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감성의 눈을 떠라
최종학 지음 | 소울메이트
마흔, 감성의 눈을 떠라
최종학 지음
소울메이트 / 2015년 3월 / 402쪽 / 17,000원
감성을 찾아 떠나는 음악여행
사라 브라이트만과 <오페라의 유령>을 말하다
음악의 ‘음’ 자도 제대로 모르고, 집에 있는 오디오란 라디오와 테이프, 시디플레이어 겸용의 조그마한 뮤직박스가 전부였던 유학 시절, 한 친구가 <타임 투 세이 굿바이(Time To Say Goodbye)>라는 타이틀의 시디를 선물했다. 거기에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전혀 알지 못하는 여인의 노래가 담겨 있었다. 그래서 알게 된 가수가 바로 사라 브라이트만이다. 지금은 고물상에서나 찾아볼 수 있음직한 조잡한 뮤직박스였지만, 그래도 그 오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사라 브라이트만의 목소리는 남들과는 다른 그 무엇이 있었다.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한 느낌, 무언지 모르게 마음을 잡아당기는 목소리였다. 듀엣으로 같이 노래를 부른 성악가 안드레아 보첼리의 청아한 목소리를 완전히 압도하는 듯한 풍부한 성량은 유명한 남성 테너 3인조(플라시스 도밍고ㆍ호세 카레라스ㆍ루치아노 파파로티)밖에 모르던 나에게 그녀의 이름을 단단히 각인시켜 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음악감상이라는 고상한 취미를 즐길 시간적ㆍ정신적ㆍ금전적 여유가 전혀 없었던 생활 때문에 그녀의 시디는 몇 개 안 되는 다른 시디들과 함께 박스 속에 담겨 나의 생활에서 잊히고 말았다.
상당한 시간이 흘러 우리 가족이 마침내 홍콩에 자리를 잡고, 함께 살게 되고 나서도 몇 년이 지난 후였다. 아내가 “우리 집에도 오디오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라고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음악감상이라는 것은 우리 같은 사람들 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고상하고 여유 있는 사람들 이야기가 아니던가? 내가 이렇게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니 아내가 직접 나섰다. 한동안 어떤 오디오의 조합이 좋으니 안 좋으니 하며 이곳저곳 물어보더니, 자신의 봉급을 사용해 할부로 오디오를 구매하겠다고 선언을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집에 오디오가 나타났다. 2개의 체리색 스피커에 앰프와 시디플레이어로 가장 기본형만 갖춘 오디오였는데, 가격은 내가 생각했던 것을 훨씬 더 초과했다.
이 오디오를 이용해 음악을 듣기 위해 그동안 묵혀놓았던 시디 박스를 꺼냈는데, 그때 다시 사라 브라이트만을 만났다. 새 오디오로 <타임 투 세이 굿바이>를 들으니 어떻게 음악이 그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생생하고, 또렷하고, 신비롭고…. 음이 부드럽게 조화를 이루어 파도처럼 나의 귀로 다가왔다. ‘아, 이래서 사람들이 음악감상을 하는구나.’ 대학교 때 한두 번 어디선가 얻은 공짜 표를 들고 수준 미달의 클래식 발표회에 갔다가 꾸벅꾸벅 졸은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한 수준 높은 예술을 진짜로 접하는 최초의 경험이었던 것이다.
<타임 투 세이 굿바이>의 탄생: 그 후 나는 그녀의 팬이 되었다. 그녀가 ‘팝페라의 여왕’이니, ‘크로스오버 음악의 대가’라는 별칭으로 불린다는 것도 알게 되었으며, <타임 투 세이 굿바이>가 전 유럽의 음악차트에서 수십 주 동안 1위를 차지했던 대단한 인기 곡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녀는 1960년 영국에서 태어났으며, 별다른 고등교육을 받지 못했다. 런던에서 밴드 활동을 하다가, 여러 뮤지컬에서 단역 또는 조연 배우로 약간의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그러다가 불과 24세의 나이로 그녀는 당시 최고의 뮤지컬 제작자로 명성을 날리던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나 <캣츠> 등을 만든) 앤드루 로이드 웨버와 결혼하게 된다. 이 결혼은 그녀의 이름을 세계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앤드루가 사라를 위해 <오페라의 유령>이라는 뮤지컬을 만들어 그녀에게 선물했기 때문이다. 그 오페라의 사운드트랙 중에서도 특히 <밤의 음악>이라는 곡은 앤드루가 사라의 생일선물로 작곡한 곡이라고 한다.
그녀의 장점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도록 만들어진 이 뮤지컬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전 세계에서 무려 6천만 명 이상의 관객을 끌어모았으며, AP통신은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성공한 쇼로 이 뮤지컬을 뽑았을 정도다. 이 뮤지컬 덕분에 여주인공 크리스틴 역할을 맡았던 사라는 무명에서 전 세계에 이름을 떨치는 스타로 떠오르게 되었고, 앤드루는 돈방석에 올라앉았다. 그는 지금도 영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재산가라고 한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앤드루와 사라는 결혼 6년 만에 이혼을 했다. 그 이후 사라는 프랑크 피터슨이라는 성악의 대가에게서 ‘벨칸토 발성법’이라는 클래식 창법을 공부했다. 그리하여 탄생한 작품이 바로 <타임 투 세이 굿바이>다.
<오페라의 유령>을 관람하다: 그녀의 대표작 <오페라의 유령>에 대한 나의 궁금증은 더 부풀어올랐다. 마침 <오페라의 유령>이 영화로 제작되어 홍콩에서도 상영되었다. 원래 더 일찍 영화로 만들어질 계획이었으나, 사라와 앤드루가 이혼해서 제작이 10년 이상이나 지연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조엘 슈마허를 감독으로 2004년에 영화 <오페라의 유령>이 완성된 것이다. 당시 나는 바쁜 일정으로 따로 시간을 낼 수 없었기 때문에, 극장 개봉이 끝난 후 발매된 DVD를 구입해 시청했다. 그리하여 이 오페라가 대략 어떤 내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 작품에 대한 나의 기대가 너무 높았던 탓일까? 영화에 대한 감상평은 약간 실망스러웠다. 무대 장치나 화면 등은 대단했으나, 영화가 너무 평면적이어서 배우에게서 감정 전달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영화를 본 후에도 이 작품의 내용이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았는데, 가스통 르루의 원작소설을 축약한 책을 읽고 나서야 그 궁금증은 해결되었다.
그러고 나서 한참 지난 후의 일이다. 한국의 직장으로 옮겨 오기로 하고, 가족을 먼저 한국으로 떠나보내고 홍콩에서 1년간 외롭게 혼자서 살고 있는 나에게 어느 날 저녁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당신, <오페라의 유령> 보고 싶지 않아요? 브로드웨이 팀이 한국에 와서 6월부터 공연을 한대. 지금 예매를 하면 7월 중순쯤에는 볼 수 있을 거야.” “그래? 그럼 예매해요. 7월 초에 내가 한국에 가니 그때 같이 보면 되겠네.” 이래서 우리는 7월 14일, 난생 처음으로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 들어섰다.
팬텀의 마력에 빠지다: 낡은 오페라하우스의 경매장면에서 시작해, 하늘로 올라가는 샹들리에와 크리스틴의 주연 여배우 데뷔, 음악천사의 방문 등 뮤지컬은 재미있게 진행되었다. 드라이아이스가 펼쳐진 호수 위로 반짝이는 수많은 촛불들, 그 위로 노를 저어가는 두 주인공의 모습은 정말 낭만적인 수준을 넘어서 환상적이었다. 역시 생동감과 박진감에서 뮤지컬은 영화보다 한 수 위였다. 그러나 샹들리에가 올라가거나 떨어지는 장면만은 영화에 비해 긴장감이 좀 떨어졌다.
팬텀 역으로 열연한 브래드 리틀은 사라 브라이트만과 함께 오리지널 영국판에 출연했던 마이클 크로퍼드와는 조금 달랐다. 시디로 들은 마이클 크로퍼드의 목소리는 강렬하기보다는 마귀의 숨결처럼 간사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브래드 리틀보다 침착했으며, 더 경험이 많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영리하고 전지전능한 팬텀이었는데, 브래드 리틀은 보통 사람인 우리들처럼 화내고, 잘 흥분하고, 질투하는 팬텀이었다.
크리스틴과 라울처럼 행복하게: 막이 내리자 아내가 먼저 벌떡 일어나서 박수를 쳤다. 모두 3번에 걸쳐 무대의 막이 다시 올라가고, 박수는 계속되었다. 주말 동안 시디를 듣고, 다시 DVD도 꺼내 보면서 뮤지컬과 비교해 생각해보았다. 전체적으로 뮤지컬에서 라울은 파묻혀서 전혀 보이지 않았으며, 크리스틴 역의 캐스팅이 적합했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목소리 자체도 사라와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칼로타 역을 맡은 배우가 나이는 들었지만 크리스틴의 목소리로는 더 어울리지 않나?” 이것이 아내의 평가였다.
가만히 앉아서 다시 <타임 투 세이 굿바이>를 꺼내 들으며 사라 브라이트만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녀가 지금 이 뮤지컬을 다시 본다면 행복할까?” 아내가 묻는다. “글쎄?” 나는 아내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크리스틴 다이에는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라울과 평생을 살았으니 정말 행복했겠지? 사라 브라이트만이 지금 행복한지는 잘 모르지만 나는 행복해. 사랑하는 당신이랑 이렇게 아름다운 뮤지컬도 볼 수 있으니….” 아내의 대답이 걸작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나도 정말 행복하다. 명예나 부보다 더 소중한 것은 진실한 사랑이다. 이제 반년만 더 참으면 내년부터 우리 가족이 다시 함께 모여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나도 서울로 직장을 옮겨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을 위해, 홍콩으로 돌아가서 힘차게 살아야겠다.
감성을 찾아 떠나는 영화여행
대한민국의 현실을 생각하게 한 영화, <명량>
2014년 여름 연구실 엠티 때 경상남도 남해군을 찾았다. 남해대교를 넘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들른 곳이 충렬사다. 남해대교를 건너면 왼편에 충렬사가 위치해 있다. 바로 이순신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위치한 곳이다. 충렬사는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사망한 후 시신을 수습해서 묘를 모신 곳이다. 정유재란 끝에 철수하는 일본군과 마지막으로 대결한 전투가 바로 노량해전이다. 노량해전이 일어난 장소는 지금 남해대교가 서 있는 바다 좁은 길목이다. 정확하게는 충렬사에서 내려다보이는 앞바다 왼편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이곳은 육지와 큰 섬 사이의 좁은 해협이라서 물살이 빠른 곳으로 명량해전이 일어났던 진도 앞바다 울돌목의 지형과 유사하다.
바다에서 전투가 거의 끝나갈 때쯤 이순신 장군은 적의 총탄을 맞아 숨을 거두면서, “지금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라고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질 것을 염려한 것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보다는 조국을 생각했다는 의미다. 전투가 승리로 끝난 후 장군의 시신을 육지인 남해로 모셨다. 시신이 처음 도착한 장소가 4km쯤 떨어진 관음포이며, 시신을 관음포에서 옮겨서 묘를 만든 장소가 바로 충렬사다. 나중에 시신은 이순신 장군의 고향인 충청남도 아산군에 있는 현충사로 이장되지만 시신이 묻혔던 장소는 충렬사에 가묘로 남아 있다.
영화 <명량>을 통해 다시 본 이순신 장군
영화 <명량>이 잘 만든 영화냐고 묻는다면 바로 답하기는 곤란하다. 연기자들의 역량은 뛰어났지만 고증이나 컴퓨터 그래픽은 좀 어색하다. 이야기 전개상 불필요한 군더더기나 억지스러운 장면들도 많았다. 그래도 영화가 전해주는 메시지는 명확했다. 김한민 감독은 모두가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는 어려운 상황에서 모든 군사들을 단합시켜 싸움터로 이끌어가는 이순신 장군의 고뇌어린 모습을 잘 그려냈다. 그는 2시간의 러닝타임에서 1시간 이상을 이런 장군의 모습을 드러내는 데 할애한다. 이순신 장군을 위한, 장군에 의한, 장군의 영화인 것이다.
일본군은 첩자를 이용해서 일본 함대의 출병에 관한 거짓 정보를 조선 측에 알린다. 선조는 이 허위정보를 믿고 이순신 장군에게 부산으로 출병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그 정보가 허위정보이며 부산으로 갔다가는 중과부적으로 패배할 것이 분명하다면서 거부한다. 이에 왕명을 어긴다며 격분한 선조는 이순신 장군을 파직해 한양으로 압송시키고 후임 삼도수군통제사로 원균을 임명한다. 원균이 부산으로 진격하자고 상소를 올렸던 것이다. 하지만 통제사가 된 원균도 일본군과 정면 대결을 해서는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닫자 부산 출병을 차일피일하기만 한다. 그러자 선조는 더욱 강하게 부산으로 출병할 것을 명하고, 도원수 권율이 원균을 잡아 곤장을 치는 일까지 벌어졌다. 결국 이런 압박에 굴복해 원균은 조선 수군 전체에 출전 명령을 내린다. 운명의 주사위가 던져진 것이다. 결국 원균의 책임도 크지만 전쟁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리한 지시를 한 왕, 선조의 책임이 가장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만여 명의 조선 수군은 100척이 넘는 판옥선을 포함한 총 300척의 배를 이끌고 여수에서 부산 앞바다까지 먼 거리를 역풍을 거스르면서 힘들게 노를 저어간다. 조류까지 반대로 흐르고 풍랑이 치는 상황에서 상당한 거리를 노를 저어서 가다 보니 조선 수군의 피로가 상당했다. 부산에 이르기도 전에 이미 조선 수군은 지치고 말았다. 항상 조류와 바람을 이용해서 싸움을 벌인 이순신 장군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부산 근처에서 벌어진 소규모 교전 후 지친 조선 수군은 현재 부산 신항이 있는 가덕도에 상륙해서 물을 구하고 휴식을 취하고자 한다. 그러나 가덕도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기습으로 많은 병력을 잃고 다시 바다로 쫓겨난다. 밤이 되어 지친 군대를 이끌고 쉬고자 도착한 곳이 지금의 거제도와 칠천도 사이에 있는 바다 칠천량이다. 이곳에서 원균은 가장 큰 실수를 한다. 적이 추격해올 가능성을 고려해 척후선을 세워야 했으나 그냥 쉬라고 명령을 내리고는 자신도 술에 취해 잠이 든 것이다. 1579년 7월 15일 밤 지친 조선 수군 1만 명은 모두 단잠에 빠졌다.
조선 수군의 행로를 따라온 일본군은 7월 16일 새벽 기습을 감행한다. 깜짝 놀란 조선 수군은 지리멸렬한다. 일본군 기록에 따르면 170척 정도의 배를 격침했다고 한다. 사실 일본군의 숫자가 별로 많지 않았는데, 혼비백산 놀란 조선 수군이 싸울 의욕을 잃고 도망가기 바빠서 자멸했다고 전해진다. 이끄는 이가 누구냐에 따라 병졸들의 자세도 이렇게 달라지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활약했던 충청수사 최호와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끝까지 남아 싸우다 전사했다. 그러나 상당수의 수군은 남쪽 바닷길로 탈출할 수 있었다. 경상우수사 배설은 자신 휘하의 전선을 이끌고 한산도 방향으로 도주했다. 원균도 수군을 이끌고 육지로 상륙해서 도망치지만 일본 육군을 만나 싸우다 사살된다. 전라좌수영 본영이 위치해 있던 한산도도 곧 일본군의 손에 떨어진다.
이 소식이 조정에 알려지자 조정은 발칵 뒤집힌다. 그리고 옥에 갇혀 있던 이순신 장군이 복직되어 다시 남쪽으로 파견된다. 8월 3일의 일이다. 그러나 일본 육군도 움직이기 시작해 전라도 방면을 침략한다. 전주성과 남원성이 함락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된다. 조선군에게 식량을 공급하던 곡창지대가 적의 눈앞에 훤히 열리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린 것이다. 영화는 바로 이 시점부터 시작된다.
울돌목의 승리와 진도의 아픔
절망의 위기 속에서 치렀던 그날의 처절했던 전투가 끝났다. 이순신 장군이었기에 공포에 떠는 병졸들을 규합해 막강한 적에 대항해 싸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였기에 아무도 자기를 따르지 않고 믿지 않는 외로운 상황 속에서 두려움을 추스르고 불가능에 맞설 수 있었으리라. 그래서 오늘날 후손들이 지금 이 역사를 배우고 있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1년 후 1598년 벌어진 노량해전에서 일본군의 총탄을 맞고도 “싸움이 끝나기 전에는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라고 전하고 숨을 거두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의 넬슨 제독은 트라팔가해전에서 영국 침공의 기회를 엿보는 프랑스 함대를 물리치면서 역시 총탄을 맞았지만 총탄을 맞았다는 사실을 숨긴 채 지휘를 계속하다가 승리가 확실해지자 숨을 거두면서 “신에게 감사한다, 나는 내 의무를 다했다.”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런 일화를 보면 이순신 장군이나 넬슨 제독은 목숨보다도 자신의 책임을 더 강조하는 생활을 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그래서 훌륭한 위인으로 칭송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지 50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다. 바로 그 역사의 현장 울돌목 진도 앞바다에서 2014년 너무나도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났다. 인천을 출발해서 제주로 가던 세월호라는 여객선이 격랑 속에서 난파한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 특히 학생들이 목숨을 잃었다.
“엄마, 내가 말 못 할까 봐 보내놓는다. 사랑한다.” “얘들아 진짜 내가 잘못한 것 있으면 다 용서해줘. 사랑해.” 세월호가 침몰하기 직전 이런 메시지들을 남기고 어린 학생들이 우리 곁을 떠나갔다. 어린아이들이 무슨 큰 죄를 그리 지었다고 용서해달라는 말을 남겼을까? 오히려 우리가 이들에게 용서를 해달라고 빌어야 하지 않을까? 분향소를 방문해 조문을 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사건 직후 당황해서 우왕좌왕한 정부의 행태를 보면서 500년 전 일본의 침공을 앞에 두고 우왕좌왕하던 조선의 모습을 다시 떠올렸다. 500년이 지났어도 우리가 제대로 교훈을 배우지 못해서 이런 일이 되풀이된 것이리라. 그래서 그 후 본 영화 <명량>의 모습이 더 내 마음에 다가왔을 것이다. <명량>이 평론가들의 예상을 뒤엎고 대흥행한 이유에는 아마 이런 당시 시대 분위기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물살 빠른 해협에서 목숨을 걸고 잠수작업을 하는 잠수사들의 모습을 보도하는 뉴스를 보면서, 울돌목의 급류가 어떤지 실제로 알게 되는 계기도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