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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하는 단어들

최인호 지음 | 인물과사상사



부유하는 단어들



최인호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15년 2월 / 252쪽 / 13,000원





사랑



11월 31일. 여기는 고도 2,700미터의 베트남, 고산지대 소수 부족 블랙흐몽 마을. 주소도 이름도 없는 마을에 나는 해가 질 무렵 도착했다. 원시 부족 여인들이 화려한 꽃처럼 하나둘 내 곁에 모여들었다. 그녀들의 머리 장식과 화려한 빛깔의 옷들은 금방 사진 속에서 튀어나온 듯 신비하고 아름다웠다. 나를 둘러싼 여인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많은 말을 쏟아내며 혹은 저희들끼리 깔깔거리며 즐거워했다. 어떤 처녀들은 멀리서 낯선 나의 모습이 신기한 듯 훔쳐보다 나의 눈과 마주치자 얼굴을 붉혔다. 아마도 외지인이 거의 찾지 않는 이 오지 마을에 나의 방문이 신기해서일 것이리라. 나는 순수한 그녀들의 웃음에서 나의 첫사랑을 다시 만났다.

그 여인들 가운데 한 처녀는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연신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녀에게 왜 웃냐고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의 말을 알아들을 리 없었다. 그저 미소만 보낼 뿐. 그런데 그녀가 나의 왼팔에 있던 팔찌를 발견하고 그것을 자신에게 달라고 했다. 그녀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그 팔찌는 어제 다른 부족의 마을의 코흘리개 꼬마에게 산 것이다. 비싸지는 않지만 나에게는 의미 있는 팔찌였다. 하지만 나는 벌써 팔찌를 풀고 있었다. 그녀의 기분 좋은 미소에 나의 심장을 판 것이다. “우리 마을에서는 아무 처녀에게나 팔찌를 선물하지 않아요”라며 몸으로 설명했다. 그러자 처녀는 연신 미소를 지으며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그녀의 오두막으로 사라져버렸다. “저는 언덕 너머에서만 피는 한 떨기 꽃이요, 당신은 저 멀리서 날아오는 화살입니다.”

사랑은 위험의 다른 말이다. 사랑이 위험한 건 욕망이 타자를 소유의 대상으로 변화시키고 비이성적인 눈으로 완전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욕망이 충족되는 순간 그것이 함께 죽는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즉, 욕망으로 타자를 지배하는 순간 사랑도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사랑은 불완전하고 위험하기 때문에 영원성을 가진다. 마치 일정한 궤도를 돌던 별을 강제로 나의 궤도로 끌어당기거나 혹은 나의 별이 궤도를 이탈하여 다른 궤도로 무작정 뛰어들어 두 궤도 모두에게 무질서와 충돌 혹은 파괴의 공포를 준다고 해서 그 별들이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중력에 저항하면서도 중력의 존재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듯이 우리는 사랑의 파괴적 위험에 이끌리면서도 그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특히 사랑의 위험성은 이성의 밖에서 더 강하게 작동하는 동물적 감정의 절제 불가능성의 상태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평상시 이성은 나를 지배하고 나와 타자를 구별해가면서 세상을 만들고 유지시켰다. 하지만 사랑이 오는 순간 이성은 포효하는 감정에게 주인의 자리를 내주고 동시에 세상도 포기하고 만다. 사랑하는 주체와 대상에게 그들 이외의 것들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랑은 공간과 시간의 흐름이 제거된 순간성에 갇히게 된다. 사랑은 유일한 공간으로서의 절벽에 그들의 발을 위치시킨 채 어둠이 오고 겨울이 닥치는 것에 관한 감각적 기능을 마비시킨다. 사랑은 주체를 대상 밖의 소리에 침묵하게 만들고 세상을 향하던 주체의 시선의 방향을 하나의 대상, 사랑하는 이에게만 고정시킨다. 그래서 사랑은 사막 위의 고독한 장미처럼 자신도 모르는 가시, 다른 것들이 접근할 수 없는 무서운 독을 동시에 품는 행위이다.

하지만 사랑은 결코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사랑은 나의 거울에 비친 대상을 나의 모습으로 혹은 나만의 방식으로 사랑하는 나르시스의 파괴적 결말을 내재하고 있다. 즉, 종이에 뚫린 바늘 구멍으로 상대의 한 부분만 보면서, 상대의 눈 혹은 입술과 나의 눈이 은밀하게 마주쳤을 때 우리는 그것이 우연적이며 그 모습이 타자의 아름다움 혹은 본질이 아니라 나의 거울이 만들어낸 나의 모습임을 모르는 것이다. 이성이 감정 밖으로 밀려난 상태에서 어떤 것도 꿈이 되지 않을 수 없으며 사랑 또한 꿈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힘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 꿈은 사랑의 주체가 욕망의 이미지 또는 무의식적 무지를 불어넣어 만든 풍선이나 거품 같은 것으로서 언제든 쉽게 터질 수 있는 불완전하고 위험한 상태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과의 일치성을 갖고 있거나 특정 범위 안에서 공존할 때 ‘나’와 대상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없듯이 우리는 사랑을 하는 동안 ‘나’ 그리고 대상과의 일정한 거리를 확보하기 힘들기 때문에 자신이 나르시스적인 사랑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상대방의 눈동자 속에 나 자신이 들어 있으며 그것을 내가 바라보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이런 나르시스적 사랑, 자신의 거울에 비친 상대방을 자기화하려는 욕망은 ‘판단’의 오류를 동반한다. 즉, 사랑은 대상이 아름답다고 여겨질 때 시작되는데 그 아름다움의 기준이 나의 거울이다. 그 거울은 나르시스의 연못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바람이 불면 일렁이고 구름이 지나가면 어두워져 그 속에 비친 형체를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다. 판단의 기준이 모호해지는 것이며 그것은 평상시 내가 확신했던 ‘나’와는 거리가 먼 또 다른 나의 모습들, 고요한 호수에 비친 나의 모습이 아닌 흔들려 일그러지거나 뚜렷한 무언가를 보여주지 않는 불명확한, 인지하기 힘든 나로 나타나는 것이다. 결국 거울과 판단이라는 사랑의 조건이 상대방과 나를 혼란 속에 가둔다. 사랑하는 동안 수백 번 흔들리는 거울의 표면은 수백 번의 다른 판단을 가져오고 그것은 상대방과의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결국 사랑은 파괴의 신, 타나토스에게 굴복당하고 만다.

하지만 에로스, 사랑은 타나토스와 싸우는 과정 그 자체이지 어떤 완성된 아름다움의 종착점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거울과 판단이라는 기준을 버리고 자신의 심연, 거울의 표면이 아닌 더 깊은 뒷면에 숨어 있는 나의 본질과 나와 상관없이 존재하고 있는 상대방의 아름다움을 발견해가는 과정이 사랑인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더 위험해져갈 뿐이다. 거울과 판단은 이상인데 그것이 사라진다면 그것은 미치광이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나와 상대방은 하늘의 구름처럼 언제든 변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 혼란 그 자체를 즐기고 있는 것이 이성의 바깥에만 존재하는 일방향의 도로 위를 무섭게 그리고 맹목적으로 질주하는 자기 파괴의 행위라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결코 알 수 없다. 어쩌면 사랑은 이처럼 신도 악마도 두렵지 않은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 조금씩 나와 상대방을 죽음 혹은 삶의 파괴적 시간 속으로 이끌어가는 은밀한 에너지일지 모른다. 하지만 두려워 마라. 사랑하는 이들에게 이런 위험은 절대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만약 위험이 보인다면 그들의 사랑은 이미 종착점에 다다른 것이다.

오월



온통

세상은 사뿐거리는 봄 처녀의 걸음

치맛자락의 울렁이는 유혹인데

나는 창가의 모과처럼

향기롭게 썩어가는 오후,

양귀비의 입술인 양

타오르는 꽃들이여

오월의 한스러운 꽃들이여

그대들이 뿜어낸 치명적인 빛깔들

숨 막히듯 밀려드는 매혹의 공기들

어느 것 하나도 너희 곁에 머물지 못하고

춤추는 나비들의 날갯짓 속으로

꿀만 탐하는 벌들의 입술 위로

빨려들어갈 뿐.

아! 살랑거리는 봄 처녀의 걸음

도대체 누구에게 가는 것일까?

술 취한 나의 단어들은

노을마저 사라진 시 속을

정처 없이 비틀거리고 있는데…….





소파



11월 페루, 마추픽추로 가기 위해 잠시 머무르는 도시, 올란 타이탐보.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에 사람들의 걸음 소리가 요란하다. 그들의 걸음이 빗방울과 부딪쳐 출전하는 병사들의 군화 소리처럼 들린다. 그런데 그 소리 사이를 비집고 나의 시선에 와 부딪치는 것은 낡은 소파에 앉아 처연히 비를 맞고 있는 한 사람. ‘노숙자일까?’ 행색은 비록 초라해 보이지만 비와 사람들의 움직임에 동요되지 않는 모습은 그가 노숙자가 아님을 말해주기에 충분하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보다 좋아하며,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무위는 최고의 업적, 인간의 가장 위대한 목표라고 가르쳤다. 항아리가 유용한 것은 항아리 그 자체가 아니라 항아리가 감싸고 있는 텅 빈 공간, 무無에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저 사람의 무위 혹은 무는 어디서 온 것일까? 그리고 그의 무위는 그에게 어떤 쓰임을 가져올 수 있을까? 아마도 그 낡은 소파가 그를 무위로 이끌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가 꿈꾸고 있는 공상은 낯선 곳에서 비를 맞고 서 있는 내가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소파는 무위가 허락되고 공상이 살아나는 극히 사적인 공간이다(여기서 무위는 육체적인 것에 한한다). 우리는 소파를 만나면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움직임조차 거부한다. 하지만 그 순간부터 공상은 몸과 정신을 지배해온 세계를 파괴하며 여기저기서 꿈틀대기 시작한다. 소파의 바깥에서는 육체와 정신이 하나여야만 했다. 육체와 정신의 움직임이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할 때 사람들은 그를 사회적 이탈자로 낙인찍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파는 다르다. 이곳에서 육체는 무위를 향해 달려가고 정신은 질서의 바깥 세계를 항해한다. 즉, 육체와 정신의 방행이 어긋나고 그들의 사이가 멀어질수록 공상의 세계는 깊어지고 넓어지는 것이다.

소파는 하나의 공간이나 사물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육체의 움직임을 제거하고 정신의 이탈을 도와 새로운 현실을 생성해내는 창조적 유희의 도구이다. 소파가 주는 쾌감은 육체를 고단함에서 해방시켜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질서가 요구하는 의무감이 제거된, 극히 사적인 세계, 질서 바깥으로 향할 수 있는 권리가 발생되는 정신적 희열이다. 이렇듯 소파는 ‘나’를 둘러싼 사적인 공간이나 사물들 중에서 ‘나의 또 다른 세계’에 생명을 불어넣는 유일한 것에 속한다. 중요한 사실은 소파에서 만들어진 공상의 세계, 극히 사적인 ‘나의 또 다른 세계’가 비현실적인 것을 초월해 타자들의 현실적 삶으로 재현된다는 것이다.

소파에서의 공상은 주로 시각적 감각에서 촉발된다. 그것은 습관적으로 켜놓은 텔레비전을 몇 시간씩 바라보면서 그 속에 펼쳐진 세계를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이면서 시작된다. 만약 텔레비전 속 세계가 ‘현실적’일 경우 우리는 그 세계를 ‘나만의 비현실적 세계’로 변형하며, 텔레비전 속 세계가 ‘비현실적’일 경우 우리는 그 세계에 나를 투영하여 ‘나만의 현실 세계’로 재구성한다. 그런데 이런 두 세계의 변형은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공상의 세계, 극히 개인적이며 비현실적이라 여겨지는 세상은 분명 현실적 세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다시 말해 공상의 세계를 만든 ‘나’는 현실적 세계에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다.

다시 텔레비전 속 세계로 들어가보자. 특히 ‘비현실적인 장면’들이 나오는 세계는 누군가의 공상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현실적 세계 속에 하나의 부분을 이루며 나의 곁에 버젓이 앉아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타인의 공상은 나의 현실적 세계를 만들고 나의 공상 역시 타인의 현실적 삶을 만들어가는 부분적 요소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나의 현실적 삶은 수많은 타인들의 다양한 공상체의 조합인 것이다. 즉, 내가 앉은 소파도 누군가의 공상이 만든 것이다. 결국 내 주변의 모든 현실적인 것은 타인이 만든 공상의 진행체이거나 일시적 완성체인 것이다.

따라서 현실과 공상은 별개의 것이 될 수 없다. 이 둘은 변증법적인 관계에 의해서 순환되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것이다.어떤 것도 고정적이며 확정적인 현실적 세계가 될 수 없으며 어떤 것도 비현실적 공상의 세계로 규정화시킬 수 없는 것이다. 즉, 타인에게 현실은 ‘나’에게 비현실적 공상의 세계이며 ‘나’에게 현실적 세계는 타인에게 공상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바다’가 없는 고산지대의 원시 부족에게 ‘바다’는 공상의 세계에 지나지 않지만 ‘바다’를 앞에 두고 살아가는 부족에게 ‘바다’는 너무나 자명한 현실적 공간인 것이다. 이처럼 현실적인 세계와 공상 세계의 구별적 기준은 존재할 수 없으며 구별적인 행위 자체는 무의미한 것이 된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우주적인 것으로 확장하기 위해 소파 위로 몸을 던져야 한다. 그 위에서 무위적 유희를 만끽해보자. 소파에 누워 깨지 않는 잠을 자거나 또는 소파에 앉아 커피 혹은 포도주를 마시며 음악을 듣거나 공상 영화를 보자. 시대를 막론하고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의 습성으로 치부되었던 게으름으로 공상의 세계가 넘쳐나는 나의 방을 만들어보자.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현실은 점점 좁아지거나 아예 사라질 수도 있다. 현실적인 세계에만 안주하고 그것이 전부인 양 매달린다면 현실적 세계는 금방 고갈될 것이며 그 속에 갇힌 인간들은 좁아진 삶에 질식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현실적 삶에서 벗어난 소파의 세계, 이것은 결코 게으름이나 망상적인 것으로 치부되어 소외되어서는 안 된다. 소파 위의 공상이 가져다주는 이탈의 쾌감 그리고 육체적 게으름은 현실적 삶을 우주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일지도 모른다.

소파여, 너의 품에서 나를 깨어 있게 하라. 그리고 잠 속에서만 꿈을 꾸는 자들이 볼 수 없는 공상의 세계를 꿈꾸게 하라. 비록 공상의 세계가 술 취한 듯 흐릿하게 나의 앞에 나타날지라도 그것을 지우려 하거나 또렷하게 만들기 위해 애쓰지 말라고 충고해다오. 그 분명치 않은 이미지 속에는 내게는 아직 오지 않은, 하지만 곧 다가올 현실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현실과 미래 사이를 공상의 다리로 건너는 나의 사고는 전율할 것이다. 이 전율은 ‘나’의 실존에 관한 타 공간적 바라봄의 자각인 동시에 우주적 비행의 도정이다. 나는 소파, 너의 품에서 오늘도 나와 타인의 삶, 즉 현실과 공상의 다리를 오가며 헤매고 싶다. 나는 오늘도 네가 그립다. 흄이 늘 말했던 것처럼, “이곳, 사교장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루에도 두세 번씩 나의 조용한 방, 그리고 안락한 소파가 나는 그리워진다.”

시간



별이 사라지는 건

별의 시간, 하늘이

사방으로 커져만 가는 것이니

별은 결코 죽은 것이 아니네.

단지, 별빛이 점이 되어

팽창된 시간의 공간을 달려

개미 눈 같은 우리의 동공 속으로

들어오지 못할 뿐.



배가 돌아오지 못하는 건

배의 시간, 바다가

육지를 향하여 커져만 가는 것이니

배는 결코 길을 잃은 것이 아니네.

그냥, 노가 버드나무 가지 되어

떠미는 시간의 물결을 거슬러

모래알 같은 우리의 항구로

돌아올 수 없을 뿐.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네.

잠시 점유된 공간들을 갉아먹으며

무한의 공간으로 자라나는 것일 뿐이니

나는 죽은 것이 아니네.

시간에게 내 공간을 빼앗겨

집을 잃었을 따름이네.









모든 사물은 한 방향으로만 떨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없으며 어딘가로 상승하거나 무언가를 떠받치고 있다. 인간이 서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지구를 밀어내고 동시에 어딘가로 날아오르려고 꿈틀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모든 사물과 인간은 어떻게 다중적이며 모순적인 운동의 방향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멈추지 않는 회전의 속력과 그것이 생산하는 힘, 중력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인간을 포함한 모든 만물은 자신만의 속력으로, 크기와 질량에 따른 속력으로 회전하면서 존재의 에너지, 존재의 상호적인 끈을 놓지 않고 있다. 하나의 별, 지구는 자신의 질량이 만들어내는 자전의 속력으로 태양의 질량이 만든 거대한 중력에 저항하고 있다. 아마도 몇만 년 전 지구는 갓 태어난 아이처럼 작고 가벼웠을 것이며 중력 역시 미약했을 것이다. 따라서 거대한 태양의 중력은 작은 지구를 빠른 속도로 끌어당겨 불덩이의 입 속으로 집어넣으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끌려가는 긴 세월 동안 지구도 아이가 성장하듯 팽창하면서 중력을 키워갔고 태양의 중력에 맞설 수 있었을 것이다. 두 중력의 균형점은 지구가 더는 태양에 빨려들지 않는 거리, 공전의 궤도를 만들어낸 것이다. 줄다리기에서 양 팀의 힘이 팽팽할 경우 줄이 움직이지 않듯이 당기는 힘, 중력이 균형점에 이르면 두 사물은 운동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균형점에 다다랐을 때 한 곳에서 정지하는 것이 아니라 중력이 큰 사물을 중심으로 동일한 거리에 있는, 원 모양의 점들 위를 회전하게 된다. 이것이 곧 지구의 공전이다. 지구가 존재 가능한 거리, 지구의 저항력이 정점에 이른 곳, 공전의 범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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