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8달러의 기적

김명곤 지음 | 북오션



8달러의 기적



김명곤 지음

북오션 / 2016년 12월 / 264쪽 / 15,000원



나의 고향 평북 후창 그리고 자유를 택한 남한행



어머니의 품, 그리고 꿈의 계절들 / ‘지주의 아들’, 광복 북녘 땅엔 설 자리가 없었다: 나는 1931년 11월 20일 평안북도 후창군 후창면(현재 양강도 김형직군 김형직읍)에서 아버지 한성범 어머니 조완옥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농토가 있었던 데다, 부모가 근면하고 부지런한 성정으로 집안 형편은 유족했다. 나는 집과 가까운 후창 유치원과 후창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안주 중학교에 입학하여 기숙사에서 지내다 해방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곧 여기저기서 군중집회가 열리고, 누구누구가 잡혀가고 처형되었다는 소식들이 들려왔다. 그리고 아버지도 ‘지주 반동분자’라며 잡혀가서 행방을 몰라 우리 가족 모두 전전긍긍했다. 갑자기 쏟아져 들어오는 이러한 생경한 광경들에 나는 ‘해방’된 느낌보다는 또 다른 압제에 짓눌리는 듯했다.

1947년 어느 날이었다. 청년 단체에서 하는 학습 모임에 참석했다가 나보다 두어 살 연배인 듯한 청년을 사귀게 되었다. 서울이 고향인 그는 북쪽의 이모 집에 놀러 왔다 서울로 돌아가곤 한다며 해방 뒤에도 몇 차례 삼팔선을 넘나들었는데, 며칠 후에 서울로 돌아가려고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서울에 가서 좋은 학교에도 다닐 수 있다는 말까지 하며 함께 가자고 했다. 나는 어머니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생각하시던 어머니는 “좋은 학교에 공부하러 간다”는 말에 마음이 움직였다.

광복 축제로 들뜬 밤, 남행길에 오르다: 우리는 마침 광복절 기념일을 앞두고 축하행사 준비에 이목이 쏠린 틈을 타서 동네를 빠져나갈 계획을 세웠다. 어머니는 남쪽에서 사용하는 화폐로 3만 원을 바꿔 오시더니 전대에 몽땅 집어넣은 뒤 겉옷을 들추고 허리에 둘러차게 하셨다. 당시 3만 원은 두 학기 등록금과 1년 동안의 생활비로 적지 않은 돈이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서울에 사는 아버지의 친구들 명단을 주시면서 찾아가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아울러 어머니는 “담배 피우지 말아라. 술을 마셔선 안 된다. 하늘이 너를 도와주실 거다!” 라는 당부 겸 격려의 말씀을 하셨는데, 이 세 마디는 어머니의 유언이 되고 말았다. 이후 두 학기 등록금을 포함한 비상금은 남하하다 안내원과 북한 경비원의 계략에 속아서 털리고, 죽을 고비를 몇 차례 넘기며 서울에 도착했다.

해방 이후 혼란의 세월 그리고 파란만장한 삶이 기다리다



보름 공부해 편입 합격…… 탈북 소년의 두 번째 기적: 믿거라 하고 찾아간 아버지의 두 친구로부터 냉대를 당하고 쫓겨나듯 길거리로 나서자 화려하기만 했던 서울 거리가 그렇게 황량해 보일 수가 없었다. 다시 쪽지를 펴 들어 세 번째 아버지 친구 이름을 읊조리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 이름을 되뇌다 보니 왠지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렴풋이 ‘의사 아저씨’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를 찾아갔다. 그는 잠시 나를 멍하니 바라보더니 “네가 웬일로 여기에 서 있는 거냐?” 면서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그때야 그가 우리 집 별채에서 여러 해 동안 함께 지냈고 아버지가 상당히 아끼던 아저씨였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그는 의대를 졸업하고 우리 지역의 보건소에서 봉사하던 엘리트 의사였고, 나는 동갑내기이던 그의 아들과 함께 유치원을 다녔었다. 나는 지난 수주일 동안 겪었던 북한 탈주 과정을 들려줬다. 그러자 그는 아내에게 연락을 해두겠다며 자기 집으로 가서 짐을 풀고 쉬라고 했다. 세 번째 아버지 친구의 집에서 며칠을 푹 쉬며 마음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슴 설레게 하는 ‘빅뉴스’를 접하게 되었다. 경복고등학교에서 편입생을 뽑는다는 소식이었다. 편입시험은 그날부터 보름 후에 있을 예정으로 시험과목은 영어였다. 시험은 무사히 잘 치른 것 같았다. 드디어 발표일 아침이 밝았다. 게시판을 빠른 속도로 훑었다. ‘한 도 원’ 거기에 내 이름 석 자가 있었다. 내가 경험한 ‘두 번째 기적’이었다. 야밤에 배를 타고 서해를 건넌 첫 번째 기적보다 기쁨이 더 컸다. 다행히 첫 학기 등록금은 의사 부인의 도움으로 낼 수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그 말, ‘찹쌀떡’: 입학식을 마치고 등교가 시작되었으나 걸리는 일이 한 둘이 아니었다. 이미 숙식을 제공받고 있고 첫 학기 등록금까지 마련해준 의사 아저씨 부부에게 더 이상 부탁을 한다는 것은 염치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찹쌀떡 장사를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밤늦게까지 장사를 하다 다른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전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누군가가 내 등을 툭툭 쳤다. 뒤를 돌아다보니 우리 학교 선생님인 서갑록 선생님이셨다. 그는 자기 집에 들러 식사를 함께하자고 했다. 그 뒤로도 그는 자기 집에 가자고 했고, 나는 그때마다 염치없이 선생님 집을 방문하여 음식 대접을 받았다. 서 선생님은 다른 면으로도 나에게 잊을 수 없는 도움을 주셨는데, 학교 측에 나의 처지를 상세히 알리고 다음 학기 등록을 위해 장학금 혜택을 받도록 주선해 주었다.

한편 시간이 흐르면서 의사 아저씨 집안의 분위기도 전과 같이 따뜻해 보이지는 않았다. 더 이상은 폐를 끼쳐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깍듯이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집을 나왔다. 그리고는 길거리에서 장사를 하다 만난 친구와 함께 을지로 삼정목에 작은 셋방을 얻어 함께 기거하기로 했다. 뒤로 나는 철에 따라 찹쌀떡 군고구마, 군밤, 땅콩 등 이런저런 장사를 닥치는 대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서갑록 선생님이 나의 안색을 보더니 병원에 가보자고 했고, 심한 영양실조라는 판정이 내려졌다. “죽을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집에 돌아온 그 날, 나는 난생처음으로 책상에 앉아 손을 모으고 ‘하느님’에게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종교가 없던 처지였으나 기적적으로 험로를 거쳐 온 것을 생각하며 ‘보이지 않는 손’이 나를 돕고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해 왔었던 터였다. “하느님, 저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이 있겠지요. 고아와 같은 처지의 저를 살려 주시면 당신의 뜻을 헤아려서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겠습니다.” 간절히 기도하고 나니 왠지 힘이 솟는 듯했다. 그 후 어느 날 전염병이 돌아 휴교령이 내려졌다. 그 기간 동안 나는 북한 탈출과 고학 스토리를 썼고, 그 스토리가 학교 잡지에 실리고 나자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일으켰다.

‘신데렐라’가 된 고학생, 달콤함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 와중에 따뜻한 시선으로 나를 늘 도와 왔던 서갑록 선생님이 폐병에 걸렸다. 당시 폐병은 가장 무서운 전염병으로 알려져서 아무도 선생님을 찾아보려고 하지 않았으나, 나는 거의 매주일 그의 집을 방문하여 도와 드릴 것이 없는지 묻곤 했다. 그의 가족들은 그런 나를 무척 대견스럽고 고맙게 여겼으나 나는 그의 가족들을 돕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학교 훈육주임 선생님이 나를 불러 오픈한 지 얼마 안 되는 학교 간이매점 관리직 일을 제안했다. 나는 고맙다며 받아들였다. 나의 행운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육군포병학교장 이기권 대령이 내 학교 친구의 부모 집을 방문했다가 내 얘기를 전해 듣고, 무엇이든 돕겠다고 했다. 그가 내게 전한 도움은 이런 것이었다. 장교들이 묵는 숙소의 방 한 칸을 내주고, 식사도 장교들과 함께하며 매일 점심도 장교식당에서 알아서 꾸려 주기로 했다. 또 군용차에 태워 등교까지 시켜준다고 했고, 생활비도 지원했다. 친구들과 선생님들은 나의 행운을 축하해 주었다. 하지만 머무르고 싶었던 시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터졌기 때문이었다. 포병학교 장교 숙소가 집이었는데, 그 부대가 전쟁이 나서 어디론가 출동했고, 건물도 무너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태극기를 품은 채 ‘인민군 검문소’를 지나가다: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내몰린 나는 염치를 무릅쓰고 친하게 지내던 급우 집을 찾아가 당분간 머물렀고, 그 뒤 또 다른 친구 삼촌의 도움으로 마산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영어 통역이 가능했기에 우연찮게 미군 해병 본부에서 한국인 식당 직원들을 감독하는 감독관으로 일했다. 그리고 내가 6개월 정도 식당 감독관 일을 하는 것을 눈여겨본 상사(장교식당 총책임자)는 나를 또 다른 자리에 추천하였는데, 당시로써는 가히 파격에 가까운 자리였다.

미 해병 장교로 ‘벼락출세’ …… 백마 탄 왕자가 따로 없었다: 내가 맡은 일은 소위 계급으로 부대 외곽을 순찰하는 50여 명의 순찰대원을 지휘 감독하는 일이었다. 나는 종종 난처한 지경에 처하기도 했으나 무난하게 일을 처리하려고 애썼다. 그러던 어느 날, 내게 또 다른 임무가 떨어졌다. 전투식량 보급을 위해 동원된 수백 명의 한국인 노역자들을 감독하고 지휘하는 일이었다. 보급 노동자 감독관을 한 4~5개월가량 했던 어느 날이었다. 군대 업무차 부산을 가게 되었고 광복동 거리를 활보하다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들은 영도에 전시학교가 세워져 6개월 정도만 공부하면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게 된다고 했다. 나는 부산에서 마산으로 돌아와 내 직속상관에게 더 이상은 군대생활을 할 수 없는 사정을 설명했다. 상관은 내 말을 듣고는 내 결정을 존중하며 행운을 빈다며 격려까지 해 주었다. 나는 부산으로 돌아와 즉시 전시학교에 등록했고, 6개월 만에 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했다.

명문대 거절당한 탈북 소년, 미국 유학을 꿈꾸다: 고등학교 졸업장을 손에 쥐었으나 일자리를 잡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래서 나는 서울의 연희전문(현재의 연세대학교) 경제과에 지원했다. 다행히 1차 필기시험을 통과했으나, 2차 구두시험(면접)에서 낙방했다. 당시 사립대학이란 돈 많은 부유층 자제들이나 다니던 터였고, 나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속울음을 삼키며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어느 날 부산 길거리를 배회하다가 서갑록 선생님의 처남을 우연히 만났는데, 그는 나에게 유엔한국재건단 건물 안의 우체국에서 우편물 작업을 하는 일을 소개해 주었다. 그 일을 하면서 영사관의 한국인 직원들과 얼굴을 익히며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영사관 한 직원이 “한도원 씨, 미국으로 공부하러 가지 그래?” 라고 했다. 당시엔 그저 웃음으로 지나치기는 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막연하게나마 “미국유학? 그렇지 이게 바로 내 살 길인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그 후 여러 지인들의 도움과 나의 끈질긴 노력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열 번 찍어 받은 ‘도지사 추천서’, 드디어 미국으로: 떠나던 날 평생 잊지 못할 두 가지 ‘사건’이 떠오른다. 환송하기 위해 나온 친구의 어머니들과 두어 명의 친구들 외에 눈에 띄는 이화여대 학생 한 명이 끼어 있었다. 조금은 알고 지내던 친구의 여동생이었다. 환송객들과 이런 저런 인사를 나누던 와중에 누군가가 호텔 밖으로 불려나갔다 들어오더니 “밖에서 이화여대 학생이 전해주더라”며 쇼핑백을 건네주었다. 열어보니 금방 산 것으로 보이는 와이셔츠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이화여대 학생은 내가 입고 있던 와이셔츠가 너무 낡고 초라해 보여 급히 노라노 양장점에 가서 사왔다고 한다.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일이 있다. 막 벤치에서 일어나 탑승장 안으로 들어가려던 참에 얼핏 보기에도 옷매무새가 점잖아 보이는 여자 한 분이 급한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홀로 앉아 있을 나를 생각하니 너무 안 됐다는 생각이 들어서 급히 택시를 타고 왔노라고 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녀가 막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기 전 내게 남긴 말은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다. “도원아, 나는 성경에서 늘 기적 이야기를 읽었단다. 그런데, 너는 ‘눈으로 보는 기적’이었어. 너를 보면서 늘 기적을 보았단다. 하나님이 너를 돌보실 거야. 건강히 잘 다녀오너라!”



기적 같이 이뤄진 미국유학의 꿈 그리고 세계적 과학자로 우뚝 서다



‘8달러’로 시작한 미국생활, 난 ‘낙원’에 와 있었다: 1955년 4월 초순, 마침내 사우스웨스턴 미주리주립대학이 있는 스프링필드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자 저만치에서 백인 할머니가 나를 발견하고는 활짝 웃으며 급하게 다가왔다. 수년 동안 편지만 주고받던 애나 블레어 박사였다. 상기된 얼굴의 그녀가 나를 껴안았다. 엉거주춤 그녀의 포옹을 받은 나는 연신 ‘땡큐’를 연발하며 머리를 숙였다.

블레어 박사의 집으로 가는 도중에 그녀가 조심스러운 말투로 내게 물었다. “도원, 네 수중에 얼마나 가지고 있지?” “8달러.” “흠, 네 형편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게 적은 돈을 갖고 있을 줄은 몰랐군. 괜찮아 걱정하지 말라고! 공부하며 일도 할 수 있겠지?” “그럼요.” 집에 도착하자마자 블레어 박사는 점심으로 치즈 샌드위치와 주스를 내왔다. 그리고 그녀는 나를 위해 비워 두었던 방을 2년 전에 다른 학생에게 빌려주었다면서 방을 구할 때까지 당분간 자기 집에 머물러도 된다고 했다. 그러더니 당장 작업화를 사야 한다며 전화로 어떤 학생을 불러서는 신발 가게로 안내하도록 했다. 나는 작업화를 4달러를 주고 구입했다. 이렇게 해서 전 재산 8달러의 절반이 떨어져 나갔다.

블레어 박사 집에는 내 일자리 리스트가 쌓여 있었다. 모두 잔디 깎는 일이었고 시간당 25센트였으나 하늘을 나는 기분으로 일을 시작했다. 일주일 정도 블레어 박사 집에서 머문 후에 캠퍼스 인근에 작은 원룸 아파트를 구했다. 일자리는 잔디 깎는 일 외에도 도서관에서 책을 정리하는 일, 식사를 무료로 제공받는 학교 식당 일 등 얼마든지 널려 있었다. 나는 학교 수업을 빼고는 매일 서너 곳의 일자리를 옮겨 다니며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보통 새벽 1~2시까지 영어사전을 펴 들고 그날 수업 시간에 들은 강의 내용을 복습했다.

정신없이 한 학기를 지내고 여름방학을 앞두게 되었다. 나는 수업을 듣는 짬짬이 여름방학 동안 할 수 있는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었다. 마침 유엔한국재건단 우편물 취급소에서 일하던 당시 미국인 엔지니어가 내게 알려준 일자리가 생각나 아르바이트 신청서를 보냈다. 미시간 주 그랜드 래피즈의 북쪽 지역에 있는 미니왕카(Miniwanca)라는 캠프였다.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것은 하루 일당이 1달러밖에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한국 유학생 친구들은 뉴욕이나 시카고 등지에서 일을 하면 하루 20달러를 너끈히 벌 수 있는데, ‘일당 1달러’는 말이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달랐다. 나는 이제 막 미국에 온 초짜 유학생으로 미국 문화를 배우는 일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수와 친구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선택한 미시간 캠프 미니왕카의 아르바이트 일은, 내 평생에서 가장 잘한 결정 가운데 하나였음이 그 여름, 그리고 이어지는 여름에도 입증되었다. 캠프 미니왕카는 주로 고등학생들과 대학생들이 사용하는 기독교 수양관이었는데, 막 건축이 끝난 50개의 캐빈이 여기저기 정연하게 위치해 있었다. 그런데, 건축만 덩그러니 끝냈을 뿐 안팎으로 다듬고 손을 대야 할 곳이 많았다. 주변에 조경시설도 안 되어 있어서 그 또한 두 사람이 해야 할 몫이었다. 무엇보다도 그곳에서 일을 하면서 삶의 스승들을 만나게 된 것을 두고두고 큰 축복으로 여길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첫 스승은 캠프 디렉터인 ‘프레스톤 오위그’였다. ‘와제피’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는 매우 사려 깊고 사색적인 사람이었다. 일을 시작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벤치에 앉아 쉬면서 그가 한 말을 평생 잊지 못한다. “도원, 너 자신을 하찮은 존재로 여겨선 안 돼. 만약 너 자신을 귀한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도 너를 그렇게 취급하게 될 거야.” 당시 그가 왜 나에게 이런 말을 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마도 의기소침해 보인 내 모습에 어떤 도움말을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모래땅에 꽃 피운 청년’, 인생행로를 잡다: 캠프 미니왕카에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캠프 직원이 모는 차에 동승하여 주변 마을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어느 지점을 지나치려는데 온갖 꽃들로 만발한 너서리(원예 식물 재배장)가 눈을 부시게 했다. 문득 ‘왜 캠프 미니왕카에는 꽃나무를 심지 않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옆자리에 앉은 직원에게 머뭇거리는 투로 물었다. “왜 우리 캠프에는 꽃밭을 만들지 않나요?” “하고 싶어도 할 사람이 있어야지!” “그거 내가 하면 안 될까요?” “그게 잘 될까? 미스터 와제피가 허락할지 모르겠군.” 그런데, 와제피 아저씨는 의외로 쉽게 허락하며 “필요한 것을 구비해 줄 테니 열심히 가꾸어 보라”고 격려해 주었다. 심지어 그는 내가 원하는 대로 소똥 흙을 트럭으로 날라다 주는가 하면 삽이나 경작기 등 갖가지 원예 도구를 사다 주었다.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