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 있는 저녁
리샤오둥 지음 | 미래타임즈
철학이 있는 저녁
리샤오둥 지음
미래타임즈 / 2018년 9월 / 336쪽 / 15,000원
내가 누구인지 모를 때_ 소크라테스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469년 아테네에서 조각가인 아버지와 산파술을 업으로 하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처음으로 아버지를 따라 조각 일을 하다가 보병에 편입되기 전까지 철학을 공부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참전하여 공을 세운 후 아테네로 돌아와 잠시 동안 정치학에 몰두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곧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의 한 친구가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에 가서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 누구인지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신전의 여사제가 “지금 아테네에는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사람은 없다.”는 신탁을 전했다. 이 사실을 듣고 놀란 소크라테스는 그 사실이 틀렸음을 입증하기 위해 아테네에서 가장 박식하다는 사람을 찾아갔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만 자랑스럽게 얘기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박식한 사람들의 지식에 의문을 갖는 데 사용한 방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아무런 선입견 없이 누군가의 관점을 선택해 박식한 사람에게 단순히 질문을 던지면서 그 사람의 논거에서의 모순과 지식 사이의 차이를 드러나게 해서 스스로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해주는 방법의 논증법을 펼쳤다.
소크라테스는 사고의 시작을 도와주는 그 과정을 그의 어머니의 산파술에 비유했다. 이 토론을 통해 소크라테스는 아폴로 신전의 신탁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그것이 바로 그가 지식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가 아무 것도 모른다고 공언했기 때문에 아테네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델포이의 신전 입구에 새겨진 ‘네 자신을 알라’는 비문을 중요하게 여겼다. 소크라테스에게 지식을 얻는 것의 시작은 바로 자신의 무지의 한계를 깨닫고 모든 선입견을 없애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에야 진리를 알아낼 희망이 생길 수 있었다.
이처럼 아테네에서 가장 지혜로운 철학자는 바로 소크라테스이다. 그리고 인구에 회자되는 성격 사나운 부인이 바로 악처로 소문난 그의 아내 크산티페이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후세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더구나 그가 말한 “너 자신을 알라.”는 명제는 아직까지도 여전히 동서고금을 통틀어 우리들의 심금을 울린다.
고대 그리스에서 소크라테스는 변론을 잘하기로 유명했다. 제자 플라톤이 쓴 『국가』에 소크라테스가 설전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계속해서 질문함으로써 상대방이 결국 스스로 모른다고 고백하게 만드는 데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항상 대로에 서서 지나가는 행인들과 스스로 자신을 정확히 아는지에 대해서 논쟁을 벌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굴복시키려고 시도했지만 결국 그의 논점에 자신이 굴복해야 했다.
소크라테스는 걸음걸이도 우아하지 못했다. 그는 오리처럼 불뚝 튀어나온 배를 내밀고 고개를 쳐든 채 뒤뚱뒤뚱 걸었다. 또 항상 남루한 옷을 입고 맨발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이런 볼품없는 모습에도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를 찾아왔다. 그는 그들과 다양한 문제에 대해 격렬한 논쟁을 벌이며 정신적 지도자이자 유익한 친구가 되어 주었다. 소크라테스의 경우를 보면 사상과 지혜를 추구하는 데 외모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주변에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매력으로 인해 소크라테스는 목숨을 잃는다. 70세가 되던 해에 ‘신을 모독하고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죄명으로 고소를 당한 그는 아테네의 민주주의 제도에 의해서 ‘독배를 마시라’는 판결을 받는다. 이에 젊은 제자들은 그가 도망칠 수 있도록 도왔지만 그는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끝내 독배를 마시며 자신의 방식으로 결백을 증명하려 하였다. 그의 육체는 떠났지만 한평생 철학에 헌신한 그의 불굴의 정신은 세상에 남았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명제는 소크라테스 사상의 핵심이다. 그는 지식을 구하는 건 인간의 본성이자 사명이며 더욱이 이를 통해 아테네 민주제도의 고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 인간이 지식을 구하려면 먼저 반드시 자신을 알고 내면의 원칙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이러한 원칙을 ‘덕성’이라고 불렀다. 소크라테스는 덕성은 사람들마다 모두 지니고 있는 인간의 본성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이성을 통제해야만 자신의 덕성을 드러낼 수 있으며,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여겼다. 이렇듯 이성의 통제는 주로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렇기에 자신이 여전히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더 많은 지식을 쌓아 자신의 덕성을 드러낼 필요가 있다. 후세에 깊은 영향을 끼친 ‘지식은 곧 미덕이다’, ‘반성하지 않는 삶은 가치가 없다’ 등의 말들은 모두 사람들이 자신의 한계를 깨달아야 한다는 의미로 소크라테스가 한 말들이다.
자신감을 잃었을 때_ 프랜시스 베이컨
아는 것이 힘이다
우정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바로 온갖 감정들로 인해 생겨난 슬픔과 마음속에 응어리진 고민거리들을 털어놓을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다. 우리는 폐색과 질식으로 생긴 병이 몸에 가장 위협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마음도 다르지 않다. 간을 건강하게 하려면 사르사 뿌리를 쓰고, 비장을 건강하게 하려면 철분을 섭취하면 되며, 폐를 건강하게 하려면 유황화를, 뇌를 건강하게 하려면 해리향을 쓰면 된다. 하지만 마음이 편안하게 하는 데는 진정한 우정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진심 어린 친구와 마주할 때 우리는 지난 잘못을 참회하거나 고백하게 된다. 그리고 걱정, 즐거움, 두려움, 바람, 의심, 충고와 같이 가슴속에 깊숙이 숨겨두었던 것들을 모두 털어놓을 수 있다.
우정에 대해 이처럼 깊이 있는 탐구를 한 인물은 저명한 유물론자이자 과학자이며 근대 영국 고전경험론의 창시자인 프랜시스 베이컨이다. 베이컨은 태어나면서부터 고귀한 신분을 타고났다. 그는 1561년 1월 22일 런던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최측근 관직인 옥새상서 자리에 올라 있었으며, 어머니는 명문 귀족 집안 출신으로 그리스문학과 라틴문학에 조예가 깊은 교양인이었다. 또 칼뱅파의 신도이기도 했다.
1579년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평탄했던 베이컨의 삶에도 첫 번째 시련이 찾아온다. 1582년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그는 1584년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정치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1602년 기사 작위를 받은 이후 1607년 차장검사, 1613년 검찰총장, 1616년 추밀원 고문의 자리에 오른 뒤 1617년에는 자신의 아버지가 올랐던 옥새상서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리고 1618년에는 대법관의 자리에까지 오르면서 베룰람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이처럼 성공적인 정치활동을 하던 그는 1621년 뇌물 수수 혐의로 4만 파운드의 벌금형을 선고받고 런던탑에 갇히면서 의원직과 관직을 모두 잃는다. 나중에 벌금과 감옥행은 면제를 받았지만 정치인으로서 결코 회복될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한편 베이컨은 정치인이기 이전에 항상 과학적 진리를 찾기 위해 노력한 과학철학자이기도 하다. 정치인으로서 탄탄대로를 걷던 때에도 그의 재능과 정신은 정치활동이 아닌 과학적 진리를 찾는 일에 머물러 있었다. 이 시기에도 그는 학술연구를 통해 매우 큰 성과를 거두며 여러 저서들을 출판했다. 부패사건이 터진 뒤에는 정치 무대에서 내려와 오로지 저술에만 몰두했고, 성과를 이루기도 했다.
1597년 베이컨은 그의 첫 번째 저서인 『수상록』을 발표했다. 이 책에서 그는 사회와 인생 등 다양한 관점에 대해서 자신의 철학적 견해를 드러내며 폭넓은 독자들로부터 광범위한 환영을 받았다. 또 그는 『학문의 대혁신』 6부작에서 백과사전적인 지식을 다루려 했다. 그는 이 책을 씀으로써 과학을 부흥시키고 인류 지식을 새롭게 개선시키고 싶어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자신의 계획을 완성하지 못한 채 『학문의 진보』와 『신기관』 두 권만 완성한다.
『신기관』은 베이컨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철학은 다루고 있다. 그는 여기서 경험인식의 원칙과 방법을 제시했다. 『신기관』의 ‘신’은 새롭다는 의미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인 『기관』에 대해 대항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인류가 지식을 잘못 터득하는 원인을 지적하며 유명한 4대 우상론을 제시했다. 첫 번째는 ‘종족의 우상’으로 인간이 가진 천성으로 인해 생기는 인식의 오류이다. 두 번째는 ‘동굴의 우상’으로 개인의 성격, 취향, 교육, 환경으로 생긴 편견의 오류이다. 세 번째는 ‘시장의 우상’으로 사람들이 의사소통을 할 때 언어의 부정확한 개념으로 인해 생기는 사고의 혼란이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극장의 우상’으로 맹목적으로 권위나 전통을 믿으면서 생겨난 잘못된 인식이다. 그는 이러한 네 가지 우상은 인간을 오류에 빠지게 하는 잘못된 편견이지 어떠한 상황에서 생겨난 의혹이나 난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또 스콜라철학들이 이러한 4대 우상론에 빠져 진리를 말살하고 오류를 범했다고 지적하며 스콜라철학을 거세게 비판했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도 이 책에 담긴 내용이다.
베이컨이 저술한 『헨리 7세의 역사』는 역사학자들에게 높이 평가받으며 ‘근대 역사의 이정표’라고 불려졌다. 대략 1623년경에 저술한 것으로 보이는 미완성 저서인 『새로운 아틀란티스』는 유토피아에 대한 베이컨의 이상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이 추구하고 바라는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 책에서 묘사된 과학이 모든 것을 통제하는 가상의 국가는 그가 평생에 걸쳐 강조한 ‘학문의 대혁신’을 집중해 표현한 것이다.
1626년 3월, 온도와 부패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었던 베이컨은 마차를 타고 가던 도중에 눈밭을 보고는 순간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는 즉시 마차를 세우고 눈밭에서 바로 실험을 진행했다. 닭 한 마리를 구해서 닭의 배 속에다가 눈을 가득 집어놓고 냉동이 부패에 미치는 영향을 관찰했던 것이다. 하지만 허약한 그의 몸은 추운 겨울 날씨를 견디지 못했고, 결국 지독한 감기에 걸려 병세가 악화되면서 같은 해 4월 9일 새벽에 숨을 거두고 만다.
누군가 나를 속박할 때_ 홉스
자유와 필연은 양립한다
‘Leviathan(리바이어던)’은 『성경』에 나오는 사악한 ‘바다괴물’이다. 주로 거대한 고래, 돌고래 또는 악어의 모습으로 묘사되며 육지괴물인 베헤모스와 함께 이야기되곤 한다. 『구약성서』 〈욥기〉에는 리바이어던을 딱딱한 비닐과 날카로운 이빨, 뾰족한 가시가 돋친 배, 그리고 코와 입에서는 불을 내뿜는 거대한 악어로 묘사하고 있다. 이처럼 기독교에서 리바이어던은 악귀의 대명사로 7대 죄악 중 하나인 질투를 상징한다.
『구약성경』 외전인 ‘이스라엘서’ 제6장에는 신이 천지를 창조한 지 5일째 되는 날 산과 바다를 창조했고, 6일째 되는 날 점토를 이용해 리바이어던과 베헤모스를 창조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최후의 심판 때 리바이어던과 베헤모스, 그리고 거대 새인 지즈를 잡아 죄를 용서받은 성스러운 사람들에게 음식으로 내어준다고 나와 있다. 또 에녹의 예언서에는 “창조된 그날 바로 헤어진 두 괴물 중 암컷인 리바이어던은 깊은 물속에서 자리를 잡고, 수컷인 베헤모스는 사막에서 자리를 잡았다.”고 적혀 있다.
17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부르주아혁명으로 인류 사회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이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영국의 철학자 토마스 홉스는 『성경』 속 바다괴물인 ‘리바이어던’을 부활시켜 국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다.
홉스는 1588년 영국 남부의 윌트셔 주 맘스베리에서 가난한 시골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집안 형편이 좋지 못했기 때문에 홉스는 유년 시절부터 부유한 삼촌의 도움으로 성장했다. 총명하고 공부를 좋아했던 그는 14살 때 이미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배웠으며, 15살 때는 귀족 자제들을 육성하던 옥스퍼드 대학에 들어가 고대철학과 스콜라철학을 공부했다. 졸업한 뒤에는 한동안 대학에 남아 논리학을 가르쳤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 홉스는 귀족 가문과 매우 두터운 친분을 쌓아 갔다. 그는 부유한 귀족 가문인 카벤디쉬가에서 윌리암 카벤디쉬의 가정교사로 일하기도 하고 또 귀족의 비서나 수행원으로도 일했다.
귀족 가문에서 일한 경험들은 홉스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타고난 신분은 보잘것없었지만 그는 귀족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상류사회에 진입할 수 있었고, 덕분에 당시 영국에서 학술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영향을 지녔던 유명 인사들과 친분을 맺을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은 그의 식견을 넓혀 주었을 뿐만 아니라 세상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확립하는 데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한편 귀족들과의 친밀한 관계로 홉스는 자신의 저서에서 항상 군주제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는데, 이는 그를 다양한 모순을 지닌 매우 복잡한 인물로 만들었다.
1651년 파리에서 왕권신수와 교회에 반대하는 내용을 담은 『리바이어던』을 발표하면서 프랑스 당국과 파리에서 망명 중인 영국 왕당파 사람들 모두에게 미움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또다시 신변의 위협을 느낀 홉스는 영국으로 도망쳤다. 홉스는 크롬웰에게 영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을 전달했고, 영국으로 돌아온 홉스는 크롬웰이 제안한 자리를 완곡하게 거절하며 정치활동을 하지 않았다. 이후 1666~1667년 런던에서 대화재가 일어나고 전염병이 창궐하게 되자 교회는 홉스가 신성을 모독했기 때문에 재앙이 일어났다고 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이에 겁에 질린 홉스는 황급히 자신이 가지고 있던 원고를 모두 불태워버렸다. 이처럼 동시대 사람들과 비교해 봤을 때 홉스는 ‘평화와 안전’에 매우 민감했으며, 또 이를 가장 절박하게 원했던 인물이었다. 홉스는 자유란 본래 개인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서의 ‘아무런 방해가 없는 상태’라고 보았다. 또 자유인이란 ‘자신의 힘과 지혜로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원하는 일을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할 수 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이와 관련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같은 이치로 우리가 자유롭게 말을 할 경우 자유로운 것은 목소리나 발음이 아니라 인간이다. 말하려는 인간에게 다른 방식으로 말하라고 법률적으로 제약할 수는 없다. 마지막으로 자유의지라는 것도 의지, 의욕, 의향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말한다. 즉 그것은 의지, 의욕, 의향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하는 데 아무런 방해가 받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자유에 대한 깊은 성찰과 주장을 통해서 그는 “자유와 필연은 양립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예를 들어 물은 물길을 따라 흘러 내려갈 자유뿐만 아니라 필연성도 가지고 있다.” 그의 관점에 따르면 인간의 행위는 비록 자신의 의지에서 나오지만 인간의 의지에서 비롯되는 모든 행동, 의욕, 의향은 ‘어떠한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필연적인 행동’이라는 것이다. 홉스는 이러한 원인이 최종적으로 귀결되는 ‘모든 원인의 원인은 신’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철학은 요즘의 인권론 관점에서 보면 몇 가지 한계가 분명히 있다. 하지만 자유와 필연의 관계를 주장한 부분만큼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또한 홉스는 인간들이 평화를 이루어 자신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선 ‘인위적인 계약’을 통해 국가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를 ‘리바이어던’이라 표현했다. 홉스의 설명에 따르면 자연 상태의 인간들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연권’을 누리지만 불행하게 살아간다. 인간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끊임없이 싸워야 하고, 그렇기에 결국에는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을 갈망하게 된다. 이에 인간들은 자신의 자연권을 포기하고 한 사람 또는 하나의 집단에 권력을 맡기기로 계약을 맺는다.
이러한 한 사람 또는 한 집단은 모두의 의지를 하나의 의지로 결합하고, 모두의 인격을 하나의 인격으로 통합시킨다. 이에 모든 사람들은 그의 의지에 복종하고, 그의 판단을 따른다. 이것이 바로 사회계약이며 한 사람, 또는 집단은 바로 최고의 권력을 지닌 주권자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계약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의 인격이 하나로 통일되는 강력한 국가가 형성된다. 그는 이러한 과정으로 진행되는 국가의 형성에 대해 이렇게 결론 내린다. “이로써 위대한 리바이어던이 탄생하였다. 좀 더 경건하게 말하자면 이는 살아있는 신의 탄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