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흔드는 글쓰기
프리츠 게징 지음 | 흐름출판
마음을 흔드는 글쓰기
프리츠 게징 지음
흐름출판 / 2016년 12월 / 428쪽 / 15,800원
삶, 읽기, 글쓰기
왜 글을 쓸까
글을 쓰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많은 작가들이 청소년 시절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고, 그들에게 글쓰기는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굳이 이유를 물을 필요도 없다. 이들은 이야기에 매료돼 있거나, 스토리를 만드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혹은 언어로써 유희를 즐기기 위해 글을 쓴다. 또 어떤 작가들은 글을 통해 과거를 꼭 붙들어놓기 위해 글을 쓴다. 그리고 인생의 부족함을 메우고, 유년 시절의 침묵을 극복하고자 자신의 삶을 글로 쓰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가 하면 세상의 온갖 일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으로 글을 쓰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자신이 경험한 것 중 놀랄 만하거나 감탄스러운 것들을 머릿속에 고정시키고 이를 언어로 형상화하고, 이것을 통해 스스로 변화되기를 원한다.
즉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보완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글쓰기는 삶에 개입하거나 지속적으로 영향을 줄 수도 있다. 많은 작가들에게 글쓰기는 정말 중요해서, 글을 쓰지 않는 삶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인데, 창작의 희열과 고난을 모두 겪은 플로베르는 이렇게 말했다.
“글쓰기란 참으로 근사한 일이다. 글을 쓰면서 우리는 더 이상 자신에게 머물 필요가 없고, 자신이 창조한 우주에서 움직일 수 있으니 말이다. 예로 오늘 나는 남자가 되었다가 여자가 되기도 하며, 가을날 오후에 낙엽을 밟고 말을 타고 숲을 지나가기도 한다. 나는 또 멋지고 근사한 말(馬)에, 잎사귀에, 바람에, 주인공이 하는 말 속에 존재할 수도 있고, 사랑에 빠진 주인공의 눈을 감게 만드는 불타는 태양 안에 존재할 수도 있다.”
어쩌면 당신은 이런 질문을 할지 모른다. “그저 글 쓰는 재미를 느끼고 싶을 뿐인데, 왜 굳이 힘들게 ‘써야만’ 할까?” 글 쓰는 것이 간단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딘가에 몰두해서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실감나게 전달하는 것은 ‘그리 간단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신이 쓴 원고가 낯선 사람들 앞에 던져진다면 분명히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아마 당신도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등장인물이 고통스러워하는 내용의 글을 써서 낭독했지만, 듣는 사람들이 지루한 표정을 짓거나 무관심하게 반응한 경우 말이다. 그제야 글이 의도했던 반응을 불러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표현하려는 내용을 정확하게 썼는지 의문을 갖게 됐을 것이다. 나중에 혼자서 그때 일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당신에게 부족했던 점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바로 서술 기법이라 할 수 있는 ‘테크닉’과 ‘스스로 글을 쓰는 활동’이 부족했을 것이다.
천재는 인내의 대가
이미 글을 쓰고 있거나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을지 고민해본 사람이라면 가끔 자신에게 이렇게 질문할 것이다. ‘나에게 글 쓰는 재능이 정말 있을까? 나는 끝까지 내 뜻을 지킬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문학적 창의력’이라는 능력에는 매우 다양한 조건들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언젠가 인정받는 사람이 재능 있는 사람으로 판명된다. 그러나 특별한 재능이 없어 보이는 데도 유명해진 작가들이 있다. 그러므로 가상의 질문 때문에 머리를 싸매고 고민할 필요는 없다. 물론 당신이 글쓰기에 강하게 매혹되었고, 글을 쓰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있다면 말이다.
만일 작가가 천직이라는 느낌이 든다면, 초반에 성공을 거두지 못하더라도 좌절할 필요는 없다. 이때 중요한 것은 ‘글쓰기’라는 노동을 완벽하게 하는 것이다. 경험 많은 작가들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이 쓴 글에서 스스로 단점을 발견해야 한다. 또 힘든 상황에서도 동요하지 말고 지치지 않고 글을 써야 한다. 그렇게 해야 행복한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언어의 대가(大家)가 되고 탁월한 주인공들을 만들어내는 솜씨는 오로지 수많은 연습을 통해서 터득할 수 있다. 그런데 소설가가 되려면 여기에 모종의 경험도 필요하다. 소설가는 자신과 다른 사람, 상상의 형상물을 내적으로는 물론이고 외적으로도 볼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가까이 또 멀리서도 볼 줄 알아야 하며, 양면성을 수용할 줄도 알아야 한다. 플로베르는 ‘뷔퐁’이라는 인물의 입을 통해 “천재란 인내의 대가”라는 말을 했다.
삶의 경험은 어떻게 이야기가 되는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작가는 어떻게 등장인물과 소재, 스토리를 만드는 것일까? 다음과 같은 것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① 자신의 독서와 경험을 이용한다. ② 추가로 다른 사람의 삶, 예를 들어 친구의 이야기도 이용하며, 잘 아는 사람을 모델로 삼거나 여기에 허구를 보태기도 한다. ③ 글이라는 허구적 세계를 통해 자신의 경험을 여과시키며 풍요롭게 만든다.
삶의 경험은 대부분의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작품을 쓰게 만드는 주요 원천이다. 물론 이로부터 생기는 오해를 해소할 필요는 있다. 즉, 글에 나오는 모든 내용이 작가가 경험했다는 뜻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많은 살인 사건, 역사소설, 자전소설, SF를 떠올려보라. 또한 유명한 여성소설이 남성의 손에 의해 쓰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라. 『보바리 부인』을 쓴 플로베르는 대부분의 인생을 프랑스 북서지방인 노르망디에서 보냈고, 날이면 날마다 문체라는 구체적인 문제로 고민했다. 그러다가 잊히지 않는 한 여성의 운명을 창조하여 세계문학사에 길이 남을 유명한 소설을 썼다.
중요한 것은 모험적인 체험과 열정적인 감정이 아니다. 그와 같은 체험과 감정에 공감하고, 언어를 통해 그것에 등장인물과 스토리를 입혀, 독자들이 공유하고 체험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이다. 물론 이 말이 작가는 열정적이고 모험적인 것을 경험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뒤로 물러서서 삶과 거리를 두고 살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보헤미안적인 태도나 낯선 곳을 누비고 다니는 모험(슬럼가나 내전, 민중봉기 틈에 있는 시인처럼)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지역과 사회계층, 주변 환경에서 심리적 동요와 함께 얻게 되는 삶의 경험은 작가에게 손해될 것이 없다. 살인 장면을 서술하기 위해 살인을 경험할 필요는 없지만, 살인을 저지를 만큼 화가 나본 적이 있어야만 살인자의 심정을 십분 이해할 수 있다.
삶의 경험과 글쓰기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 몇 가지 원칙을 기억해둬라. ㉠ 삶의 경험은 글쓰기에 유용할 수 있다. 정신적 갈등과 고통도 마찬가지다. ㉡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삶의 격랑으로부터 거리를 두어라. 성공적인 글쓰기는 심리 치료 차원에서 글을 쓰는 태도를 극복해야만 가능하다. ㉢ 역지사지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중심적인 사람과 달리 여러 장점이 있다. ㉣ 글을 쓰는 사람은 호기심이 많아야 한다. 모든 것에 흥미를 가지되, 가능한 어떤 것도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대며 거부하지 말라. ㉤ 작가는 글쓰기와 결혼해야 한다. 그린에이크가 표현했듯이, “세상과 연애를 해야만 한다.”
스토리와 캐릭터
캐릭터와 운명
문학은 두세 명의 운명이 얽힌 그물을 묘사한다. 문학은 이 그물처럼 얽힌 운명들의 인과관계 그리고 일련의 또 다른 법칙(예를 들어 악한은 벌을 받게 된다는 ‘서사적 정당성’과 같은 법칙)들에 따라서 인간의 삶을 분류하는데, 이 줄거리를 만들어내는 주인공을 ‘캐릭터’나 ‘등장인물’이라고 부른다. 인물 혹은 스토리를 소설의 기초라고 볼 것인지 아닌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독자들은 행동하는 인물들에게 더 관심을 갖거나 혹은 스토리 진행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는데, 이 두 가지 가운데 하나라도 없으면 안 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헨리 제임스가 이렇게 대답했다. “캐릭터에서 반드시 사건이 나온다. 사건은 캐릭터의 성격을 말해준다.” 문화 분석가들은 오늘날 살아가는 세계의 불투명성과 불투과성, 과거의 진리와 법칙의 몰락으로 인해 ‘주인공’과 그의 ‘이야기’가 사라진 것에 대하여 계속해서 환기시킨다. 그러나 학문적인 분석과 칼럼니스트들의 논쟁을 제외하더라도 이야기와 의미 그리고 인간에 대한 갈망은 여전하다. 비록 의도적으로 이야기를 고안해냈다 해도 그것이 인간의 갈망이라는 것은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자아가 얼마나 심각하게 무너졌는지, 혹은 사회의 맥락을 통해 얼마나 카멜레온처럼 변했는지는 감히 판단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일체성과 정체성을 원하고, ‘캐릭터’와 ‘운명’에 대한 바람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문학적 캐릭터를 통해 대리인과 배우와 가면을 찾고 발명한다.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그림자를 위해서, 분열된 부분과 존재하지 않았던 가능성을 위해서, 마지막으로 우리의 호기심을 위해서 그렇게 한다. 작품 속의 등장인물들은 길잡이와 정찰대원으로서 우리를 작품 속으로 안내한다. 디터 벨러스호프의 말을 인용하면, 문학이라는 “가상의 시뮬레이션 공간”과 ‘실험장“ 안으로 독자들을 끌어들인다. 각각의 등장인물들이 작가와 독자에게 어떤 특별한 기능을 갖든, 일반적으로 중요한 것은 인간 행동의 가능성을 끝까지 연개해내고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인간 행동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이다.
잘 다듬은 캐릭터
핵심 캐릭터들은 독자의 관심을 끌고, 독자의 눈앞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 어떻게 하면 그런 캐릭터를 만들 수 있을까? 에드워드 모건 포스터가 『소설의 이해』에서 요구하듯이, 작가는 캐릭터를 다차원적으로 ‘잘 다듬어서’ 만들어낸다. 포스터는 캐릭터들이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독자들을 놀라게 할 수 있는지 시험해보라고 제안한다. 예측 가능하게 행동하는 인물들은 너무 평이하므로 소설의 핵심 인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한편 독자를 당황하게 만들고 놀라게 하는 인물은 양면성이 있다. 그런 인물은 소설이 끝날 때까지 독자에게 수수께끼 같은 존재로 머물 수 있는데, 이런 인물을 묘사하는 그림은 항상 빈칸이 많다. 그래서 독자는 빈칸을 메우고자 하는 욕구가 강해진다.
작가는 등장인물을 모든 면에서 비춰보아야 한다. 정반대의 개성을 가진 인물들을 함께 생각하고, 가능하면 언어로 표현하는 것보다 인물에 대해 많이 앎으로써 다차원성을 이룰 수 있다. 그리고 작가는 인물을 공감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독자들은 책을 읽으며 항상 이렇게 생각하곤 한다. ‘그래, 나라도 이렇게 행동했을 거야!’ 작가는 독자들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도록 인물들의 행동에 능동성과 활동성을 부여해야 한다. 하나에서 유발된 동기에 의해서 다양한 결과가 전개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각의 국면마다 미리 복선을 깔아놓는 등의 준비 작업이 필요하다. 만일 작가가 작품의 인물들에게 호감을 느끼지 않거나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즉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고 인물들에게 전념하지 않으면, 독자를 열광하게 만들 수 없다.
저자는 이와 같은 특징에 더 방대한 측면을 추가해야 한다. 즉, 독자와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혼합해서 독창적인 인물을 만들어야 한다. 등장인물이 독자와 너무 비슷하면 지루하고, 독자에게 너무 낯설면 거리감이 느껴져 결국 외면당한다. 반면에 독자와 닮았지만 동시에 낯선 사람은 호기심과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독자는 이런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어 허구적인 캐릭터 안에서 자신을 보게 된다. 이런 점은 오래전부터 잘 알려졌을 뿐 아니라 경험적으로도 입증된 사실이다. 독자는 인물들에게서 자신이 허용하지 않는 그림자 자아를 보게 된다. 인물과 독자 사이의 무의식적 다리는 잘 설명할 수 없지만, 결코 헤어나지 못할 정도로 매혹적이다.
스토리에는 얼마나 많은 캐릭터가 필요할까?
소설을 구상하고 줄거리를 짤 때 반드시 인물의 수와 비중을 고려해야 한다. 소설이 실패하는 이유 중 하나는 작가가 너무 많은 인물을 중심에 세우고, 이 인물들을 충분히 묘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작가는 복잡한 관계 구조를 완성해내지 못한다. 또는 반대로 오로지 한 명의 중심인물에만 집중한 나머지 시간이 갈수록 흥미가 떨어지고, 통속소설로서도 다각도로 조명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삶이 쓰는 이야기와 할리우드의 지침
스토리와 플롯
캐릭터, 스토리, 플롯은 각각 분리할 수 없다. 캐릭터가 없으면 어떤 스토리도 나오지 않고, 스토리가 없으면 캐릭터는 벙어리 인형에 불과하다. 그러나 캐릭터가 생명을 얻어 움직이고 연달아 부딪치기 시작하면 일련의 사건들인 줄거리가 생긴다. 그러나 줄거리만으로는 아무런 스토리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줄거리에는 설득력 있는 윤곽과 자체적으로 구조가 갖춰져 있어야 한다.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연결되고 서로 종속되면 비로소 스토리가 형성되고 이로써 플롯이 생긴다.
에드워드 모건 포스터는 『소설의 이해』에서 단순한 줄거리와 진정한 의미의 플롯 사이의 차이를 간단한 예를 통해 설명했다. “왕이 죽었고, 왕비가 죽었다.”라는 문장은 단순히 사건을 차례대로 열거했을 뿐이다. 그러니까 일어난 행위만을 지시했을 따름이다. 이 문장은 “왕이 죽었고, 왕비가 슬픔으로 인해 죽었다.”라는 문장이 되어야 플롯이 되고 체계화된 스토리가 된다. 두 사건은 원인과 결과를 통해서 연속적으로 연관된다. 왕과 왕비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들은 무엇보다도 그들의 맺고 있는 관계를 통해 ‘존재한다.’ 이처럼 자명해 보이는 연관성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문학작품의 거시적 구조에 해당될 뿐만 아니라, 미시적 구조에도 해당되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관계가 명백하게 알기 쉬울 필요는 없다. 그러나 지나치게 관계가 많아 복잡해지면 스토리를 쉽게 조망할 수 없다. 그리고 만일 어떤 작품이 첫눈에 훤히 알 수 있고 아무 비밀도 없다면, 그 작품은 인공적이며 죽은 작품이다. 또한 고민해야 할 점은 모든 작품의 의미는 그 작품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독자나 관객 등 작품의 수용자는 언어적인 표현의 수수께끼를 스스로 풀어야 한다. 다시 말해 중요한 의미를 찾는 것은 그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이런 일을 기계적인 해석처럼 상상하면 안 된다. 예술품은 항상 빈 곳이 있는데, 빈 곳을 두지 않고 모두 채워두려고 한다면 내용은 무한하게 늘어질 수밖에 없다. 독자는 빈 곳을 특정한 구조적 패턴에 따라 구성되어 있는 기호를 통해 스스로 채워 넣어야 한다.
포스터가 제시한 예를 들어보겠다. “왕이 죽었고, 왕비가 죽었다.”라는 문장이 있다면, 우리는 독자로서 왕비가 죽은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왕은 적이 독살했을 수도 있고, 왕비는 상심 때문에 죽었을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은 글에 나와 있지 않지만 우리는 원인, 동기, 납득할 수 있는 연관성으로 사건의 연결이 필요하다. 그런데 글에는 이렇게 나와 있는 것이다. “왕의 죽음을 목격한 왕비는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침실로 옮겨진 왕비는 식음을 전폐하였고, 그녀의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여전히 왕비가 왕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글에서 제공하는 모든 정보를 이용하면 그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다. “왕비가 죽은 왕을 보고는 고통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녀를 침실로 모셔갔다. 그녀는 비탄에 빠진 나머지 더 살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왕비는 물과 음식을 거절했다. 곧 그녀는 슬픔으로 가슴이 찢어져 죽고 말았다.”
우리는 책을 읽을 때 문장 사이에 있는 빈 곳을 채운다. 이와 동시에 우리가 글 전체에서 얻을 수 있는 안내문, 문학적 선(先)지식, 개인의 욕구, 감정과 경험에 따라 빈 곳을 해석하게 된다. 글은 표현할 수 있지만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으며, 우리에게 상상의 날개를 충분히 펼 수 있는 자극을 준다. 글쓰기의 결정적인 장치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런 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