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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 의원

오승원 지음 | 생각의힘
반딧불 의원



오승원 지음

생각의힘 / 2018년 7월 / 256쪽 / 14,000원





과로사회 ― 피로는 간 때문이 아니에요



김형철 부장이 무언가 문제가 생겼다고 느낀 건 3개월 전 어느 아침이었다. 예전보다 몸이 무겁다는 느낌이 든 지는 오래되었지만 올 들어 늘어난 업무가 원인이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터였다. 그 전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오후에는 사무실에서 밀린 서류와 보고 사항을 확인했고 저녁에는 부서 회식이 있었다. 중견 기업에 속하는 K건설 부장 직함을 단 지 올해로 칠 년째. 마흔다섯에 부장이 되었으니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이 업계에서는 부장을 달고 오 년쯤 지나면 임원 승진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 보통이다. 승진이 안 되면 자연스레 퇴사 수순을 밟는다. 함께 입사한 동기들 중 아직 회사에 남아 있으면서도 부장 직급인 사람은 그뿐이었다. 영업부를 책임지는 김 부장은 자기 일에 자긍심을 갖고 있었다. 잘 팔면 회사가 살고 못 팔면 회사가 망한다. 영업부는 회사의 핵심 부서이자 전투의 최전선에서 적진을 휘젓는 돌격대 같은 존재였다. 재개발, 재건축 사업이 호황일 때는 그야말로 잘나가던 시절이었다. 김 부장 팀에서 굵직한 재개발 사업을 따낸 일도 여러 차례 있었다. 야근이 일상이었지만 그때만큼 보람과 성취감을 느끼며 일했던 때가 없었다.

하지만 십 년 전 미국발 금융위기로 부동산 경기가 하락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미분양 아파트가 쏟아지고 재개발과 재건축 위주 정책에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던 시기였다. 이런 흐름을 읽고 일찍부터 분양 실적이 부진한 주택 대신 공공시설이나 토목 등으로 영업 포인트를 바꾼 건설사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마침 시작된 ‘4대 강’ 관련 사업에 참여한 건설사들의 실적이 크게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회사는 발 빠른 대처를 하지 못했고 그 대가는 컸다. 최근 십 년간 K건설의 매출은 내리막길이었다. 앞으로도 그러한 추세를 반등시킬 가능성은 낮았다. 몇몇 선배와 동료들은 등 떠밀리듯 퇴사를 선택해야 했다. 김 부장으로선 회사에 남아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었고 그만큼 관리자로서의 능력을 보여야 했다. 그에게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구호는 사치스러운 소리였다.

그날 아침, 잠에서 깼을 때 김형철 부장의 팔다리는 물을 잔뜩 먹은 빨랫감처럼 무거웠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것만 해도 무진 애를 써야 했다. 입맛이 없어서 아침도 거르고 집을 나섰다. 회사에 도착해 모니터를 한 시간쯤 들여다보고 있으니 머리가 멍해져 화면 안의 숫자가 들어오질 않았다. 양 어깨에 돌덩어리가 하나씩 올려진 것 같았다. 외부 업무를 핑계로 근처 사우나에서 땀을 빼고 수면실에서 잠을 자고 나니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지만 그날은 결국 일찍 퇴근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었다는 것이다.

아내는 한의원에 가보라고 했다. 한의사는 맥을 짚어보고는 기가 허해서 그런 것이니 기를 보충하는 한약을 꾸준히 먹으면 나아질 거라고 했다. 하지만 한 달에 수십만 원씩 들어가는 한약을 내리 먹어도 피곤은 가시지 않았다. 비타민제와 피로에 좋다는 헛개 추출물도 도움이 안 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운동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그때부터였다. 대학 때는 축구부 활동도 했던 몸이었다. 접대와 회식이 많았지만 삼십대까지는 수영과 등산을 꾸준히 해서 누구 못지않게 건강관리를 잘해왔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주말에 접대 골프를 하는 것 외에 운동을 안 한 게 오 년이 넘었으니 문제가 생길 때도 되지 않았을까.

헬스장 몇 곳을 꼼꼼하게 비교해보고 가격이 가장 저렴한 곳을 골랐다. 내친김에 개인 트레이닝도 신청했다. 그렇게 운동을 시작한 게 두 주 전이었다. 운동을 하면서 김 부장은 생각보다 훨씬 저질인 자신의 체력에 놀랐다. 준비한 프로그램의 횟수를 절반도 채우지 못하고 무더위에 늘어진 개처럼 헉헉대는 그를 보며 트레이너는 끌끌 혀를 찼다. 그때마다 김 부장은 민망함을 느꼈다. ‘이 시간에 말짱한 정신으로 집에 가고 있다니, 이런 날도 다 있네.’ 밤 아홉 시였다. 지난 해 퇴사한 입사 동기 두 명과 오랜만에 만나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반가움을 나눈 것도 잠시, 대화는 팍팍한 생활에 대한 경연대회가 되어갔다. 퇴사 후 한 명은 고깃집을, 한 명은 편의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업종은 달랐지만 처지는 판에 박은 듯 비슷했다. 둘 다 퇴직금과 대출을 합해 가게를 얻었고 최근에는 수익이 줄어 대출금을 갚기에도 빠듯한 처지였다. 그나마 월급쟁이인 김 부장의 처지가 제일 나았다.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일찍 자리를 파한 것은 두 사람과 비슷한 시기에 퇴직한 선배의 부고 소식 때문이었다. 폐암이 간에 전이되었다고 했다. 아래 직원들의 신망이 두터웠고 언제나 파이팅이 넘쳤던 그였다. 덜컥 겁이 났다. 당장 내일부터 담배를 끊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술맛이 달아나면서 잠시 물러서 있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버스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두 정거장을 지나친 뒤였다. 김 부장은 눈을 비비며 황급히 버스에서 내렸다. 택시를 타고 들어갈까 생각했지만 바람도 쐴 겸 걷기로 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피로가 간 때문이라는 간장약 광고가 덩그러니 빛을 내고 있었다. 문득 올려다본 건물 3층에 유독 환한 불빛이 비치는 창이 눈에 들어왔다.

반딧불 의원. 진료 시간: 오후 5시 ~ 오전 1시. 토요일은 쉽니다.



진료 시간을 잘못 본 것 아닌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어쩌면 낮에 병원 가기 힘든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을 테니 괜찮은 영업 방식인지도 몰랐다. 문득 그가 올라가보기로 마음먹은 것은 최근 느끼는 몸의 이상보다도 오늘 들었던 선배의 부고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이 시간에 여는 곳이라면 앞으로도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병원은 어두침침한 복도 끝에 위치하고 있었다. 밤늦은 시간인데도 대기실에는 차례를 기다리는 환자들이 있었다. 마스크를 쓴 채 아기를 안고 있는 엄마와 연신 기침을 하는 초등학교 3학년쯤의 남자 아이가 한 묶음이었고, 칠순은 넘었음직한 백발의 노신사가 다른 하나였다. 엄마와 아이가 진료실에 들어가 있는 동안 또 다른 환자가 들어왔다. 붐비지는 않았지만 환자가 적은 병원도 아닌 것 같았다. 곧 그의 차례가 되었다.

진료실 내부는 단출했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의자, 진찰용 침대와 책장이 집기의 전부였다. 환자용 의자에 앉으면서 김 부장은 습관처럼 의사의 인상을 살폈다. 얼굴을 봐서는 사십 대 초반쯤으로 보였지만 반백에 가까운 머리카락을 보면 자신과 비슷한 또래인 것 같기도 했다. 헝클어진 머리에 낡은 가운을 입은 의사는 김 부장만큼 피곤해 보였다.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나요?” “글쎄요. 딱히 어디가 문제인지 모르겠는데….” 의사는 김 부장이 다음 말을 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전문의 이수현. 명패에 박힌 의사의 이름이었다. “이전보다 피곤이 심해졌는데 몸에 뭔가 병이 생긴 게 아닌가 걱정이 되어서요.” “언제부터 그러셨나요?” “한 서너 달쯤? 예전엔 며칠 쉬면 나아졌는데 이번엔 그렇지가 않아요.” 김 부장이 그간의 증상에 대해 설명하는 동안 의사는 주의 깊게 그의 말을 들으며, 중간중간 모니터에 기록을 했다. 의사는 잠은 잘 자는지, 피로 외에 다른 증상은 없는지 등을 물은 뒤 몇 가지 혈액검사를 하고 일주일 뒤에 다시 보자고 했다. 김 부장이 진료실을 나오려 할 때 의사가 한마디 덧붙였다. “당분간 운동은 중단하세요. 지금은 쉬는 게 우선입니다.” 논산 훈련소 조교 같은 트레이너 얼굴을 당분간 안 봐도 된다니, 김 부장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병원을 나섰다.

일주일 뒤 확인한 혈액검사 결과는 간 기능을 포함해 모두 정상이었다. “그럼 왜 이렇게 피곤한 걸까요? 다른 검사를 더 해야 합니까?” 약간은 짜증 섞인 김 부장의 질문에 답하는 대신 의사는 책상 위에 있던 컵을 김 부장 앞으로 옮겼다. “이 컵에서 물이 넘쳐 책상 위로 흘렀다고 생각해보세요. 물이 왜 흘러나왔을까요?” 예상치 못한 엉뚱한 질문에 김 부장은 당황스러웠다. “사실 컵에 금이 가거나 구멍이 나서 물이 흘러나오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그 보다 더 흔한 건 컵에 물을 너무 많이 부어서 넘치는 경우일 거예요. 다시 말해 과로를 했거나 스트레스가 지나치게 많은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일을 줄이는 것이겠죠.”

김 부장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제 의사가 하는 말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나는 평소대로 물을 부었는데 알고 보니 컵의 크기가 이전보다 작아져서 물이 넘쳤을 수도 있습니다. 체력이 떨어진 거죠. 누구나 나이가 들면서 컵의 크기는 줄어들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직책이 높아지고 아이들이 커가면서 직장과 가정에서 요구하는 것이 더 많아지잖아요. 결국 물이 넘치는 시기가 찾아오게 됩니다.” 내 컵의 크기가 얼마나 줄어든 걸까. 김 부장은 생각했다. “적당한 양만 남기고 덜어내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죠. 환경을 바꾸기 어렵다면 결국 나 스스로를 바꿔야 하는데, 이건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쉬운 방법이 있나 싶어 보약이나 간장약, 영양제를 먹기도 하지만 일시적인 방법일 뿐이에요. 오래 걸리지만 컵의 크기를 키우는 게 근본적인 방법이겠지요. 직장 생활을 하면서 어려움이 있겠지만 우선 술자리를 줄이세요. 운동은 가벼운 것부터 천천히 시작하는 게 좋습니다. 다음에 들르시면 운동을 어떻게 할지도 상의해보지요.”

그간 먹었던 한약과 잔뜩 사두었던 비타민제들이 떠올라 속이 쓰렸다. 그나저나 앞으로 부서 회식은 없애야 할 것 같다. 직원들은 오히려 좋아할지도 모르지. “담배 끊기 어려우면 말씀하세요. 끊을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담배를 끊겠다고 결심했던 걸 어떻게 알았을까. 일주일 전 당장 끊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터였다.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순간 얼굴이 달아올랐다. 다음 진료 약속을 하지 않았지만 진료실을 나가면서 조만간 다시 오게 될 거란 예감이 들었다.

***



피로는 병원을 찾는 환자들이 가장 흔히 호소하는 증상 중 하나다. 하지만 지극히 주관적인 증상이고 다양한 질환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정확한 원인을 찾고 해결하기가 쉽지 않다. 직장인 1만 176명을 대상으로 한 국내 연구 결과에 따르면 10명 중 1명이 육 개월 이상 만성 피로를 느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피로의 원인 중 신체적 질환은 3.7퍼센트에 불과했다. 피로 환자는 대개 신체적 문제를 걱정해 병원을 찾지만 이처럼 실제로 신체적 질환이 원인이 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보통 육 개월 이상 피로감이 지속되는 경우를 ‘만성 피로’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만성 피로와 함께 인후통, 림프절 압통, 근육통, 다발성 관절통 등의 증상도 있다면 ‘만성 피로 증후군’이라는 질환을 의심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피로를 유발하는 다른 원인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이에 대한 확인이 우선이다. 신체 진찰과 갑상선, 간, 신장 질환, 빈혈 등에 대한 기본적인 검사에서 문제가 없다면 환경의 변화나 생활 습관을 확인해보아야 한다. 최근 신체적, 정신적 스트레스를 느낄 만한 일은 없는지, 과로를 하지는 않았는지, 수면 패턴에 변화는 없었는지 등을 점검해야 하는 것이다. 늘 똑같이 과로와 수면 부족에 시달렸는데 이제야 증상이 생겼다면 지금까지 근근이 적응해왔던 몸이 증상을 나타낼 만큼 약해졌다는 신호라고도 볼 수 있다.

이때 휴식을 취하는 것은 필수다. 휴식하면 보통 잠을 푹 자거나 빈둥거리는 것을 떠올리는데, 이러한 소극적 휴식 외에 산책, 가벼운 운동, 공연 관람 등 즐거운 일을 하는 적극적 휴식도 병행하는 것이 좋다. 만성 피로가 심한 경우에 처음부터 격한 운동을 하는 것은 오히려 증상을 악화시킬 수 있으며, 유연성 운동만 하는 것보다 유산소운동을 병행하는 것이 좋다. 운동은 하루 10~15분 정도로 시작해 상태에 따라 매주 시간을 늘려 최대 30분이 될 때까지 운동량을 늘리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좋다. 초기에는 가벼운 운동으로 시작해 점차 강도를 높이고, 피로가 더 심해지면 피로 증상이 줄어들 때까지 그 이전 단계로 돌아간다. 이렇게 최소 3개월 이상 운동을 지속해야 한다.

앞서 언급한 직장인 대상 연구에서 피로의 원인으로는 심리적 요인과 업무 과다가 70퍼센트를 차지했다. 원인을 줄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막상 과로와 스트레스를 줄이는 것은 쉽지 않다. 피로라는 증상에 대해 사회적 접근이 필요한 이유다. 철학자 한병철은 그의 책 『피로사회』에서 시대마다 그 시대의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긍정성의 과잉에 빠진 현대의 성과 사회를 사는 이들은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착취하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된다. OECD의 《2016 고용동향》에 따르면 2015년 기준 국내 취업자 1인당 평균 노동시간은 2,113시간으로 멕시코에 이어 두 번째로 높았다.



헤어질 수 없다면 시작하지 않겠어요 ― 고혈압 약에 대한 통념과 진실



Q. 안녕하세요, 서른한 살 직장인입니다. 나이를 먹으니 신중해진 건지 겁이 많아진 건지, 사람을 만나고 연애를 시작하는 게 어려워요. 어렸을 때 그냥 들이대던 패기는 어디로 간 건지.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는 것도 이젠 힘들고요. 나이가 들수록 자꾸 현실을 따져보게 되고 부정적인 생각이 많아집니다. 이 사람과 사귀게 되면 이런 문제가 생길 것 같은데, 잘 해서 결혼까지 갈 수 있을까. 중간에 관계가 어려워지면 서로 상처도 주게 될 텐데…. 이런 생각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더라도 다가가는 것이 어렵습니다. 머뭇머뭇하다가 그냥 멀어지기도 하구요. 그러고 나면 그래, 어차피 맞지 않을 사람이었어, 하고 생각하곤 합니다. 제게 꼭 맞는 사람을 만난다면 이런 망설임 없이 연애를 할 수 있을까요. - 상일동에서 고민에 빠진 여우.

A. 김현철의 <연애>란 노래가 생각나네요. 연애와 사랑만큼 멋진 일이 어디 있을까요. 물론 관계에 있어선 필연적으로 어려움이 따를 수 있지만 그게 걱정되어 시작조차 못한다면 어리석은 일이겠지요. 어쭙잖은 책임감은 내던지세요. 관계는 어느 한 사람이 책임지는 게 아니고 함께 만드는 겁니다. 여우 님은 미래에 생긴 부작용이 걱정되어 꼭 필요한 치료를 미루는 환자 같네요. 부작용 걱정하지 말고 시작해보세요.

김은영 씨는 잡지를 덮었다. 흔해 빠진 연애 상담에 흔해 빠진 충고였다. 창의력이 부족하군. 이런 고민과 답변이 다 내 이야기처럼 느껴졌던 적도 있었는데, 그때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녀는 유치했던 과거를 들켜버린 것 같은 마음에 얼굴이 달아올라 괜히 헛기침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기실에는 김은영 씨를 포함해 세 명의 환자가 있었다. 벽에 붙은 포스터의 붉은색 문구에 김은영 씨의 눈길이 멈췄다.

건강 가족 시작은 자기 혈관 숫자 알기부터.

사망 원인 1위 심뇌혈관질환!

정기적인 혈압, 혈당, 콜레스테롤 측정이 예방의 시작입니다.



김은영 씨는 자리에서 일어나 건너편 자동 혈압계 앞에 앉아 구멍 안으로 오른팔을 넣었다. 150/95. 조금 전 수치와 변화가 없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결혼 후 체중이 늘었지만 평소 건강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일 년 전 건강보험공단의 건강검진에서 고혈압 주의 판정이 나왔고 재검에서도 혈압이 높다고 했다. 고혈압이라니. 그건 노인들에게나 생기는 문제 아닌가? 당시 의사는 우선 식이요법과 운동을 권했다. 식이요법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자 의사는 싱겁게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더욱 의문이 들었다. 입맛도 싱거운 편인데 도대체 왜 내가 고혈압이 생긴걸까?

규칙적으로 운동 시간을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아침에 남편과 초등학생 아들 둘이 집을 나가면 후다닥 설거지를 끝내고 출근해야 했다. 그녀는 버스로 세 정거장 거리인 공인중개사 사무소에서 오전 열 시부터 세 시까지 일했다. 사무실로 걸려오는 전화를 받거나 중개사가 물건을 보러 나간 사이 방문한 손님들을 접대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눈치가 빠른 그녀는 오래지 않아 동네 전월세 물건의 시세와 조건을 파악할 수 있었고 두어 달이 지나자 손님과 함께 나가 직접 안내를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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