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하느님의 약속

조너선 모리스 지음 | 가톨릭출판사
하느님의 약속



조너선 모리스 지음

가톨릭출판사 / 2018년 8월 / 371쪽 / 18,000원





재판받는 하느님



하느님, 저희가 걱정되지도 않으십니까?: 우리가 하느님을 절실히 필요로 할 때, 그분은 어디에 계시는가? 마르코 복음서에 나오는 한 이야기는 고통에 관한 그리스도교 신학의 핵심 요소 가운데 하나인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아름답게 설명한다. 우선 이 이야기를 경청해 주기를 바란다.

어느 날 예수님은 군중을 가르치신 뒤 제자들과 함께 호수를 건너가고 계셨다. 어부로 일했던 제자들이 배를 부리는 사이에 예수님은 배에서 좀 주무시기로 하셨다. 예수님이 주무시는 사이, 밤이 되면서 바람이 사나워졌다. 제자들은 세찬 폭풍우 한가운데에 있음을 깨달았는데, 그 순간 차가운 호수 물이 들이쳐 그들이 탄 작은 배를 사정없이 집어삼키려 들었다. 그들은 고함을 지르며 갑판 저쪽으로 미끄러지듯 내달리면서 작은 배가 뒤집히지 않게 애를 써 봤지만 소용없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마르 4,38).’

큰 공포는 이런 것이리라. 하느님은 걱정하지 않으실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의 모든 탄원이 쇠귀에 경 읽기일지 모른다. 제자들이 이런 질문을 한 것은 배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였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역할을 했다. 그들은 불만을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표현하며, 하느님의 거룩한 아드님이신 예수님이 무관심하시다고 비난했다.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르 3,39~41)’

이 이야기에는 하느님 앞에 있는 우리의 자세와, 우리 앞에 계시는 하느님의 모습이 반영되어 있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무지와 자기중심적 생각, 하느님에 대한 부족한 신뢰를 보여 주는 것이다. 위협적인 곤경에 직면했을 때에 우리는 하느님의 권능에 의문을 갖고, 그분의 선하심을 의심한다. 전에는 매 순간을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여기더니, 이제는 그 하느님을 손가락질하는 것이다.

킴은 남편 짐과 풍족하게 살았다. 그들의 삶은 남부럽지 않았고, 그들도 자신들의 삶에 만족했다. 그들은 온갖 여가 생활을 즐기면서도 주일에는 시간을 내어 성당에 나갔지만, 그렇게 열성적이지는 않았다. 그들에게 종교는 문화적인 것이었다. 종교는 자녀들에게 도덕 생활의 원칙을 가르쳐 주었고, 킴과 짐은 자녀들이 종교를 통해 그 원칙을 배울 수 있다는 데서 양심의 위안을 얻었다.

어느 토요일, 킴은 짐을 데리러 공항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킴의 자동차 엔진이 멈춰 버렸다. 그녀는 서서히 갓길로 가서 차를 세웠다. 그녀는 차의 보닛을 열었다. 그러고는 생각했다. ‘내가 차에 대해 뭘 안다고?’ 얼떨떨한 기분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하며 그녀는 두 손으로 난간에 턱을 괴고 발아래로 지나다니는 자동차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때 요란한 소리가 났다. 대형 트레일러가 킴의 차를 뒤에서 들이받는 바람에 그녀는 튕겨서 바로 아래 고속도로로 떨어졌다. 구급차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킴은 겨우 목숨만 붙어 있는 상태였다. 킴은 근처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며칠이 지난 뒤에야 열네 군데가 골절되고 뇌진탕을 입었음을 알았다. 킴은 전신에 깁스를 한 채 12주를 지냈다. 게다가 그녀는 줄곧 극심한 통증에 시달렸다. 어떤 약도 통증을 덜어 주지 못했다. 그녀를 보는 짐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녀 곁을 지키는 것이 전부였다.

어느 날인가 그녀 곁에는 짐도, 자녀들도 아무도 없었다. 옆 병실의 환자 보호자인 한 여자가 혼자 있는 그녀에게 인사차 들렀다가 함께 기도하고 싶은지 물었다. 킴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방문객은 킴의 침묵을 소리 내어 기도해도 좋다는 허락으로 받아들였다. 킴은 그때까지도 그 방문객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기도를 시작하자, 킴은 할머니가 소파에 앉아 소리 내어 기도를 바치는 모습을 보았던 어린 시절의 좋은 추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기도가 시작된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킴은 자신의 통증이 왠지 완화되었음을 깨달았다. 킴과 방문객이 기도를 마치자마자 짐이 도착했다. 30분 뒤 그녀는 짐에게 자신이 조금 전에 겪은 일을 털어놓았다. 짐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킴은 서서히 다시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과 다르게 느껴졌다. 통증을 더 이상 참기 힘들어지자, 킴은 곁에 있는 친척에게 이전에 바쳤던 그 기도를 함께 바치자고 요청했다. 킴은 말을 더듬거리며 한 글자씩 힘들게 기도를 읊으면서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킴은 기도문에 담긴 의미를 마음으로 온전히 느끼기 시작했다. 점차 기도문이 자신의 기도가 되고 있음이 느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를 짓누르던 통증이 점점 잦아들었고 그녀는 이제 좀 더 편하게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짐에게도 조금씩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짐은 비록 그녀가 완쾌되지는 않았지만 하루하루 더 나아지고 있음을 알았다.

담당 간호사는 킴에게 기분이 좋아진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 그러자 킴이 대답했다. “하느님께 말씀드렸지요.”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던 간호사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오, 킴! 무슨 일이 일어났군요!” 그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킴은 자신에게 일어난 그 일이 간호사가 짐작한 것처럼 ‘정신력의 문제’가 아님을 알았다. 그 일은 그녀의 내부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었다. 그 이후 그녀 곁을 지키는 사람은 규칙적으로 기도를 바쳤다. 그리고 이 설명할 수 없는 일로 인해 그녀의 가족과 친척은 각자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게 되었다. 짐은 사제가 언제 병실에 들를 것인지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큰아들은 그해에 견진성사를 받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다른 아들은 종교 수업에 큰 흥미를 가졌다. 그들은 모두 영혼의 문을 열어 하느님의 축복을 받았다.

킴은 이 이야기를 하면서, 하느님은 우리를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신다고 말했다. 사고를 당했을 때와 그 이후에 하느님의 침묵은 무관심이 아니었다. 하느님은 그녀와 함께 고통을 겪으셨고, 겉보기에는 잠을 주무시는 것만 같았지만, 그녀가 와서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거세게 묻기를 줄곧 기다리셨다. 나중에 그녀는 처음 회복되던 순간을 떠올리며, 잠들어 있었던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자신이었다고 고백했다. 사실 우리는 홀로 고통을 겪는다고 여기지만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고통을 겪으신다. 그분은 우리가 구석에 있을 때 함께 계시고, 우리가 곤경에 처했을 때 함께 계신다. 예수님은 파도가 거세게 몰아치고 돛대가 부서질 때에 미친 듯이 요동치는 난파선에 주저앉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누구의 손길이 통제하고 있는지를 아신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실 때는, 제자들과 함께 있던 배 위에서나 킴의 병실에서 하셨던 것처럼, 당신의 권능이 약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신다. 하느님은 힘이 있으시고 인간사에 꼬박꼬박 관여하신다고 믿는 이들은 킴의 이야기에서 많은 의미를 발견할 것이다. 자신의 체험과 신앙을 통해 킴의 일화가 자신과 무관한 일이 아님을 알 것이다. 하지만 킴이 그 일을 겪지 않았더라면 이런 믿음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예전의 킴이었다면 이런 일을 단지 또 하나의 미스터리, 다행히도 긍정적인 미스터리로 치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삶에 하느님이 현존하신다는 체험을 통해 그녀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그녀의 치유는 당신이 실제로 돌보신다고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활동 방식이었다.

제자들은 시련에서 벗어나 더 순조롭게 항해했다. 킴도 그랬다. 이는 우리에게 종종 일어나는 일이 아닌가? 우리는 고통을 다시는 겪으려 하지 않으면서도, 우리가 고통을 통해 축복을 얻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악에서 선을 얻는 것, 이것이 고통에서 보게 되는 첫 번째 의미다. 그것은 인간의 고통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가 얻은 것과 잃은 것이 비례하지 않음을 나타내는 다른 사례들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위한 예수님의 뜻이 비록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계획과 다를 때조차도 완전하다고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참된 신앙은 하느님이 개입하지 않기로 작정하실 때에도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것이다.

하느님의 약속: [현실의 비참함] <그리스도교에서 가르치는 사랑이 지극하신 하느님> 하느님은 사랑이 지극하신 당신의 본성에 의해서 우리가 온전한 인간이 되도록 고통을 허용하신다. 그런데 인간이 된다는 것은 자유 의지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느님은 설사 우리의 선택이 비극적인 결과를 낳는다 하더라도 우리의 선택을 존중하신다. 만일 하느님이 우리가 고통을 겪지 않도록 막고자 개입하시어 우리의 나쁜 결정들을 모두 하나하나 되돌리신다면 그것이 사랑일까? 우리가 정말로 자유로운 것일까? 우리는 고통을 겪지 않겠지만, 사랑하고 사랑받는 데에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상처투성이 세상은 하느님의 원래 계획에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가 완전한 계획을 뒤바꾸어 버렸다. 힘든 길을 선택한 이가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일 때, 세상에 거짓말쟁이와 사기꾼, 살인자, 학대하는 이들이 있다고, 또 그들이 우리를 괴롭힌다고 우리가 하느님을 탓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하느님에게 아무런 탓이 없다고 너무 쉽게 여기지는 말자. 만일 하느님이 사랑이 지극하고 전능하시다면, 우리가 순종 대신 이기심을 선택하리라는 것을 아시면서도 왜 보완할 계획은 생각하지 않으셨을까? 쓰나미와 지진처럼 이른바 하느님이 하신 일들로 야기된 그 모든 고통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는 그 고통들을 자유 의지 탓이라고 여길 수 있는가?

[약속] 나는 고통을 자유 의지의 탓으로 여길 수 있다고 본다. 다만 한 가지 조건 아래에서만 그렇다. 곧 하느님이 그 모든 고통과 악 하나하나에서 더 큰 선을, 고통과 악으로 잃었던 그 선보다 더 좋은 것을 가져다주실 수 있다는 전제에서만 그 모든 고통을 자유 의지의 탓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이 약속이다! 그것이 상처투성이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다.

피터 크리프트는 그의 저서 『고통 이해하기』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하느님은 모든 고통을 일시에 없애실 정도로 강하시고, 우리의 축복만을 원하실 만큼 사랑이 넘치시며, 무엇이 우리에게 축복이 되는지를 늘 알고 계실 만큼 지혜로우시다. 그런 하느님이 당신이 창조하고 지탱하시는 세계에, 끊임없이 고통을 허락하시는 유일하고도 아주 충분한 근거는 우리에게 고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고통이 필요하다는 것’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완전히 실현되도록 이끌어 줄 그 무엇, 훨씬 더 큰 선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모두 악에서 선을 가져다주시는 하느님의 권능과 계획의 증언이다. 이 권능과 계획은 실제로 우리의 구원에 대한 이야기의 시작이자 중간이며 마침이다. 비극적인 사고로 자녀를 잃은 부모는 자기 자녀의 죽음에서 ‘더 큰 선’을 가져다주시는 하느님관에 대해 혐오할 것이다. 나는 ‘더 큰 선’에 대한 이 원리가 비극적으로 자식을 잃은 부모의 깊은 고통, 어쩌면 우리가 쉽게 상상할 수조차 없는 큰 고통과 어떻게 부합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먼저 다음의 암시들에 관해 생각해 보자. 이 암시들이 증거는 아님을 유념해야 한다.

<고통에서 얻는다> 미식축구단 인디애나폴리스 콜츠의 감독을 맡았던 토니 던지는 왜 고통이 때로는 아주 유익한지를 직접 체험했는데, 어느 날 그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조던은 사물에 대한 감각은 있지만 통증은 느끼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좋은 것 같았어요.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조던을 얻고 나서 지난 5년 동안 고통에 관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아이들은 조금 아파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요. 아이들이 좋은 것과 해로운 것의 차이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고통이 필요합니다. 조던은 과자를 정말 좋아합니다. 어느 날, 아이는 쟁반에 담긴 과자보다 오븐에 있는 과자가 훨씬 맛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아내가 보지 않을 때에 아이는 오븐을 열고 바로 팬을 꺼내다가 손에 화상을 입었습니다. 그러고는 쿠키를 먹으려다 혀를 데었지요. 하지만 전혀 고통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조던은 어떤 게 자기에게 나쁜 것인지를 알지 못해요. 그 애는 아무 것도 겁내지 않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 애를 끊임없이 지켜봐야 합니다. 그 고통, 그 작은 일시적인 고통 때문에, 사람들은 무엇이 해로운지를 배운다는 것을 우리는 알았습니다. 사람들은 올바른 것을 두려움을 통해 배웁니다. 우리는 고통을 통해 치유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우리는 고통을 통해 더욱 인간적인 사람이 된다 / 역경에서 빛이 난다> 고통을 심하게 겪고 극복해 낸 사람은 더 나은 사람이 된다. 아픔과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인생 이야기가 더 나아진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은 위기가 닥칠 때 가장 크게 드러난다. 9.11 테러가 일어났을 때를 생각해 보라.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국민들이 하나로 단합했다. 그런 고통을 겪지 않았다면 그와 같이 단합할 수 있는 역량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스럽고 무의미한 죽음을 맞으면, 하느님이 어떻게 온갖 악에서 더욱 큰 선을 가져다주시는지에 관해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암시들로는 파악하기 어려워진다. 하지만 우리의 이성을 계속 사용하면서, 이제는 초자연적 영역을 주시하면서, 우리는 고통을 통해 영적인 선을 얻고, 이 영적인 선은 또 다른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다.

<영적인 선> 던지 감독의 사례를 통해 영적인 선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그는 다섯 살 된 아들이 앓는 선천적인 질병을 통해서 고통이 어떻게 자연적인 수준에서 어느 정도 선을 가져다주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나중에 같은 주제로 이야기하면서 이를 상당히 더 발전시켰다. 그의 깊은 고통을 헤아려 보면 그가 한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불과 1년 전에 열여덟 살이었던 그의 맏아들 제임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일을 두고 던지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때때로, 고통은 우리를 다시 아버지께 향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 됩니다.”

물론 그는 아들의 죽음이라는 고통스러운 체험을 통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아버지께 향하는 길을 배웠고, 그래서 천상의 아버지와 잘 지내게 되어 기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설명할 수 없는 비극에서조차도 하느님은 영적인 선을 가져다주실 수 있으며, 또 가져다주신다고 말하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고통이 무슨 역할을 하는지를 이야기하면서 초자연적 덕으로 우리의 성품과 성장을 단련하는 그 영적인 선에 대해 ‘기뻐하라’라고 격려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 3-5).’

<더 큰 선을 가져다주시는 하느님> 그래도 아직,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만일 우리가 고통으로부터 얻은 모든 인간적인 선에 이런 영적인 선을 더 얻는다고 해서, 처음에 잃은 것보다 ‘더 큰 선’을 하느님이 가져다주셨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더 이상 고통이 없는 날이 오지 않는 한, 고통의 문제에 대한 결정적인 해결책이 우리에게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더 큰 선’에 해당하는 것을 영원한 안식처인 천국으로 바꾼다면, 하느님이 어떤 이들은 살게 하고 어떤 이들은 죽게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웃게 하고 어떤 이들은 울게 하신다고 해서 그분을 변덕스럽다고 볼 수는 없다. 만일 하느님이 우리의 행복에 아주 관심이 많으시다면, 그리고 하느님을 우리 삶에 모심으로써 영원한 보상을 받는 것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결코 완벽하게는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왜 하느님이 아주 가끔씩만 우리 삶에 개입하고자 하시는지 상상할 수는 있다. 우리 자신이 또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한동안 겪는 고통이 바로 가장 좋은 일일 수 있다. 그 고통은 완전한 사랑의 행위일 수 있다.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