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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철학

함돈균 지음 | 세종서적



사물의 철학

함돈균 지음

세종서적 / 2015년 2월 / 304쪽 / 15,000원





새로운 생각을 시작하기 좋은 시간



가로등_ 신이 모습을 드러낸다면

당신이 도시인이라면 이 사물은 거의 늘 당신의 생활 반경 내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물의 존재를 비로소 인식하게 되는 건 십중팔구 어둠이 찾아온 다음이다. 이 사물은 어둠과 반대 속성인 빛을 품고 있지만, ‘어둠에서만 나타나는 빛’이라는 역설을 동반한다. 바로 ‘가로등’이다.

지금 한번 떠올려보자. 낮에 당신은 익숙한 길거리를 지나고 있다. 하지만 가로등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고 묻는다면 즉시 대답할 수 있을까. 그럼 밤의 길거리를 다시 떠올려보자. 가로등의 존재감은 당신이 움직이는 밤거리 동선 어느 즈음에서 또렷해진다. 그것은 당신이 지나는 어떤 어둠 속에서 당신에게 한 줌의 빛이라도 가장 절박한 그 순간, 반드시 필요한 바로 거기에 그렇게 서 있다.

인적이 끊긴 어둠 속에서 섬뜩한 느낌으로 혼자 걷던 골목길, 방향을 제대로 알 수 없는 낯설고 컴컴한 타지를 운전하고 있을 때, 그제야 우리는 이 작은 빛이 소중한 친구이자 보호자로서, 먼 바다를 건너는 항해사의 등대와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다시 가로등을 생각해보자. 어둠 속에서 드러나는 가로등의 빛이란 미미하기 짝이 없다. 사방을 덮고 있는 밤의 공간적 넓이와 시간적 깊이, 즉 어둠의 총량에 비한다면 이 한 줌의 빛을 과연 ‘빛’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겨우 빛나는 반딧불처럼, 이 사물의 빛을 다른 무언가를 ‘비추는 빛’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가로등의 역설은 여기에 있다. 빛은 실낱같은 희망의 가능성으로 오히려 어둠 속에서 제 존재를 분명히 드러낸다는 사실 말이다. 우리가 절박하게 어둠 속을 걷거나 음산한 골목길에 있을 때, 멀리 있는 가로등을 보며 안도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이 사물에서 나오는 빛은 어둠의 전체와 비교할 때 ‘비추는 빛’이라고 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래서 가로등은 우리에게 거꾸로 말한다. 어둠 속에 나타난 빛의 진정한 힘은 어둠을 전면적으로 제거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고. 가로등의 역할은 빛이 사방의 어둠 속에서도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예감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철학자 플라톤이 쓴 『국가』에는 어둠 속 동굴에 갇힌 죄수의 이야기가 나온다. 모든 사람이 어둠의 공간을 유일한 세계로 알며 살던 중에 단 한 명의 죄수가 천신만고 끝에 밖으로 기어 나와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된다. 죄수의 호기심과 용기를 자극하는 데는 전면적인 어둠의 틈새로 새어 들어오던 머리칼 같은 빛으로도 충분했다. 그것은 빛이 존재한다는 가능성의 확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어둠 속에서의 빛이라는 문제를 ‘희망’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 관념과 관련하여 얘기해보자. 당신은 희망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희망에 관한 대중의 가장 보편적인 이미지로 시인 윤동주의 <별 헤는 밤>과 같은 이미지를 떠올릴 수도 있다. 이 시는 마지막을 이렇게 맺는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 무덤 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우에도 /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윤동주의 이 시는 순결한 감성과 결벽성을 보여주는 청춘의 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마지막 연에 나타난 희망의 이미지는 따져보면 절박한 역사적 현실에 내던져진 사람들의 소망충족심리에 근거한 논리적 비약이다. 겨울이 지나면 반드시 봄이 온다는 자연적 질서를 인간의 역사에 바로 대입함으로써, 자연의 희망을 삶의 희망으로 바꾸는 마술을 건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삶은, 역사는, 겨울 무덤가에 봄 잔디가 피어나듯이 반드시 더 나은 삶의 방향으로 ‘부활’하는 것은 아니다. 한민족이 처했던 역사적 절박성이 말을 짓는 시인의 순결성과 결부되어 비장하고 아름다운 시구를 만들어낸 것은 사실이지만, 이 희망은 엄밀히 말하면 ‘잘못된 유비’를 진실의 형태로 승격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말의 마술이지 삶의 실상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희망에 관해서라면, 죽은 것이 다시 소생하는 ‘부활’이 문제라면 차라리 가로등의 형상을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가로등의 힘, 가로등의 희망은 어디서 오는 걸까. 이 미미한 빛이 어둠 속에서 단지 밝혀져 있다는 사실, 그것뿐일까.

희망의 문제와 관련하여 보다 중요한 것은 빛의 ‘양’이 아니라, 빛의 ‘방향’이다. 일반적으로 가로등은 가늘고 긴 몸통 위에 빛이 발산되는 머리가 밑으로 구부러진 형상을 하고 있다. 즉 가장 전형적인 가로등은 빛의 얼굴을 한 어떤 존재가 마치 땅을 굽어보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굽어보는 얼굴의 빛은 아래로, 그러니까 낮은 자리로 발산되며 가능한 제 주위를 평등하고 넓게 비추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가로등의 힘, 가로등의 희망은 그것이 발산하는 빛이 낮은 자리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2013년 시사주간지 《타임》의 커버를 장식했고, 2014년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의 첫 번째 세족식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는 가톨릭에서 예수의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여 그와 똑같은 형식으로 사제들에게 오랫동안 진행되어온 세족식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치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역사상 처음으로 사제가 아니라 12명의 ‘아이’를 선택해서 발을 닦아주고 거기에 입맞춤했다. 이들은 모두 ‘죄 있는 인간’, 소년원 재소자였으며 거기에는 여자아이와 이슬람교도가 끼어 있었다. 아이, 여자, 이슬람교도, 전과자는 오늘날 문명세계의 가장 힘없는 존재들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취임식에서 교황이 되는 게 아니라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제자가 되기 위해 그는 가장 ‘낮은 자리’로 임하여 그 자리를 섬기는 자가 되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예수는 왜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었을까 하는 새삼스러운 질문을 다시 하게 된다. 발이 신체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프란치스코 교황은 역대 교황 중 예수의 세족식 의미를 가장 정확하게 알고 있는 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둠이 가득한 지상에 신이 잠시 모습을 드러낸다면 어떤 방식일까. 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보에서 가로등을 본다. 언뜻 거기에서 신의 실루엣을 본 듯도 하다.

내비게이션_ 머릿속에서 동네 길이 지워지다니

내비게이션은 본래 뱃사람들의 항해술을 뜻하는 말이다. 나침반과 지도, 해도(海圖), 별자리의 위치 파악 등이 이 항해술의 필수목록을 구성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항해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비게이터(navigator), 즉 항해사의 지도 해석 능력이다.

지도에 ‘해석’이 필요하다는 말에 주의하자. 해석(interpretation)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실재와 가상, 원본과 복사본 사이의 ‘차이’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둘 사이에 벌어져 있는 간극을 메우기 위한 기술이 해석이란 말이다. 전통적 항해술에서 당연히 이 간극은 엄청나게 컸다. 인간의 발품과 눈썰미만으로 만들어진 작은 종이그림과 실제 지형 사이의 간극을 생각해보라.

내비게이션이란 말은 이제 우리 삶에 필수 용어가 되었다. 누구나 매일 운전수-항해사가 되니까. 그러나 이 현대적 현상은 이전 뱃사람들의 상황과는 전혀 다르다. 무엇보다 자동차 유리창에 붙어 있는 이 작은 직사각형 상자는 엄청나게 정교한 정보력을 가지고 있다. 뉴욕의 마천루 틈새에 겨우 위치한 작은 도넛 상점과 사하라 사막을 매주 이동하는 부시맨의 이동 거주지, 부산의 꼬불꼬불한 골목길, 이베리아 반도의 낯선 국도 위 과속 카메라의 위치와 강변북로에서 실시간 발생하는 교통변화까지를 모두 알고 있다니 충격적이지 않은가. 오늘날 지구라는 별에서 진정한 신의 눈을 소유하고 있는 존재는 우주 공간에 떠 있는 24개의 GPS 위성(이것은 미공군 우주비행대 소유다!)과 수시로 정보를 주고받는 이 상자다.

이제 불필요하게 된 것은 지도에 대한 운전수-항해사의 해석 능력이다. 원본과 복사본 사이의 간극이 완전히 사라졌는데 무슨 해석 능력이 필요하겠는가. 문제는 이제 가상이 현실을 대체한다는 사실에 있다. 운전대를 잡은 당신은 더 이상 눈앞의 실제 풍경을 살펴보거나, 자신의 머리에 들어 있던 지형에 대한 오랜 기억을 활용하지 않는다. 이 가상의 스크린이 그 자체로 리얼리티가 되었으므로, 항해사는 당신이 아니라, 이 상자 자신이다. 『미생(未生)』의 오차장도 20년을 매일 지나다니던 출근길을 이 상자의 지시 하나 때문에 꼬불꼬불 골목길로 돌아가는 줏대 없는 일들이 그래서 수시로 일어난다.

노래방이 생기면서 순식간에 노랫말을 까먹게 되었던 경험이 떠오른다. 뛰어난 기능의 전자사전을 곁에 두기 시작하면서 나는 고등학교 시절보다 영어 단어를 더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다. 요즘은 머리에서 20년을 지나다니던 출근길 지도가 자꾸 지워지는 증상이 진행 중이다.



평범한 물건은 어떻게 철학을 선물하는가



물티슈_ 백색신화

물티슈는 ‘티슈’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그와는 성질이 좀 다른 사물이다. 젖으면 티슈는 사용가치가 제로가 되지만, 물티슈는 젖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것의 속성이다. 그런데 늘 젖어 있는 이 사물은 티슈와 달리 잘 찢어지지도 않는다. 일반 펄프티슈와는 달리 종이가 아니라 부직포로 만드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물티슈는 티슈가 아니라 ‘물수건’에 훨씬 가깝다.

이 사물이 언제부터인가 여자들의 가방 속 필수품이 되었다. 젊은 엄마들이 아기를 데리고 외출할 때 물티슈는 편리하다. 요즘 젊은 엄마들은 물티슈가 없으면 갓난아기를 데리고 외출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야외에서 기저귀를 갈 때, 입에서 먹던 걸 쉽게 흘리는 아기에게 물티슈가 매우 유용하다는 것이다. 지하철에서 입술 화장을 고치며 물티슈를 이용하는 여성을 자주 본다. 물티슈의 주된 소비층은 젊은 여성들이다. 하지만 소비층이 거기에만 한정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무언가를 쏟거나 피부가 더럽혀졌을 때 이 사물은 ‘오염 제거’에 놀라운 효율성을 보여준다. 아주 간단하게 끈적끈적한 피부 상태를 깨끗하게 만들어준다. 식당에서도 물티슈는 필수품이 되었다. 입으로 들어가야 할 음식을 손으로 만지는 게 찜찜하니 식당에 가면 으레 물티슈를 달라고 주문하는 손님들이 적지 않다. 사은품으로 휴대용 티슈를 주던 주유소에서도 이제는 휴지가 아니라 물티슈를 주는 곳이 많다.

내가 어릴 때는 본 적이 없던 이 사물이 모든 곳에 다양하게 만능상품처럼 쓰이는 상황은 흥미롭다. 오래된 일상용품이라고 할 수 없는 한 사물이 짧은 시간에 이렇게 생활 전반에 광범위하게 사용된 데는 기능적 편리성 외에도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가 다소 의심스러워하는 것은 ‘청결’이라는 ‘위생 관념’이다. 표면적으로 청결로 불리는 위생 관념은 실은 현대가 지닌 중요한 특성, 현대라고 불리는 이 시대의 무의식을 드러내는 증상 같은 것은 아닐까. 물티슈로 ‘오염된’ 피부가 간단하게 깨끗해질 때의 기분은 직접적으로는 ‘깔끔하다’는 감각으로 경험된다. 그런데 감각이란 것은 보편적이기도 하지만 시대나 문화적 조건에 따라 다르게 경험되고 의미화되기도 한다.

현대인의 감각은 끈적한 것, 찝찝한 것, 투명하지 않은 얼룩과 모호한 흔적을 잘 견디지 못한다. 오염에 대한 불신과 불안은 현대인의 큰 특징이다. 작은 얼룩과 더러움을 실제 몸에 생리적으로 미치는 영향보다 매우 크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는 그런 오염에 대해 공포를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예전 같으면 별문제로 여기지 않았던 정도의 위생이나 오염에 관한 상황도 지금은 점점 더 크게 부각된다. 시골사람과 도시인의 위생 관념이나 청결에 관한 감각 사이에 상대적으로 큰 차이가 있는 것과도 비슷하다. 화장품 광고 모델의 피부는 현대인의 감각이 ‘백색신화’ 속에 자리 잡고 있음을 이미지 차원에서 분명히 보여준다. 흔히 뽀샵으로나 가능한 피부, ‘물광’이라고 불리는 피부를 현대인은 욕망한다. 그건 사실 자연 상태에서는 예외적인 형태의 피부이며, 심지어는 불가능하기까지 하다. 의사가 흰 가운을 입을 뿐만 아니라, 첨단 기술의 표상인 반도체 산업 종사자가 굳이 하얀색 가운을 입는 것 역시 현대성의 무의식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증상이다.

그래서 ‘현대 너머’ 흔히 탈근대 시대의 철학이라고 불리는 사색에서는 한결같이 ‘순수’, ‘순혈’, ‘투명’, ‘선명’, ‘백색’ 같은 단어에 의혹의 눈초리를 보낸다. 반대로 ‘오염’, ‘흔적’, ‘얼룩’, ‘잡종’, ‘모호함’ 같은 ‘찝찝한’ 단어들을 오히려 선호한다. 이유가 무엇일까. 이러한 현대 너머의 철학들은 앞 계열 단어에 강박적으로 열광했던 현대인의 가장 나쁜 역사적 사례를 20세기 초 유럽에서 보았다. 나치는 당시 유럽에 살던 유대인들을 끔찍하게 핍박하면서 되풀이해서 말했다. ‘순수한’ 피를 위해서는 ‘오염된’ 인종을 인류로부터 영원히 제거해야 한다고. 영화 <해리포터>의 마법사 전쟁의 핵심원인도 마법사의 순수한 피를 가진 종족이 오염된 종족, 잡종에 대해 갖는 혐오와 패권주의다.

이 문제를 나치나 볼드모트 같은 순혈주의 마법사에 한정할 필요도 없다. 오늘날의 세계, 즉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현대 사회를 주도한 서양 사람들은 유색인종을 끔찍하게 혐오했고, 백색인종이 주도하는 시대야말로 가장 진보한 역사시대라는 신념으로 순수성의 신화를 퍼뜨려왔으니 말이다. 이게 실은 17세기 이후 서구가 주도하여 오늘날에 이르는 현대 문명의 본질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반성이 20세기 중반 이후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서구만의 문제라고 볼 수도 없다. 이미 신라나 고려시대 때부터 아랍인, 중국인, 변방 이민족들 등 다양한 외국인들이 들어와 살던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단일민족이라는 관념에 필요 이상으로 집착해 살아왔던 게 우리나라이니 말이다. 그래서 이런 문제의식을 지닌 학자들은 ‘국사(國史)’가 아니라 ‘한국사(韓國史)’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에 따르면, 국사라는 용어에는 한국의 역사를 세계사의 일부가 아니라 특별한 기억으로 자리매김시키려는 반보편주의가 은연중 스며 있다고 한다.

인구의 구성이 매우 복잡해지고 국제화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현재이며, 세계의 현재이다. 물티슈를 통해 ‘순수성’의 문제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당신이 상상하는 것처럼, 사물은 놀랍다



쇼핑카트_ 권력의 사각 프레임

아내와 함께 쇼핑카트를 밀면서 ‘산책’을 즐긴다. 당신은 입가에 웃음을 띠면서 아내와 카트를 번갈아 쳐다본다. 흡사 곧 태어날 아기를 태운 유모차를 끄는 젊은 아빠와 같은 모습이다.

신도시에 사는 당신의 집 주위에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대형 마트가 있다. 어디로 산책을 가든지 커다란 사각형 철제 수레를 미는 곳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이 사물은 제 안에 견고하고 넓고 깊은 빈 공간을 열어놓음으로써, 어떤 물건이라도 무사히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는 안도감을 준다. 콘플레이크, 생선, 샴푸, 신발, 자동차 용품과 조립용 의자까지 빼곡히 담겼다. 무엇이든 수용하는 무차별성이 이 사물의 ‘톨레랑스(관용)’를 보여준다.

180도 자유자재로 방향을 바꿀 수 있는 바퀴는 유연성을, 브레이크가 없으면서도 원하는 지점에 정확히 정지하고 뒤로 밀리지 않는 감각은 예민함과 뚝심을 드러낸다. 그래서 당신은 또다시 어떤 물건을 향해서라도 쉽고 빠르고 우아하게 다가갈 수 있다.

쇼핑카트는 생명체처럼 자라며 진화하고 있다. 사각형은 더 커지고 튼튼해지며 완고한 인상은 갈수록 부드러워진다. 손잡이에 향균방지제를 하고 그립감이 좋은 플라스틱 외모를 한 채, 구매자 주변의 추천상품 정보를 실시간으로 조회해주는 태블릿컴퓨터가 부착된 카트도 등장했다. 관용과 유연성에 건강과 똑똑함까지 갖춘 것이다.

쇼핑카트를 단지 커다란 장바구니라고 여기는 것은 오해다. 오늘날 이 사물은 일주일마다 반복되는 도서 산책의 친절한 동반자요, 아직 아기가 없는 당신에게는 유모차를 대신한다. 이 사물은 소중히 보듬어야 할 일용할 양식과 일상을 당신의 차까지 가이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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