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로메로
케빈 클라크 지음 | 가톨릭출판사
오스카 로메로
케빈 클라크 지음
가톨릭출판사 / 2018년 10월 / 256쪽 / 14,000원
죽음이 대주교에게 다가오다
산살바도르의 평범한 저녁인 어느 무더운 날, 폭스바겐 파사트가 디비나 프로비덴시아 병원 안에 있는 경당 가까이에 멈췄다. 그 앞 도로에 또 다른 차량 두 대가 나타났다. 한 대에는 암살자를 지키는 ‘보안대’의 무장 괴한들이 타고 있었고, 다른 한 대에서는 암살 작전을 감독하는 두 사람이 작전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친절한 가르멜 수녀들은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기를 바라며 날개 모양의 경당 문을 활짝 열어 두고 있었고, 파사트에 타고 있던 마르고 수염이 난 남자가 운전사 가라이에게 밖으로 나가 몸을 구부리고 무엇인가를 고치는 척하라고 말했다. 열린 문을 통하여 암살자는 제대에 있는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의 모습을 확실히 볼 수 있었다.
로메로는 한 친구의 어머니를 위하여 봉헌하는 위령 미사에서 강론을 하고 있었다. 로메로는 말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오늘 저녁 우리가 사랑하는 사라 부인의 영원한 안식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부인이 남긴 메시지, 곧 모든 그리스도인은 열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이 메시지를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은 이를 알아듣지 못하고, 그리스도교에서 그러한 것들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로메로는 물질세계를,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온갖 문제를 ‘것들’이라는 말로 가리켰다. 그는 강론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여러분은 방금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이러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누구나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여 역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목숨이 위태로운 일에 관여하는 것을 회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위험에서 도망치려는 사람들은 자신의 목숨을 잃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섬기려고 자기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죽어 가는 밀알 같지만, 그들은 살 것입니다. 밀알이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습니다. 그 밀알은 오직 죽음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기꺼이 땅에 떨어져 부서지고 희생됨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오직 자기 자신을 버림으로써 그 밀알은 풍성한 수확을 가져다줍니다.”
이윽고 그는 성체를 축성하고 나서 그 성체를 제대 위로 높이 들어 올렸다. 그는 최후 강론에서 마지막 순간,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 이 역사적 순간에 이러한 문제들을 (희망을 가지고) 자신을 내어 주는 희생정신으로 바라봅시다. 우리 모두 할 수 있는 일을 합시다. 우리가 지상에서 체험하는 정의와 평화, 행복에 대한 모든 갈망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희망으로 그러한 문제들을 밝힐 때에 우리에게 실현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영원히 살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는 큰 믿음으로 자신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마침내 빛나는 왕관의 광채 속에서 그 모든 결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지상에서 진리와 정의, 사랑과 행복을 가꾸며 믿음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받는 상급입니다. 그러한 노력은 이곳 지상에만 머물지 않고, 하느님의 성령으로 정화되어, 우리가 받게 될 상급이라는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 순간 파사트에서 나와 있던 가라이는 총소리를 들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차에 타고 있던 남자가 자동차 뒤편 오른쪽 창문에서 두 손으로 총을 들고 오른쪽을 겨냥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 남자가 가라이에게 말했다. “운전해. 걱정하지 말고.” 가라이는 시키는 대로 했다. 차는 작전 감독관들에게 갔고 그 남자가 말했다. “임무 완수.” 로메로가 살해되던 날 밤, 엘살바도르 지배 계층과 군부에서는 축하 판이 벌어졌다. 산타테클라 농장에 있는 사람들은 특히 만족해했다. 그곳에는 엘살바도르 반공(反共) 지도자인 로베르토 도뷔송이 추종자와 함께 암살 작전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로메로가 살던 엘살바도르
오스카 아르눌포 로메로 이 갈다메스는 1917년 8월 15일 엘살바도르 동쪽, 산미겔의 시우다드 바리오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인 로메로가 열세 살 때 학교에서 쌓을 수 있는 모든 지식을 다 배웠다고 판단하고, 아들이 좋은 직업을 갖도록 마을에서 가장 뛰어난 목수에게 도제로 보냈다. 그렇지만 로메로는 자신의 장래에 대해 처음부터 분명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형제자매들은 날마다 목공소에서 일을 마친 로메로가 곧바로 성당에 기도하러 갔다고 기억했다. 로메로는 장성한 뒤 그 마을의 시장을 찾아가 자신의 성소, 곧 배움과 사제직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그러고 나서 현실적인 생각만 하는 아버지를 만나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다. 아버지는 결국 자신의 아들이 말을 타고 일곱 시간을 가야 하는 산미겔의 소신학교에 가도록 허락했다.
참고로 19세기 엘살바도르에서 커피 산업이 군림하자 이탈리아와 영국에서 유럽 이민자들이 몰려들었고, 그 이후 20세기까지 다른 지역의 이주민들도 몰려왔다. 그리고 이주민들은 식민지의 소수 지배자들과 통혼(通婚)하며 동화된 뒤 자신들만의 가문을 만들어 경제적 왕국으로 키워냈다. 그들은 커피 재배에 가장 좋은 땅을 독차지했으며, 커피를 많은 가치를 지닌 국제 상품으로 만들어냈다. 그러자 이미 주변으로 밀려난 ‘라디노들’(외부인이 원주민과 에스파냐인의 혼혈을 가리킬 때 쓰는 말)과 엘살바도르의 토착 농민들은 거의 불모지에 가까운 땅으로 쫓겨났다.
한편 1898년부터 1931년까지 엘살바도르의 대통령 자리는 커피 재배자들 가운데서 선출됐다. 수십 년이 지난 뒤에 특권층이 된 커피 재배자들은 엘살바도르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권을 군부 독재자들에게 넘겼다. 그리고 그들은 커피 재배와 가공을 넘어 금융ㆍ제조ㆍ관광 산업으로 지배력을 확장해 나갔다. 내전 무렵에 이르기까지 특권층은 커피 산업만이 아니라 엘살바도르 경제 전 분야를 지배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 구조로 인해 극소수 특권층만 물질적으로 풍요로웠으며, 대다수 엘살바도르인은 극도로 궁핍한 삶을 살았다. 엘살바도르의 농민들은 커피 특권층의 지배에 도전할 힘이나 용기가 없었다. 특권층에 도전했던 극소수의 농민들이 무자비한 보복을 당했기 때문이다.
1932년 1월 22일부터 몇몇 사건들이 일어난 뒤에 그 보복이 얼마나 무자비한 것인지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날 파라분도 마르티와 엘살바도르 공산당이 전국적인 봉기를 촉구하자 이에 호응하여 일단의 농민들과 농장 노동자들이 엘살바도르 서부 지역에서 봉기했다. 그러나 농민 봉기는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하고 신속하게 진압됐다. 사흘 동안 일어난 봉기에 무자비한 징벌 작전이 뒤따랐다. 엘살바도르 국가 경비대가 완전한 면책 특권을 가지고 농촌에 배치되어 한 달 동안 원주민과 라디노 마을에서 살육작전을 자행했는데, 이 사건은 ‘대학살(Matanza)’로 알려졌다.
지칠 줄 모르는 젊은 사제
1932년 대학살 사건이 절정에 이르렀는데, 로메로는 글라렛 선교 수도회가 운영하는 산미겔 소신학교를 열세 살에 입학해 공부하고 있었다. 그는 소신학교를 마치고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전국 신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했고, 로마의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학업을 마쳤다. 그리고 로메로는 1942년 로마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1943년 로메로는 엘살바도르에 사제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부름을 받고 박사 과정을 마치지 못한 채 고국으로 돌아왔고, 엘살바도르 산악 지방인 아나모르스에서 짧은 기간 사목 활동을 한 뒤 교구 비서로 임명되어 그 지방의 중심지인 산미겔로 갔는데, 그는 그곳에서 23년 동안 일했다. 로메로는 산미겔에서 교구 비서만 맡은 것이 아니었다. 주교좌성당의 본당 사목구와 다른 곳에 있는 경당의 주임 사제로 일하며, 교구 신문의 부편집장과 편집장을 차례로 맡았다. 산미겔에서 로메로는 지칠 줄 모르고 농촌과 교도소를 방문했고, 레지오 마리애, 단주 모임, 가톨릭 액션, 꾸르실료와 같은 교구 내 신심 단체와 자조 모임의 활동을 장려했다. 또한 그는 지역 카리타스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식량을 나누어주는 것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영양 문제를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로메로는 설교가로서도 명성이 높아졌고, 그의 설교는 방송국 5곳을 통해 생중계됐다.
한편 로메로는 자유분방한 행동을 하는 사제들을 몹시 불편해했다. 젊은 사제들이 수단을 입지 않고 대중 앞에 나서기 시작하자, 그는 이처럼 작은 일부터 충실하지 않은 성직자들의 모습에 늘 화를 내며 못마땅하게 여겼다. 또 그는 세심증으로 잔소리가 심했는데, 이러한 면은 그의 삶에 두고두고 문제가 된다. 보좌 주교가 되고 나서, 그는 교리에 대한 사제들의 충실성을 감시하는 한편 매일 사제들의 복장까지도 열정적으로 검사해 모든 사제의 반감을 사게 됐다. 그러나 그의 꼼꼼한 성격은 목자의 임무에서 두드러졌다. 로메로는 완전히 탈진할 때까지도,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을 거절하지 않았다.
산미겔에서 로메로는 또 다른 생활 방식을 보이기 시작했다. 바로 마을의 부유한 사람들이나 권력자들과 친분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었는데, 나중에 그가 엘살바도르 특권층과 교류하는 모습은 농민들의 억압에 가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교회와 엘살바도르 사회에서 많은 사람이 로메로를 진보와 정의의 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부자들과 친분을 쌓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로메로는 노동자들과 억압받는 사람들과도 관계를 유지했다. 마을의 알코올 중독자들과 걸인들, 심지어 매춘부들까지 로메로에게 동전을 받으려고 매일 줄을 섰다. 또 알코올 중독자들과 노숙하는 노인들을 성당 수녀원에서 지내게 해 주고, 농촌으로 돌아가는 농민들을 위해 버스비를 대신 내줬으며, 마을의 구두닦이 아이들을 보호하고 그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모임을 만들어 주었다.
로메로에게는 이러한 유대 관계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생애 거의 마지막까지 그의 개인적인 영성과 신학은 구식이었다. 그는 산미겔의 빈곤한 사람들을 물질적으로 도울 의무가 있었고, 그 의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그는 산미겔의 부유한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더 어려운 일까지 해야 하는 책임감도 있었다. 로메로는 이러한 관계들을 통합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고 부유한 사람들을 구원하는 사목자의 이중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부유한 사람들을 설득해서 산미겔의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자신을 돕도록 하고, 그러한 방식으로 부자들이 구원을 향해 나아가도록 촉구하지 않았을까?
한편 1965년 산미겔에 새 주교가 임명됐는데, 미국 프란치스코회 소속인 로렌스 그라시아노가 부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어 로메로의 윗사람으로 왔고, 1968년에 산미겔 주교좌를 계승했다. 사람들은 로메로가 산미겔의 차기 주교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는 엘살바도르 주교회의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어, 1967년 9월 산살바도르로 떠나게 된다. 산미겔에서 고된 직무를 마친 로메로는 주교회의 사무총장이라는 조용한 임무를 맡게 되어 다행스러웠을지도 모르나 불행하게도 그 시기가 참으로 좋지 못했다.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세계 교회의 모든 문과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교회가 변화의 강풍 앞에서 휘청거리는 것처럼 보이던 시기였다. 로메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들과 곧이어 1968년에 나온 메데인 문헌의 놀라운 표현들을 이해하고, 엘살바도르 주교들의 대응책을 모색하는 일을 맡았다. 그의 꼼꼼한 성격이 이 일에서 큰 몫을 했다. 로메로는 마음의 쇄신이라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에 따라, 개인적인 성찰과 쇄신의 시기를 갖도록 이끄는 회복과 새 출발의 정신을 진심으로 따랐다. 그러나 성직자들의 금기 사항들이 완화되고, 정해져 있었던 믿음직한 역할과 의전에 변화가 생긴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엘살바도르 주교회의 사무총장으로, 나중에는 보좌 주교로 지내는 동안 로메로는 보수의 문화를 지키는 전사 역할을 자처했다. 그리고 교구 신문인 「오리엔타시온」에 방어벽을 쳐 놓고, 젊은 사제들과 토론했다.
한편 대학살 사건을 겪으면서 엘살바도르 지주들과 기업인들의 정신에는 양자택일과 흑백 논리가 새겨졌다. 무엇인가를 가진 사람들은 아무것도 못 가지게 되고, 아무것도 없는 사람보다 더 불행해질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원주민들이 보복한다면 지주 계층은 피비린내 나는 몰살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누구도 제3의 길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로메로도 마찬가지였다. 로메로는 언젠가 대안의 길인 정의와 사회적 화해에 이르는 비폭력의 길을 온몸으로 구현하게 될 것이었지만, 그 당시 로메로의 생각은 화합이었다. 그러한 생각은 과거에 그가 부자들과 가난한 사람들 사이의 중재자가 되었던 경험에 근거한 것이었다.
이 시기에 로메로는 여러 ‘진보’ 세력들과 부딪쳤다. 보좌 주교로서 로메로는 엘살바도르에서 ‘진보적인’ 사제들에 반대하는 두 가지 중요한 운동의 주역이 되었다. 예수회와 오랜 인연을 맺고 개인적으로는 이냐시오 영성을 실천하면서도, 로메로는 예수회원들을 전국 신학교에서 몰아내는 매우 불편한 운동에 관여했다. 그는 신학생들에게 정치를 가르쳤다는 이유로 교수들을 비난했다. 또한 신학교의 예수회 지도자들이 권장하는 담론에 반대하는 주요 인사들 가운데 하나였다. 로메로는 신학교에서 마르크스주의를 가르치고, 그들이 헤픈 여자들과 놀아나며, 심지어 연구실에서 공산주의라는 ‘폭탄 제조’가 조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렸고, 로메로가 그렇게 공적ㆍ사적으로 한 선전은 결국 성공했다. 하지만 그는 바로 몇 년 뒤에 그러한 일을 한 데 대해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신중한 성직자의 깨달음
1974년 엘살바도르 전역에서 소작농들과 시민들이 부정 선거에 항의하고 농장 노동자들의 정당한 대우를 요구하다가 총격을 받거나 학살당했다. 국가는 온갖 반대에 공격적으로 대응했고, 보안대에 체포된 사람들은 실종됐다. 한편 농장 노동자들의 단결에 대한 대응으로 인근 교구들에서 폭력 사태가 발생했는데, 이 사태는 마침내 산티아고 데 마리아까지 확산됐다.
그리고 1975년 6월, 로메로의 교구 관할 지역인 트레스카예스에서 남자 여섯 명이 잔인하게 폭행을 당하고 살해됐는데, 정부는 그 소작농들이 체제 전복을 노리는 지하 조직의 일원들로 국가 방위군을 습격했고, 총격전을 벌인 끝에 사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렇지만 이른바 습격을 당했다는 방위군 가운데 부상당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희생자들은 모두 잠을 자다가 끌려 나와서 고문을 당하고 총과 칼로 냉혹하게 살해당했다고 했다.
그때부터 상황은 더 나빠지기 시작했다. 로메로는 농민들의 눈에서 분노가 번뜩이는 것을 보고 놀랐다. 비통해하는 그들을 위로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로메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상황에 맞닥뜨렸다. 마을에서 사라진 남자아이가 트레스카예스에서 멀리 떨어진 비포장도로 옆 배수로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군인들이 그 아이를 고문하고 처형한 뒤 그곳에 버리고 간 것이었다. 로메로는 이에 대응을 할 수 없는 자신에게 무력감을 느끼며, 분노로 들끓는 마을을 떠났다. 돌아가면서 로메로는 교구 사제인 페드로에게 말을 꺼냈다. “페드로 신부님, 우리는 부자들을 복음화시키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들이 변화되고 회개할 수 있습니다.” 이때 로메로는 둘로 갈라진 엘살바도르 사회에서 회개가 필요한 사람들은 특권에 중독된 부유층이라고 이해했다. 부유층이 누리는 특권이, 자신이 방금 빠져나온 트레스카예스에서 일어난 형언할 수 없는 비극의 근원이라고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그가 평생 수행했던 사목적 중재 역할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을 내딛는 것이었다.
그동안 그는 부자들에게 호소하여 자선금을 모아 가난한 사람들의 극심한 고통에 연고를 발라 주듯 자선금을 나누어 주었다. 자선을 통해 부유한 사람들이 구원의 길에 좀 더 가까워지도록 하여 덕행의 이중 효과를 얻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트레스카예스의 참상을 통해 로메로는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야 할 것은 한낱 물질적 자선이 아님을 깨닫기 시작했다. 부자들에게는 마음의 회개가 필요했다. 그래야 엘살바도르의 가난한 사람들이 단지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가 아니라 그들이 앉을 자리를 얻게 될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