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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 스님의 행복

법륜 지음 | 나무의마음



법륜 스님의 행복

법륜 지음



나무의마음 / 2016년 1월 / 280쪽 / 14,000원





1장 왜 내 삶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까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면



남들은 꿈을 좇아 열심히 사는 것 같은데 왠지 나만 뒤처지는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게다가 이루고 싶은 꿈,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도 현실적인 여건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다면 마음의 갈등이 더 크겠지요. 한 30대 남성이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어쩔 수 없이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런 현실이 너무 괴롭다며 이렇게 하소연했습니다. “경제적 여유만 있다면 적성을 살려 제가 하고 싶은 디자인 공부를 다시 시작해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결혼도 하고 아이도 생기다보니 직장을 그만두고 꿈을 찾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거 같습니다. 이대로 꿈을 포기하고 하루하루 살아도 될까요?”

우리는 흔히 적성에 맞는 일을 해야 행복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적성이란 있다고도 할 수 있고 없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과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고 적성에도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장래 희망에 종교인은 단 한 번도 고려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제가 과학자가 아닌 종교인으로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번민과 갈등이 있었겠어요? 그런데 고등학생 시절 출가해서 지금까지 종교인으로 살면서도 과학은 제 삶 속에서 늘 새롭게 응용되었습니다. 원래 과학에 관심이 있던 까닭에 종교에서도 허황된 요소는 믿지 않고 멀리했습니다. 대신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불법의 이치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를 두고 고민했어요. 그러다보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할 때에도 논리가 정연하게 강의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결국 어떤 일을 하든 거기에는 개인의 성향이 작용하게 됩니다. ‘내 적성은 과학에 맞으니까 나는 반드시 과학에 관련된 일을 해야 한다.’ 이런 생각은 고정관념일 뿐입니다. 내 적성이 어떤 직업에만 딱 맞는다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무슨 일을 하며 살든 어떤 직업을 선택하든 최선을 다하다보면 그 일에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적성을 발휘하게 됩니다.

직업을 선택할 때 젊은이들에게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하라” “가슴 뛰는 일을 하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의 참뜻을 잘 새겨들어야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돈과 명예, 안정만을 좇아 의사나 변호사, 공무원이 되려 하지 말고 자기 적성에 맞는 일을 찾으라는 뜻입니다. 자기가 잘할 것 같고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잘나가는 직업’인지 아닌지를 너무 따지지 말고 당장 돈이 되지 않더라도 도전하라는 의미예요. 세상에서 좋다고 평가되는 것이 나에게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무조건 세상 사람들이 좋다는 길로 따라가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하고 싶거나 좋아하는 일이 없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또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절망할 필요도 없어요. 가령 디자인 공부를 하고 싶은데 지금 공부할 상황이 안 된다면 고민할 게 아니라 지금 하는 일에서도 디자인 감각을 접목시킬 수 있습니다. 만약 이분이 스님이 된다면 어떨까요? 스님이 되어서도 디자인을 하지 않을까요? 승복을 디자인하는 데 관심을 가질 수도 있고, 절 정원을 가꾸거나, 절집 설계를 바꾸어 전통미를 살리면서 현대적으로 변화를 주자고 할지도 모릅니다. 어떤 일을 하느냐, 디자이너가 되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인연이 되는 대로 무엇이든 하면서 자신의 적성과 장기를 살릴 수 있습니다. 꿈을 찾는다고 현실을 등한시하고,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 좋아하는 것만 찾아다니면 인생을 허황되게 살기 쉽습니다. 그렇다고 현재의 밥벌이에만 급급하다보면 미래에 희망이 없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상을 좇을 것인가, 현실을 중요시할 것인가를 놓고 항상 갈등합니다. 그런데 이상과 현실은 모순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두발은 현실에 딱 딛고 서서 두 눈은 이상을 향해서 한 발씩 한 발씩 나아가면 됩니다.

행복의 비결



하루는 어느 신도가 제게 이렇게 말했어요. “스님, 제가 지금껏 절에 다니면서 불전함에 돈을 수도 없이 넣어봤지만 아무 효과가 없더라고요. 만약에 만 원을 넣어 백만 원이 돌아온다는 보장만 있으면 얼마든지 넣을 텐데 말이죠.” 만 원을 넣고 백만 원 받기를 바란다면 그건 투기심에 지나지 않습니다. 꼭 이런 돈 욕심이 아니어도 우리가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며 지도하는 내용도 이와 비슷해요. 노력은 조금 하고 대가는 크게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실적도 부족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는 자기 자식을 좋은 대학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잖아요.

이런 마음으로 기도를 한다면 복은커녕 오히려 화를 불러오게 됩니다. 노력은 적게 하고 결과는 크게 받으려는 것은 도둑놈 심보인 거죠. 결국 내 대신 누군가를 희생시켜야 한다는 뜻이니까요. 가령 공부 못하는 내 자식이 좋은 대학에 붙으려면 공부 잘하는 누구네 자식 한 명이 떨어져야 하잖습니까. 따라서 이런 기도는 이루어질 리가 없어요. 이뤄지지 않는 것이 마땅한 이치인데도 자기가 헛된 욕심을 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부처님을 원망하고 하느님을 탓합니다. 가만 보면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쉽게 될 것 같지 않은 일들을 바랄 때 기도합니다. 그러다보니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을 확률이 높을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우리 삶은 즐거움보다 괴로움이 더 많은 거예요.

세상살이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면 좋겠지만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지지 않는 게 현실입니다. ‘원하면 다 이루어진다’는 말은 환상이고 욕심일 뿐이에요. 이때 원하는 것에 매달려 울고불고하면서 불행하게 살 것인가. 아니면 그런 가운데서도 행복하게 살 것인가. 이것은 선택의 문제입니다.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인생이 괴로운가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을 때 괴롭지, 이런 생각이 없다면 이루어지면 좋고, 안 이루어져도 그만이에요. 일은 내가 하지만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내가 의도한 대로 모두 되는 게 아니라 주변 상황과도 맞아떨어져야 합니다. 이 이치를 알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때론 실패도 하고 때론 좌절도 해야 굳건한 성장을 합니다.

어떤 일이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든 그 과정에서 이미 행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되는 게 행복이고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세상 일은 내가 원한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객관적인 상황이 그렇게 될 때도 있고 그렇게 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따라서 외적인 조건과 상황에 따라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한 행복은 기껏해야 반쪽짜리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만을 바라는 마음을 움켜쥐고 있으니까 당연히 불행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행기는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우리는 “자식 때문에 못 살겠다” “남편 때문에 못살겠다” “직장 상사 때문에 못 살겠다” 하면서 남 탓, 환경 탓을 합니다. 이러한 기대와 고집을 내려놓지 못하면 우리의 삶은 힘들어 집니다. 우리를 둘러싼 주변 환경은 늘 변합니다. 그런데 이건 이래야 하고 저건 저래야 한다는 바람과 고집을 내려놓지 못하면, 환경과 조건에 따라 끝없이 흔들리게 되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행복의 기준을 미리 정해놓고 그 길만 고집한다면 도리어 행복에서 멀어집니다. 반대로 내가 기대한 대로 돼야 한다는 고집을 내려놓고 인연 따라 지혜롭게 대처할 때 행복도 찾아옵니다.



2장 감정은 만들어진 습관



좋고 싫음의 감정에서 자유롭기



우리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불교에서 말하는 육근六根으로 눈, 귀, 코, 혀, 몸, 뜻을 가리킴)으로 사물을 접하면서 순간순간 기쁘다. 슬프다. 두렵다. 외롭다 하는 갖가지 감정을 경험합니다. 좋아하고, 사랑할 때는 너무 기뻐서 천국을 경험하고, 미워하고 원망할 때는 너무 괴로워 지옥 속으로 허우적대지요 그렇다면 우리를 기쁘게도 하고 괴롭게도 하는 감정은 어떻게 일어나는 걸까요?

감정은 부싯돌이 부딪치면 불꽃이 피어나듯 순간적으로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길을 가다가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 아무리 낮선 사람이라도 순간 마음이 동요합니다. 그리고 이내 슬퍼집니다. 그게 만약 불의의 결과라면 분노를 느끼겠지요. 이렇듯 감정은 외부 자극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기 때문에 본래 타고난 것이고, 고유의 실체가 있어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거기에 사로잡혀 자기감정을 절대화하지요. 그런데 과연 좋고 싫음은 객관적 실체가 있을까요?

꽃을 보고 기분이 좋아지는 때를 생각해봅시다. 지금 내가 장미 한 송이를 보며 ‘참 예쁘다’는 생각이 들면 이내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리고 그 좋은 마음에는 아무런 부작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꽃이 나를 좋아해주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꽃이 참 예쁘구나!’ 하는 마음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좋아할 때 마음이 두근거리는 것은 상대가 나를 좋아할까 아닐까를 분별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좋아하듯이 저 사람도 날 좋아할까?’ ‘어떻게 하면 저 사람도 나를 좋아하게 만들까?’ 이렇게 생각하고 요구하기 때문에 머릿속이 혼란스럽고 심장이 뛰는 겁니다. 즉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면서 마음이 두근거리는 것은 저 사람이 나를 좋아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런 생각에 아무리 몰두해도 상대가 나를 좋아하게 되는 것은 아니에요. 내가 좋아하면 상대도 나를 좋아하리라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것과 그가 나를 좋아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예요. 그러니 앞으로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가슴이 뛸 때는 ‘내가 지금 이 사람을 좋아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기보다 ‘지금 저 사람이 나를 좋아하길 바라고 있구나’라고 자신의 감정을 바로 봐야 합니다.

나와 사고방식과 관점이 다른 사람이 있을 때 굳이 그 사람에게 다가가서 사귀려고 할 필요도 없고 그 사람을 회피하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또 상대방을 내 마음에 맞게 고치려고도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됩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카르마에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나의 관점에서 보면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들이 그 사람 편에서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 됩니다. 따라서 어차피 만날 수밖에 없는 인연이라면 상대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나를 편안하게 하는 길입니다. ‘내 성격도 못 고치는데 내가 어떻게 남의 성격을 고치겠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으면 상대를 인정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나와 맞지 않는 사람과도 같이 일할 수 있고 같이 살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좋아하면 같이 살아야 한다고 집착하고, 싫어하면 무조건 헤어지는 길밖에 없는 줄 아니까 늘 괴롭고 불평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좋고 싫음의 감정에 구애받지 않을 수 있다면 우리 인생이 얼마나 자유롭겠습니까.

우리는 좋아하면 반드시 가져야 되고 싫어하면 반드시 버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주어진 객관적 상황은 좋아하는데 가질 수 없고 싫어하는데 버릴 수 없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는 겁니다. 그럴 때 하루하루가 지옥처럼 느껴집니다. 따라서 상대가 좋지만 헤어질 수밖에 없고 싫지만 함께 있을 수밖에 없을 때는 그 좋아하고 싫어함에 내가 속박당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조금 더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만들어진 습관은 고칠 수 있다



소나무가 절벽 위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남기까지는 소나무의 성질과 주변 상황과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이 있었을 겁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예요. 지금 우리의 습관과 행동은 오래전부터 주변 환경과의 상호작용으로 형성되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이 습관이라는 것은 쉽게 바뀌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종의 관성이지요. 그런데도 금방 바꾸려고 하니까 잘 안 됩니다. 그러면 “나는 문제다”라고 자책하기 쉽습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성격이 빨리 안 바뀌어도 답답해하고 버럭 화를 내기도 합니다. 성격은 습관이고 습관은 본래 쉽게 바뀌지 않는데, 잘 안 바뀐다고 조급해하니까 화가 나고 미워하고 좌절하는 거예요. 더군다나 어릴 때 형성된 습관은 더더욱 고치지가 어렵습니다. 무의식에 깊이 뿌리박혀 있어서 고치기가 어렵기 때문에 “운명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습관도 다 만들어진 것이고, 고정불변한 것이 없기 때문에 노력하면 변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담배를 끊으려고 할 때 의식에서는 ‘끊어야지’ 하지만 무의식에서는 ‘끊기 싫어’하기 때문에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갈등이 생깁니다. 그래야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 마음은 그러기가 싫은 겁니다. 마음은 무의식에서 일어나고, 의지는 의식에서 일어납니다. 의식이 무의식을 통제하려면 대부분 실패해요. 그래서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윤리나 도덕으로는 안 해야 되는 줄 알면서도 마음이 끌려가는 경우가 있잖아요. 또 알긴 다 아는데 행동이 안 따라준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결국 우리의 말과 행동은 생각이나 의지보다 무의식인 마음의 영향을 더 강하게 받는다는 의미예요. 예를 들어 시험공부를 하는 학생이 새벽 3시에 일어나기 위해 가족에게 부탁한 뒤 자명종 시계까지 맞춰놓고 잔다고 합시다. 새벽 3시가 되어 가족이 깨우고 시계도 울리니까 학생이 잠깐 눈을 떴지만 다시 잠들어버렸어요. 그러고는 아침에 일어나서 가족에게 왜 깨우지 않았냐고 투덜거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반면에 소풍을 간다거나 수학여행을 간다고 하면 어느 누가 깨우지 않아도 제 시간보다 일찍 일어나는 경우가 많아요.

이것이 바로 의식과 무의식의 차이입니다. 몇 시에 일어나겠다는 것은 의식의 작용이에요. 잠이 들면 의식이 움직이지 않으므로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잠이 들었다가도 꿈을 꾼다거나 기대감에 들떠서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는 것은 무의식이 움직인 결과예요. 무의식은 의식적인 것은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아주 좋은 일이나 마음 깊이 와 닿는 일일 때만 영향을 준다고 보면 됩니다. 어떤 굳은 결심을 하더라도 무의식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이 바뀌어도 무의식이 바뀌지 않으면 행동이 잘 변하지 않지요. 자신의 단점을 계속 지적받고 고치려 노력해도 좀처럼 바뀌지 않는 것은 의지가 무의식까지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무의식을 바꾸는 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은 아니에요. 의지가 아주 강력하다면 절대로 변할 것 같지 않던 자신의 오래된 업식인 카르마를 변화시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다만 변화를 기대하기 전에 카르마는 쉽게 바뀌지 않는 성질을 갖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시행착오가 따를 수도 있고, 꽤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시작해야 해요. 간혹 전기 충격에 버금가는 강력한 자극이 신체에 주어질 경우 순식간에 변화가 일어나기도 하지만 흔히 벌어지는 일은 아닙니다.

습관을 바꾸려면 꾸준한 노력이나 강력한 의지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꾸준히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강하게 마음먹지도 않습니다. 조금 도전하다가 ‘에잇,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안 그래도 다 사는데’ 하고 포기합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지만 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고 꾸준하게 밀고 나가야 합니다. 의식적으로 꾸준하게 변화를 추구하면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이 습관으로 자리잡아 무의식화됩니다. 그러면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면서 비로소 운명이 바뀌게 됩니다.



3장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법



나무는 서로 어울려 숲을 이룬다



산에 가면 소나무만 빽빽이 자라거나 키 큰 나무만 자라는 게 아니고, 소나무와 낙엽송이 섞여 자라기도 하고 키 큰 나무 아래 키 작은 나무가 자라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갈등 없이 잘 자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로 좋아서 만나고 결혼까지 한 부부 사이에 갈등이 왜 생길까요? 남편이 술 먹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고, 아내가 잔소리하기 때문에 갈등이 생길까요? 아니에요. 남편이 술 마시고 왔을 때 “왜 술 먹니? 건강 해치고 돈 없애고 바보 같은 짓을 왜 하니?” 이렇게 반응하고, 아내가 잔소리할 때 “또 그 소리야? 적당히 좀 해!” 하면서 반감을 갖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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