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미술관
최연욱 지음 | 생각정거장
비밀의 미술관
최연욱 지음
생각정거장 / 2016년 1월 / 288쪽 / 15,000원
피카소, 자신을 마케팅하다!
우리 모두 어렸을 적에는 꿈을 갖고 있었다. 꿈들은 자라면서 수없이 변하기도 하고, 험악한 사회와 타협하면서 아예 사라지기도 한다. 하지만 앞만 바라보고 노력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언젠가 그 꿈을 이룬다. 죽고 나서라도 말이다. 파블로 피카소는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현실이다’라고 말했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인이 되면서 욕망을 꿈으로 착각하게 된다. 그래서 더 이상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 아닌 빨리 부자가 되는 것을 꿈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돈이 많다고 행복한 것은 절대 아니지만 돈이 없으면 불행이 찾아온다. 꿈을 이루거나 발전시키는 것은 물론,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돈이 필요하다. 대다수의 예술가들에게는 넘기 어려운 장애물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많은 예술가들은 삶이 지옥이란 말을 절실히 실감하곤 한다. 명예를 얻은 것은 물론 경제적으로도 성공했다고 알려진 파블로 피카소도 초기에는 말 그대로 쫄쫄 굶었다. 피카소는 태어나서 걸음마보다 그림을 먼저 그렸다고 한다. 또 9살에는 <투우사>라는 작품을 완성했는데, 이미 색과 구도가 아주 안정적이었다. 15살에 그린 <첫 성찬식>이나 <화가의 아버지>는 도저히 학생이 그렸다고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작품의 주인공들은 다름 아닌 피카소의 부모님과 여동생이었다.
전업화가의 길에 들어선 첫날부터 피카소도 가난과 ‘절친’이 됐다. 겨울에는 난방비가 없어서 자기의 작품을 태워 난방해야 했다. 유화를 그렸으니 아주 활활 탔겠지만 그을음은 심했을 것이다. 얼어 죽지 않고 살아서 봄을 맞았을 때는 더 이상 그림 그릴 캔버스가 없었다. 그래서 쓴 캔버스를 재활용하기도 했다. 캔버스를 재활용하면 기존에 말라붙어 있는 물감 때문에 새 물감이 잘 올라가지 않아 그림 그리기가 상당히 어렵지만 많은 화가들이 돈이 없어서 이렇게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다.
피카소는 미술이 일상의 먼지가 쌓인 영혼을 씻어준다고 믿었다. 즉, 자신의 작품을 통해 사람들의 영혼을 맑게 해주는 것이 꿈이었다. 피카소는 이미 자신이 천재라는 것을 알았고 열심히 노력했다. 하지만 초년의 경제적 궁핍은 큰 걸림돌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던 피카소는 파리의 모든 갤러리를 돌아다니며 “피카소의 작품이 있냐”고 물어보고 다녔다. 자신의 작품을 직접 사러 다닌 것이다. 물론 갤러리들은 피카소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대답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한 바퀴를 다 돌면 다시 처음부터 그 과정을 반복했다. 파리는 그리 큰 도시가 아니기 때문에 걸어다녀도 가능한 작업이었다. 그렇게 다닌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작품을 찾는 갤러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마침내 피카소도 돈을 버는 화가가 됐다. 지금 생각해봐도 아주 기발한 아이디어다. 하지만 피카소가 서울이나 뉴욕, 도쿄처럼 파리보다 면적으로 보나 인구로 보나 훨씬 큰 도시에 살았다면 불가능한 시도였을 것이다. 피카소는 자신의 환경을 정확히 인지했고, 그에 맞는 액션 플랜을 짰으며 무엇보다 포기하지 않고 실행에 옮겼다.
이렇듯 ‘예술가들은 가난하다’는 편견과는 달리 피카소를 포함한 많은 거장들이 경제적으로 풍족했다. 물론 피카소처럼 자신의 꿈을 향한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노력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인류의 걸작을 더 일찍 만들어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예술가들에게는 문제점이 하나 남아 있다. 자신의 분야를 제외한 다른 분야에는 매우 약하다는 것, 꿈을 만들고 목표를 실행하기 위해 필요한 경제 독립 쟁취를 할 수 있는 방법과 자신의 꿈이 담긴 자서전을 미리 써보자. 미술을 포함한 자신의 분야에서 위대한 업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독립 선언과 2달러 지폐
행운의 2달러 지폐!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미국의 화폐는 1, 5, 10, 20, 50 그리고 100달러 지폐와 1, 5, 10, 25, 50센트, 그리고 1달러짜리 동전이다. 2달러 지폐는 사용량이 적어서 발행 수가 점차 줄어들었고, 1966년에 결국 생산 중단됐다. 이후 1976년 등 몇 차례에 걸쳐 다시 발행됐지만, 미국 화폐의 유통경로를 조사하는 사이트인 ‘Where’s George?(www.wheresgeorge.com)’에 따르면 미국 내에 돌고 있는 2달러 지폐는 약 300만 장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2009년 우리나라 5만 원권이 처음 반행됐을 때, 악 2,700만 장이 유통됐던 것에 비하면 귀한 지폐는 맞는 것 같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지폐에도 미국을 대표하는 위인들의 초상화가 들어 있다. 지폐 뒷면에도 멋진 그림들이 그려져 있는데 특히 2달러에는 미국인들에게 아주 의미 있는 작품들이 들어 있다. 바로 독립선언문을 만들고 있는 건국의 아버지 56명의 모습이다. 건국의 아버지란 미국의 독립을 주도했으며 독립선언문을 만들었고, 헌법을 제정한 56인을 뜻한다.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패트릭 헨리의 연설처럼, 자유를 외쳤던 미국인들에게 1776년 7월 4일의 독립은 정말 큰 의미가 있다. 이 작품은 1817년, 존 트럼벌이 작업한 것이다. 미국 정부는 1819년에 작품을 구입해서 1826년, 워싱턴 DC의 국회의사당에 걸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약 200년 동안 한자리를 지키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미국 독립선언문에 사인을 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잘못 알려져 있다. 미국인 중에서도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실제는 앞에서 말했듯 독립선언문의 초안을 작성하는 모습으로 미국 대륙회의 의장 존 핸콕의 주최 아래 토머스 제퍼슨과 벤자민 프랭클린, 존 애덤스, 로저 셔먼, 로버트 리빙스턴이 작품 오른쪽 중앙에 모여 있다. 작품 속 인물의 머리를 다 세어보면 총 47명이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 실제로 독립선언문을 작업하고 사인한 사람들은 모두 56명이다. 게다가 작품에 등장하는 47명 중에서도 실제로는 사인을 하지 않은 사람이 5명이나 된다. 그렇다면 이 42명을 제외한 나머지 14명은 어디로 갔을까? 누군지 밝히지는 않겠지만 존 트럼벌의 생각에 작품에 들어갈 만큼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었나 보다. 그냥 싫었을 수도 있고.
배경 또한 실제와는 많이 다르다.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고 사인한 곳은 필라델피아에 있는 인디펜던스 홀이다. 요즘은 이렇게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있으면 TV나 신문사에서 취재를 했겠지만, 당시에는 그런 기술이 없었으니 기록을 남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글로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가로 5.5m나 되는 작품을 그리기 위해서, 바쁘신 분들에게 몇 개월 동안 있어 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존 트럼벌은 독립선언문을 만든 당시의 현장은커녕 인디펜던스 홀에도 가보지 않았다. 미국의 전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 그려준 스케치를 보고 작업했을 뿐이다. 1776년에 일어났던 일을 1817년, 칠순이 넘은 할아버지가 기억에 의존해 그려준 스케치였으니 정확할 리 없었을 것이다.
2달러 지폐의 뒷면은 작품 원본을 많이 자르긴 했다. 원작의 가장 왼쪽에서는 조지 와이스부터 토마스 린치까지 5명, 오른쪽에서는 토마스 맥킨과 필립 리빙스턴이 잘렸다. 디자인할 때 어떤 기준을 적용했는지 알려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큰 작품을 작은 지폐 뒷면에 제법 충실하게 반영했다. 자! 그럼 지금부터는 숨은 그림 찾기 시간이다. 존 트럼벌의 원작과 2달러 지폐 뒷면에서 다른 부분을 찾아보자. 이미 얘기한 것처럼 몇 명이 없다거나, 커튼이 덜 늘어졌다거나,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다거나 하는 것 말고 확실하게 다른 부분이 있다.
원작에서는 토머스 제퍼슨이 존 애덤스의 발을 밟고 있는데, 2달러 지폐에서는 그렇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원작의 이 부분을 토머스 제퍼슨과 존 애덤스가 정치적으로 좋지 않은 관계였던 사실을 표현하기 위한 장치라고 해석한다. 미국을 대표하는 정치가였던 두 사람은 50년 지기 친구이자 라이벌로, 주고받은 편지가 380통이 넘는다고 한다. 하지만 1800년 대통령 선거에서 맞붙게 된 두 사람은 서로 으르렁거리는 경쟁자가 됐다. 그러나 승리자 토머스 제퍼슨이 정계에서 은퇴한 이후에는 다시 절친한 친구로 돌아가 함께 여생을 보냈다. 그렇다면 1800년 당시의 선거 상황을 반영한 것일까?
하지만 발을 밟고 있는 부분을 가능한 한 확대해서 보면 생각이 조금 생각이 달라진다. 단지 옆으로 겹치게 그리다 보니 토머스 제퍼슨이 존 애덤스의 발을 밟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됐을 뿐이다. 즉, 모델이나 장소를 실제로 보지 않았던 존 트럼벌이 작품에 원근법 등 기본적인 미술의 법칙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미술의 기본도 모르는 사람이 이런 중요한 그림을 그린 것일까? 사실 존 트럼벌의 실력 부족으로 일어난 일은 아니다. 존 트럼벌은 어렸을 적에 사고로 그만 한쪽 눈을 잃었다. 그래서 그는 작품들을 대체로 멋있게 잘 그리긴 했으나 공간과 원근법을 세밀하지 못하게 표현하는 등의 실수가 종종 있었다. 그럼에도 조지 워싱턴이나 로버트 리빙스턴 등 당시 잘나갔던 많은 정치가들의 초상화나 미국 역사화를 많이 그릴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트럼벌의 아버지가 코네티컷 주의 주지사였던 것과 연관 있지 않을까. 그리고 후대에 2달러 지폐를 만들면서는, 토머스 제퍼슨과 존 애덤스 사이에 어떠한 정치적 대립도 없었다는 사실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눈에 보이게 둘의 발을 떨어뜨려 놨다.
못생긴 코 때문에 천 명의 남자와 잔 페기 구겐하임
화가는 아니었지만, 페기 구겐하임을 빼고는 현대미술을 얘기할 수 없다. 그녀가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화가들이 먹고살았고, 미술의 중심이 미국으로 넘어왔다고 할 수 있다. 페기 구겐하임의 아버지는 가진 것이라고는 돈과 여자들밖에 없었던 거물 사업가 벤자민 구겐하임이었고, 삼촌은 뉴욕, 빌바오, 아부다비에서 구겐하임 미술관을 운영했던 솔로몬 구겐하임 재단의 솔로몬 구겐하임이었다. 벤자민은 사생활이 굉장히 난잡했기 때문에 페기 구겐하임은 어려서 아버지를 거의 보지 못하고 자랐다. 그리고 벤자민은 아들만 편애해 회사는 물론이고 거의 모든 재산을 페기의 남동생 윌리엄에게 물려줬다. 1906년 당시 벤자민 구겐하임의 연봉은 20만 달러가 넘었다고 하는데, 지금 환율로 2억 원이 넘는 돈이다. 1900년대 초면 더욱더 엄청난 금액이었다. 하지만 1912년, 유럽에서 미국으로 오다가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그는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침몰한 그 배는 바로 타이타닉 호이다.
홀로서기를 해야 했던 페기 구겐하임은 서점에서 첫 일을 시작했고, 이때 여성 화가 조지아 오키프를 만났다. 당시에는 유명하지 않았지만 이후에 거장으로 등극한 화가다. 그러면서 페기는 미술에 눈을 뜨고 미술작품 콜렉팅을 시작했다. 1920년, 페기 구겐하임은 프랑스 파리 몽파르나스 주변의 카페에서 죽치고 있었던 화가들과 미술 비평가들을 만나 친분을 쌓으며 현대미술에 대한 안목을 키웠다. 마르셀 뒤샹이나 만 레이 같은 작가들은 화가들의 작업실과 전시회에 페기 구겐하임을 끌고 다니면서 그녀의 미술에 대한 지식을 늘리는 데 큰 도움을 줬다. 그렇게 현대미술의 기본 이론을 착실히 배운 페기 구겐하임은 본격적인 작품 수집에 들어갔다. 열심히 돈을 모아 그녀는 1938년 런던에 구겐하임 죈느라는 상업 화랑을 열었고, 1942년에는 뉴욕에 아트 오브 디스 센츄리 갤러리를 개관해서 유럽에서 수집한 현대미술작품을 소개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페기 구겐하임은 가는 곳마다 대박을 쳤다. 그 비밀은 바로 충분한 미술 지식과 실력 있는 젊은 화가들을 알아보는 안목이었다. 그녀는 그들의 작품에 아낌없이 후원해서 유명한 화가로 키워냈다. 그럼 자연스럽게 소장품의 가격도 올라갔다. 물론 어머니의 이른 별세로 처음부터 유산을 많이 물려받기도 했다. 21살의 나이에 물려받은 재산이 250만 달러, 지금 돈으로 약 380억 원 정도 된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돈으로도 해결하지 못했던 것이 두 가지 있었는데 바로 가족 문제 그리고 자신의 코였다.
첫 남편이자 조각가였던 로렌스 배일은 페기 구겐하임 덕에 먹고살았으면서도 아내를 때리고 욕한 아주 나쁜 놈이었다. 그걸 보고 자란 딸이자 화가 페귄 베일 구겐하임은 수차례의 자살시도와 마약 과다복용으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몇 년간의 결혼 생활을 접고 바로 존 홈스라는 작가와 살았지만 이번엔 홈스가 바람이 났다. 다음으로 자신이 먹여살려줬던 독일 화가 막스 에른스트와 재혼했지만 그 또한 얼마 못 가서 깨져버렸다. 독일계 유대인이었던 페기 구겐하임은 코가 상당히 못생겼다고 한다. 사진을 보면 코가 좀 크긴 하다. 그래서 일 년에 옷을 두세 벌밖에 안 샀던 여자가 1921년, 성형 수술을 받기 위해 큰맘 먹고 성형외과를 찾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기술로는 불가능한 코였다. 페기 구겐하임은 남자와의 불운을 코 때문이라고 믿었으며, 그 때문에 우울증까지 걸렸다고 한다. 그런 우울함을 풀기 위해 난잡한 성생활이 시작됐다.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약 1,000명 이상의 남자와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평생이 아니라 유럽에 살았던 단 몇 년간 말이다. 그것도 전쟁 통에! 수많은 화가들과 관계를 맺으며, 그녀는 가난한 화가들을 전쟁 중인 유럽에서 안전한 미국으로 데려와 당시 미국의 젊은 화가들과 교류시켰다. 살바도르 달리가 미술의 중심을 파리에서 뉴욕으로 옮기기 시작한 촉매제였다면, 페기 구겐하임은 아예 확실히 옮겨버린 장본인이다. 그녀가 미국으로 돌아와 키운 미국 화가들로는 윌렘 드 쿠닝, 마크 로스코, 알렉산더 칼더, 한스 호프만 등이 있으며, 특히 무명의 술꾼이었던 잭슨 폴록을 세계적인 스타로 키웠다.
하지만 이런 천재 미술 사업가도 손대지 않은 곳이 있으니 바로 앤디 워홀의 팝아트다. 그녀는 자신이 손대기 전 이미 성장해버린 팝아트에는 투자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다. 이미 가격이 높으니 투자해봤자 그만큼의 수익을 못 낸다는 생각이었다. 이후 앤디 워홀이 미술계를 장악했을 때, 그녀는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자신의 컬렉션과 함께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미술 투자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활발한 미술 사업과 성생활을 즐겼던 페기 구겐하임은 이탈리아 베니스로 넘어와 비엔날레에서 자신의 컬렉션을 공개하며 이탈리아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약 30년을 살았다. 그녀가 살았던 베니스의 예쁜 집은 지금도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으로 불리며 수많은 관광객들을 모으고 있다. 그녀는 죽기 전, 자신의 모든 재산을 삼촌이 세운 솔로몬 구겐하임 재단으로 넘겼다. 구겐하임 재단은 세계에서 제일 큰 미술재단이 됐고 지금도 전 세계의 미술계 큰손으로서 미술 시장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또한 젊은 작가들을 키우는 데도 아끼지 않고 투자 중이다.
짝사랑으로 탄생한 10등신 비너스
르네상스 회화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 중 하나는 바로 긴 머리에 똥배가 살짝 나온 단아한 미인을 그린 <비너스의 탄생>이다. 르네상스는 14세기경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 5세기 서로마제국이 멸망하면서 고대부터 약 12세기까지 중동을 지배했던 동로마 제국은 지금의 터키 수도 이스탄불에 위치했던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크게 번영했고, 이후 이슬람의 지배를 받으며 그쪽 지역의 예술과 과학까지 흡수하는 등 엄청난 발전을 하게 됐다. 그리고 15세기, 오스만 제국에 완전히 흡수될 때까지 중국과 함께 전 세계를 휘어잡았다.
이슬람 세력은 이베리아 반도, 지금의 스페인과 포르투갈 중부까지 뻗어갔고, 고대 그리스 로마와 이슬람의 선진문명 덕분에 끝없는 발전을 했다. 이때부터 이탈리아에서 위대한 화가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산드로 보티첼리는 청년이 된 후 프라 필립포 리피라는 수도사에게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후에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금융업 거부였던 메디치 가문의 후원으로 전업 화가의 길을 걷게 됐다. 메디치 가문의 로렌조는 1486년, 자신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서 보티첼리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폴리치아노의 시를 그림으로 표현해달라고 주문했다. 그는 폴리치아노가 그리스의 시인 헤시오도스의 시를 바탕으로 쓴 스탄자, 즉 4행 이상의 각운이 있는 시구에 영감을 얻어 작업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