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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재밌어서 잠 못 드는 철학 수업

김경윤 지음 | 생각의길
너무 재밌어서 잠 못 드는 철학 수업



김경윤 지음

생각의길 / 2018년 8월 / 296쪽 / 15,000원





니체 - 망치로 철학하는 법



우상 파괴자, 니체



프리드리히 니체는 1844년 프로이센 작센 주의 뢰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 밑으로 남동생 요제프, 여동생 엘리자베스가 태어났으나 남동생은 2살 때 죽고, 누이만 남았다. 니체가 5살 되던 해, 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니체의 어머니는 가족을 이끌고 할머니가 살고 있는 나움부르크로 이사를 갔다. 니체의 주변은 온통 여자들뿐이었다.

7살에 칸디다텐 베버라는 사설 교육시설에 들어가 종교, 라틴어, 그리스어 수업을 받았고,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선물받고 음악을 배우기도 했다. 니체는 어려서부터 음악과 시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주위 사람을 놀라게 했다. 9살에는 돔 김나지움에 입학하여 작사와 작곡을 시작했고 14살에는 사립 명문 슐 포르타에 입학해 인문계 중등교육을 받았다. 고전어와 독일문학에 능통했고, 교회음악을 작곡했다.

18살에는 〈운명과 역사〉라는 글을 썼고, 20살에 본 대학에서 신학과 고전문헌학을 전공하기 시작했지만 이후 신학은 포기했으며 그와 더불어 신앙도 상실했다. 이러한 선택에는 저명한 문헌학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리츨의 영향을 컸다. 니체는 21살 때 스승 리츨을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겼다. 그해 고서점에서 발견한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고 빠져들었다. 이때 디오게네스를 연구하며 문헌학자로 이름이 알려지기도 했다. 23살에 군대 생활을 시작했으나 다음 해 낙마하여 가슴에 부상을 입고 군대를 그만 둔 후, 라이프치히로 돌아와 바그너를 만났다. 바그너와의 만남은 니체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니체는 불과 25살 때 박사 학위도 없는 상태에서 이례적으로 스승 리츨의 추천으로 스위스 바젤 대학의 고전문헌학 조교수로 취임했다. 후에 고전문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스위스 국적을 신청하지 않은 채로 프로이센 국적을 포기함으로써 무국적자의 삶을 시작했다.

니체는 솔직한 사람이었다. 마음에 들면 흠뻑 빠져들지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과감하게 관계를 끊었다. 그는 바그너의 예술 세계를 흠모했지만 특유의 기독교 색채를 띤 애국주의와 반유대주의는 혐오했고 점점 이런 색채가 두드러지자 과감히 바그너를 버렸다. 그의 결단은 사람뿐만 아니라 기존의 사상에도 적용되었다. 그는 기존 도덕에 대한 타협 없는 전투를 시작했다.

스위스의 휴양 생활은 니체에게 축복과 같았다. 쉴즈마리아의 산책길에서 그는 영원회귀에 대한 구상을 떠올렸고, 이후 그의 저서를 관통하는 핵심 사상이 되었다. 38살에 『즐거운 학문』을 쓰기 시작했고, 39살에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쓰기 시작했다. 이처럼 미친 듯이 집필에 몰두했지만 글은 오히려 농밀해졌다. 같은 시기 루 살로메를 만나 친분을 쌓기도 했다. 41살 니체의 역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마침내 완성되었으나 출판할 곳을 찾지 못해 자비로 40여 권만 출판했다. 니체는 당시 독자들에게 불가해한 인물이었다. 42살에 쓴 『선악의 저편』도 자비로 출판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렇게 푸념을 늘어놓았다.

내 모든 작품은 일종의 낚싯바늘이다. 나야말로 낚싯법을 누구보다는 잘 알고 있지 않겠는가? (…)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면, 그건 내 잘못이 아니다. 고기들이 없는 것이다.

43살에 쓴 『도덕의 계보』도 자비로 출판했다. 44살이 되었을 때 『디오니소스 송가』, 『우상의 황혼』, 『반 그리스도』를 완성했다. 그해 11월 자신의 삶과 책을 소개한 『이 사람을 보라』를 썼다. 12월에는 『니체 대 바그너』를 완성했다. 그야말로 속전속결이었다. 불꽃 같던 그의 생애는 45살이 되는 1889년에 멈췄다. 그해 1월 투린의 칼 아버트 광장에서 채찍을 맞는 말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다가 혼절하여 정신병원에 입원한 후 1900년 56살에 사망할 때까지 정신을 되찾지 못했다. 니체는 시대를 앞서갔으나 그의 시대는 그를 외면했다.

바보 소크라테스



우리는 흔히 소크라테스를 ‘현자’로 알고 있다. 그는 철학사에서 가장 주목받고 존경받는 인물 중에 하나다. 오죽하면 세계 4대 성인의 반열에 들었겠는가. 그러나 니체는 이러한 우리의 상식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니체에게 소크라테스는 한 낱 ‘교활한 한 마리의 짐승’에 불과했고 고작해야 ‘바보’일 뿐이었다. 그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어 소크라테스를 다음과 같이 평한다.

진리를 구하는 자라고, 그대가? 햇살은 이렇게 조롱했다. 아니다. 시인일 뿐이다. 거짓말을 해야 하는, 알면서도 짐짓 거짓말을 해야 하는, 교활하게 약탈하며, 살금살금 기어 다니는 한 마리의 짐승. 먹이를 노리고, 알록달록한 가면을 쓰고, 스스로 가면이며 스스로를 먹이로 감는 그런 자가 진리를 구하는 자라니. 아니다, 바보일 뿐이다, 시인일 뿐이다.

소크라테스는 그리스인들의 디오니소스적 삶을 거부하고 이데아라는 독을 이 세상에 퍼뜨린 장본인이었다. 그는 육체를 부정하고, 정신, 이성, 진리, 영혼을 외쳐대면서 대지의 삶을 부인했다. 니체가 보기에, 소크라테스가 주장하는 이데아란 오히려 ‘감옥’이며, 본능적인 삶을 죽이는 질병에 다름 아니었다. 때문에 니체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생을 긍정하지 못한 자의 위장된 자살이라 말했다.

소크라테스는 죽기를 원했다. 그에게 독배를 준 것은 아테네가 아니라 그 자신이었다. 그가 아테네로 하여금 독배를 주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니체의 태도는 단지 소크라테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소크라테스 이후의 모든 철학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는 그 최초의 인물인 소크라테스에게 철퇴를 가함으로써 그 이후의 유사한 철학적 조류 자체를 일거에 부정하려 했던 것이다. 니체는 자신과 동시대인들이 바로 이 소크라테스적 철학에 오염되어 생을 긍정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원한과 증오의 기독교



생을 올바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소크라테스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기존의 철학적 세계 전체에 대해 전쟁을 선포함과 동시에, 당시 가장 강력한 종교였던 기독교에 철학적으로 대항한다. 니체는 기독교를 천민, 노예, 약자들이 강자에 대해 갖는 원한과 증오심의 산물로 생각했다. 그것은 힘없는 사람이 힘 있는 사람에게 저항하지 못하고, 대신 스스로를 위안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사기극에 다름 아니다. 약자는 자신의 약한 측면을 오히려 미화시켜 대결하지 않는 것을 ‘관용’으로, 억울하지만 참는 것을 ‘인내’로, 손도 쓰지 못하고 당하는 것을 ‘훈련’으로 여긴다. 대신 기독교도들은 이런 핍박에 대한 최후의 보상으로 ‘최후 심판의 날’을 상정하고 기다린다는 것이다. 즉, 약자의 인내의 본질은 결국 자신의 무력함을 신이 대신 복수해 주기를 바라는 원한과 증오의 심리에 가깝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약자의 태도가 현실 세계에서는 강자로 둔갑된다는 데 있다. 기독교도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태도를 미화하고 강변함으로써 이 세상을 오염시키고 강한 자를 약한 자로 만들었으며, 야수를 가축으로 길들이고 생의 주인을 노예로 만들었다. 그 결과 이 세상은 철저히 무력화되었고, 병적인 세상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사기극을 종식하는 것이다. 기존의 노예의 도덕과 가치를 전복하는 것이다. 기독교에 대한 니체의 분노는 다음과 같은 표현에 잘 나타난다.

기독교에 대한 이 영구한 고발을 나는 벽이 있는 곳이면 어느 벽이든지 써놓으리라. 나는 장님까지도 보게 할 문제로 쓰리라. 기독교란 하나의 커다란 저주, 커다란 부패, 커다란 복수의 본능일 뿐이라고, 그리고 기독교는 불멸하는 인류의 영원한 오점이라고.


가치의 가치 - 도덕의 계보



이처럼 무모하리만치 과격하고 단호한 니체의 입장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그것은 후세에 이른바, 계보학(genealogy)이라고 알려진 그의 철학적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계보학’이란 당연시되어 의심하지 않았던 개념이나 가치(예를 들어 진리, 선, 이성)가 어떻게 만들어져 변화되며, 인간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연구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니체는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개념이나 가치가 본래부터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어떠한 것’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았다.

이 같은 전제로 니체는 기존의 모든 개념과 가치를 심판대 위에 올려놓았고, 그 개념이나 가치의 이면에 있는 것을 드러내려 했다. 니체에 의하면, 그것들의 이면에는 권력의지가 있다. 이 권력의지야말로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는 동력이 되는 것이다. 니체는 이러한 권력의지는 인간에게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물에게 있다고 보았다. 동물이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권력을 유지하듯이, 인간 역시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권력을 확보하려는 의지가 충분한 존재다.

인간의 도덕이나 철학의 이면에 바로 이 권력의지가 작동되고 있으며, 선, 진리, 이성 따위의 도덕이나 관념은 권력의지의 충동과 다를 바 없다. 그는 말했다.

‘진리’는 충동과 욕구에 바탕을 둔 전반적인 평가로부터 유래한다. 진리는 환상, 오류, 유용한 거짓말, 속임수 등으로서 그 가치는 ‘생물학적 유용성’에, 그 기준은 ‘권리감의 상승’에 있다.

니체에 따르면, 이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옳고 그르냐가 아니다. 문제는 우리의 원초적인 욕망인 권력의지에 따라 권력의 증대로 나아가는 것에 있다. 이제 철학적인 모든 개념의 가치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가치를 가치 있게 보이려는, 그 ‘가치의 가치’인 권력 의지에 종속된다.

망치로 철학하는 법



물론 니체가 ‘네 멋대로 살아라!’라고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니체의 진정한 요구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가치에 대한 재평가가 아닐까? 그 속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으라는 말은 아닐까? 1888년에 쓴 그의 저서 『우상의 황혼』은 이러한 부제를 달고 있다. ‘망치로 철학하는 법!’ 그는 우리가 주저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는 약자의 가치가 지배하는 세상에 길들여져 있고, 그것이야말로 우리에겐 가장 큰 저주다. 약자의 가치를 오해하지 말기를. 우리를 주인으로 만들지 못하고, 세상에 길들여진 채 노예처럼 살아가게 하는 온갖 가치들이 니체가 말하는 약자의 가치다.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되려면 늘 새롭게 자신을 창조하는 강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의 삶을 노예화하는 사실을 망치로 깨부수고 해방되어야 한다.

니체는 우리에게 해방자가 되라고 권고한다. 그것은 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 속에 있음을 선포한다. 해방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철저히 격파함으로써 진정한 삶을 되찾으라고 권고한다. 모든 우상을 격파하고 동굴에서 나오라는 그의 외침은 망치처럼 우리의 뇌리를 때린다.

나는 망치이다. 이제 나의 망치는 형상을 감금하고 있는 동굴을 격노하여 내리친다. 부서진 바위 조각들이 비처럼 흩어진다.

주사위, 허무주의, 초인



니체가 이해한 세상은 두 개의 주사위 놀이와 같았다. 그는 주사위를 힘으로 파악한다. 이 두 힘의 총합은 늘 같다. 매번 던질 때마다 우연한 숫자가 나오는 놀이. 그리고 그 놀이의 무한한 반복, 차이와 반복의 끝없는 연속, 그는 이런 세상을 영원회귀라는 말로 표현한다.

필연성은 없고 우연성이 지배하는 세상. 그렇다면 그의 철학적 결말은 허무주의로 귀결되지 않을까? 그렇다. 중세에는 신이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철학적으로 허무주의는 없었다. 인간이 신을 죽인 이후, 인간은 허무주의에 빠졌다. “허무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최고의 가치들이 박탈되는 것이다. 목표는 없다. 왜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없다.” 그러나 니체의 허무주의는 패배적인 허무주의가 아니라 그 허무를 뛰어넘어야 하는 ‘능동적 허무주의’다.

니체는 이러한 인물의 표상으로 초인을 그리고 있다. 이 초인은 삶의 영원회귀를 알고 있기 때문에 현실에 충실할 수 있는 인간, 순간을 영원처럼 살 수 있는 인간, 창조와 쾌락의 원칙에 따라 해방된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다.



하이데거 - 철학하는 것에 날개는 있는가



엇갈린 명성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1889년 독일 남부 바덴 주의 메스키르히에서 상당 종치기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처음에는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였지만 이내 철학으로 관심을 돌린다. 그가 대학에 다닐 당시 교수로 재직 중이던 후설과 친분을 맺고 조교로 봉사하다가 후설이 그만두자 그의 후계자로 철학 교수가 된다. 그는 1933년에 프라이부르크 대학에 총장으로 취임하였으니, 한 학교에서 학생, 조교, 교수, 총장을 한 셈이다.

그의 주저 『존재와 시간』(1927)의 제목으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인간 존재의 문제를 탐구하였고, 시간성 안에 있는 인간에 대하여 파고들었다. 스승 후설은 주로 인식론의 문제를 연구했지만, 하이데거는 존재론의 문제로 관심 영역을 확장했다.

한편 하이데거는 늘 논란의 대상이다. 히틀러와 파시스트를 옹호했기 때문이다. 그의 대학총장 취임 연설 <독일 대학의 자기 주장>에는 나치에 대한 옹호와 선동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행보 때문에 그는 2차 대전이 끝난 후 강단에서 추방당한다. 그의 제자이자 연인이었던 한나 아렌트는 유태인이었기에 스승과는 다른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나치의 잔혹상을 고발하고 분석하여 그녀만의 철학을 정립한다. 비록 하이데거와 엇갈린 운명이었지만 전후 하이데거의 정치적 과오 때문에 그의 철학적 성과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노력으로도 하이데거를 다시 학문의 광장으로 불러들이지는 못했다. 만년에 하이데거는 가까운 친구들과만 교제하면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1976년 8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아니 좀 더 포괄적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 더 나아가 하이데거 식으로 표현하면 ‘존재란 무엇인가?’ 이를 알기 위해서는 어디에서부터 출발해야 되는가? 하이데거는 존재 일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 존재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해의 능력을 가진 인간 존재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바위나 나무와 같은 사물과는 달리 존재의 의미를 물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그렇다면 인간 존재란 무엇인가?

하이데거는 인간 존재를 해명하면서 현존재라는 용어를 새로 만들었다. 쉽게 풀면 ‘지금 여기에 있는 존재’라는 말이다. 즉, 인간은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서 결코 분리하여 사고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인간에 대한 이해는 신이나 이성 등과 같이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출발점에서 인간을 이해하고자 했던 과거의 철학적 접근과는 다른 출발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일상적이고 일회적이며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인간으로부터 출발한다.

하이데거는 인간 존재를 세계 내 존재라는 말로도 표현한다. 이는 현상학의 특징인 주체(인간)와 객체(세계)의 불가분의 관계, 즉 지향성이 하이데거의 철학에서도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은 ‘세계’와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또한 받고 있는 존재이다.

이 같은 하이데거의 인간 이해에 따르면 우리는 공간, 시간적으로 제약을 받는 존재임과 아울러 세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한낱 조건의 산물인가?

던져짐과 던짐



하이데거에 의하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특성을 사실성, 전락성, 실존성 등의 세 가지 실존 범주를 통하여 설명하고 있다. 하나하나 살펴보자.

사실성: 우리는 선택해서 태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부모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고, 태어난 나라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으며, 성별 또한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다. 그것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이러한 사실성을 피투성이라는 표현을 써서 사용하기도 했다. 우리는 마치 우리의 선택과 무관하게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와 같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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