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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쿠바에 가는 사람이 가장 알고 싶은 것들

남기성 지음 | 원앤원스타일



처음 쿠바에 가는 사람이 가장 알고 싶은 것들

남기성 지음

원앤원스타일 / 2015년 4월 / 312쪽 / 15,000원





PART 1 쿠바, 내 생애 첫 여행



쿠바 기본정보

쿠바는 원래 수천 년 전부터 시보네이 족(Ciboney), 과나아따이베이 족(Guanajatabey), 따이노 족(Taino) 등 원주민들이 농경을 영위하며 살았던 곳이다. 하지만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쿠바에 첫발을 디딘 이후 스페인은 본격적으로 쿠바에 손을 뻗쳤고, 결국 1514년 스페인이 쿠바의 전 지역을 정복한다. 1898년 스페인 식민지에서 독립할 때까지 쿠바는 구대륙에서 들어오는 수입품을 신대륙으로 공급하는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했다. 16세기 초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스페인이 아프리카에서 쿠바로 이주시킨 흑인 노예가 19세기에 오면 거의 100만 명에 이르게 된다. 그러다 1868년 노예제도 폐지를 주장하며 쿠바의 제1차 독립전쟁이 발발했고, 스페인이 노예해방을 약속하며 10년 전쟁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하지만 스페인은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고 결국 호세 마르띠를 중심으로 1895년에 제2차 독립전쟁이 다시 일어났다.

스페인은 쿠바의 자치를 인정하지 않고 강경 대응을 하며 쿠바 독립군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그러다 아바나 항에 정박되어 있던 미국 군함 메인호가 원인불명으로 폭발하고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게 된다. 이를 미서전쟁(미국ㆍ스페인 전쟁)이라고 하는데, 전쟁은 미국의 승리로 마무리되었고 그 결과 미국은 스페인으로부터 쿠바를 이양받아 관타나모에 미 해군기지를 설치한다. 사실상 쿠바는 미국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1934년까지 이어진다.

형식적으로 미국은 1920년 에스트라다 팔마를 쿠바 최초의 대통령으로 추대해 쿠바 공화제 공부를 수립한다. 그러나 이후 부정 독재 정권이 계속된다. 1933년 쿠데타로 자유당의 바티스타 정권이 들어서지만 미국과의 결탁으로 부패정치가 만연하고 독재 정치를 일삼는다. 결국 1959년 피델 까스뜨로가 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게 되고, 1961년 미국과 국교를 단절한다. 그리고 사회주의를 표방해 쿠바공산국을 천명한다. 이때 단절되었던 미국과의 국교는 53년 만인 2014년이 되어서야 정상화란 급물살을 맞이한다. 이런 역사적 질곡을 간직한 쿠바는 북쪽으로는 미합중국의 플로리다 주, 동쪽으로는 아이티, 서쪽으로는 멕시코, 남쪽으로는 자메이카와 이웃한다. 쿠바의 면적은 대한민국보다 조금 큰 11,860km2다. 아메리카 대륙의 지도를 펼쳤을 때 초승달을 엎어 놓은 듯한 모양으로 플로리다 주 남쪽 아래로 길게 누워 있는 섬나라다.

Tip 1. 쿠바의 인구 구성은 어떻게 될까? 우리는 쿠바를 보통 흑인의 나라로 알지만 실제적인 구성비는 백인과 흑인의 혼혈인 물라토(mulato)가 37%, 유럽계 백인이 51%, 흑인은 11%다. 스페인이 쿠바를 지배하는 500여 년 동안 쿠바 원주민 인디오를 멸종시키면서 스페인에서 건너온 백인 정착민과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흑인 이주민을 위주로 인구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쿠바의 거리를 다니다 보면 흑인이 많이 보이기는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백인 구성비가 더 높은 나라다.

Tip 2. 쿠바 돈의 가치는 어느 정도일까? 간단하게 비교하자면 ‘1USD = 1천 원 = 1CUC = 25CUP’이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 돈으로 1CUC(쎄우쎄 또는 꾹이라고 읽음)은 1천 원 정도, 1CUP(쎄우뻬 또는 모네다 나시오날이라고 읽음)은 40원 정도다. 쿠바에서는 CUC와 CUP을 반드시 구분해서 사용해야 한다. 바코드가 있는 물건은 CUC만을 사용해야 하고, 바코드가 없는 농산물이나 길거리 음식 등은 CUC와 CUP을 사용할 수 있다. 식당의 메뉴판 숫자 뒤에 CUC라고 적혀 있으면 CUC으로 지급해야 하고, 숫자 뒤에 M/N(모네다 나시오날)이라고 적혀 있으면 CUP로 지급한다.



PART 2 쿠바, 6박 7일간의 여행기



1장 첫째 날, 아바나 비에하와 센뜨로 아바나를 걷다

생동감 넘치는 쿠바의 명동, 오비스뽀 거리: 아바나 구 시가지인 아바나 비에하는 도시 전체가 1982년 유네스코에 의해서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특히 오비스뽀 거리를 걷다 보면 파스텔 톤의 아름다운 건축물과 스페인 식민 지배의 영향이 그대로 남아 있는 유럽풍의 전통 양식들을 볼 수 있다. 오비스뽀 거리는 1863년부터 아바나의 상권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헤밍웨이의 단골 술집 라 플로리디따를 시작으로 아르마스 광장까지 약 1km 거리가 바로 오비스뽀 거리다. 차량이 통제되어 사람들만이 거리를 활보할 수 있으며 쿠바에서 가장 생동감 있는 거리다. 거리에는 옷가게, 레스토랑, 카페, 기념품 시장, 환전소, 여행 안내소 등이 있다. 아바나 비에하에 갔다면 거리의 정취를 느끼며 꼭 한번 걸어봐야 할 필수 관광 코스다.

위용을 자랑하는 옛 국회의사당, 까삐똘리오: 1936년 공사를 시작해 1929년 완공되었고 네오클래식과 아르누보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다. 지붕은 중세 르네상스 시대에 유행했던 돔 양식의 큐폴라(cupola)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팡테옹 사원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미국 국회의사당과도 유사하다. 1950년대까지 아바나에 세워진 건물들 중 가장 높은 건물이었고, 내부 큐폴라의 크기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크다. 건물 주위에는 건축 당시 아름다운 유럽 정원을 본떠 만든 정원이 네 구역으로 나뉘어 조성되어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왼쪽에는 일(Work), 오른쪽에는 수호(The Tutelary Virtue)의 동상이 있다. 중앙으로 이어지는 곳에는 12가지 로마 양식의 열주가 2줄로 배열되어 있다.

현관을 넘어 메인 홀로 들어서면 3개의 대형 청동 부조가 보인다. 돔 아래에는 웅장한 오리지널 공화국 동상(Statue of the Republic)이 우뚝 솟아 있다. 이 동상은 로마에서 주조한 뒤 쿠바로 가지고 온 것이다. 동상은 금으로 덮여 있고 49톤의 무게를 자랑한다. 그리스 지혜의 여신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것이다. 원래는 내부에 2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내장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행방을 알 수 없다. 대신 복제본이 들어 있다. 내부 중앙홀 안쪽에는 대통령 집무실도 보인다. 1959년 쿠바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국립 국회의사당 건물이었으며, 혁명 이후 과학ㆍ기술ㆍ환경부 건물로 이용되다가 현재는 쿠바 과학 아카데미로 사용되고 있다. 2013년부터 건물 복원 공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공사가 마무리되고 나면 다시 쿠바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할 예정이라고 한다.



2장 둘째 날, 역사 속에 남겨진 쿠바의 자존심

쿠바 교육의 살아 있는 현장, 아바나 대학교: 아바나 대학교는 1728년 아메리카 대륙에 세워진 첫 번째 대학교다. 설립 당시에는 구 시가지인 아바나 비에하의 산 끄리스또발에 있다가 1902년 베다도 지역의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 아바나 대학교의 설립 당시 명칭은 ‘왕립 교황 성 제로미노 아바나 대학교’였다. 이때만 해도 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서는 왕실이나 가톨릭의 인증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대학교명에 왕립이나 교황이라는 단어를 넣어야만 했다. 그러다 1842년 대학교와 종교가 분리되자 ‘왕립 문화 아바나 대학교’로 이름이 바뀌었고, 최종적으로 쿠바공화국 시절 현재의 ‘아바나 국립 대학교’가 되었다.

대학 중앙도서관은 1936년에 설립되었다. 1952년 학생들의 격렬한 무력시위가 있은 후 아바나 대학교가 반정부 시위의 중심지가 되자 1959년까지 잠정적으로 폐쇄되기도 했다. 그러다 쿠바혁명 후 피델 까스뜨로가 학생시위 및 정치적 제휴관계를 재정립해서 1961년 학교를 다시 열었다. 피델 까스뜨로도 아바나 대학교 출신이다. 대학교 정문 계단 맞은편 작은 공터에는 기념탑과 흉상이 있다. 이 기념탑은 1957년 3월 학생운동의 지도자이자 공산주의자였던 호세 에체베리아가 이끌었던 무장대원 35명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이들이 방송국과 대통령궁을 습격한 뒤 아바나 대학교로 후퇴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중앙도서관 앞 정원에는 쿠바혁명을 상기시키는 장갑차도 전시되어 있다.

아바나 대학교에는 자연과학ㆍ사회과학ㆍ경제학 대학으로 나뉘어 다양한 학부가 있지만 의과대학은 없다. 쿠바에서 가장 발달된 분야가 의학이라는 점을 생각해볼 때 쿠바의 최고 명문 아바나 대학교에 의과대학이 없다는 것이 의아할 수 있겠지만, 아바나 외곽 지역에 해군기지를 개조해서 설립한 라틴아메리카 의과대학이 따로 있다. 쿠바의 발달된 의학 기술을 중남미 가난한 나라들을 위해 기꺼이 전수하고 있어 중남미의 많은 학생들이 의학을 배우기 위해 쿠바로 유학을 올 만큼 유명하다.

카리브 해의 쿠바 지킴이, 산 까를로스 까바냐 요새: 산 까를로스 까바냐 요새는 스페인의 왕 까를로스 3세의 이름을 따서 만든 곳이다. 1763년 군 기술자인 실베스뜨레 알바르까의 지시에 따라 건설이 시작되었다. 1774년 요새가 완성되었을 때 산 까를로스 까바냐 요새는 아메리카 지역에서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요새였다. 사실 까바냐 요새를 만들기 전부터 16세기 모로성 설계자인 후안 바우띠스따는 언덕과 섬에 대한 전략적 가치에 대해 조언을 했었다. 하지만 조언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섬은 계속 방치되었다. 그러다가 1762년 영국과의 전투에서 크게 패해 영국이 장악했던 섬을 탈환한 후에야 까를로스 3세는 실베스뜨레 알바르까에게 요새 건설을 지시했고 그렇게 공사가 시작된 것이다.

까바냐 요새는 모로성과 연결되어 있고 700m의 성벽과 4만m2의 면적으로 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요새이자 전략적 요충지다. 건설 이후 스페인 식민 시대에는 스페인 군대의 가장 큰 요충지였고, 이후 쿠바 독립전쟁 당시에는 사형 집행 장소와 감옥으로 이용되었다. 쿠바혁명 이후에는 전범자, 정치범, 반역자, 바티스타 정권을 심판하는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특히 체 게바라는 요새를 혁명 사령부 건물로 사용했다. 1986년 요새의 복원작업을 하며 까바냐 군사 공원을 조성했고 1992년 복원이 완료된 후 요새의 역사를 알려주는 무기 박물관, 체 박물관, 모노그래픽 박물관을 한곳에 열었다. 까바냐 요새에 가면 바, 레스토랑, 기념품점, 시가 가게뿐만 아니라 모든 박물관들을 구경할 수 있다. 특히 매일 밤 18세기의 전통복장을 갖추어 입은 군인들이 8시 30분에 대포 발사 예식을 진행하며 9시에 발사되는 대포는 요새 문이 폐쇄됨을 알린다.



3장 셋째 날, 체 게바라가 잠든 도시 산따끌라라(아바나 근교 여행 1)

체 게바라가 잠들어 있는 곳, 체 게바라 기념관: 체 게바라 기념관은 산따끌라라에 있는 쿠바혁명의 국가기념물이다. 중남미 혁명의 선봉장이었던 체 게바라의 무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쿠바혁명 30주년을 맞아 피델 까스뜨로의 지시 아래 기념관을 만들었고 6년의 공사 기간을 거쳐 1988년 12월 28일 완성되었다. 기념관 입구에 들어서면 청동으로 만들어진 6m 높이의 체 게바라 동상을 볼 수 있다. 동상 오른쪽에는 그의 삶을 엿볼 수 있는 편지가 적혀 있는데, 체가 볼리비아로 떠나기 전 피델에게 보냈던 마지막 작별 편지다. 라틴아메리카 본토에서 자신의 싸움을 계속할 것이라는 동기를 부여하는 편지이기도 하다. 동상 왼쪽에는 피델 까스뜨로, 까밀로 씨엔푸고스, 체 게바라와 산따끌라라 전투 장면이 부조되어 있다. 동상 앞에서 길 건너를 보면 바닥에 빨간색과 흰색, 검은색으로 되어 있는 테라스가 있으며, 그 끝에는 체의 별을 상징하는 형상이 좌우로 2개가 있다.

박물관과 묘지는 동상의 후면에 있으며 블랑까 에르난데스가 설계했다. 오른편 박물관에는 체의 연대기와 함께 그의 유니폼과 모자, 권총, 가죽케이스, 사진기 등의 개인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왼편 묘지에는 볼리비아 전투에서 패배한 체 게바라를 비롯한 39명의 유해가 있다. 그중 17구는 볼리비아의 한 공동묘지에서 대량으로 발견되어 1997년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여기에는 볼리비아 전투의 유일한 여성 동지였던 따마라 분케의 유해도 있다. 체는 볼리비아에서 게릴라 전술을 이용해 저항하다 체포되어 1967년 10월 9일 처형되었다. 1997년 고고학자들이 체의 유골을 볼리비아에서 발견했고 그후 유골은 쿠바로 송환되었다. 1997년 10월 17일 군대 명예 훈장과 함께 이곳에 묻혔다. 녹색 지프로 체의 유골이 수송되었을 때 그를 환영하는 70만 명의 인파들은 하나같이 “Hasta siempre comandante(아스따 시엠쁘레 꼬만단떼: 영원한 동지)!”를 외쳐대기도 했다.

산따끌라라의 심장이자 상징인 곳, 비달 공원: 비달 공원은 산따끌라라 중심에 위치해 있다. 문화와 혁명 투쟁의 상징이자 정체성의 상징이다. 1999년 7월 15일 산따끌라라 도시 310주년을 기념으로 비달 공원은 국립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비달 공원이라는 이름은 1899년 의회 회의에서 쿠바의 독립 영웅 레온씨오 비달 까로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1820년 처음 공원이 만들어졌을 때는 아르마스 광장, 마요르 광장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현재 비달 공원은 산따끌라라에 사는 주민뿐만 아니라 도시를 방문하는 여행자들에게 가장 편안한 휴식처가 되고 있다. 공원 중앙에 위치한 전망대는 1911년에 세워졌으며, 도시의 상징인 부츠를 든 소년 동상도 만들어졌다. 또한 마르따 아브레우의 동상도 자리 잡고 있다. 1902년부터 공원에서는 매주 목요일, 일요일 오후 8시에 시에서 주관하는 오케스트라 공연도 열린다. 많은 전문가들은 까리다드 극장, 호세 마르띠 도서관, 산따끌라라 리브레 호텔로 둘러싸인 비달 공원을 쿠바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원 중 하나로 꼽는다. 비달 공원은 산따끌라라 도심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찾아가기가 매우 쉽다. 산따끌라라에서 투숙하는 호텔이나 까사 빠르띠꿀라르(이하 까사, 정부의 허가를 받은 민박집)가 어디에 있든 5~10분만 걸으면 찾아갈 수 있을 정도다.



4장 넷째 날, 가장 쿠바다운 카리브 해 뜨리니다드(아바나 근교 여행 2)

신비로움 가득한 뜨리니다드의 중심, 마요르 광장: 마요르 광장은 뜨리니다드 제일 중심부에 위치한다. 그래서인지 현재 뜨리니다드 거주 구역은 마요르 광장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18~19세기에 뜨리니다드는 설탕과 노예무역으로 크게 번영했는데, 그때 쌓은 부를 바탕으로 부루넷 백작과 귀족들은 마요르 광장 주변에 호화로운 건물을 지었다. 그 당시 세워진 건물들이 아직까지 남아 있어 광장 주변의 건물들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박물관을 연상시킨다. 광장은 4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져 정원이 조성되어 있고, 가로등은 19세기의 고풍스런 장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중앙에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뮤즈 여신상이 있다. 뮤즈 여신상 오른편에는 18세기에 건축된 산체스 이즈나가의 집이 있다. 현재 건축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식민지 시대의 건축 역사를 자세히 볼 수 있다.

광장 북동쪽으로는 1892년 건축된 삼위일체 성당이 보인다. 이 성당 내부에 보관 중인 십자가는 원래 멕시코의 항구도시 베라크루스로 운반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기상악화로 배가 3번이나 회항하자 십자가를 배에서 내렸는데 그제야 순조롭게 항해할 수 있었다. 이를 본 사람들은 신의 뜻이라 여겨 십자가를 뜨리니다드 성당에 보관했다고 한다. 광장 북서쪽 끝에 있는 산 프란씨스꼬 교회는 1813년에 지어져 1848년 교구 교회가 되었다. 1895년에는 스페인 군대의 주둔지 역할을 하다 1986년부터 혁명에 관련한 물품과 사진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현재 쿠바의 내국인 화폐 25센타보 뒷면의 배경이다. 서쪽의 고고학 박물관(Museo de Arqueolgia)은 18세기에 건축되었는데 소유자가 명확하지 않다. 박물관에는 토착시대 쿠바의 생활상이 보존되어 있다. 시립 박물관(Museo Historia de Municipal)은 1828년 뜨리니다드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한 명이었던 돈 호세 마리아드에 의해 지어졌다. 19세기 후반까지는 깐떼로의 집이었으나 1980년 이후부터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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