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가 뭐라고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글쓰기가 뭐라고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18년 11월 / 224쪽 / 13,000원
제1장 마음에 대하여
작가들이 말하는 ‘글쓰기 고통’에 속지 마라
“글쓰기는 마조히즘이다. 모든 다른 범죄처럼 처벌받아야 하는, 자신을 향한 범죄다.” 프랑스 소설가 시도니 콜레트가 ‘글쓰기의 고통’과 관련해 한 말이다. 이렇듯 전문 작가들은 ‘글쓰기의 고통’에 대해 격렬한 언어로 말하며, 고통을 묘사하는 것도 드라마틱하다. 하지만 이런 발칙한 의문을 갖는 사람들도 있을 법하다. 어떤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건 그 정도의 고통은 있는 게 아닐까? 창작의 고통이 아무리 심하다 한들, 조직에서 생존을 위해 비굴해져야 하는 직장인의 고통보다 심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게다가 문인들의 고통은 강요당한 것이라기보다 자발적으로 택한 것임에도 그렇게 고통스럽다고 외쳐대도 되는 걸까?
폴 오스터는 글쓰기의 고통을 말하면서 글쓰기를 누구에게도 권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글을 쓰는 게 너무 행복하단다. 오스터만 그러는 게 아니다. 글쓰기의 고통을 말하는 문인들이 모두 그런 식이다. 글 쓰는 게 행복해 죽겠다면서도 동시에 너무도 고통스럽다고 아우성쳐대니 이걸 어찌 이해해야 할까? “밑지면서 판다”고 주장하면서도 많이 팔릴수록 좋아하는 상인과 무엇이 다를까?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글쓰기의 고통을 발설하는 건 문인들의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인간은 이야기 없인 살 수 없는 ‘호모 픽투스(Homo fictus)’, 즉 ‘이야기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각 직업마다 나름의 특권은 있기 마련이다. 나는 작가들의 그런 특권을 인정하면서도 ‘글쓰기의 고통’ 담론이 유발하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에 주목한다. 소설가 장정일은 “특정 장르의 문학이 글쓰기의 피라미드 가장 높은 꼭대기에 좌정하고 있으면서 그 외의 글쓰기를 억압하는 사회”를 비판한다. “문학이 너무 강한 사회는 온갖 사회적 의제와 다양한 글감을 문학이란 대롱으로 탈수해버린다”는 이유에서다. 장정일은 이른바 ‘문학적 글쓰기 패권주의’ 현상을 고발한 셈이다. 나는 문학 문외한으로서 문학이 글쓰기의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에 아무런 불만이 없다. 다만 문학에 경외감을 갖고 있는 보통 사람들이 논픽션 글쓰기를 하면서도 글쓰기의 준거점을 자꾸 문학으로 삼는 것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을 뿐이다. 그로 인해 글쓰기에 자신이 없는 보통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내 주변에서 그런 학생을 많이 보았다. 시사적인 문제나 신변잡기라도 좋으니 A4 용지 1~2장 분량으로 글을 써보라는 요청에도 손사래를 치는 학생이 많다. 자신이 무슨 정상급 문인이라도 된 것처럼 글쓰기의 어려움을 큰 고통이나 되는 것처럼 과장해 말하는 경향이 있더라는 것이다. 이처럼 글쓰기의 고통을 느껴보기도 전에 그 고통을 말하는 이유는 문인들이 말하는 ‘글쓰기의 고통’이 적잖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내 답은 한결같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가 찢어진다.” 뱁새가 준거집단을 황새로 두면 불행해진다. 그래선 안 된다. 작가들이 말하는 ‘글쓰기 고통’에 속아 넘어가 자신이 글쓰기를 피하는 이유의 면죄부로 삼지 말라는 것이다.
전문적인 문인과 보통 사람은 무엇보다도 글을 쓰는 이유가 다르다. 문인들이 글을 쓰는 이유를 밝힌 걸 보면 마치 온 우주를 책임지려는 듯한 기개가 엿보인다. 그래서 그들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누가 보통 사람에게 그런 요구를 했단 말인가? 일반 대중은 작가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기 마련이고, 작가는 그런 수요에 부응해야 한다. 그러나 누가 평범한 당신에게 그런 환상을 갖고 있단 말인가? 우리 모두 어깨에 힘을 빼고 가볍게 접근하자. 그러면 글쓰기가 즐거워진다. 『치유하는 글쓰기』의 저자인 박미라는 “글을 잘 쓰려면 ~해야 한다”는 원칙이나 원리를 버리고서야 비로소 글 쓰는 일이 행복해졌다고 말한다. 당신이 글쓰기 능력에서 평범한 중하층에 속하는 사람이라면 문인들의 ‘글쓰기 고통’과 더불어 문학적 글쓰기를 표준으로 삼은 글쓰기 원칙은 당신과는 거리가 먼 상류층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 자세를 갖고 아무리 힘을 빼도 글쓰기가 여전히 고통스럽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글쓰기에 임하는 자신의 자세를 살펴볼 일이다. 혹 일반적인 글쓰기에서조차 창작자가 되려는 과욕을 부리는 건 아닌가? 나는 ‘창작자’가 아닌 ‘편집자’의 자세를 가지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윤리적인 편집자다. 보통 사람들이 느끼는 글쓰기의 고통은 과욕에서 비롯된다. 처음부터 자신이 모든 걸 다 만들어내겠다니, 그 얼마나 무모한 욕심인가. 중요한 것은 ‘창조는 편집’이라는 것을 흔쾌히 인정하는 마음이다. 여기에서 내 메시지는 간단하다. “작가들이 말하는 ‘글쓰기 고통’에 속지 마라. 스스로 자기 자신을 속이지도 마라. 눈높이를 낮추면 ‘글쓰기의 고통’은 ‘글쓰기의 즐거움’이 된다.”
글쓰기의 최상은 잘 베끼는 것이다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 화가 파블로 피카소의 말이다. “어디서 가져왔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디로 가져가느냐가 중요하다.” 프랑스 영화감독 장뤼크 고다르의 말이다. "독창성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의 아이디어 도둑질을 숨기려고 애쓰지 마라. 오히려 축하하고 장려하라.” 영국 광고업계의 전설로 통하는 폴 아든의 말이다. 이 세 주장에 동의하시는가? 글쓰기를 그런 식으로 해도 괜찮단 말인가? 이런 의문이 드는 독자라면 숭실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남정욱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보는 게 좋겠다. “글쓰기의 최상은 잘 베끼는 것이다.” 나는 남정욱의 이 주장에 전폭적으로 동의한다.
남정욱은 오로지 자신의 통찰만으로 세상을 표현하고 싶다는 욕심은 ‘무식한 생각’이라고 단언한다. 나는 동시에 ‘유치한 생각’이거나 ‘위선적인 생각’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의외로 이런 ‘무식하고 유치하고 위선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 아주 많다. 이게 보통 사람들의 글쓰기를 어렵게 만드는 이유 중의 하나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남정욱은 “현재의 소생이 생각하는 글쓰기의 최상은 독창이 아니라 잘 ‘베끼는’ 것이다. 독창을 추구했더니 독(毒)과 창(槍)으로 돌아와 욕창이 생기도록 고생한 끝에 얻은 소중한 결과물이다”라며 베끼기의 주요 방법으로 잘 ‘엮는’ 것을 추천한다. “내 ‘영업 비밀’을 하나 털어놓자면 원고 청탁이 들어오면 나는 일단 블로그와 카페를 검색한다. 열 개 정도면 청탁받은 소재에 관한 거의 모든 ‘정보’가 잡힌다. 소생이 하는 일은 이걸 죄 퍼온 다음에 중복과 근거 희박을 걷어내고 인물이나 사건 하나를 주인공 삼아 흐름을 재배치한 후 내 말투로 바꾸는 것이다. 딱 그게 전부로 짧으면 한나절, 길어야 사흘이다.”
남정욱의 이런 작업을 쉽게 생각하면 큰 오해다. 남의 글에서 중복과 근거 희박을 걷어내고 흐름을 재배치한 후 자신의 말투로 바꾸는 것은 고도의 기량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방식이 좋은 것은 ‘독창’을 부르짖다가 결국 글쓰기를 포기하는 일은 없다는 점이다. 기량과 노력의 차이에 따라 글의 품질이 크게 달라지지만, 일단 글의 완성은 가능해진다는 장점이 있다. 물론 표절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므로 절대 안 된다. 어디까지가 표절이고 어디까지가 표절이 아닌가 하는 것은 검색을 해서 관련 글을 읽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대통령의 글쓰기』의 저자인 강원국 역시 “당당하게 모방하자”고 말한다. 무조건 모방이 아니다. 당당한 모방이다. 글쓰기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독창성의 게임’이라기보다는 ‘기억력의 게임’이다. 그리고 얼마나 많이 읽었느냐의 게임이다. 많이 읽고 기억력이 좋을수록 머리에 든 게 많을 테니 그만큼 글쓰기도 쉬워진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우리는 독창성의 가치를 매우 높게 평가하는, 묘한 게임을 한다. 창조의 주역은 단 한 사람이라는, 그리고 그 사람의 아이디어는 완전히 독창적인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가리켜 ‘독창성 신화’라고 하는데, 이는 헛된 욕망에 불과하다. 이미 자신의 머릿속에 입력된, 수많은 책에서 얻은 정보와 지식과 생각이 자신의 것이란 말인가? 참고문헌을 보지 않고 기억력에 의존해 그런 정보와 지식과 생각을 자신의 언어로 풀어낸다고 해서 독창성을 주장할 수 있는 걸까? 그러다간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를 자기 것으로 착각하는 ‘절도 망각증’에 사로잡히기 쉽다. 부디 글쓰기의 최상은 잘 베끼는 것이라는 점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뭐 어때?” 하면서 뻔뻔해져라
“글쓰기 재능을 연마하기 전에 뻔뻔함을 기르라고 말하고 싶다.” 『앵무새 죽이기』를 쓴 하퍼 리의 말이다. 나는 평소 학생들에게 “겸손하면서 오만하고 오만하면서 겸손하라”고 말해왔는데, 이젠 이렇게 말하련다. “ ‘뭐 어때?’ 하면서 뻔뻔해져라!” 전문 작가에겐 부정적 비평을 이겨내는 게 중요하겠지만, 글쓰기 초심자에겐 자기 내면에서 스스로 하는 부정적 비평을 넘어서는 게 중요하다. 전문 작가건 초심자건, 나는 뻔뻔함의 ‘미덕’을 ‘자기효능감(self-efficacy)’의 관점에서 이해한다. 자기효능감은 자신이 변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걸 말한다. 자신의 글쓰기 능력에 대한 신념이 높은 학생일수록, 글 쓰는 것을 덜 걱정하고, 그러한 기술들이 개인적 성취에 유용하다고 여기며, 글쓰기에서 더 나은 수행을 한다.
전문 작가에게 자기효능감의 원천은 판매 부수다. 물론 비평가들의 호평까지 얻는다면 더욱 좋겠지만, 양의 문제일 뿐 악평을 받는 건 피할 수 없는 작가의 숙명이다. 책이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 베스트셀러가 된다면, 그 어떤 악평에도 내심 “개는 짖어도 기차는 간다”는 심적 평온을 누릴 수 있다. 초심자에게 자기효능감의 원천은 ‘작은 성공’이다. 목표를 낮춰 잡고 글의 발표를 작은 곳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좋다. 나중에 높고 큰 목표로 가기 위해서라도 처음엔 낮고 작은 목표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효능감은 막연한 자신감이 아니라 근거 있는 자신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누군가의 뻔뻔함을 비판하는 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기효능감을 느끼기 위해 그런 정도의 ‘뻔뻔함’을 갖는 게 도대체 누구에게 피해를 주며 왜 문제가 된단 말인가?
스티븐 기즈는 그의 저서 『습관의 재발견: 기적 같은 변화를 불러오는 작은 습관의 힘』에서 작은 시작이 얼마나 중요한지 밝히고 있다. 그는 지인으로부터 하루 30분 운동이 쉽지 않으니, 팔굽혀펴기 운동을 더도 덜도 말고 ‘딱 한 번만 하라’는 조언을 들었다. 그는 처음에 이 말을 듣고 비웃었다가 실제로 딱 한 번 해보고 나서, 이후 이런 결론을 내렸다. “그것이 내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었다.” 기즈는 한 번 하는데도 어깨에서 우두둑 하는 소리가 났고, 팔꿈치에 윤활유라도 칠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이왕 자세를 취한 김에 몇 번을 더 했고, “좋아, 한 번 더. 좋아, 두 번만 더. 자, 다시 한 번 더!”라는 식으로 잘게 나눈 목표를 세웠더니 달라지더라는 것이다. 그는 나쁜 습관을 끊는 것보다 좋은 습관을 기르는 게 쉽다며, 작은 습관 시스템은 적용이 쉽고 마음가짐을 긍정적으로 바꿔주는 강점이 있다고 역설한다. 이걸 글쓰기에 적용해 ‘매일 2~3줄 쓰기’로 접근하라는 조언도 빠트리지 않는다.
어떤가? 그의 말처럼 시도해본다고 밑질 건 없잖은가. ‘매일 2~3줄 쓰기’가 힘들다면 ‘매일 1줄 쓰기’는 어떤가? 그렇게 해서 글쓰기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면, 글에 담을 내용을 전개하는 데도 뻔뻔함이 필요하다. 나는 학생들에게 종종2006년 독일월드 컵 때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코치 홍명보가 후배들에게 한 말을 들려준다. “우리 선수들이 건방져졌으면 한다.” 그동안 해외에서 치러진 월드컵에서 한국 선수들이 상대팀 선수들의 눈빛이나 표정에 주눅 들어 제 기량을 다 펼쳐보지도 못하고 좌절을 겪었던 쓰라린 경험담에서 나온 조언이었다. 잘난 척해도 될 만한 능력을 갖고 있음에도 글을 너무 겸손하게 쓰는 학생이 많다. 무난하고 깔끔하게 쓴 글이지만, 참신성이 없고 도발적인 새로움도 없어 속된 말로 ‘안전빵’이라는 느낌을 준다. 이 정도론 약하다. 글쓰기를 할 때엔 겸손하면서 오만하고, 오만하면서 겸손할 필요가 있다. 글에서 무언가를 보여주겠다는 욕심을 내는 일에선 오만이 필요하며, 그런 욕심이 드러나지 않게끔 차분하게 논지를 펴 나가는 일에선 겸손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너무 겸손한 나머지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시점에서 글이 끝나는 경우가 많다. 처음부터 바짝 긴장해 압축적으로 할 말 다 해야겠다는 ‘공격성’이 모자라다. 결론도 ‘그날이 오길 바란다’,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꿈꿔보자’ 등으로 끝나는 건 너무 약하다. 이는 세미나에서 상습적으로 나타나는 ‘막판에 낙관주의자 되기’ 와 유사하다. 세미나 내내 어떤 주제에 대해 문제를 지적하고 현실적인 어려움을 토로해놓고 막판엔 ‘할 수 있다’로 돌아서는 낙관주의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물론 그건 ‘잘해보자’는 의지를 다지는 취지로도 볼 수 있겠지만, 많은 경우 냉정한 현실 인식을 방해할 수도 있는 것이다.
글에 전반적으로 ‘당위’가 너무 많고 ‘어떻게’가 빈약한 것도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스스로 문제점을 제기하면서 방안을 제시해보는 적극성이 아쉽다는 것이다. ‘당위’의 역설보다는 ‘어떻게’를 말하는 것이 값지다는 걸 잊지 말자. 부자도 아니면서 부자 몸 사리듯 하지 말고 욕심을 좀 내는 게 좋다. 내 글이 변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도록 하자. 아니면 어떤가? 다시 말하지만, “뭐 어때?” 하면서 뻔뻔해진다고 해서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잖은가.
제2장 태도에 대하여
글의 전체 그림을 미리 한 번 그려보라
집을 지으려면 설계도가 필요하듯, 글을 쓰기 전에 글의 주제에 대한 전체 그림을 미리 한 번 그려보자. 정교한 설계도를 요구하는 건 아니기에, 그저 밑그림이라고 해도 좋겠다. 일단 총론을 세워놓고 각론으로 들어가자는 뜻이기도 하다. 대체로 많은 학생들이 주제 전체보다는 어느 한 부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주제에 대해 잘 몰라서 그렇다기보다는 아예 처음부터 주제 전체의 모습을 요리해보겠다는 마인드가 없기 때문이다.
글쓰기에 돌입하기 전에 논점을 확실히 하는 건 물론 논리 전개 방식까지 미리 머릿속에 정리해두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써나가다 보면 나중에 논점을 잃고 갈팡질팡하게 된다. 평가를 받아야 하는 학생의 처지에선 중요도에 따른 지면 배분을 미리 해보는 것도 필요하다. 당신은 제한된 지면과 시간에 얽매인 처지다. 결코 한가롭지 않다. 중요한 건 부각해야 한다. 이는 글의 총체성과 포괄성을 배려하면서도 특별히 ‘악센트’를 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걸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한 학생은 200자 원고지 5매도 안 되는 분량의 글에서 “한일 양국에 대한 관계와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과거의 한일 관계와 현실 진단을 하고, 앞으로 전망을 해보고자 한다”고 말했다. 고려대학교 교수 이남호는 “원고지 3분의 1을 이런 ‘낭비성 문장’으로 채우는 수험생도 있는데, 이는 자신의 글쓰기 실력과 사고력이 부족하다는 걸 드러내는 일이다”라고 말한다. 지나치게 자상한 성격이거나 완벽주의 기질 때문이기도 하지만 혹 채점관이 모를까봐 불안해 그런 불필요한 설명을 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지면은 좁고 해야 할 말은 많다. 이러한 자기 설명은 없애거나 예컨대, “우선 그간의 한일 관계부터 살펴보자”라는 식으로 소화해야 한다.
지면은 좁고 해야 할 말은 많으므로 서론, 본론, 결론 지면 할애에 균형을 취하는 것도 글을 쓰기 전에 미리 해두어야 할 일이다. 다만 그런 3분법에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다. 서론, 본론, 결론 이라는 형식을 버리고 논증을 취해야 실용적 글쓰기를 잘할 수 있다는 주장도 그런 의미에서 이해하면 되겠다. 이러한 주장을 펴는 철학자 탁석산은 “서론, 본론, 결론이 확연하게 구분되는 패턴화한 글은 읽는 이를 지치게 만든다. 따라서 서론, 본론, 결론이 확연하게 구분되는 글을 쓰지 말고 신문이나 잡지의 칼럼처럼 논증 형식으로 써야 한다. 논증이란 자신의 주장인 결론과 주장을 뒷받침하는 전제로 구성된다. 서론, 본론, 결론은 하나의 형식에 불과하다. 보고서나 논문을 보면 모두 서론과 결론이 있는데 이는 서비스 차원에서 두는 것으로 없어도 무방하다.”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