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그 은밀한 삶과 치욕스런 죽음
노먼 레브레히트 지음 | 마티
클래식, 그 은밀한 삶과 치욕스런 죽음
노먼 레브레히트 지음
마티 / 2009년 2월 / 512쪽 / 19,000원
거장들의 시대
개척자들: 소리 녹음은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이 포노그래프에 대고 ‘메리는 작은 양을 가졌네’라는 노래를 소리쳐 부른 1877년에 시작되었고, 대중적인 시장을 얻은 것은 나폴리 태생의 테너 엔리코 카루소가 1902년에 부른 아리아 음반 덕분이었다. 그러나 녹음이 실황연주와 구별되는 독자적인 음악 행위로 거듭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은 1920년에 독일의 한 예술가가 내지른 외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브람스의 친구였던 요제프 요하임의 후계자 빌헬름 켐프는 희미해져가는 낭만주의 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레코딩이 그저 돈을 버는 또 다른 기회 이상임을 예리하게 간파했다. 예술가가 실수의 두려움을 극복하기만 한다면 음반은 완벽한 작품을 남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었다. 이로써 음악 문화가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정확성과 속도가 예술적 영감보다 더 중요한 연주 목표가 되었고, 켐프처럼 자신의 연주로 기록을 세우고 싶어 하는 젊은 음악가들이 계속 나타났다.
외부 소음 문제를 극복한 최초의 레코딩은 미국 출신의 젊은이 프레드 가이스버그가 나폴리 태생의 엔리코 카루소를 설득해서 열 곡의 아리아를 녹음한 음반이다. 레코딩이 문화적 산물로 정착하는 데 공을 세운 거인으로 세 명을 드는데, 에디슨이 표면에 소리를 새겼고, 베를리너가 그라모폰을 발명했다면, 가이스버그는 음악 산업을 만들어낸 장본인이었다. 1902년 3월 가이스버그는 오페라 「게르마니아」의 주인공 역을 맡은 테너 엔리코 카루소에게 매료되어 그에게 음반 제작을 제안했다. 작은 키에 뚱뚱하고 못생긴 카루소는 도저히 스타가 될 것 같지 않았지만, 당시 대중들은 무대와 보도용 사진에 실린 외양이 아닌 귀에 들리는 소리로 판단했다. 음반에서 카루소는 찬탄을 자아낼 만큼 편안하게 노래했고, 그의 든든한 저음은 음반 특유의 잡음을 상쇄시키며 안정감을 부여했다. 결국 그 음반은 날개 돋친 듯 팔려 그라모폰 최초의 히트작이 되었다.
포맷 전쟁과 메이저 레이블: 음반사들이 나름의 정체성을 갖추기까지는 대략 반세기의 시간이 걸렸다. 1914년 에로폰(Aerophone)에서 조노폰(Zonophone)까지 무려 78개에 달했던 음반사는 이후 매각과 합병을 거치면서 그 수가 대폭 줄었고, 유럽과 미국의 레이블들이 이런저런 식으로 손을 잡았다. EMI는 자사의 HMV 타이틀을 RCA를 통해 미국에 발매했다. 데카는 미국에서 ‘런던’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한편 EMI는 미국의 컬럼비아와 빅터 레이블 대행으로 이들의 음반을 유럽에 발매했다. 미국의 음반사들은 유대인들의 소유였고, 영국에서는 스튜디오 인력이나 임원들 중에 유대인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레이블 특유의 스타일은 브랜드로 확립되었다. RCA는 대형스타, 웅장한 소리를 대표했고, CBS는 자유롭게 삶을 즐기는 쾌락주의자 이미지를 나타냈다. 중산층 미국과 맨해튼 혹은 공화당과 민주당으로 이 둘의 차이를 정의할 수도 있다. RCA가 시장을 선도했고 CBS가 그 뒤를 따랐다. 영국으로 눈을 돌리면 EMI는 보수파였고, 데카는 급진파에 속했다. 하나는 우직한 영국산 불독, 다른 하나는 우아한 샴고양이었다.
독일인들은 패배의 상처를 딛고 문명 재건에 힘을 모았다. 도이치그라모폰은 폭격을 맞은 베를린을 떠나 하노버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는 동안 음반사의 주인이 바뀌었다. 1941년 도이치그라모폰은 가전업계의 거인인 지멘스운트할스케 소유가 되었고, 에른스트 폰 지멘스가 대표로 있는 전기음향 부서에 할당되었다. 지멘스운트할스케는 도이치그라모폰을 인수하자마자 나치 친위대로부터 노예 인력을 사들이기 시작했고, 총 10만 명의 남녀와 아이들이 독일로 끌려와 지멘스의 공장과 실험실에서 죽음과 야만적인 대우와 폭격의 위협을 받으며 강제 노역에 시달렸다. 지멘스는 이들의 노동으로 V2 로켓에서 클래식 음반에 이르는 많은 물품을 생산했다. 히틀러가 패한 뒤에도 지멘스는 서독 산업계를 대표하는 자신의 자리를 그대로 지킬 수 있었고, 회사는 반인륜적인 범죄에 대한 어떠한 사과와 보상도 하지 않다가 1998년 뒤늦게 미국이 상품 불매운동을 하겠다며 위협을 가하자 그제야 홀로코스트 보상 기금을 설립했다. 이렇게 도덕적으로 때 묻은 회사가 독일 음악의 부흥을 이끌며 예전의 영광을 되찾는 데 앞장섰다. 에른스트 폰 지멘스는 1945년 아르히프(Archiv) 레이블을 설립했고, 폭격을 피한 바로크 양식의 교회를 찾아다니며 오르간 음악을 녹음했다. 독일은 적법한 음악 유산을 다시 보존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물은 독일인들의 발명품인 마그네틱테이프에 담겼다.
기적 위에 꽃핀 기적: 소니, CBS-소니, 필립스, 폴리그램으로 구성된 컨소시엄이 마침내 CD기술을 완료했다는 사실이 1982년 8월 31일 도쿄에서 선언되자 음반 산업에 희망의 새벽이 열렸다. 10월 1일 소니의 CDP-101 플레이어가 일본에서 출시되었다. 빌리 조엘의 <52번가>를 시작으로 50종의 CBS-소니 CD가 출시되었다. 소니의 CDP-101은 700달러에 팔렸고 CD는 LP 가격의 두 배였다. 출시된 음반들은 하이파이 오디오 취미를 가진 부유한 중산층 애호가들이 좋아할 만한 음악들로 골랐다. 5분의 1이 클래식이었다. 일본에서의 반응은 폭발적이어서 일주일 만에 물량이 바닥났고, 공급이 딸려서 아홉 달이나 기다려야 했다. 유럽 출시는 1983년 3월이었고 폴리그램이 1차분으로 100종의 CD를 시장에 풀었다. 영국에서는 한 달 만에 3만 장의 CD가 팔렸고, 프랑스, 서독, 네덜란드에서도 반응이 비슷했다. 자동차에 장착되는 재생기기가 등장했고, 1984년 9월에는 워크맨 CD가 출시되었다. 그동안 재생기의 가격은 상당히 떨어져서 어지간한 일반인들도 구입할 수 있었지만, 음반은 여전히 높은 가격에 팔렸고 그만큼 레이블의 수익도 늘어 1986년 마침내 CD의 판매고가 LP를 앞질렀다. 절망의 시대는 이제 끝났다. 비틀즈 이래로 고전하던 클래식 음악이 처음으로 두 자릿수의 시장점유율을 기록했다.
디지털 사운드는 놀라울 정도로 투명했다. 나는 차이콥스키의 「1812년 서곡」을 언론용 홍보 음반으로 들었는데 시카고 심포니 첼로의 목재 이음매에서 나는 소음까지 생생히 들렸다. CD로는 마이크를 여러 대 설치한 첨단 녹음보다 초창기 스테레오 녹음이나 심지어 모노 녹음이 더 자연스러운 소리를 냈다. 푸르트벵글러, 페리어, 비첨, 크라이슬러, 카살스의 연주가 후대의 연주자들의 음반보다 더 많이 팔렸다. 음반 산업은 1980년대 내내 호황을 맞았지만 서서히 하락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모두가 디지털 기술을 반긴 것은 아니었다. 「사계」음반으로 200만 장을 팔아 치운 영국 출신의 기묘한 반문화 영웅 나이젤 케네디는 EMI로 하여금 아날로그 기계로 녹음하게 했다. 그는 음반 내지에 이렇게 썼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반들의 상당수가 비닐 음반이었다. 그리고 더 많은 연주자들이 오늘날 음악 유행이 길들여 놓은 분석적이고 건조한 테크닉 위주의 연주에서 벗어날수록 지금보다 아름다운 연주가 훨씬 더 많이 나올 것이라 생각한다.”
CD가 열풍을 일으키면서 가장 많은 손해를 본 레이블은 필립스였다. 디스코 열기가 갑작스럽게 꺾이자 1983년 부채가 2억 달러에 육박했다. 비지스는 그 와중에 소송을 걸어 7,000만 달러를 쥐어짜갔다. 성악가 얀 팀머가 실권을 잡으면서 폴리그램 본부를 런던과 뉴욕으로 옮겼고, 지멘스의 주식을 사들여 음악과 영화 시장 전체를 네덜란드 기업의 손아귀에 넣었다. 1989년에 그는 폴리그램을 암스테르담 주식거래소에 상장했고 이때 기업의 가치는 56억 달러였다. 이런 조치는 클래식 음악에 혹독한 결과를 가져왔다. 자율적으로 운영되던 새 레이블은 이제 주주들의 이해에 따라야 했고, 모든 주요 경비에 대해 본사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미친 돈 놀음: 소니가 클래식 산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전만 해도 이 분야는 비교적 소박하게 운영되었다. 오가(소니의 사장)가 등장하고 카라얀의 DG프로듀서였던 귄터 브레스트가 그의 클래식 부서 사장으로 임명되면서 모든 게 바뀌었다. DG에서 눈치만 보며 살았던 브레스트는 소니를 독일의 노선에 맞게 재정비했고 본사를 함부르크로 옮겼다. 브레스트는 세련된 노넨스티크(Nonnenstieg)에 위치한 세기말의 화려한 저택을 사무실로 얻었다. 돈은 문제가 아니었고 미적 취향도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했다. 많은 이들이 재빨리 계산해보더니 자신의 개런티를 두 배로 달라고 요구했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세 차례 세션을 하는 데 18만 마르크(12만 5,000달러)를 요구했는데, 이는 수지를 맞추려면 음반을 4만 장이나 팔아야 하는 액수였다. 클래식 녹음의 경제는 시장 현실과 따로 놀았다. 브레스트 밑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엄청난 봉급 인상에 환호했다. 데카에서 4만 파운드의 연봉을 받던 프로듀서가 하룻밤 사이에 소니에서 10만 파운드를 받게 되었는데, 그래도 그는 동료들 가운데서 봉급이 가장 낮은 축에 속했다.
소니의 돈 자랑은 다른 레이블에도 영향을 미쳤다. 남자들 특유의 허세로 가득한 필립스의 알랭 르비는 자신의 레이블이 더 많은 돈을 써서 전쟁에서 이기도록 독려했다. 수요의 증가가 눈에 띄지 않는데도 메이저 레이블이 해마다 발매하는 음반의 숫자가 세 자릿수로 증가했다. 한편 수집자들은 옛날의 LP를 CD로 대체하는 일을 마쳐 더 이상 CD를 구입하지 않았다. “미국의 평균적인 음악 애호가들이 보유한 LP는 100장 정도였습니다.” 한 마케팅 담당자의 말이다. “1980년대가 되자 사람들이 한 해에 8장에서 10장 정도의 CD를 구입해 과거 음반을 대체했고, 1990년대 초가 되면 서너 장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한 음반사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CD가 등장하기 전에 클래식이 전체 음반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6% 정도였습니다. 1987년이 되면 두 배로 치솟아 12%에 이르렀고, 1990년대 초에는 다시 6%로 곤두박질쳤습니다.” 좋았던 시절은 끝났다. 블랙 먼데이의 악몽과 소비주의의 종말은 전 세계적인 경기침체를 불러왔다. 카라얀이 죽고 열네 달 뒤에 번스타인마저 죽자 이제 누구나 아는 마에스트로는 더 이상 세상에 남아 있지 않았다. 계속해서 등장하는 클래식의 새 얼굴에 당혹감을 느낀 소비자들은 거장들과 죽은 자들의 이름에 매달렸다. 하지만 소니가 계속 돈을 쏟아 붓는 한 다른 음반사들도 어쩔 수 없이 보조를 맞춰야 했다.
10년이 흘러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들마저 사업을 정리하기 시작했을 때 다들 서로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오랫동안 공급이 치솟았는지, 소니는 오가에 대한 회계감사에 들어가기 전에 1억 달러나 날려먹는 것을 왜 그냥 보고만 있었는지, 또 예술가, 프로듀서, 기획자, 비평가, 라디오 진행자, 오케스트라 매니저들 가운데 이 모든 행위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용감하게 고발한 사람이 왜 그리도 없었는지 말이다. 가게마다 팔리지 않은 CD가 쌓여갔지만 다들 잘 팔리고 있는 듯 호황인 듯 시치미를 뗐다. 《그라모폰》은 클래식 음반의 황금시대를 선언했고, 《BBC 뮤직》이 거센 추격을 벌였다. 특히 이 잡지는 독자들에게 공짜 음반을 끼워줘 CD의 격을 심하게 떨어뜨렸다. 클래식이 부활했다는 헛된 믿음에 힘입어 ‘클래식 FM’라디오[클래식 음악의 대중화를 기치로 1992년 9월에 첫 방송을 시작했다]가 개국했다. 자기기만의 함정에 걸려든 클래식 음악계는 에우리피데스의 경고를 무시했다. “신은 멸망케 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먼저 미치게 만든다.”
그런데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월드컵 열기가 한창 들끓던 1990년 7월 7일, 세 명의 테너가 로마 아레나에서 팔짱을 끼고 함께 노래해 기록을 세웠다. 공공연한 라이벌이었던 파바로티와 도밍고는 백혈병을 이기고 돌아온 호세 카레라스에게 힘을 주기 위해 함께 무대에 올랐다. 언론들은 겉만 번드르르한 쇼라며 무시했고, 데카는 성악가들이 고정 급료를 받고 노래하는 조건으로 음반을 발매해주기로 했다. 두 시간 노동에 100만 달러면 서로에게 괜찮은 장사였다. 스리 테너는 카라칼라 야외 욕장에서 행복하게 노래를 불렀고, 텔레비전을 통해 이를 지켜본 전 세계 청중들은 음반 가게로 달려갔다. 이 음반은 무려 1,400만 장이나 팔려 단일 클래식 음반으로는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음반이 되었다.
하지만 클래식 음반은 계속해서 위축되었다. DG, 데카, 필립스의 2001년 음반 판매고를 전부 합한 것이 10년 전 한 회사의 매출에도 미치지 못했다. 새로운 ‘클래식’ 스타들은 과대포장이 거둔 승리였다. EMI는 헬싱키 오페라 오케스트라 출신으로 《플레이보이》 누드모델로 등장한 바 있는 가슴이 풍만한 바이올리니스트 린다 브라바를 내세웠고, 데카는 몸에 착 붙는 속옷을 걸친 여성 현악 4중주단 ‘본드’로 맞불을 놓았다. 섹스어필이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음반사들은 캐나다에서 늑대를 키우며 사는 피아니스트, 불이 들어오는 빨간 양말을 신은 피아니스트 등 사연으로 승부하기 시작했다. 트랜스젠더 매춘부로 BBC의 리얼리티 드라마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던 재키 매컬리프는 데카와 계약했다. 앞을 못 보는 팝가수 안드레아 보첼리는 클래식으로 전향하여 발레리 게르기에프가 지휘한 베르디의 「레퀴엠」에서 억지로 한 자리를 맡았지만, 성악적으로는 재앙이었다. 이제 클래식 CD를 구입하는 것은 문명화된 취향의 표현이라기보다는 복권 구입에 가까웠다. 유니버설은 “지루한 부분은 다 편집해낸” 클래식 커츠(Classic Cuts)라는 앨범을 내놓았다. BMG는 “당신에게 필요한 유일한 클래식 앨범”을 두 장으로 내놓았다. 음반업계는 이렇듯 자신들이 만들어내는 제품 표지에 음악의 부고장을 쓰고 있었다.
음반의 죽음 그 이후: 그리스가 찬란했던 옛 과거와 이를 보러온 관광객들에게 의존하듯이 클래식 음반 역시 골수팬들의 상상력에 힘입어 근근이 버티어간다. 《그라모폰》과 《BBC뮤직》에 실리는 음반 평들은 대부분, 어쩌면 절반 정도가 이제 자기 홍보로 전락했다. 연주자들이나 친구, 정부 혹은 후원자들이 돈을 내고 평을 받는, 따라서 평자의 엄격한 기준이나 상업성의 근거는 찾기 어려운 허영의 산물이 되고 말았다. 나머지를 차지하는 것은 카탈로그의 빈틈을 공략하는 낙소스 음반들과 우는 소리나 해대는 소규모 레이블 음반, 그리고 옛 음원들을 낚아챈 재발매 음반이다. 새로운 미디어가 클래식 음반의 기력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셔츠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60GB의 아이팟은 CD 600장에 해당하는 교향곡과 오페라를 저장할 수 있다. 공급과잉으로 남아도는 음반은 중고 상점에 가면 3달러면 살 수 있다. 클래식 음반은 객관적인 가치를 잃어버렸다. 음악업계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사멸해가는 문화에 대해 분통을 터뜨리고, 그나마 다운로드 사업이 활발해지기를 기도하는 것뿐이다. 물론 그렇다 해도 소비자들이 오페라 극장이나 콘서트홀로부터 실황 음악을 구입할 수 있는 시대에 왜 굳이 음반사로부터 음악을 구입해야 하는지 의문으로 남는다.
어떻게 보든 클래식 음반은 죽었다. “누가 그것을 죽였는지 알고 싶겠죠. 월스트리트가 죽였습니다. 음반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클래식이야말로 우리의 토대이자 우리가 하는 일의 기반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클래식 분야의 음반을 제작하면서 설령 돈을 잃을지언정 행복했습니다. 한데 투자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감상적인 면이 보이면 사람들을 갈아치웁니다.” 소니 유럽의 회장을 지냈던 폴 버거는 이렇게 말했다. 기업 문화는 창조성을 짓누르고 공모를 조장했다. 유니버설, 소니-BMG, EMI, 워너, 이렇게 거대 레이블 넷이 미국 시장의 85%를 차지하며 사실상 독점을 행사했다. 배급을 거대한 서너 개 메이저가 좌지우지하는 상황에서 기업화를 피할 수 없는데, 이는 클래식 음반이 주저앉게 된 주요 원인이었다.
과잉제작 역시 클래식의 몰락을 촉진한 요인이었다. 과잉제작은 엘자 실러가 은퇴한 뒤로 카라얀이 DG에서 작업하는 음반의 양을 늘리면서 시작되었다. 그와 라이벌들이 똑같은 작품을 반복적으로 계속 녹음하는 것이 문제였다. 1994년 시중에서 팔리는 드보르자크의 「신세계」 교향곡 음반만 79종이었다. 2006년 스웨덴의 한 웹사이트는 435종의 비발디 「사계」음반을 확인했고, 아마존 닷컴에서 구입할 수 있는 베토벤의 5번 음반은 276종이었다. 카라얀, 마리너, 솔티, 하이팅크의 음반만도 2,000종 가량이나 된다. 또한 CD는 반영구적 특성을 내세워 소비자들을 공략했지만, 결국은 그 덕분에 소비자들이 낡은 음반을 새 음반으로 교체할 필요가 없게 되어 산업이 큰 타격을 받았다. 브라티슬라바에서 제작되는 낙소스 음반이나 베를린에서 만들어지는 DG음반이나 사운드의 선명도는 비슷하고, 데카 스튜디오의 최상의 소리도 이제 교외 침실에서 여드름투성이 10대가 쉽게 복제해낼 수 있는 상황이므로 레이블마다 갖고 있던 독특한 음향의 신비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제작 단가가 떨어지자 CD는 신문이나 잡지에 공짜로 끼워주는 홍보용 미끼로 전락했다. 한때 동경과 열망의 대상이던 클래식 음반은 랩으로 씌워 공짜로 돌리는 상황에서 사회적 가치를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