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위한 미움받을 용기
기시미 이치로 지음 | 스타북스
엄마를 위한 미움받을 용기
기시미 이치로 지음
스타북스 / 2015년 6월 / 232쪽 / 14,000원
모르는 것 투성이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며 절실히 느낀 것은, 육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분유를 타거나 기저귀를 갈아 주는 일은 처음이지만 금방 배웠고, 능숙하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른 가정에서 자란 적이 없으니 다른 가정에서 어떻게 육아를 했는지 알 방도가 없지만, 우리 부모님이 해 주었을 육아 방식을 흉내 내면 그럭저럭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이들이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에 낮 동안 혼자 아이를 돌볼 때가 있었습니다. 아내가 육아 휴가 뒤, 직장에 복귀하여 유치원에 들어가는 4월까지는 제가 아이들을 보기로 한 것입니다. 힘든 일이라고 예상했지만 뭔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언제나 가슴이 두근거리는 저라 그다지 깊게 생각하지 않고 아이를 보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육아를 결정한 것은 저를 기다리고 있던 고난을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들은 그 전에도 낮에는 줄곧 잠을 잤기 때문에, 자는 동안에 연구나 강의 준비를 하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안이한 생각이었음을 금방 깨달았습니다. 아침에 아이를 위한 방송 몇 편을 보고 나면 아들은 어김없이 자긴 했지만, 저까지 졸음이 오는 바람에 결국 함께 잠들곤 했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일어나 울기 시작할 때쯤에야 눈을 떴습니다. 결국 저녁까지 아이와 같은 페이스로 생활하니 도무지 일한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자동차 운전을 할 때는 면허를 따야만 합니다. 당연히 교습소에도 다녀야 합니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도 교습소에 육아를 배우러 가려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아무도 그걸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볼까요? 이는 수술을 받은 적 있다고 자기가 다른 사람을 수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과 마찬가지입니다.
저 자신도 아이 교육법을 배우지 않는 게 별로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부모에게 받은 교육을 떠올리며 그렇게 하면 어떻게든 될 거라 생각했지요. 좀 더 생각해 보면 어렸을 때의 일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으니, 부모님이 그 시절에 나를 어떻게 길렀는지 알 방법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어찌 됐든, 저는 준비를 다 마치지 못한 차를 출발시킨 셈이었습니다. 기저귀 가는 법은 알아도, 아이가 밤에 울기 시작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장난감을 가지고 싶다고 떼를 쓰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같은 것들은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갓난아기를 혼낸다고 울음을 그칠 리 없고, 추운 겨울밤에 분유 병을 들고 망연자실했습니다. 비단 저뿐만 아니라, 많은 부모가 명쾌한 방법 없이 간신히 그 순간만을 모면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육아에 대한 정보는 없다기보다 넘쳐 나고 있다는 말이 맞을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혼내라 하고, 어떤 사람은 혼내지 말고 칭찬하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떡하면 좋을지 모르는 채로 아이에게 휘둘리고 있는 건 아닐까요? 또, 만일 육아 기술을 알고 있더라도 육아의 본래 목표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육아 지식이 있어도 아이를 원하는 대로 키우지 못하는 사태에 직면했을 때 당황합니다. 애당초 아이를 부모 생각대로 기른다는 발상 자체 역시 검토할 여지도 없는 말입니다. 나아가서는 부모가 아이를 기른다는 표현도 꼭 맞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야마모토 유조의 「파도」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그의 비유를 빌리자면, 우리는 밀려오는 파도처럼 옛날부터 거의 변하지 않고 같은 것을 되풀이하는 것 같습니다. 부모가 해 온 일들을 보고 흉내 내며 익혀도, 부모의 방식에 실수가 없었다고 단언할 수 없습니다. 부모의 교육에서 부족했던 점은 그 아이들이 부모가 되었을 때, 그대로 다음 세대로 이어집니다. 물론, 일부러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저도 나중에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어떡하면 좋을지 생각하였지만, 아이와 처음 관계를 형성하기 시작했을 때는 그것만으론 부족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할 여력도 없는 시행착오의 나날들이었습니다. 처음의 생각과 다르게 낮에는 일을 전혀 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자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날씨가 흐린 날에는 집 안에 있었지만 날이 좋으면 이렇게 집 안에 갇혀서 텔레비전만 쳐다보고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자전거를 타고 공원에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분명히 애들은 귀엽고 그 성장은 나날이 눈에 보이지만, 매일매일 아이와 놀다 지쳐 같이 잠드는 일상이 반복되는 건 정신적으로 상당히 힘들었습니다. 사회와 동떨어진 기분이 들어 빨리 상근 근무를 하고 싶어 조바심이 났습니다.
이윽고 유치원에 아이를 맡기면서 낮 동안 아이를 볼 필요는 없어졌지만,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아들이 유치원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다행히 큰일 없이 유치원 근처에서 금방 찾았지만,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저는 심리학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처음 쓴 『아들러 심리학』입니다. 저의 전공은 철학입니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철학자인 플라톤이 쓴 작품을 읽어 왔습니다. 아이 교육에 관심이 깊은 아버지가 소크라테스에게 어떻게 하면 아이를 우수한 아이로 키울 수 있는지 조언을 구했다는 이야기를 읽고 있자니,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2천 5백 년이나 전에 쓰인 고전을 지금도 읽으며 배우는 것이겠지요.
인간은 예로부터 현대인과 마찬가지로 교육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인류는 지금까지 이미 몇 천 년이나 아이들을 길러 왔으니, 딱히 어깨에 힘을 넣지 않더라도 아이를 기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인간은 정말 변함이 없습니다. 자연의 흐름은 완만하지만, 너무 완만한 나머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한 것 같습니다. 지식을 전달할 수 있어도, 사람의 ‘좋음’ - 이를 플라톤은 ‘덕(아레테, Arete)’이라고 불렀습니다 - 은 가르치지 못한 게 아닐까, 하는 물음이 그리스인을 사로잡았고, 이 물음을 둘러싼 많은 논의가 있었습니다. 훌륭한(비꼬는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군요) 정치가의 자녀가 부모의 덕을 보지 않고 평범하게 산다는 현실이 당혹스러웠던 거겠지요.
철학과 심리학은 전혀 다른 학문이 아닙니다. 다만 저에게 있어 가장 달라진 점은 이전처럼 부동의 것으로서 눈앞의 텍스트였던 학문이 아닌 매일 성장하며 다음 순간 무엇을 할지 예측할 수 없는 아이와 격투를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아이의 문제 행동
“우리 아이는 부모가 하는 말을 뭐든 잘 듣는 착한 애예요”라며 상담 오는 사람은 없습니다. 대개는 부모가 봤을 때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는 행동(일부러 에둘러 표현하겠습니다)에 대해 상담하러 오지요. 아이가 부모를 곤란하게 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문제가 일어나더라도 바로 해결된다면 아이와 관계 맺기는 정말 쉬울 겁니다. 하지만 지금 어떤 문제가 해결되었다 생각해도 반드시 다음 문제가 일어납니다. 요즘은 육아 걱정이 좀 덜었다고 생각할 때쯤 아이는 자립해 있겠지요. 그때는 육아가 부담이었던 날들의 고생은 깨끗이 잊어버린 듯, 아이가 부모 품을 떠난 일을 쓸쓸히 여기는 사람도 많습니다. 효도하고 싶을 때 부모는 없다고도 말하지만, 다시 한 번 아이를 잘 키우고 싶다고 생각해도 이미 아이는 우리손이 닿지 않는 먼 곳으로 간 뒤입니다.
아이를 둘러싼 어떤 문제만 처리하면 모든 게 해결된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목적지에 도달한 순간 또 다른 문제가 생겨서 목표가 신기루처럼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낙담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연달아 문제가 일어난다고 해서 낙담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이는 항상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성장하면 새로운 문제가 생기는 게 당연한 일이고, 부모도 아이와 마찬가지로 성장합니다. 제 이미지에서 아이와의 관계는 문제를 해결해도 목표가 점점 멀어지는 듯한 신기루가 아니라, 나선형 계단과 같습니다. 빙글빙글 돌아서 또 같은 곳에 돌아온 것 같아도, 반드시 전보다 높은 곳에 도달해 있습니다. 몇 번이나 도돌이표로 돌아가거나, 앞으로 가지 못하는 것 같아도 문득 어느 순간 높이까지 와 있다는 걸 깨닫습니다. 제가 육아나 교육에 가지는 이미지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일이나 아이의 성격, 행동의 문제를 없애는 일과 좀 다릅니다. 우선 큰 꽃을 피워 보고 그때 필요하다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는데 실제로 꽃이 피고 보니 이전에는 문제라 생각했던 일들이 싹 사라지는 이미지입니다.
매일 모든 부모가 아이 문제로 고민할 겁니다. 하지만 막상 정말 큰 문제가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 말은 상담을 받지 않으면 안 될 만큼 큰 문제가 없다는 뜻입니다. 병에 걸린 게 아니라 해서 건강하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지금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것뿐인지도 모릅니다. 건강이 병에 걸리지 않는 상태 이상을 의미하는 것처럼, 건강한 부모· 자식 관계도 문제가 없다는 것 이상의 적극적인 의미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꽃으로 비유하자면, 최종적으로 어떤 꽃이 필지 상상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제가 없다는 것만으로 부모· 자식 관계가 어떤지 구체적 이미지를 갖는 사람은 적은 것 같습니다. 육아에 마법은 없다고 말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크든 작든 지금 아이에게서 나타나는 어떤 문제가 자는 동안 마법으로 해결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마법에 걸린 사실은 부모도 아이도 알 수 없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마법에 걸렸다는 걸 알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을 해도, 금방 대답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아직 먼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를 되돌리면, 아이가 문제시되는 행동을 했을 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저는 사랑이 있어도 기술이 없다면 무력하다는 걸 실감했다고 앞에 썼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한 것은, 아들이 2살이었던 어느 날 갑자기 유치원에서 없어졌던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3시쯤, 유치원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혹시 집에가 있진 않나요?”라는 전화의 의미를 선뜻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이가 그렇게 몸이 건강한 상태도 아니었는데 아이 걸음으로 30분 이상 걸리는 거리를 혼자서 걸어왔으리라고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집을 향해 오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게 느껴졌습니다. 아들이 다니던 유치원은 저도 어렸을 때 다니던 곳입니다. 제가 다니던 때는 나무가 무성하고 자연에 둘러싸인 유치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유치원에 들어가는 해에 이전하였습니다. 통원하는 길은 교통량이 많았고, 도중에 신호등이 있다고 하지만 커다란 교차로도 있었기 때문에 행여나 그 길로 간다면 큰일이 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행히도 유치원에서 수백 미터 떨어진 도시락 가게에서 아이를 봐 주고 있었습니다. 어린아이가 혼자서 걷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겠지요. 그런데 유치원에서 도시락 가게까지 가는 길에 건널목이 있었습니다. 나중에“신호 건널 줄 알았어?” 하고 묻자 아들은 “응, 괜찮아. 파란색이라서 건넜어”라고 태연하게 대답했습니다. 유치원 선생님들은 아이가 유치원 밖으로 나갔을 거라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유치원 안에서만 찾고 있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멀리까지 걸어와 있을 줄 상상도 못했습니다.
제가 이때 몰랐던 것은 아들이 ‘왜’ 유치원에서 나갔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점심을 먹은 뒤 낮잠 시간이 끝날 때쯤이었습니다. 같은 반 친구들의 엄마가 데리러 오는 시각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날은 예방 접종을 가려고 다른 날보다 일찍 데리러 온 엄마가 있었습니다. 유치원 선생님의 설명으로는 아이가“나도(접종받아야 해)” 하며 그 후 홀연히 없어졌다고 합니다.
이렇게 큰 사건이 없더라도 부모로서는 ‘왜’ 아이가 이런 일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 ‘왜’라는 물음의 의미, 그 물음에 의해서 본래 원하는 답은 무엇인가, ‘왜’라는 물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면, 아이의 행동을 그때까지와 전혀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그때 저는 이런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불가한 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 후 아들이 유치원에서 없어졌던 것만큼 큰 사건은 없었지만, 유치원에서 돌아올 때 친구들하고 헤어지려 하지 않아 곤란했던 적은 자주 있었습니다. 우리는 자전거로 통원하고 있었는데, 통 자전거에 타려 하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우리 집은 근처에 집이 거의 없어서 놀 친구도 없거니와, 사회성 부족 때문에 유치원에 가려 하지 않거나 유치원에서 저와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게 원인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유치원에 가기 전까지 오전 내내 저와 둘이서만 생활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아이가 유치원에서 부모와 떨어지지 않는 것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걸 나중에 깨달았습니다.
유치원에 갈 때 한결같이 제가 함께 통원했기 때문에 엄마가 육아에 충분히 관여하지 않는 건가 하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유치원 알림장에도 언제나 제가 아이에 대해 길게 쓰곤 했습니다. 아이가 말로 소통하기 충분하지 않은 어릴 적에는 알림장을 보고 그날 유치원에서의 일상을 알 수 있어 고마웠기 때문입니다. 선생님들은 다들 자세히 써 주시긴 했지만, 어느 날, ‘어머니가 적어주세요’ 라고 써 주신분이 있었습니다. 왜 내가 쓰면 안 되는지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설마 낮 동안 일하는 아이 엄마가 육아에 소홀한 것처럼 생각되는 건가 하고 걱정했습니다. 나중에 또 쓰겠지만, 당시 아들은 유치원에서 손이 많이 가는 말썽꾸러기였던 듯합니다. 그런데 유치원에서 아이들 문제가 가정에서 부모· 자식 관계와 같다고 본다면 정말 실망스러웠습니다.
아이 문제 행동의 원인을 부모의 애정 부족에서 찾는 사람은 있지만 어떻게 하면 애정 부족이 해소될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문제를 지적하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병원에 가면 무슨 병인지 진단하는 것뿐만 아니라 약을 처방하고 필요하다면 수술을 합니다. 문제점을 지적하는 일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문제 해결을 위한 방법을 제시했을 때 그 방법이 실제 가능한 일이라면 이해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뭔가를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설사 이때 제안받은 방법이 실행 불가능하다 한들 그것과 아이 행동과의 사이에 무언가 관계있다고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무언가를 하면 애정이 충족된다고 해 봅시다. 그러면 부모가 본 아이의 문제 행동은 없어질까요? 나중에 쓸 내용을 잠시 소개하자면,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을 겁니다. 오히려 부모는 애정 과다인 데 비해 아이는 애정 결핍을 느끼는 데서 비롯되는 문제가 훨씬 큽니다. 애정 결핍은 사랑받고 있음에도 더 사랑받고 싶어 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애정 결핍이란 낮에는 아이를 유치원 등에 맡기고, 아이와 함께할 시간이 적다고 생각하는 부모에게는 죄스러운 단어 같습니다. 애정이 부족해서 아이가 문제 행동을 일으키는 거라고 협박당하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하지만 단지 함께 있다고 애정이 충족되지 않습니다. 일을 그만두고 집에서 아이와 함께 하루 종일 있으면 아이들이 변할까요? 매일 아이와 적은 시간밖에 있지 못하더라도 그게 문제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 짧은 시간 동안 어떻게 아이와 지낼지를 생각하는 게 현실적입니다. 오랜 시간 함께 있는 것만으로 육아가 잘 되면 얼마나 좋겠느냐마는,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용기 부여
아이의 적절한 면에 주목하는 것을 칭찬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칭찬은 상하 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그러면 학교에서 돌아와 거동을 못하는 할머니를 간호하는 초등학생에게 무슨 말을 하는 게 좋았을까요? 상담하는 동안 얌전히 기다린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하는 게 좋았을까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답은 제외합니다. 뭔가 반드시 말을 걸어 주세요. 상담 중에 이렇게 물으면 부모는 대개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생각해 내지 못합니다. 하지만 육아나 교육 현장에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손을 늦출 수 없지요. 어떤 말을 걸어야 할지 생각하는 동안 아이에게 말을 할 타이밍을 놓칩니다. 아이에게 말을 걸어도, 그 말이 아이에게는 전혀 기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일도 많이 있습니다. ‘대단하다’나 ‘착한 아이’가 적절하지 않다는 건 같은 말을 같은 상황에서 어른에게 했을 때 이상하다고 느끼는 감정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른과 아이는 다르다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어른과 아이는 대등하게 사귀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