러 온 것은 아닌 듯했다. 허름한 차림의 남자는 턱이 진 입구로 올라올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길에 서서 찻집 안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구걸을 하러 온 것도 아닌 듯했다. 사람들은 그를 정신이상자쯤으로 여기는 분위기였다. 아침마다 그 찻집에 들르는 웬만한 사람들을 알고 있는 나로서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렇게 남자는 일주일이 넘도록 매일 8시 무렵 찻집 앞에 나타나 좁은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과 이리저리 부딪치면서 우두커니 찻집 안을 바라보았다. 배고픈 표정 같기도 하고, 초점이 없지만 뭔가 갈구하는 눈동자였다. 마침내 내가 신문을 접고 남자에게 다가가 “캬 할 헤!” 하고 인사를 하자 그도 “캬 할 헤!” 하고 반응을 보였다. 내가 힌디어로 이름을 물으며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니까 뜻밖에 그는 영어로 대답했다. 어느 정도는 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동네 주민이 아니라 도시의 다른 지역에서 흘러온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게 짜이 한 잔을 건네며 날마다 그곳에 오는 이유를 물었다. 뜨거운 유리잔을 때 묻은 손으로 감싸고서 남자는 턱으로 찻집 안을 가리켜 보였다. 내가 어리둥절해 하자 그는 손가락으로 찻집 안 맞은편 벽을 가리켰다. 그제야 나는 그곳에 걸린 그림을 보게 되었다. 작은 액자에 담긴 그림이었다. 여러 번 그곳을 들른 나도 눈여겨본 적 없는 찻집 주인의 동생이 그린 평범한 작품이었다. 그림 속에는 사리를 입은 여인이 두 팔로 갓난아이를 공중에 들어 올리며 사랑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림을 응시하는 남자의 눈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초점 없는 눈처럼 보였던 것은 그 물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짜이를 마실 생각도 하지 않고 자신에게도 그림 속 여인과 같은 아내와 아이가 있었다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내와 아이가 일 년 전 자동차 사고로 죽은 충격으로 그는 떠돌며 살아갔고, 그러다가 우연히 찻집에 걸린 그 그림을 발견하고는 날마다 그곳에 와서 몇 시간이고 물기 맺힌 눈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자신의 아내가 아이를 공중으로 들어 올리며 행복하게 쳐다보는 모습을……. 살아 있는 것은 아프다. 고통은 한계를 넘을 때 스스로 치유제가 된다고 하는데, 그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어쩌면 우리는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이 아니라 다만 신에게 의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듬해 다시 갔을 때는 며칠을 기다려도 남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찻집 형제와 단골손님들에게 물어도 행방을 모른다는 대답뿐이었다. 그 그림만 변함없이 벽에 걸려 있었다. 내 인도인 친구 산자이가 즐겨 부르는 영화 주제곡에 이런 가사가 있다. “두니아 메 키트나 감 해 메라 감 키트나 캄 헤.” ‘세상에 슬픔은 얼마나 많은가. 내 슬픔은 얼마나 작은가’라는 뜻이다. 다른 사람들의 슬픔을 알고 나면 나의 슬픔이 작게 느껴진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곡식의 여신 데메테르는 딸 페르세포네가 지하의 신에게 납치당하자 상심한 나머지 곡물을 자라게 하는 임무를 더 이상 수행하지 않고 울기만 한다. 그래서 온 대지에 기근이 퍼진다. 인도 신화의 라마신도 아내와 헤어지자 견디지 못하고 오열한다. 이 세상 누구도, 신들조차 슬픔과 고난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음을 알 때 우리는 자신의 행복과 불행에 크게 동요되지 않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태풍이 멈췄는데도 계속 흔들리는 나무처럼 된다.



2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장차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중에 친구가 모 언론사의 입사 지원서를 구해 왔다. 그는 함께 지원하자며 내게도 한 장 내밀었다. 잘하면 외국 특파원으로 나갈 수도 있다는 친구의 말이 결정적이었다. 우리는 운이 좋으면 히말라야로 취재를 떠나 성자나 외계인과 인터뷰하는 특종을 터뜨릴 수 있을지 모른다고 농담을 하며 열심히 지원서를 작성했다. 필기시험은 열흘 뒤였다. 어떤 과목이든 자신 있다고 큰소리치면서 밤새워 예상문제집을 풀었다.

드디어 시험일인 일요일, 설레는 가슴을 안고 아침 일찍 시험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시험장소인 학교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시험 장소를 가리키는 화살표 방향 을 따라 강의실로 가니 텅 비어 있었다. 정문으로 다시 가서 수위 아저씨에게 물었더니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며, 시험은 “오늘이 아니라 어제”였다고 했다. 날짜를 착각한 것이다! 망연자실 서 있다가 학교 앞 골짜기에 있는 국밥 집으로 가서 아침부터 혼자 술을 마셨다. 사회에 편입될 수 없는 천형을 받은 자신을 한탄하며.

인생이 첫 구간부터 막혔다는 불길한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날 정릉에서 종로까지 비틀거리며 걸어와 조계사 법당에서 부처님께 절하는 척 엎드려 잠이 들며 나는 생각했다. 이것은 다른 인생을 살라는 하나의 계시라고, 세상 속에서 살되 세상에 소속되지는 말자고. 그렇게 시험 날짜를 착각해 외계인과의 인터뷰는 물거품이 되었지만 훗날 히말라야 여행은 농담처럼 현실이 되었다. 만약 우리가 전체 그림을 볼 수 있다면, 전체 이야기를 안다면 지금의 막힌 길이 언젠가는 선물이 되어 돌아오리라는 것을 알게 될까? 그것이 삶의 비밀이라는 것을.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은 지나간 길이 아니라 지금 다가오는 길이다.

한 남자가 큰 회사의 사환직에 지원했다. 면접관이 그에게 사무실 바닥을 청소해 보라고 했다. 그의 청소하는 태도를 만족스럽게 지켜본 면접관이 말했다. “당신을 채용하겠소. 고용계약서와 근무 조건 등 세부 사항을 보내 줄 테니 당신의 이메일 주소를 주시오.” 남자가 말했다. “저는 컴퓨터도 없고 이메일도 없습니다.” 그러자 면접관이 말했다. “이메일이 없다면 당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요. 미안하지만 우리 회사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고용할 순 없소.”

남자는 희망을 잃고 그곳을 떠났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주머니에는 단돈 10달러가 전부였다. 고민하던 그는 과일 도매상에 가서 10달러짜리 토마토 한 상자를 샀다. 그리고 집집마다 다니며 그 토마토를 팔았다. 두 시간도 안 돼 그는 전 재산을 두 배로 만들 수 있었다. 같은 날 그 일을 세 차례 반복한 결과 그는 80달러를 주머니에 넣고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남자는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날마다 토마토를 팔았다. 매일 그의 재산은 두 배 혹은 세 배 늘었다. 얼마 후에는 수레를 사고, 또 얼마 후에는 트럭을 샀다. 곧이어 여러 대의 배달 트럭을 구입했다. 5년 후 이 남자는 매우 큰 규모의 식품 도매업체 사장이 되었다.

성공한 남자는 가족의 미래를 위해 보험을 들기로 결정했다. 상담을 마칠 무렵 보험사 직원이 그의 이메일 주소를 물었다. 그러자 남자는 대답했다. “나는 이메일이 없소.” 보험사 직원이 놀라며 말했다. “이메일도 없는데 이렇게까지 성공하셨군요. 만약 이메일이 있었다면 지금쯤 무엇이 되어 있을지 상상이나 하실 수 있겠습니까?” 남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아마도 사환으로 일하고 있겠지요.”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삶의 여정에서 막힌 길은 하나의 계시이다. 길이 막히는 것은 내면에서 그 길을 진정으로 원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존재는 그런 식으로 자신을 드러내곤 한다. 삶이 때로 우리의 계획과는 다른 길로 우리를 데려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길이 바로 우리 가슴이 원하는 길이다. 파도는 그냥 치지 않는다. 어떤 파도는 축복이다. 머리로는 이 방식을 이해할 수 없으나 가슴은 안다.



3



아무도 보지 않을 때의 나

‘나는 누구인가’를 가장 잘 말해 주는 것은 나의 주의나 주장이 아니라 내가 은연중에 행하는 행동 혹은 혼자 있을 때 하는 행위이다. 영혼과 의식의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나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행하는 작고 사소한 행동들이 내 몸의 리듬을 결정하고, 마음의 세계를 드러내 보이며, 의식을 특정한 차원과 연결시킨다. 어떤 사람을 만날 때 마음이 열리는 순간이 있다. 나의 감각과 느낌 혹은 삶에서 경험하는 기쁨이나 두려움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사람과는 나눌 수 있을 것만 같다. 그 자발적인 열림이 폭풍에 길 잃은 새 같던 우리를 연결시켜 주며, 그때 세상과의 거리도 가까워진다. 삶이라는 여행의 한 구간을 그런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은 행운이다.

심리학자 밀턴 에릭슨이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책을 팔러 다닐 때의 일이다. 하루는 농가에 가서 어느 농부에게 책을 권하자 농부는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난 아무것도 읽지 않고, 아무것도 읽을 필요가 없어, 난 단지 우리 돼지들한테만 관심이 있을 뿐이야.”라고 말했다. 에릭슨은 “돼지를 먹이시는 동안 잠깐 옆에 서서 말씀을 나눠도 될까요?”하고 묻고는 책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무심결에 땅바닥에서 납작한 돌멩이 하나를 주워 돼지 등을 긁어 주었다. 에릭슨 자신도 어린 시절을 농장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그러자 농부가 하던 일을 멈추고 말했다. “자네는 돼지를 좋아하는군. 돼지들이 원하는 대로 등을 긁어줄 줄 아는 사람이라면 나도 그 사람에 대해 알고 싶네. 오늘 저녁 식사는 나와 함께 먹고 우리 집에서 하룻밤 묵고 가면 어떻겠나? 책은 내가 사 주겠네.”

농부의 마음이 에릭슨의 무의식적인 행동에 반응한 것이다. 사실 우리는 날마다 본성 차원에서 타인과 접촉하고 있다. 우리 마음을 둘러싼 장벽이 그 접촉을 가로막은 것처럼 느낄지라도 우리는 늘 그 순수한 차원을 품은 채 타인을 만나고 서로를 알아차린다.

미국 시인 마야 안젤루는 이렇게 썼다. “사람들은 당신이 한 말과 당신이 한 행동은 잊지만 당신이 그들에게 어떻게 느끼게 했는가는 잊지 않는다.” 나 자신이 실제로 누구인가는 감추거나 꾸미는 것이 불가능하다. 나는 부지불식간에 그것을 드러내며, 내가 주장하는 사상이나 철학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행동이 나에 대해 가장 잘 말해 준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을 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고 어떤 사람인가? 그것이 가장 진실된 나의 모습에 가깝다.

신은 우리의 말을 들음으로써가 아니라 행위를 봄으로써 우리를 신뢰한다. 내가 설명하지 않는 것을 내 삶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에서는 ‘코람 데오’를 이야기한다. 즉 ‘신 앞에 선 단독자인 너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이다. 신 앞에서는 어떤 가면으로도 본연의 모습을 숨길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 날 코끼리와 개미가 숨바꼭질 놀이를 했다. 처음에는 개미가 술래가 되어 코끼리가 숨었는데, 몸집이 커서 금방 발각되었다. 이번에는 코끼리가 술래가 되자 개미는 코끼리가 들어올 수 없게 작은 사원 안으로 들어가 숨었다. 하지만 코끼리는 쉽게 개미가 숨은 곳을 찾아낼 수 있었다. 개미가 평소의 행동대로 신발을 벗어 놓고 사원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내 영혼, 안녕한가

여행 갈 때 책을 들고 가지 않는 편이다. 제상이 곧 책이라서가 아니라 여행지의 책방에 들르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지난번 여행 때 델리 칸마켓의 서점에서 산 토머스 무어의 『영혼의 돌봄』은 여행 내내 좋은 독서가 되었다. 안개 때문에 열네 시간 연착한 기차를 기다리는 대합실에서 그 책을 읽은 것 자체가 나에게는 영혼의 돌봄이었다. ‘영혼의 돌봄’은 말 그대로 영혼을 보살피는 것이다. 몸을 위해 좋은 음식을 먹고 규칙적인 운동을 하듯이 자기 영혼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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