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에서 떨어진 주소록
팀 라드퍼드 지음 | 샘터
우주에서 떨어진 주소록
팀 라드퍼드 지음
샘터 / 2015년 9월 / 399쪽 / 17,000원
번지와 거리(The Number and the Street) : 대체 이 집의 주인은 누구?
아마 열 살쯤으로 기억하는데, 새 학년에 올라가자마자 나도 수백만 명의 열 살짜리들이 했음 직한 일을 했다. 연습장에 이름과 번지수와 거리 이름을 나란히 적고 그다음에는 마을과 도시 이름을 적었다. 거기다 추가로 우리 도시가 속한 행정구역 명칭과, 노파심에 나라 이름까지 적었다 그런 다음에 - 만에 하나 그 공책을 읽어버릴 경우, 이 공책을 발견하게 될 가상의 인물을 상상하다가 - 지구라고 썼다. 혹시 그것만으로는 헷갈릴 것 같아서 태양계도 적어놓았다. 이 엄숙한 절차를 수행하던 나는 어느 결엔가 기왕이면 확실하게 마무리 짓기로 결심하고 의기양양하게 다음 두 글자를 적었다. 우주.
나중에 내가 너무 허술했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나라가 속한 대륙도 적고 반구도 적었어야 했다는 것을. 그리고 태양을 품고 있는 우리 은하를 우주 앞에 적었어야 비로소 나의 좀스러운 꾀가 완결될 수 있었을 텐데 하고 말이다. 그때는 ‘주소 쓰기’가 반드시 치러야 하는 일종의 의례처럼 보였지만, 열 살짜리 꼬맹이들이 그런 강박이나 의례에 주눅 들 리 없다. 하지만 수십 년이 흐르고 보니, 문화와 세대를 막론하고 모든 이가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떠올리는 질문에 대한 고민이 처음으로 내 안에 싹튼 것도 공책에 주소를 쓰던 열 살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왔을까? 왜 지금 여기 있는 걸까? 어디로 가는 걸까? 이런 질문들에 대답하려면, 우리는 어딘가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 질문부터 대답해보자. 지금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내가 어디에 있는가는 시간과 공간의 궤적 위에 한 지점으로 나타낼 수 있다. 위치는 정체성의 강력한 한 부분이다. 내게는 우편 주소가 있지만 사실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여전히 여기 앉아 있지만, 어림잡아 시속 1,000킬로미터의 속도로 동쪽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은 단단한 암석 위에 지어진 집이지만, 사암은 눈으로도 보일 만큼 부서지기 쉬운 데다 우리 집이 서 있는 해안 역시 침식이 진행 중이다. 침하작용도 일어나고 있다. 그러니까 지금 나는 이 세계에서 침몰하고 있는 중이다. 언젠가는 이 집의 잔해도 바닷속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내 발 아래의 지반도 가뭄과 홍수 그리고 결빙이 반복되면서 내려앉고 솟아오르고 비틀린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어디 있는지도 모를뿐더러 내가 솟아오르고 있는지조차 늘 헷갈린다.
어쨌든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내가 있는 곳이 어딘지는 안다. 지금 나는 내가 약간의 일시적인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고 꽤 정확한 지리적 위치를 갖고 있는 집 안에 있다. 책상과 의자, 책꽂이의 책들, 바닥에 깔린 러그, 벽에 걸린 달력들은 내가 그 자리에 놓았기 때문에 거기 있고, 하시라도 내 마음대로 자리를 바꿀 수 있는 것들이다. 내가 ‘여기’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이 집 안의 공간은 경찰에 의한 강제 이동 조치 따위를 염려하지 않고도 몇 시간, 혹은 며칠씩 머물 수 있는 나의 공간인 것이다. 그렇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여기’는 내 집이다. 공동 소유자로 내 이름이 당당히 올라 있고 재산권을 명시한 법적 문서도 있다. 하지만 나는 사실 내가 이 공간의 온전한 주인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보다는 차라리 내가 이 공간을 돌볼 책임을 떠맡은 것 같다. 이 집의 설계와 건축뿐만 아니라 가장 최근에 이 집을 확장하고 개조할 때도 나의 의견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 집은 2등급으로 분류되어 있기 때문에 내 집이라고 해서 내 맘대로 외형을 변경하거나 내부 인테리어를 대대적으로 리모델링할 수도 없다. 거주권이라면 빗살수염벌레가 훨씬 더 큰 권리를 갖고 있고, 어쩌면 구조를 변경하는 데도 나보다 훨씬 더 자유로울지 모른다. 빗살수염벌레와 이 집의 관계는 나보다 오래됐다. 녀석의 조상들은 어쩌면 18세기 무렵, 대충 한 300년쯤 전에 지금은 부엌이 된 자리에 작은 오두막을 지으려고 실어 온 - 이미 곰팡이로 헐은 - 녹심목에 딸려 왔을지도 모른다.
수수한 현관 베란다로 걸어 올라가면 현관문이 있다. 현관 베란다에는 두 개의 출입문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서재로 이어진다. 문을 열자마자 바로 서재다. 다른 문 하나는 오래된 벽돌로 바닥을 깔고 커다란 빅토리아풍의 창으로 빛이 들어오게 한 홀로 이어진다. 나무판자로 벽의 절반을 댄 이 널찍한 홀에서 침실들과 욕실, 서재, 다락방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시작된다. 휘어진 복도를 따라가면 이 집의 정면이 나오고 넓은 거실과 음악실이 있다. 육중한 떡갈나무 문을 열면 벽에 나무판자를 댄 식당으로 통한다. 그와 비슷한 또 다른 커다란 문을 열면 작은 로비와 욕실이고, 거길 지나면 한때 마구간으로 쓰였던 마당이 나온다. 반대편 복도를 돌아 비좁은 계단을 내려가면 넓은 반지하 부엌이 있고, 식료품 창고와 커다란 지하실로 이어진 출입문이 또 하나 보인다.
내가 갖고 있는 1872년 판 경매 홍보 전단에서 설명하는 이 집은 ‘헤이스팅스, 성 클레멘트 교구 내의 품격과 가치를 갖춘 대저택, 해발 360피트의 웨스트 힐에 위치해 쾌적하고 낭만적이고 아늑함. 서향으로, 끝없이 넓은 바다의 절경을 조망할 수 있으며 내륙 쪽 경관도 무척 아름다운 저택.’이다. 이 홍보 전단은 내게 한 쌍의 좌표를 제공해주었다. 덕분에 나는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상의 좌표를 가지게 된 셈이다. 이 건물은 해발 고도, 너비, 길이라는 공간적 치수도 갖고 있지만, 한편으로 존속 기간도 갖고 있다. 홍보용 전단과 서재 벽에 걸린 달력을 나란히 놓고 보면 시간의 연속선상에 있는 두 지점이 보인다. 이 두 지점은 의자에 앉아서 지금부터 시작할 가상 여행의 출발점이다. 이 여행의 세세한 부분들을 통해 140년 동안 이 장소가 거의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해보고자 한다.
음악실은 20세기에 들어서 확장했다. 욕실 하나도 그렇다. 그것만 제외하면 1872년 9월 7일 토요일에 헤이스팅스의 로열 스완 호텔에서 열린 경매에 이 집을 내놓았던 사람이 처음 이 집을 마련했을 때 그대로다. 그가 이 집을 다시 본다면 전기 조명을 경이로워했을 테고, 배관 설비를 칭찬했을 것이다. 식당과 거실 벽 가장자리로 떡갈나무 판자를 댄 모서리들마다 울룩불룩 튀어나와 있는 것들이 무어냐고 내게 물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우리의 또 다른 공생 임차인들, 세르풀라 라크리만스, 일명 버짐버섯 또는 건부병균에 대해 설명을 해주어야 할 터이다. 이 작은 균류들은 오래된 집에 남다른 취향을 가진 장기 체류자들로, 우리가 이사를 올 무렵에는 공상과학 영화에 나오는 기괴한 생물체처럼 부풀어서 벽 모서리들마다 덩굴손을 뻗어가며 목재를 먹어치우고 있었다.
하지만 1872년에 이 집을 소유한 사람까지는 균류들이 점유한 공간도 여전히 자기 것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공간이 그 사람의 것이었다면, 내 것이라고 해도 말이 되는 게 아닐까? 그 공간이 그 사람을 형성했을까? 아니면 그 사람이 그 공간을 만들었을까? 그 사람이 그 공간을 만들었다면, 나는 그 공간에 무엇을 했고 이 집은 내게 무엇을 해주었을까? 조금 확대해서 말하면, 그 사람과 내가 똑같은 주소를 가질 수 있는 걸까? 대답은 물론, 아니다. 그의 거주지가 그 시대의 것이듯, 나의 거주지는 이 시대의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한 번에 하나 이상의 집을 점유한다. 즉, 우리 모두는 한 쌍 이상의 지리적 좌표를 갖고 있다.
뉴질랜드 오클랜드 데번포트의 더비 가 - 50년도 훨씬 전에 내가 연습장 첫 줄에 쓴 주소 - 에 지금 누가 살든, 그는 다른 세상의 다른 장소를 점유하고 있다. 여전히 그대로일 것이라고 믿지만, 옛날에 그 집은 굴곡 있는 양철 지붕에 정면에는 널찍한 베란다가 있고 앞마당에는 후추나무 그루터기가 있는 목조 단독 주택이었다. 언제 봐도 ‘우리’ 집이라는 걸 금방 알아볼 수 있다. 하지만 지금 그곳에 누가 살든, 그 사람도 여러 개의 중첩된 지리 좌표들 위에 거주하고 있다.
데번포트 더비 가의 집에 대한 나의 기억들은 내가 알았던 그 집 울타리 밖의 작은 세상에 대한 기억들과 쉽사리 구별이 안 된다. 이런 어수선한 기억들 때문에 집과 가정의 차이점이 더 부각된다. 집은 먹고 자고 사랑하고 아이를 낳고 일하고 또 때가 되면 죽는 피난처 같은 일종의 상자다. 하지만 이웃 상자에서, 또는 길 건너 상자나 옆 동네 상자에서 그런 일들을 할 수는 없다. 가정은 내가 ‘나 자신’이 되는 곳, 나는 그곳을 떠날 수 있지만 그곳은 쉽게 나를 떠나지 않는 그런 곳이다.
기억은 희미해지고 과장되거나 왜곡되지만, 가끔 데번포트에 갈 때마다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는 걸 깨닫는다. 모든 것이 예전 그대로다. 내가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그곳은 내게 출발점이 되었다. 그 주소 이전의 모든 거주지들은 우리가 머물렀던 장소일 뿐이다. 1947년에 우리는 남위 36도 49분, 동경 174도 48분에 위치한 판자를 댄 주택으로 이사를 했고, 내가 열일곱 살이 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지구상에서 한 지점의 주소를 정확하게 나타내는 편리한 방식으로 위도와 경도만 한 것은 없다.
어쩌면 비현실적인 건 데번포트였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기억하기로, 그곳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열아홉 살에 싱가포르, 콜롬보, 아덴, 수에즈 그리고 네팔을 경유하여 잉글랜드 사우샘프턴까지 가는 이탈리아의 여객선 카스텔 펠리체의 선박표를 예매하게 만든 것도 바로 그런 환경 때문이었다. 나는 런던 얼스코트에서 원룸을, 햄스테드에서는 방 두 개짜리를, 그다음에 잉글랜드 북동부의 힐에서는 작은 아파트를 임대했다. 결혼을 했고 이스트 헐, 이스트 켄트, 킹스턴어폰템스에 차례로 집을 장만했다. 그리고 북위 50도 51분하고도 수십 초 북쪽으로 올라온 곳, 동경 0도 35분에서 한참 동쪽으로 돌아온 헤이스팅스(!)에 있는 집으로 가족과 함께 이사를 왔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내가 어딘가로 길을 나설 때조차도 실은 내가 어느 곳도 떠난 적 없다는 걸 깨닫는다. 내 기억 속에 있는 한, 내가 살았던 모든 장소들은 여전히 나와 함께 있다. 그곳들은 모두 내 삶을 형성하고 강렬하게 채색한 수많은 순간들의 배경이 되어주었고, 그 장소들의 질감은 불현듯 떠오른 기억들과 오래된 사진들 그리고 뜻밖의 대화들 속에서 새록새록 살아난다.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이사를 간다면 우리는 이 집을 떠나겠지만, 이 집은 우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지평선들을 향해 가겠지만, 그것은 우리가 이전에 어떤 장소에 살았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발견하는 일일 뿐이다. 우리는 집을 바꾸지만 집은 늘 우리와 함께 있다.
지역(The Country) : 잉글랜드, 그들의 잉글랜드
나의 생애 대부분 동안에도 잉글랜드 지역은 ‘잉글랜드 앤드 웨일스(England and Wales)’라는 행정 구역의 일부였으며, 잉글랜드 앤드 웨일스 역시 그레이트브리튼과 북아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의 일부였다. 게다가 적어도 반평생 동안 내가 관찰하기로, 잉글랜드에 대한 잉글랜드인의 태도에는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데에 만족하거나 심지어 자기 비하에 자부심을 느끼는 듯한 분위기가 흘렀다. 콘윌의 혈통 또는 컴브리아의 전통을 내세우는 사람도, 켄트 출신이라든가 켄트 주의 시민으로서 애국적인 차별성을 두려고 하는 사람도, 요크셔와 랭커셔 사이에서 벌어진 장미전쟁의 기억을 간직한 사람도 있었을 테지만, 대개 잉글랜드인답다든가 잉글랜드적이라는 개념에는 상당히 당혹스러워했다. 그러면서 공학적 기술력과 웅장한 경치에서는 스코틀랜드가 최고요, 사람들의 매력이나 술집의 활기찬 분위기에서는 아일랜드가 으뜸이고, 노래와 시에서는 확실히 웨일스를 따라잡을 수 없노라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침이 마르게 칭찬하곤 했다. 아무튼 잉글랜드인이 잉글랜드다움이라든가 잉글랜드적인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스스로를 내리막길로 접어들어 쇠락하고 있는, 특별히 중요하지도 않고 개성이나 색채도 없는 존재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춥고 불결하고, 전쟁의 상흔과 불황으로 어두웠던 1961년 2월 3일 - 내가 사우샘프턴 공항에 도착한 날 - 의 잉글랜드의 모습은 그저 그렇고 그랬다. 하지만 그 어두운 모습 이면에는 또 다른 잉글랜드가, 글과 이야기로 온전하게 존재하고 그 어떤 물리적 주소보다 더 뚜렷하게 내 머릿속의 한 공간을 점유했던, 잉글랜드가 있었다. 어쩌면 셰익스피어와 디킨스 탓인지도 모르겠다. 학교에서 우리는 곤트의 존이 임종의 자리에서 은빛 바다의 보석에 대해 남긴 칭송의 말(셰익스피어 희곡 『리처드 2세』에 나온 연설)을 달달 외웠다. 그때 우리는 이미 황폐한 집(디킨스의 소설 제목)과 도더 보이스 홀(디킨스의 소설 『니콜라스 니클비』에서 니콜라스 니클비가 근무한 학교)에도 가봤고, 핍과 매그위치(디킨스의 소설 『위대한 유산』의 등장인물)가 우연히 만났던 에식스의 늪지대도 알고 있었다.
잉글랜드는 언어의 왕국이자, 궁궐이며, 발전소였다. 잉글랜드 사람들의 고향일 뿐 아니라 내가 연습장에 적었던 그 단어들의 물리적 주소지, 즉 영어의 고향이기도 하다. 전하는 이야기의 내용보다는 단어 자체가 가진 힘을 일깨워 준 첫 번째 책은 두말할 것도 없이 영어로 된 책이었고, 미국과 영국의 언어적 전통이 아직 갈리기 전 시대의 책이었다.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이 그것이었다. ‘우화’라는 단어의 의미를 알기도 전에 완전히 푹 빠져서 읽었다. 그리고 의심의 성과 절망의 구렁텅이와 허영의 시장의 지리적 위치를 찾느라 고민했던 기억도 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한여름 밤의 꿈』에서 이름과 주소를 처방했던 것처럼 모두가 공허한 장소들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한편 ‘address’라는 단어의 힘을 처음 깨달은 것도 역시 버니언의 책에서 ‘그는 강을 건너가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addressed)’는 대목을 읽으면서였다. 영어 단어 ‘address’는 역사도 길고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지만, 그 모두가 이 어원에서 파생되었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따르면 600년보다 훨씬 이전에 동사로서 이 단어는 다양한 철자 형태로 나타나는데, ‘곧게 하다’, ‘세우다’, ‘시작하다’, ‘바로잡다’, ‘배열하다’, ‘정돈하다’ 등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1670년에 존 밀턴(John Milton)은 ‘의회는 여러 가지 일들을 해결하기(to address) 위해 소집된다’고 서술했다.
그로부터 7년 후에 밀턴은 『실낙원』에서 똑같은 단어를 ‘방향’의 의미로 사용한다. ‘인류의 적이라 하는 자가 이브에게로 나아가더라(towards Eve Addressed his way).’ 하지만 그즈음 이 단어에는 이미 서신에서 특정한 사람을 향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리고 1712년에 이를 즈음에는 서신을 수령할 수 있는 이름과 장소를 의미했다. 1880년에는 그 의미가 더욱 확장되어 특정 인물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그 또는 그녀를 찾을 수 있는 장소나 거주지의 의미를 포함하게 되었다. 즉, 거주지가 임차인이든 소유주든 상관없이 실재하는 주소를 의미한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가 적는 주소 한 줄 한 줄에는 다채롭고 신기한 역사가 깃들어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들은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방대하고 풍요로운 역사의 일부분이다. 그 단어들의 의미는 수십 년마다 달라지기 마련인데, 그것은 단어들이 특정한 시간, 장소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록된 역사에는 그 흔적을 남긴다. 집, 거리, 길과 오두막, 주와 지역 등을 지칭하는 단어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이 권리가 아니라 힘에 의해 우리의 것이 되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참고로 나는 영국으로 건너오기 오래전에 이미 무의식 속에 주소들의 지형을 갖고 있었다. 플리트 스트리트(런던 신문사 거리)에서 조금 떨어진 체셔 치즈(Cheshire Cheese) 퍼브 근처에는 새뮤얼 존슨 박사(영국 시인 겸 평론가)가 살았고, 일기 작가 새뮤얼 피프스는 시딩 레인(Seething Lane)에 살았다. 디킨스는 개즈 힐(Gad’s Hill)에, 아이작 뉴턴은 울스소프 매너(Woolsthorpe Manor)에, 다윈은 켄트 주 다운의 다운 하우스(Down House)에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