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 하나님 설계의 비밀
티머시 R. 제닝스 지음 | CUP
뇌, 하나님 설계의 비밀
티머시 R. 제닝스 지음
CUP/ 2015년 8월 / 352쪽 / 14,000원
제1부 하나님의 뇌 그리고 문제의 발단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은 생명이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오직 사랑하기에만 알 수 있다.
모든 것이 존재하는 이유도 오직 내가 사랑하기 때문이다.
만물이 사랑 하나로 연합되어 있다.
- 레오 톨스토이
나는 ‘하나님에 대한 진리가 어떻게 치유와 회복을 가져다주는지’ 지난 20년이 넘도록 성경과 과학에서 그 답을 모색해 왔다. 그런데 그 개념을 탐색하기에 가장 타당한 출발점이 태초임을 알았다. 그래서 성경과 상상력을 동원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하나님은 생명을 지으실 때 그분 자신의 성품과 조화를 이루어야만 제대로 돌아가도록 설계하셨다. 이 개념에 함축된 의미는 어마어마했다. 인류는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지어졌기 때문에 인류와 인간의 뇌 기능에 대한 하나님의 원안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핵심적, 중추적, 근본적 속성은 다름 아닌 사랑이다(요일 4:8). 이것은 광대무변하고 영원무궁한 선의 실체다. 온 우주가 그 위에 지어졌다! 영원한 사랑, 창조하는 사랑, 변함없는 사랑이다. 다른 모든 속성은 다이아몬드의 면면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찬란한 창이다. 하지만 사랑에 관한 한 하나님은 그냥 사랑을 행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사랑의 화신이시다!
이런 포괄적인 사랑은 우리의 죄 많은 세상에는 낯설고 이질적인 개념이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한다. 사랑의 마음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불타오른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13:16).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일 3:14). 이처럼 하나님의 속성 자체가 타인 중심의 사랑이시다.
계속 탐색하는 가운데 갑자기 로마서 1장 20절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은 사랑의 법을 모든 자연 속에 입력해 두셨다. 태양계의 행성들은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태양은 아낌없이 에너지를 내준다. 식물은 태양 에너지를 받아 식물 고유의 신진대사 “서클”을 통해 그것을 화학 에너지로 전환한다. 그 에너지를 식물은 과일과 견과와 곡식과 채소 등의 형태로 우리에게 베풀며, 그 과정에서 우리가 들이마실 산소도 뿜어낸다. 우리는 식물에서 음식을 받아 인간 고유의 신진대사 “서클”을 통해 에너지로 쓴다. 그리고 분자를 소화의 부산물과 물과 이산화탄소로 전환해 식물의 비료로 땅에 다시 돌려준다. 이것은 끝없는 베풂의 서클이다.
행성들은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태양계는 은하계에서 돌고, 은하계들은 우주에서 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은 이렇게 타자를 중심으로 돌면서 아낌없이 내준다. 선지자 에스겔이 환상 중에 천국을 보았을 때 하나님 나라의 기초를 상징하는 것은 바퀴 속의 바퀴, 회전 속의 회전, 움직이는 서클 속의 움직이는 서클이었는데(겔 10:1-10), 내 생각에 그것도 우연은 아닌 것 같다.
어떤 하나님 개념을 품는가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앤드루 뉴버그 박사가 최근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실시한 뇌 연구에 따르면, 모든 형태의 명상이 뇌의 긍정적 변화와 유관한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최대의 뇌 기능 향상은 참여자들이 구체적으로 사랑의 하나님을 묵상할 때 이루어졌다. 이런 묵상은 전전두피질을 발달시키고, 그에 따라 공감과 동정과 긍휼과 이타심의 역량을 높여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부분은 그다음이다. 사랑의 하나님을 예배하면 타인 중심의 사랑이 커질 뿐 아니라 예리한 사고력과 기억력까지 더 좋아진다. 다시 말해서 사랑의 하나님을 예배하면 실제로 뇌의 치유와 성장이 촉진된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응징을 일삼거나 권위주의적이거나 비관적이거나 멀찍이 떨어져 있는 존재)을 예배하면 두려움의 회로가 활성화된다. 그것을 가라앉히지 않고 그냥 두면 결국 만성적으로 신경이 예민해지고 뇌와 몸이 손상된다.
과연 우리는 보는 대로 변화되되, 성품만 아니라 신경회로까지 그렇다. 하나님의 설계와 조화를 이루어 살기로 선택하면 정신과 몸이 더 건강해진다. 이것은 과학적 연구로도 입증된다. 자원봉사와 건강의 연관성을 파악하고자 지난 수십 년간 수십 건의 연구가 시행되었는데 대부분의 연구에서 자원봉사와 건강은 긍정적 연관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경이 가르치는 그대로 베풂이 곧 삶이다.
인간의 뇌와 깨어진 사랑
사탄은 거짓의 아비다. 사탄은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 그들은 그 거짓말을 믿었고, 그리하여 우리의 조상의 마음과 생각 속에서 사랑과 신뢰의 서클이 깨졌다. 그러자 파괴적인 사건이 줄줄이 뒤를 이었다. 파멸의 연쇄 반응을 잘 보라. 거짓말을 믿은 결과로 사랑과 신뢰의 서클이 깨졌다. 사랑과 신뢰가 깨진 결과는 두려움과 이기심이다. 두려움과 이기심은 죄의 행위를 낳는다. 죄의 행위는 사고와 성품과 몸을 해친다. 불치의 상태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결국 두려움이 타락한 인류의 주요 원동력이 되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5-8).
이기심은 두려움과 생존 본능에서 비롯된다. 자기 자아를 앞세우는 이러한 생물학적 충동은 너무도 강해서 인간은 하나님의 개입이 없이는 절대로 이기심에서 헤어날 수 없다. 사실 사랑할 자유, 자기희생을 선택하는 능력, 그리고 모든 이타심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도 모르게 마음속에 역사하는 결과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승리와 성령의 역사 덕분에 우리 마음은 유전적 성향인 이기심을 극복하기로 선택할 수 있다. 단 그것은 우리의 의지적 선택이어야 한다.
신경학적으로 말해서 ‘마음’은 전두대상피질ACC 즉 이마 양미간의 안쪽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이 뇌 부위에서 공감과 긍휼과 사랑을 경험하고, 옳고 그름을 가려낸다. 이 중 배외측 전전두피질DLPFC은 추론하고 전략과 계획을 짜는 이성의 부위다. 배외측 전전두피질 밑으로 안와 전전두피질이 있고, 이와 붙어 있는 것은 복내측 전전두피질VMPFC이 있다. 현재의 뇌 과학 이론으로는 안와 전전두피질과 복내측 전전두피질이 양심의 부위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이 두 부위에서 우리는 죄의 자각을 경험하고, 사회적으로 부적절한 행동을 인식하며, 지시를 내려 부적절한 행동을 바로잡는다.
흥미롭게도 뇌 연구에서 밝혀진 바로는 복내측 전전두피질, 즉 양심에 부하가 걸리면 배외측 전전두피질, 즉 이성의 활동이 줄어들고, 거꾸로도 마찬가지다. 양심이 깨끗하면 그만큼 더 효율적인 추론과 사고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반대로 하나님의 사랑의 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때는 전략과 계획을 짜는 능력을 양심이 약화시킨다. 다시 말해서 죄책감이 있으면 사고를 명료하게 할 수 없다. 판단력이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려면 양심이 떳떳해야 한다.
이성과 양심의 이 놀라운 균형은 하나님이 유한한 인간에게 건강한 선택 능력을 주시려고 설계하신 것이다. 사랑의 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궁리하고 있으면 양심이 위험 경보기를 울림과 동시에 파괴적 행동의 지속적 계획을 저지한다. 그동안 마음은 신호를 보내 부적절한 행동을 바로잡으려 한다. 뇌 영상의 연구를 통해 입증되었듯이 우리가 사랑의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전두대상피질이 더 개발된다. 그뿐 아니라 그런 사람은 스트레스 호르몬, 혈압, 심장박동이 낮아지고 요절할 위험성도 줄어든다. 사랑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결함투성이 몸까지도 치유해낸다. 반대로 두려움을 유발하는 분노와 진노의 신을 생각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뇌 손상이 커지고 건강이 더 빠르게 쇠퇴해 결국 수명이 단축된다.
예수께서 오신 것은 우리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시기 위해서다. 풍성한 삶이란 곧 사랑의 삶이며, 사탄이 왜곡한 하나님관을 진리로 대체할 때에만 가능하다. 그래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로 흘러갈 수 있다.
그날 나는 계속되는 상상 속에서 비극적인 사건을 보았다. 아담이 하나님에 대한 거짓말을 믿어 사랑과 신뢰의 서클에 금이 가는 순간, 사랑의 규범이 두려움과 이기심의 규범으로 바뀌었다. 자연계도 그 뒤를 따랐다. 남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생존 본능이 온 세상에 감염되었다. 천사들은 퍼져 나가는 타락을 보며 애통했다. 이 땅은 변하기 시작했다. 꽃은 시들어 죽었고 나뭇잎은 떨어져 썩었다. 동물들은 서로 공격하며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었다. 가시와 엉겅퀴와 독초가 출현했다. 형제가 형제를 대적했고 분노와 질투와 증오가 우리 마음의 사랑을 말살시켜 버렸다. 병이 퍼져 나가자 하나님은 슬퍼하셨고 자연은 탄식했다.
제2부 상충되는 하나님관의 싸움
회심한 사람의 뇌 안에서 벌어지는 싸움
거짓을 무너뜨리고 우리의 신뢰를 회복시키는 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진리다. 그런 신뢰가 있을 때 우리는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면 두려움이 극복된다. 늘 받으려고만 하던 우리가 능히 베풀게 된다. 이것이 회심이다. 회심은 마음을 지배하는 동기가 근본적으로 바뀌는 경험이다. 이것은 한순간에도 가능하지만, 하나님이 우리 삶을 치유하시는 변화는 서서히, 꾸준히,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건강하지 못한 신경회로가 없어지고 건강한 신경회로가 만들어지려면 시간이 걸린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 한 말이 그것이다. 뇌 생리학의 통찰을 보태서 바울을 말을 풀어보자면;
“전에는 내가 불신과 두려움과 이기심에 병들지 않고 건강한 줄로 알았다. 그러나 계명으로 진찰해 본 결과 내게 가망 없는 불치병의 진단이 내려졌다. 진단의 목적으로 주신 계명을 나도 모르게 치료에 쓰려다 보니 오히려 내 병이 더 악화되었다. 계명은 진단만 할 수 있고 치료는 할 수 없거늘, 이기심과 자만심은 계명을 지키면 치료될 수 있다고 나를 속였다. 그래서 내 불치병이 더 악화되었다. 아, 나는 엄연한 현실을 깨닫는다. 내가 선을 행하고 싶어도 이기적인 구습과 두려움의 잔재가 바로 나와 함께 있다. 내 전전두피질은 하나님의 방법과 원리를 즐거워하지만, 오랜 세월 불신에 병들어 사탄의 방법대로 살았던 폐해가 아직 내게 남아 있다. 아, 나는 얼마나 치명상을 입은 타락한 인간인가! 이렇게 병들고 일그러진 뇌와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 치료해 줄 것인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치료제를 마련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리라!”
하나님은 사랑과 진리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7).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사고가 어두워지고 마음에 두려움이 가득해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우리의 사고가 치유될 수 없다. 그래서 사랑은 계속 싸운다.
하나님에 대한 시각을 넓히라
해럴드는 37세의 과묵한 남자였다. 암 전문의는 시한부 선고 때문에 혹시 그에게 우울증이 생기는 것은 아닌지 나에게 진단을 의뢰해왔다. 해럴드는 몇 달 전에 식도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고 치료 중이었으나 예후가 좋지 않았다. 그는 결혼 생활이 행복했고 열 살, 일곱 살, 다섯 살의 예쁜 세 자녀도 두었다. 당연히 그는 죽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두려움, 깊은 슬픔, 절망 같은 감정이 그를 삼킬 듯이 위협해 왔다.
해럴드는 절망에 굴하거나 감정에 지배당하고 싶지 않았다. 우울의 구덩이 속으로 빨려들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없었다. 어차피 이것이 삶의 마지막이라면 최대한 생산적이고 충만하게 살고 싶었다. 나를 보러 온 것도 그래서였다. 그는 진실을 내면화해 제대로 소화하느라 고심하고 있었다. 그는 두 주 전 자기 교회의 치유 집회에 참석했었다고 했다. 목사와 장로들이 병자들에게 안수하고 기름을 바르며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을 구했다. 하지만 그의 병은 호전되지 않았다. 병원에 가보았지만 아무런 차도가 없었고 오히려 암이 계속 퍼지고 있었다. 그의 회의와 두려움과 불안은 더 깊어졌다.
“하나님은 분명히 능력이 있으신데 왜 나를 고쳐 주지 않으신 거지? 다른 사람들은 고쳐 주시면서 왜 나는 아니지? 내가 구원받지 못한 건가? 덜 착한 건가? 믿음이 부족해서인가? 내 삶에 나도 모르는 죄가 있어서인가? 나는 지금 벌을 받고 있는 건가?”
해럴드가 그의 생각을 치유해 줄 진실을 만나려면 시각을 넓혀야만 했다. 내가 말했다. “많은 기독교 진영 안에 무언의 신념이 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기적이 일어날 것이고,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믿음이 약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그게 정말 사실일까요? 그 개념이 과연 성경적일까요? 혹시 그 개념은 진실이 거의 180도 뒤집힌 게 아닐까요? 기적은 믿음이 강한 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믿음이 약한 자들을 위해서 일어나는 게 아닐까요? 믿음이 견고한 자들에게는 굳이 기적이 필요 없고, 그리스도 안의 ‘아기들’에게나 아직도 표적과 기사가 필요한 게 아닐까요? 기적은 흔히 믿음이 강한 자들을 통해서 일어나지만 믿음이 강한 자들을 위해서는 아니지 않을까요?”
“기적의 목적은 믿음이 약한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성경을 봅시다. 하나님이 기드온을 불러 미디안을 무찌르게 하셨을 때 그는 양털의 기적을 구했지요. 이것은 그의 믿음이 강해서였습니까, 아니면 믿음이 약해 격려가 필요해서였습니다. 또, 갈멜산에 하나님의 불이 내려와 엘리야의 제물을 살랐지요. 이 큰 기적은 엘리야의 믿음을 굳세게 하려고 그에게 주신 것입니까, 아니면 믿음이 약한 백성을 위해 주신 것이었습니까? 다니엘과 친구들은 풀무 불에 던져졌을 때 철저히 하나님의 뜻에 맡기며 바벨론 왕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 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
“욥의 이야기도 해봅시다. 욥은 하나님의 친구로 불릴 정도로 하나님께 절대적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주의 증언대에 서서 그분에 대한 진실을 말할 증인이 필요했을 때, 하나님은 욥을 택하신 것입니다. 욥기의 주제는 욥 개인의 고통과 씨름을 훨씬 넘어서지요. 욥기 42장 7-8절에 보면 하나님은 욥이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옳’다며 두 번이나 욥을 칭찬하십니다. 욥은 하나님을 사랑했고 그분의 손에 기꺼이 자신을 의탁했습니다. 헤럴드, 당신도 하나님의 그런 친구일 가능성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지금 하나님이 당신을 우주의 증언대로 불러 그분에 대한 진실을 증언하게 하셨을 수도 있음을 생각해 보았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확신하는 근거는 기적이 아니라 그분의 성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믿음을 얻어내실 때 자신의 믿을 만한 성품을 계시해 주십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통해 계시되었지요. 기적은 가짜일 수 있지만, 예수께서 계시해 주신 진리는 가짜일 수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개입하지 않으셔도 확신이 흔들리지 않을 만큼 우리가 그분을 잘 알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이 능히 기적을 행하실 수 있다는 확신이 아니라 기적을 행하지 않으셔도 그분을 신뢰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