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
애덤 스미스, 러셀 로버츠 지음 | 세계사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
애덤 스미스, 러셀 로버츠 지음
세계사 / 2015년 10월 / 304쪽 / 15,000원
어떻게 우리의 삶이 바뀔 수 있는가
행복하고 좋은 삶이란 어떤 것일까? 행복의 진짜 의미는 무엇일까? 돈을 많이 벌거나 사회적으로 권위 있는 직업을 갖는다는 걸까? 또 좋은 삶이란 어떤 의미일까? 선의를 베풀 줄 안다는 의미, 즉 다른 사람들을 돕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한다는 뜻일까?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고민해보는 명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것이 비단 오늘을 사는 우리들만의 고민은 아니었다. 250년 전, 스코틀랜드의 한 도덕철학자는 『도덕감정론』이라는 책에서 이 질문들을 정면으로 다루었다. 저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애덤 스미스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도덕적인 마음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그리고 왜 사람들이 자기 이익과 상관없는 일에도 예의 바르고 선하게 행동하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18세기 당시만 해도 『도덕감정론』은 대단한 성공작이었지만, 사실상 오늘날에는 거의 잊힌 책이다. 책이 별로여서가 아니라 동일 저자의 『국부론』이란 책의 명성에 묻힌 탓이다. 이렇듯 멀게만 느껴졌던 나와 『도덕감정론』과의 관계는 어떻게 좁혀졌을까? 어느 날 조지 메이슨 대학교 교수인 친구 댄 클라인이 내게 흥미로운 제안을 해왔다. “〈이콘토크(EconTalk)〉에서 『도덕감정론』에 관해 얘기해보는 건 어때?” 나는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망설이지 않고 그러자고 답했다. 그렇게 하여 나는 먼지가 켜켜이 쌓인 『도덕감정론』을 책꽂이에서 빼낸 뒤, 첫 페이지를 펼치고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3페이지까지 읽은 후 책을 덮어버렸다. 당시에는 스미스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친구와의 약속을 저버릴 수 없어서, 일단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책을 완독한 후 방송을 해야 했다. 나는 숨을 고른 후, 다시 책을 펼쳤다. 허덕거리며 수십 페이지를 읽어 내려간 후에야 스미스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3분의 1쯤 읽었을 때, 이 책에 완전히 홀딱 빠져들어 버렸다.
내가 이 책에 탄복한 건, 애덤 스미스가 나로 하여금 사람들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 이 책은 나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도 바꾸어놓았다. 스미스 덕분에 비로소 나는 사람들과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 알게 됐다. 전에는 전혀 몰랐던 것들이다. 그는 돈, 야망, 명예, 미덕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해 시대를 초월한 현실적인 방법과 해결책을 제시한다.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지, 어떻게 물질적인 성공과 실패를 다루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또 선량하고 미덕을 갖춘 삶이 어떤 것인지, 나아가 그런 삶의 가치에 대해 설명한다.
이제야 만난 숨겨진 보물: 애덤 스미스는 무엇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지, 무엇이 사람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지 알아내고자 했다. 그리고 단언컨대 어떤 것들은 결코 관념적인 게 아닌,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유용한 것들이다. 내가 이 책에서 성실히 수행하고자 하는 주된 임무는, 『도덕감정론』에서 현재 우리에게 도움 될 만한 보석 같은 내용들을 찾아내는 것이다.
나에게 질문하는 시간
새끼손가락 vs. 수만 명의 목숨: 1759년,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을 집필하면서 모르는 사람 수만 명이 죽었다는 사실보다 내 새끼손가락 하나가 없어진다는 사실에 크게 상심하는 것이 우리 인간이라고 지적했다. 보다 자세히 살펴보자. 스미스는 지진을 상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갑작스러운 지진으로 인해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중국이라는 대 제국이 사라졌다고 생각해보자. 그리고 중국과 아무 관계도 없는 유럽의 한 휴머니스트에게 이 끔찍한 소식이 전해졌다면?’
과연 유럽의 휴머니스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짐작하건대, 우선 그는 중국인들에게 닥친 불운을 애도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목숨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고, 사람이 일궈놓은 것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린다는 사실에 비통해하며 자신의 심경을 표현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만다. ‘그는 자신의 감정과 의견을 적절하게 표출하고 난 뒤, 그런 끔찍한 사건이 언제 일어났다는 듯, 아주 편안하게 다시 하던 일을 하거나 놀거나 휴식을 취한 뒤 곤히 잠들 것이다.’
지진 얘기를 마친 후 스미스는 반대의 상황을 상상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새끼손가락이 없어질 거란 사실 앞에서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에 대해서. ‘만약 그가 내일 암으로 인해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잘라버려야 한다면, 아마도 오늘 밤 쉽사리 잠들지 못할 것이다. 반면 수억 명에 달하는 사람이 죽은 사고가 났다고 생각해보자. 하지만 그 사고를 직접 보지 않는 한, 그는 편안한 마음으로 코를 골며 잠들 것이다. 이렇듯 인간은 수많은 사람들의 사망 사건보다 자신의 작은 불운에 더 고통스러워한다.’
정말 스미스는 우리가 그 정도로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국부론』에서 세상이 이기심에 의해 움직인다고 했던 스미스의 말이 새삼 떠올랐다. 이에 대해 스미스는 복합적인 견해를 가진 듯 보인다. 물론 인간의 본성에 따라 우리의 생각이 대체적으로 나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해도, 스미스는 우리에게 나 자신 말고도 생각하는 것들이 무수히 많다고 했다. 『도덕감정론』의 첫 문장이 이를 입증한다.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인 존재라 할지라도, 기본 바탕에는 이와 반대되는 선한 본성도 있다. 그래서 인간은 다른 사람의 운명과 처지에도 관심을 갖는다. 또 자신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을지라도 다른 사람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기도 한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로 마음을 쓸까?
스미스가 예로 든 중국의 지진은 인간 본성이 매우 이기적이라는 견해와 잘 맞는다. 하지만 스미스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다시 이렇게 물을 것이다. ‘당신의 새끼손가락과 수백만 중국인들의 목숨을 맞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보자. 당신은 그렇게 하겠는가?’ 분명 당신은 성인군자가 아닐뿐더러, 내가 아는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므로 당신은 멀리 있는 수백만 명의 죽음보다 당신의 손가락 하나가 없어지는 것이 더 불행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라면, 당신은 중국인들의 목숨과 자신의 손가락을 맞바꾸고, 손가락을 지켰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낄 것이다. 그렇다면 앞의 질문에 대한 스미스의 답은 어떨까? 스미스는 인정이 눈곱만치도 없거나 교양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라도 그런 거래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수억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죽은 사고가 났을 때, 그 사고를 직접 보지 않는 한 편안한 마음으로 코를 골며 잠들 것이다. 하지만 직접 보지 않았다 할지언정 자신의 작은 불운을 막기 위해 수억이나 되는 중국인 형제들의 생명을 기꺼이 희생시킬 사람이 있을까? 세상이 아무리 부패하고 타락했더라도 그런 상황을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악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국부론』의 초반부를 보면, 번영을 이루어내는 전문성의 힘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인간은 자신이 잘하는 한 가지 일을 전문화하는 대신, 나머지는 타인의 도움을 통해 얻고자 한다. 이때 인간이 극단적인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렇게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는 인간은 타인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기적인 인간은 어떻게 타인이 원하는 것을 주게 된 것일까? 이 의문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스미스가 새로 정의한 이기심 때문이다. 우리는 타인이 원하는 것을 그냥 주는 게 아니라, 타인이 답례로 무언가를 줄 거라고 전제했기 때문에 주는 것이다.
이것이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정의한 이기심이다.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단순한 개념의 이기심과는 분명 다른 의미다. 이런 이기적인 인간들의 교역이야말로 번영을 가능케 하는 전문성의 원천이라고 스미스는 설명했다. 『국부론』에는 이렇게 이기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교역의 본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어떤 종류든 상대에게 흥정을 붙이는 사람은 누구나 이렇게 제안한다. “내가 원하는 것을 주면 당신 역시 원하는 것을 갖게 될 것이오.” 이런 의미는 사실상 모든 거래에 내재되어 있다. 이 방법을 통해서 우리는 상대방과 서로 원하는 것을 주고받는다.’
이는 스미스의 유명한 문장으로 손꼽히는 다음의 설명으로 계속 이어진다. ‘우리가 고기와 술, 빵을 먹으며 저녁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이나, 양조업자, 빵집 주인이 관용을 베풀어서가 아니다. 그들은 그
저 자신의 이익을 중시했을 뿐이다. 때문에 우리는 그들과 거래할 때 그들의 인간애가 아닌 자기애에 호소한다. 또한 우리가 필요한 것을 말하지 않고 그들에게 유리한 점을 말한다.’ 예를 들어보자. 만약 취업을 원한다면, 그 회사의 인간애가 아닌 자기애에 호소해야 한다. 즉 XYZ라는 회사가 나를 채용하면 왜 좋은지 그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제시해야 한다. 사람이 가장 큰 신경을 쓰는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이 사실을 기억해두면, 상대로부터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낼 때 상당한 도움이 된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취업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열정적으로 조언하는 부분이다.
자, 지금부터 당신이 나보다 당신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는 방식을 ‘당신의 철학’이라 부르자. 당신에게 철학이 있다면 나에게도 당연히 ‘나의 철칙’이 있지 않겠는가. 각자 우주가 자기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방식, 이러한 ‘각자의 철칙’이 바로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다.
공정하게 나를 관찰하는 사람이 있다: 『탈무드』에 등장하는 위대한 현자인 힐렐은 이런 물음을 던졌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위해줄 것인가? 그러나 반대로 내가 나 자신만을 위한다면,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이에 대해 스미스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당신이 당신 자신만을 위한다면, 다시 말해서 수억 명의 목숨과 자신의 손가락을 맞바꾼다면, 당신은 인간이 아닌 괴물이다.’ 이것이 나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의 두 번째 단계다. 우리는 모든 것을 내 위주로 생각한다. 하지만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항상 나에게 득이 되는 쪽으로만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스미스 역시 사람들이 이타적인 행동과 이기적인 감정을 어떻게 조화시키는지 궁금해했다.
인간 본연의 강한 자기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자신의 행복을 희생시키고 사심 없이 행동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한 가지 답을 한다면, 우리가 친절하고 품위 있는 존재로 타고났기 때문이다. 스미스식으로 표현하자면 자애롭고,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동정심으로 가득한 존재가 우리들이다. 그런데 스미스는 이기적인 생각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이 단순히 자애심이나 동정심 때문이 아니라, 공정한 관찰자 때문이라고 답했다. 공정한 관찰자란 인간의 상상 속 인물로, 스미스에 따르면 인간의 행동은 이 공정한 관찰자와의 상호작용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한다.
공정한 관찰자는 우리와 대화를 나누며 우리의 행동이 도덕적인지 확인해주는 공정하고 객관적인 인물이다. 공정한 관찰자는 양심과 아주 비슷해 보이지만, 고맙게도 스미스는 이 둘의 차이점을 친절히 알려준다. 양심은 각자의 가치관이나 종교 등의 원칙이 정한 기준에 어긋났을 때 자극을 받는다. 그런데 이런 기준은 상대적이고 개인적이기 때문에 스미스는 큰 가치를 두지 않았다. 이보다는 어깨 너머로 나를 쳐다보는 사람이 인간 대 인간으로 나를 심판한다고 상상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공정한 관찰자는 타인에 대한 배려심은 훌륭하고 고상한 것이라고 일깨워주는 우리 안의 목소리다. 하지만 우리가 단순히 동정심을 갖고 추상적으로나마 남들을 신경 쓰기 때문에 바른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한 스미스의 주장은 이렇다. ‘우리가 신성한 미덕을 실행하는 것은 이웃과 인류를 사랑해서가 아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나 인류애보다 더 큰 사랑, 더 강력한 애정 때문이다. 그것은 명예롭고 고상한 것에 대한 사랑, 존엄과 위엄에 대한 사랑, 탁월한 자신의 인격에 대한 사랑이다.’
행복을 위한 새로운 우선순위
우리가 인생에서 간절히 원하는 것: 애덤 스미스는 명예나 재산을 추구하는 삶에 열광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 우리를 정말로 행복하게 만드는 것에 집중하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우리를 정말로 행복하게 만드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사랑받기를 원할 뿐 아니라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우선 이 단순한 문장에 대해 두 가지 설명이 필요하다. 일단 스미스가 쓴 ‘사랑받다’라는 말이, 오늘날 연애나 가족 간의 사랑을 뜻하는 ‘사랑받다’와 같은 의미는 아니다. 그보다 훨씬 넓고 완전한 의미를 품고 있다. 사람들이 누구에게나 사랑받기를 원한다는,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를 요약하여 표현했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하고, 존경하고, 자신에게 관심을 갖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이 표현을 썼다. 틀린 말이 아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인정하고, 칭찬하고, 소중하게 여기길 바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받기를 원한다. 애덤 스미스는 이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행복이란 감정은 사랑받는다는 느낌으로부터 생겨난다.’라고 덧붙였다. 이와 더불어 단지 사랑받는 것만이 아니라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야 한다는 점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사랑받고 있고, 또한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 얼마나 행복할까? 반대로 내가 미움받고 있고, 미움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알면 얼마나 불행할까?’
스미스는 사람들이 비도덕적인 일을 안 하려는 이유에 대해서도 공정한 관찰자를 적용한다. 즉, 사람들의 행동이 객관적인 관찰자의 판단에 의해 저지된다는 뜻이다. 스미스는 주위에서 우리의 행동이나 본모습을 관찰한 사람들이 ‘당신은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해.’라고 말해줄 때, 우리가 진정한 행복을 느낀다고 말한다. 사랑받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충분히 사랑스럽기 때문에 생기는 자연스러운 결과다. 존경받을 만하고, 고결하고, 나무랄 데 없고, 친절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면, 결과적으로 우리는 진심으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사랑받는 사람은 무엇이 다를까: 사랑스러운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사랑스러운 사람이 된다는 것은 수익을 얻으려는 투자가 아니다. 때문에 훌륭한 부부들은 상대에 대한 점수를 기록하지 않는다. 내가 당신을 위해 이 일을 해줬으니 이제는 당신이 나를 위해 그 일을 해줄 차례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스미스의 이상은 내면의 자아가 외면의 자아를 그대로 비출 때, 즉 사람의 겉과 속에 다름이 없을 때 실현된다.
사랑받는 사람이 되는 법
스미스가 제시하는 행복 처방전은 단순하다.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면 된다. 그런데 사랑을 받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부자가 되고 유명해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명하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스미스는 그중 두 번째 방법, 즉 지혜와 미덕의 길을 선택하라고 충고했다. 그렇다면 미덕이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스미스의 첫 번째 답은 ‘적절성’이라 부르는 최소한의 기준을 지키는 것이다. 스미스가 이 단어를 제시한 이유는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만하고 상황에 어울리게 행동한다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즉, 주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며 말과 행동을 한다는 것을 뜻한다. 요즘 말로 ‘상식적으로 행동한다’쯤 되겠다. 지혜와 미덕의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내가 주변 사람들의 기대에 맞게 행동하고, 그들 역시 그렇게 행동함으로써 서로가 원하는 방식의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한다.
적절과 부적절의 경계는 어디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적절하고 타당한 행동을 권한다. 자녀를 키울 때도 어떤 행동이 적절하고 부적절한지 가르친다. 적절한 행동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면, 관계가 매우 순조로워질 뿐 아니라 그들과 우아하고 즐겁게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스미스가 살던 시대보다는 격식을 덜 차리며 산다. 하지만 어떤 시대, 어떤 사회든 대체적으로 적절하다고 혹은 부적절하다고 여기는 행동의 기준은 언제나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