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 뒤에 숨겨진 사랑
이동연 지음 | 평단문화사
명작 뒤에 숨겨진 사랑
이동연 지음
평단 / 2016년 11월 / 464쪽 / 16,800원
1부 선율 따라 사랑은 흐르고
차이콥스키 - 그 사람 내 눈에만 보여요
낭만주의 대작곡가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의 삶은 얼마나 낭만적이었을까? 차이콥스키의 3대 발레 음악인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잠자는 숲속의 미녀>와 6개 교향곡을 들어보라. 슬라브적인 깊은 애수와 열광이 세련되게 절충돼 있다. 독일 낭만파의 기법을 러시아 특유의 정취에 융합한 것이다. 그의 음악에는 극적인 정서적 긴장이 대치되는 가운데 매우 절제되고 세련된 서정적 몽상이 힘차게 표현되고 있다. 발레 음악을 예술작품으로 격상시킨 사람도 바로 차이콥스키였다. 원래 발레는 이탈리아에서 시작돼 프랑스를 거쳐 러시아에 들어왔으며, 이때만 해도 주로 무용의 반주 역할에 머물러 있었다.
차이콥스키는 생전에 이미 러시아 음악의 대표로서 유럽 등 서구사회를 자신의 음악으로 진동시키며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다. 하지만 그의 삶은 그다지 낭만적이지 못했다. 사회적 편견이 그의 내밀한 성향을 짓눌렀기 때문이다. 그는 호텔에서 갑작스레 죽었는데, 사인은 전염병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독극물을 마시도록 강요당해 벌어진 일이었다. 차이콥스키는 왜 그런 비극을 강요당했을까? 바로 동성애 성향 때문이었다. 개인의 성향을 사회가 종교라는 이름으로, 통치라는 명분으로 집요하게 간섭하면서 그는 평생 고뇌 속에서 살아야 했다.
미망인 폰 메크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백조의 호수〉: 차이콥스키가 결혼생활에 지칠 대로 지친 채 무일푼으로 제네바의 호반에서 지낼 때 몰래 도와준 여인이 있다. 바로 러시아 철도왕의 미망인 나제시다 폰 메크다. 그때부터 두 사람의 이상야릇한 관계가 시작된다. 폰 메크 부인은 차이콥스키보다 아홉 살 연상으로 러시아에서 최초로 개인발전기를 두고 전깃불을 밝힐 정도로 부유했다. 그녀는 각지에 많은 영지를 두고 그곳을 순회할 때마다 그 지역의 작곡가를 초대해 연주 듣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남편이 죽은 뒤로는 사교계와 발을 끊고 오직 열두 자녀를 보살피는 일에 집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소재로 한 차이콥스키의 <템페스트>를 우연히 듣게 된다. 폰 메크는 당시를 이렇게 고백한다. “그 환상곡을 들으며 공허했던 자신을 잊은 줄도 모르고 있었다. 비로소 곡이 끝난 뒤에야 잊어버린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폰 메크 부인은 차이콥스키를 흠모하여 그 유능한 작곡가가 오직 작품에만 몰두할 수 있게 힘껏 후원하고 싶어 했다. 그녀는 측근에게 부탁했다. “이렇게 탁월한 재능을 지닌 사람이 인류 문명에 기여할 수 있게 내가 후원하고 싶어.” 후원 조건은 단 한 가지였다. 직접 만나지 않되, 모든 소식은 편지로만 주고받아야 한다는 것. 이렇게 해서 폰 메크 부인은 1876년부터 매해 6천 루블을 차이콥스키에게 지급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음악과 예술과 삶에 대한 의견을 편지로 나누기 시작했고, 그렇게 14년 동안 주고받은 편지가 1,200여 통이나 된다. 고독과 우수의 작곡가 차이콥스키에게 폰 메크 부인의 정이 듬뿍 담긴 편지와 경제적 후원은 말할 수 없이 큰 힘이 되었다.
그런데 편지가 오갈수록 폰 메크 부인의 글에 점점 애정이 묻어나기 시작한다. 어느새 정이 들어 연애편지처럼 발전한 것이다. 폰 메크 부인은 차이콥스키가 차츰 좋아지자 먼 여행을 떠날 때면 차이콥스키를 자신의 저택에 초대했다. 마주치면 격정이 일 것 같아 자신이 자리를 비운 거실에 다녀가게 한 것이다. 차이콥스키는 폰 메크 부인의 거실에서 혼자 며칠을 보내기도 했다. 그동안 부인의 체취에 빠졌고, 차이콥스키가 떠난 뒤 여행에서 돌아온 부인은 그가 남긴 흔적을 보고 기뻐했다. 이 무슨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란 말인가?
부인은 이미 차이콥스키를 한 남성으로 그리워하고 있었지만 차이콥스키가 동성애자라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데 만족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두 사람의 관계 유지에 더 좋을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폰 메크 부인은 자신이 차이콥스키에게 에로스를 추구할수록 정신적 교감은 고갈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거리를 둔 채 그리움만 교환하는 선에서 머무르려 했다. 그 그리움의 공간 안에서 차이콥스키가 인류를 감동시키는 작품을 만들 수 있게 격려한 것이다.
폰 메크 부인은 차이콥스키에게 교수를 아예 그만두고 작곡에만 몰입하라고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차이콥스키가 그 말에 따르자 교수 연봉의 10배를 보내기 시작했다. 19세기 러시아 귀족들에게는 예술가를 후원하는 일이 큰 보람이었고, 예술가들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후원 귀족에게 작품을 헌정했다. 만일 작품이 성공할 경우 후원 귀족은 예술가와 동등한 찬사와 명예를 누렸다. 차이콥스키가 폰 메크 부인과 인연이 닿아 연금을 받기 시작한 그해에 〈백조의 호수〉가 탄생한다. 〈백조의 호수〉는 중세 독일의 전설을 재구성한 작품이다.
어느 나라 왕자 지크프리트가 성년이 되자 왕비가 왕자의 배필을 정하기 위해 무도회를 개최하기로 한다. 그 무렵 사냥을 떠났던 지크프리트 왕자는 하늘을 나는 백조 무리를 쫓다가 호수에 다다른다. 어느덧 날이 저물어 어두워지자 호수를 건넌 백조들은 모두 아름다운 처녀로 변신한다. 이들은 악마의 마법에 걸려 낮에는 백조가 되고 밤에만 사람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백조 무리를 이끄는 오데트 공주가 전하는 슬픈 이야기를 들으며 왕자는 어느새 오데트 공주를 사랑하게 된다. 공주가 왕에게 말한다. “마법이 풀리려면 한 사람의 변치 않는 사랑을 받아야만 한답니다.” 그 말대로 왕자는 공주에게 진정한 사랑을 준다. 마침내 악마는 패배하고 두 사람은 멋진 사랑의 보금자리를 꾸민다.
2부 그대라는 이름을 화폭에 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 가깝고도 먼 당신
다빈치는 어떤 종교나 종교적 의미, 사회적 관습을 믿지 않았다. 그가 생각한 인간의 존재 이유에 신의 은총 따위는 없었고, 그가 경험한 생의 원리에 신의 섭리는 그림자조차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빈치는 당시 사회에서 발견하지 못했거나 금기시하는 분야까지 연구하는 진정한 지식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책은 한 권도 출판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책으로 공개돼 많은 사람이 읽다 보면 이단으로 몰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서 살아야 했던 다빈치는 ‘사회심리적 이방인’이었다.
그럼 끝을 모르는 지적 갈망으로 가득 차 있던 다빈치의 로맨스는 어떠했을까? 그는 천재였을 뿐만 아니라 용모도 수려하고 언변도 화려했다. 그런 그에게서 다른 예술가들과 같은 애정행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다빈치를 연구한 프로이트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그는 로맨스를 포기하고 리서치를 택했다.” 다빈치는 무엇 때문에 로맨스를 포기했을까? 그렇게 된 데는 번지수를 잘못 짚은 로맨스가 있었다.
아! 어머니였다니… 잘못 짚은 번지수: 그리스신화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물은 누구일까? 테베의 왕자 외디푸스다. 그의 비극은 물론 자신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신탁의 저주 때문이었다. “이 아이는 장차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리라.” 사람에게 따로 정해진 운명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신탁을 믿게 되면 그 믿음이 운명을 만든다. 결국 테베의 왕 라이오스는 아들을 버리고, 외디푸스의 인생은 그 믿음대로 되고 만다. 종교의 외피를 입고 행해지는 언어를 뿌리치지 못해 외디푸스의 비극을 잉태한 것이다.
다빈치 또한 외디푸스처럼 생부 아래서 자라지 못하고 피렌체와 피사 사이의 작은 마을 빈치에 있는 할아버지 집에서 자랐다. 다빈치 집안은 대대로 공증인이었으며, 어린 다빈치는 웅장한 저택에서 조부모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이성에 한참 눈뜰 시기인 14세 때, 언제나 자신을 살갑게 돌봐주는 스무 살 연상의 하녀 카테리나가 다빈치의 눈에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한다. 카테리나는 어린 다빈치를 볼 때마다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 역력했고, 뭔가 자꾸 주고 계속 안아주려 했다. 모성결핍에 외로웠던 다빈치는 그럴 때마다 그녀의 품이 늘 포근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설렘도 커져갔고, 자꾸만 카테리나의 품에 안기고 싶어졌다. 그런데 할머니는 다빈치와 카테리나를 매서운 눈으로 주시했다. 심지어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것만 보아도 불같이 화를 냈다. 그러더니 더 이상 만나지 말라는 금지령까지 내렸다. 도무지 알 수 없어 다빈치가 몇 번이고 물어도 할머니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모든 궁금증은 스무 살이 되던 1472년, 피렌체의 화가조합에 등록하기 전날에 풀렸다. 그날 다빈치는 길가에서 밭으로 일하러 가던 카테리나의 남편을 만났다. 카테리나는 잘 있느냐는 다빈치의 물음에 그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결국 비밀을 털어놓았다. “너도 이제 어른이 됐으니 다 알아야겠지. 카테리나가 사실은 네 생모야.”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충격을 받은 다빈치가 쓰러질까 봐 부축하며 그가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네 아버지 피에로가 카테리나와 불장난을 벌여 빈치에서 너를 낳았어. 사생아의 이름을 짓듯 ‘빈치에서 태어난 사자’라는 뜻에서 너를 레오나르도 다빈치라 부르게 되었지. 네 할아버지 안토니오는 원치 않은 손자가 태어나자 서둘러 네 아버지를 귀족 집안의 딸과 결혼시켰어. 그리고 너는 자기에게 입적했지. 네가 두 살이 되던 해에 카테리나는 농사꾼인 나와 결혼했고, 낮에는 할아버지 집에 가서 하녀 일을 하며 너를 돌본 거야. 카테리나는 너에게 젖 먹이는 시간을 가장 행복해했지.”
모든 일은 하녀를 며느리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할아버지의 각본대로 이루어졌다. 그런 줄도 모르고 다빈치가 사춘기에 카테리나에게 연정을 품었으니, 할머니가 그토록 노심초사한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다빈치가 열다섯이 되자 친아버지의 집으로 보냈던 것이다. 계모들은 다빈치와 비슷한 또래였지만 다빈치는 어머니라 부르며 잘 지냈다.
엄청난 출생의 비밀을 안 뒤 그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외향적이던 다빈치의 성격도 내향적으로 변해갔다. 다빈치가 기존의 제도와 신념에 회의적이었던 것도 스무 살 나이에 전통과 권위의 이중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충격적인 발견은 다빈치의 일생을 바꾸어놓았고, 그의 모든 작품을 관통하는 모티브로 작동한다.
<최후의 만찬>과 유다의 복권: 다빈치는 어느덧 40대 초반을 지나고 있었다. 온갖 풍문도 가라앉고 불타는 정념도 잦아든 중년의 다빈치에게 초로의 여인이 찾아왔다. 어머니 카테리나였다. 자신의 어릴 적 기억에 그렇게 곱게 남아 있던 어머니가 병든 몸을 이끌고 나타난 것이다. 카테리나는 다빈치가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마치 자기 탓인 양 가슴이 저며 아무 말 없이 울기만 했다. “다 내 탓이지. 나 때문에 이렇게 외로이 살고 있구나.”다빈치는 자책하는 어머니를 가만히 안고 다독였다. “그러지 마세요, 어머니. 어머니는 저에게 세상 누구보다 훌륭하신 분입니다.” 그날부터 다빈치는 시골에서 농사꾼의 아내로 살아온 어머니를 모시고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그즈음 밀라노 대공이 성마리아 수도원 식당에 걸 대형 벽화를 주문했다. 어떤 그림을 그릴까 고민하고 있는데, 카테리나가 그만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아들에게 폐가 될까 봐 내심 걱정이었던 것이다. 편히 머무르시라고 만류해도 아무 소용이 없자 다빈치는 마지막 만찬을 대접해드렸다. 다음 날 떠나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며 전날 밤의 만찬을 떠올렸다. 다빈치는 여기에서 착상을 얻어 세계사에 길이 남을 <최후의 만찬>을 구상했다.
1년 6개월 뒤 카테리나가 사망하자, 다빈치는 어머니가 살던 곳으로 내려가 장례비를 대고 모든 장례 절차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장례를 마친 뒤 돌아와서 곧장 <최후의 만찬> 제작에 착수했고, 45세인 1497년에 작품을 완성했다. 당시에는 최후의 만찬을 그린 그림이 부지기수로 많았고, 대부분이 배신자인 가룟 유다를 식탁 건너편에 혼자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렸다 그런데 다빈치는 유다를 다른 제자와 같은 식탁에 앉게 했다.
죽음을 앞둔 예수가 슬픔에 잠겨 3개의 창문 앞에 높인 식탁 중앙에 앉아 있다. 예수를 중심으로 제자 12명이 좌우에 6명씩 앉았는데, 3명씩 네 그룹이다. 예수의 오른쪽(독자가 볼 때는 왼쪽)에는 파란 옷을 입은 유다가 오른손에 돈주머니를 쥔 채 팔꿈치를 탁자에 대고 있다. 그의 오른손 앞에 소금 통이 넘어져 있다. 유다가 일부러 쓰러트린 것이다. 그런데 그 시대 성화들과는 달리 이 그림에는 열두 제자는 물론 예수까지 머리 뒤쪽에 후광이 없다. 또한 동석한 유다의 모습도 문제가 돼 성직자들 다수는 <최후의 만찬>이 예수의 거룩성을 침해했다고 비난했다.
그림의 분위기도 동일한 주제를 담은 이전 그림들과 확연히 다르다. 그림의 중심축은 유다와 예수다. 예수는 체념하고 달관한 듯한 모습이고, 그를 바라보는 유다는 투쟁 의지로 팽배해 있다. 예수가 “너희 중 나를 팔 자가 있다.”고 말하자, 제자들은 벌떡 일어나기도 하고 앉은 채로 “나입니까?” 하고 묻는다. 하지만 유다는 조용하다. 도리어 몸을 뒤로 젖히며 불신과 분노의 시선으로 예수를 바라보고 있다. 이 장면이 체념한 듯한 예수의 모습과 대조돼 그림의 중심축이 유다에게로 이동한다.
다빈치는 왜 역사상 가장 비열하고 저주받은 인물로 취급되는 유다를 이렇게 그렸을까? 유다가 돈 때문에 스승을 판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 제국의 식민 통치하에 있었다. 유다는 식민통치에 맞섰던 독립운동단체 ‘열심당’의 일원이었다. 그는 젊은 예수가 화려한 언변으로 대중을 휘어잡는 것을 보고 독립운동에 큰 힘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이 기대는 곧 깨졌다. 예수는 압제자들에게서 저항할 의지도 철학도 없었다. 유다는 ‘세상의 구원자라면서 현실에 둔감하게 만드는 이런 지도자는 차라리 사라지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유다가 돈 주머니를 당당히 식탁 위에 올려놓은 모습은 은전 30냥에 욕심이 나서 스승을 배반했다는 편견을 일축한다. 만일 그랬다면 부끄러운 돈을 식탁 아래 감추었어야 했다.
유다는 예수 공동체의 재정을 맡았다. 그가 예수를 향해 돈주머니를 내밀고 있는 것은 천상의 언어도 좋지만 이 무리는 어떻게 먹여 살릴 것이냐는 뜻이다. 그래서 소금 통도 엎어 쏟아버렸다. 압박과 설움을 당하는 사람들을 해방시키려는 의지와 방책이 없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한 언명은 언어 유희에 불과하다. 그래서 유다는 예수와의 결별을 결심했고, 다빈치는 이를 <최후의 만찬>에 반영했다. <최후의 만찬>을 제작한 뒤 다빈치는 회화는 물론 과학, 기술, 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 밀라노를 넘어 유럽 최고의 거장이 된다.
피카소 - 나에게 사랑은 무지개야
“나는 보이는 대로 세계를 그리지 않고 생각하는 대로 그린다.”
보이는 대로의 사물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피카소는 어제나 오늘뿐 아니라 앞으로도 영원히 현역으로 남을 것이다. 그는 하나의 예술은 파괴의 총체라는 신념 때문에 고독했고, 그래서 더욱 사물을 파괴하고 포기하며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다. 피카소의 예술적 동지인 시인 폴 엘뤼아르는 피카소의 그림에 깊이를 더해주었고, 피카소는 그의 시작에 영감을 주었다. 엘뤼아르의 시 <아무도 나를 알 수 없다>를 읽다 보면 피카소의 작품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 이 시에서는 내가 너를 아는 것은 객관이 아니라 내 감성이 깃든 주관이며, 내 기호가 만든 추상이라고 했다. 엘뤼아르는 이런 앎이 세계의 어둠도 밝히고 인간의 기반인 대지조차 초연하게 한다고 했다. 이것이 인간 심층의식의 정체를 드러내려는 초현실주의자들이 지니는 독특한 이미지다. 현대 예술의 선구자 피카소의 사랑의 색은 무엇이었을까? 무지개였다. ‘왜 무지개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전 그림에 대한 피카소의 이야기를 종합해보자.
나는 어린애 같은 데생을 한 적이 없다. 그림이란 미리 정해놓고 그리는 것이 아니다. 그리는 도중에 사상이 변하면 달리 그린다. 진리란 없기에 완성된 그림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본다. 그래야 생명력을 지닌 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