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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으로 읽는 한국 생활사

윤덕노 지음 | 깊은나무
음식으로 읽는 한국 생활사

윤덕노 지음

깊은나무 / 2014년 11월 / 426쪽 / 18,500원





밥상의 주인 - 밥류ㆍ죽류



돌솥비빔밥_ 양반의 별미

한식에 익숙하지 않은 서양인 중에 돌솥비빔밥을 먹으며 감탄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외국인의 눈에는 다양한 나물과 채소, 쇠고기와 달걀을 넣고 비벼 새로운 맛을 창조하는 것도 독특해 보이는데, 음식 담는 그릇까지 돌을 갈아 만든 것이라니 더욱 관심을 보인다. 곱돌을 갈아 만든 개인용 솥에 밥을 짓고, 거기에 갖은 재료를 넣어 비빈 돌솥비빔밥은 우리에게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고 궁금할 것도 없어 보이지만 자세히 따져보면 우리가 잘 몰랐던 역사와 이야기가 숨어 있다.

돌솥비빔밥의 유래를 알려면 먼저 돌솥밥의 기원부터 살펴야 한다. 곱돌을 갈아 만든 솥에 밥을 지으면 뜸이 골고루 들고 밥을 지을 때 잘 타지도 않을뿐더러 먹을 때 쉽게 식지도 않는다. 게다가 밥맛도 좋고 누룽지와 숭늉마저 구수하다. 밥은 무쇠 가마솥에 지은 밥이 으뜸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가마솥밥은 시골 사람들이나 서민들이 주로 먹었다. 궁궐에서 수라상을 따로 받는 임금이나 지체 높은 양반집에서는 놋으로 만든 새옹이나 돌솥에다 따로 밥을 지어 올렸다. 그중에서도 밥 짓는 솥으로는 돌솥을 가장 선호했다. 영조 때의 실학자 유중림은 『증보산림경제』에서 밥 짓는 솥은 돌솥이 가장 좋고 다음은 무쇠솥, 그다음이 유기솥이라고 했다.

비단 우리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돌솥을 최고로 여겼다. 11세기 말 송나라 시인 소동파는 《돌솥[石?]》이라는 시에서 구리솥은 비린내가 나고 무쇠솥은 떫어서 좋지 않으니 돌솥이 물을 끓이기에 가장 좋다고 읊었다. 9세기 초 당나라의 학자로 유명한 한유도 “누가 산의 뼈[山骨]를 깎아서 돌솥을 만들었나”라며 돌솥을 예찬하는 시를 지었으니 옛사람들의 돌솥밥 사랑이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조선의 임금들은 돌솥으로 지은 수라를 들었다. 임금님의 수라는 새옹이라고 부르는 조그만 곱돌로 만든 솥에 꼭 한 그릇씩만 짓는데 숯불을 담은 화로에 올려놓고 은근히 뜸을 들여 짓는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임금이 상으로 돌솥을 하사했다는 기록도 많이 보인다. 돌솥은 가마솥과는 달리 혼자 쓰는 개인용 밥솥인 동시에 그릇이다.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은 돌솥에 시를 적어 자신의 소유임을 밝혔는데 이 또한 조선 선비의 풍류였다.

돌솥에 밥을 비비면 무엇보다 잘 식지 않고, 재료를 익히며 먹을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그런데 돌솥비빔밥과 비슷한 음식 역시 옛날부터 존재했다. 비빔밥은 한자로 골동반(骨董飯)인데 『동국세시기』에서 골동반은 젓갈, 포, 회, 구이 등 없는 것 없이 모두 밥 속에 넣어 먹는 음식으로 옛날부터 이런 음식이 있었다고 했다. 『동국세시기』에 나오는 골동반은 송나라 시인 소동파가 쓴 『구지필기』에 나오는 것이니 늦어도 11세기 무렵부터 비빔밥을 먹었음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고려 때의 문헌에도 돌솥을 이용해 밥을 지었다는 기록이 자주 보이고, 역시 비슷한 시기 고려와 교류가 활발했던 송나라 문헌에도 갖가지 해산물과 고기 등을 넣어 밥을 지은 골동반이 보이니 진작부터 돌솥에 밥을 비비는 돌솥비빔밥이 있었을 수도 있다. 돌솥비빔밥이 우리나라 자체적으로 발달한 음식이건 아니건 최소한 1천 년 이전부터 진화하고 발전한 것이 아닌가 싶다.

누룽지_ 세계 공통의 별미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 무엇일까? 정답은 ‘누룽지’다. 턱없는 소리라고 반박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세상의 산해진미는 모두 맛보았을 청나라 황제가 한 말이니 어느 정도는 믿어도 좋지 않을까? 사실 황제가 누룽지를 먹으며 최고라고 한 데는 이유가 있다. 청나라 전성기의 황제인 건륭제가 신분을 숨기고 지금의 장쑤성 쑤저우 부근을 시찰했다. 준비한 음식은 없고 식사 때는 지나, 인근 농가를 찾아가 한 끼 식사를 청했는데 방금 밥을 먹은 주인이 남은 밥이 없다며 난색을 보였다. 그런데 변복을 한 황제가 불쌍해 보였는지 집주인이 누룽지와 채솟국을 데워 내왔다. 황제가 뜨거운 누룽지에 국물을 부으니 ‘타다닥’ 소리가 나며 구수한 누룽지 냄새가 퍼졌다. 시장했던 건륭제가 맛있게 누룽지탕을 먹고는 종이에 “한바탕 천둥소리 울리니 천하제일 요리가 나왔네”라고 써서 집주인에게 답례로 주었다. 이것이 중국음식점에서 먹을 수 있는 누룽지탕의 유래고, 누룽지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 된 연유다. 아무리 황제라도 ‘시장이 최고의 반찬’이라는 의미도 포함돼 있다.

이야기의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중국에서 누룽지가 요리로 부각된 것은 바로 건륭제 무렵인 청나라 때다. 원매라는 학자는 자신이 저술한 『수원식단』에 “종이처럼 얇은 누룽지를 기름에 구운 후 흰 설탕을 뿌려 먹으면 맛있다. 금릉인(金陵人)이 제일 잘 만든다”고 적었다. 누룽지 요리가 금릉, 즉 지금의 난징을 중심으로 발달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때부터 누룽지가 고급 요리의 재료로 활용됐다.

누룽지는 얼핏 우리나라 사람들만 먹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쌀로 밥을 지어 먹는 나라에는 모두 누룽지가 있다. 중국에는 궈바(鍋巴)라는 누룽지가 있고, 일본에는 누룽지 오코게(おこげ)가 있으며, 베트남에도 꼼짜이(Com chay)라는 누룽지가 있다. 아시아 사람의 주식은 쌀이니까 당연히 누룽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실은 유럽에도 누룽지가 있다. 유럽 중에서 쌀 음식이 발달한 스페인 사람들도 누룽지를 간식으로 즐겨 먹는다. 스페인 누룽지는 볶음밥의 한 종류라고 할 수 있는 파에야(Paella)를 만들 때 생기는데 소카라트(Soccarat)라고 한다. 《뉴욕타임즈》의 칼럼니스트는 “소카라트야말로 누룽지의 향긋함과 바삭바삭한 맛이 어우러진 파에야 최고의 걸작품”이라고 극찬했다. 필자가 느끼기에 파에야 누룽지 맛이 솔직히 우리가 전골이나 삼겹살을 먹은 후 볶아 먹는 밥에서 나오는 누룽지보다 못하지만 누룽지가 서양인의 입맛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예전에 우리는 누룽지를 주로 숭늉으로 만들어 먹거나 군것질거리로 먹었다. 더 옛날에는 먼 길 떠날 때 먹는 비상식량 정도로 누룽지를 만들었다. 이런 누룽지가 지금은 세계인의 별미로 발전했다. 그것도 군것질거리가 아닌 값비싼 요리로 식도락가의 입맛을 끈다. 중국의 누룽지탕은 우리나라를 비롯해 여러 나라에 많이 알려져 있고, 베트남의 꼼짜이 역시 값비싼 누룽지 요리로 발전했다. 여기에 스페인의 소카라트를 비롯해 일본의 오코게까지, 이제는 누룽지마저 글로벌 경쟁을 펼친다. 우리나라에서도 누룽지 백숙을 비롯해 다양한 누룽지 음식이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천하제일 요리’라고 하기에는 아쉬운 점이 많다. 한국 누룽지도 최고의 요리 반열에 올랐으면 좋겠다.



국이 없으면 밥이 안 넘어가 - 국류



아욱국_ 조강지처 내쫓고 먹는 아욱국

계절의 전령사는 여럿 있지만 그중 음식도 빼놓을 수 없다. 가을 음식의 대명사로 많은 사람들이 전어구이를 꼽지만 사실 아욱국에서도 가을 정취가 듬뿍 느껴진다. 된장 풀고 아욱 넣어 끓인 아욱국을 보면 군침이 절로 돈다. 그 때문인지 민간에 떠도는 속설만 놓고 보면 ‘내가 제일 잘나가’라고 외칠 수 있는 것은 아욱이다. 옛날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를 보면 전어가 아무리 맛있어도 아욱국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가을 아욱국은 문 닫아걸고 먹는다”고 했다. 이웃과도 나눠 먹기 싫다는 것이니 맛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렇다고 전어 맛을 뛰어넘을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가을 아욱국은 자기 계집도 내쫓고 먹는다”는 대목에서는 전어가 무색해진다. 소심하게 며느리 친정 보낸 사이에 눈치 보며 몰래 구워 먹는 전어와는 격이 다르다. 나중에 삼수갑산을 갈지언정 마누라까지 내치고 우선 먹는 아욱국과는 처음부터 비교 대상이 아니다. 그렇기에 아욱국은 아무하고나 함께 먹는 음식이 아니다.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이 막내딸이다. 그런데 속담에 “가을 아욱국은 막내 사위에게만 준다”고 했다. 조강지처도 내몰고 먹는 아욱국이지만 쥐면 꺼질세라 불면 날아갈세라 애지중지 키운 막내딸을 데려간 사위에게만큼은 특별히 나누어주던 음식이다.

가을 아욱이 얼마나 좋은지 아욱국과 관련된 속담은 계속 이어진다. “아욱으로 국 끓여 삼 년을 먹으면 외짝 문으로는 들어가지 못한다.” 아욱국 때문에 포동포동 살이 쪄서 외짝 문처럼 작은 문으로는 출입을 못한다는 말이니 아욱의 영양가가 그만큼 높다는 소리다. 따지고 보면 된장 풀고 아욱 넣어 맛있게 끓인 아욱국에 밥 말아 먹으면 따로 보약이 필요 없을 것 같기는 하다.

이런저런 이유로 예전에는 아욱을 파루초(破樓草)라고 했다. 한자를 보면 깨뜨릴 파(破), 정자 루(樓), 풀 초(草)이니 ‘정자를 허물고 심는 풀’이라는 뜻이다. 그까짓 아욱 하나 심는데 왜 멀쩡한 정자를 허무는지 얼핏 이해가 가지 않지만 속사정을 알고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옛날 어느 양반집에서 봄에 채소를 심는데 안방마님이 하인에게 한마디를 했다. “쓸데없는 다른 채소 많이 심지 말고 이왕이면 아욱을 심어라.” 그러자 하인이 물었다. “이미 씨앗을 다 뿌려 심을 밭이 없는데 어찌하오리까?” 마님이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했다. “서방님이 아욱을 몹시 좋아하시니 심을 밭이 없으면 저기 정자를 허물고 그 터에다 아욱을 심어라.”

아욱의 별명, 파루초는 이렇게 얻어진 별명인데 옛날부터 아욱은 양기를 보충하는 작물로 이름이 높았다. 그러니 안방마님이 서방님 핑계를 대며 정자까지 허물고 그 터에 아욱을 심으라고 한 것이다. 사람들은 옛날부터 아욱이 양기를 보충해주니 정력에도 좋다고 믿은 것 같다. 실제로 14세기 초, 중국 원나라 때 왕정이 쓴 『농서(農書)』에 아욱은 양기를 북돋워주는 채소인 양초(陽草)라고 했고, 채소 중에서도 으뜸이 되는 채소라고 했으니 안방마님이 앞장서서 정자를 허물고 아욱을 심을 만하다.

보신탕_ 한국인은 왜 보신탕을 먹을까?

나라 안팎의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보신탕 문화를 비판한다. 보신탕 식용에 대한 찬반 여부를 떠나 보신탕이 우리 전통 복날 음식이었으며, 지금도 먹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그러니 한국에 왜 보신탕 문화가 발달했는지 이유라도 알아두자. 복날 보신탕을 먹는 이유는 다양한 문화와 민속이 얽혀 있어 단순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특별히 복날, 개고기를 먹던 풍속은 춘추시대의 진나라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 풍속서인 『동국세시기』가 인용한 『사기』에는 복날 개를 잡았다는 기록이 두 군데나 보인다. 하나는 진나라 역사를 적은 「본기」에 덕공 2년, “초복에 개고기를 잡아 벌레를 막는다[禦蠱]”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주의해서 볼 부분이 『동국세시기』에는 곤충을 뜻하는 벌레 충(蟲) 자를 썼지만 원본인 『사기』에는 벌레 고(蠱)라고 쓰여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해충에 의한 피해 예방이 아니라 기생충이나 세균에 의한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해 개고기를 먹었다는 뜻이다. 또 다른 기록은 『사기』의 「십이제후연표」에 나온다. 덕공 2년에 “처음으로 복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짓고 개고기를 찢어 성문 네 곳에 걸었다”고 기록했다. 전염병인 역질(疫疾)을 막으려고 개고기를 걸어 나쁜 기운이 성안으로 침입하는 것을 막았던 것이다. 6세기 『형초세시기』에서도 복날 뜨거운 국을 먹는 것은 나쁜 기운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전염병이 돌기 쉬운 여름날, 뜨거운 국과 고기로 영양도 보충하고 전염병도 예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수많은 고기를 제치고 굳이 개고기를 복날 음식으로 삼은 까닭은 무엇일까? 주술적으로 봤을 때, 개고기는 불(火)의 기운이 있어 복날의 음기인 금(金)의 기운을 물리친다는 화극금(火克金)의 오행 원리로 설명한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고대에는 개고기가 좋은 식품이었기 때문이다. 춘추전국시대 왕과 귀족의 어록을 모아놓은 『국어(國語)』라는 책을 보면 알 수 있다. 월나라 왕인 구천이 오나라에 복수하려고 와신상담, 군사력을 키우면서 병력을 늘리려고 백성들에게 출산을 장려했다. 여자 열일곱, 남자 스무 살이 되도록 결혼을 하지 않으면 부모에게 죄를 물었다. 또 남자아이를 낳으면 술 두 병에 개고기를 출산 장려금으로 지급했고 여자아이를 낳으면 술 두 병에 돼지고기를 지급했다. 돼지고기보다 개고기를 더 귀하게 여겼다는 증거다. 주나라 때 예법을 적은 『주례』에도 개고기가 말, 소, 양, 돼지, 닭과 함께 제왕이 먹는 여섯 가지 고기 중의 하나로 포함돼 있다. 고대 중국에서는 개가 고급 식용 가축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당시 사람들이 귀한 보신탕을 복날 음식으로 삼은 것이다.

이렇듯 보신탕은 고대 중국에선 매우 귀한 음식이었지만 작금의 중국인들은 대부분 개고기를 먹지 않는다. 일본이나 다른 동남아 국가도 마찬가지다. 아시아에서 보신탕을 먹는 나라는 한국과 베트남뿐이다. 여기에도 이유가 있다. 일본 사람들은 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아예 육식을 하지 않았다. 19세기 말부터 다시 고기를 먹기 시작했는데 뒤늦게 보신탕을 먹을 이유가 없었다. 중국 고문헌에서 보신탕이 사라진 것은 6세기 무렵이다. 중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농업서인 『제민요술』에도 개고기는 보이지 않는다. 주요 가축 목록에도 개가 빠지고 대신 낙타와 오리가 들어가 있다. 중국에서 6세기는 남북조시대로 북방 유목 민족이 세력을 떨친 시기다. 유목 민족과 수렵 민족에게 개는 목축과 사냥에 필수적이기 때문에 개를 먹지 않았고, 이후 중국에서 보신탕이 사라지게 되었다. 반면 한국이나 베트남은 농경문화에다 전통적으로 보신탕을 제물로 쓴 유교를 숭상해 굳이 보신탕을 기피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쫄깃한 면발의 매력 - 면류



수제비_ 옛날 양반의 고급 음식

수제비는 애증이 엇갈리는 음식이다. 가슴을 저미는 것 같은 그리움과 어려웠던 시절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 동시에 담겨 있다. 수제비에는 어머니의 손맛과 고향에 대한 기억, 어린 시절의 추억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된장찌개가 언제든지 다시 돌아가 안기고 싶은 그리움을 자아낸다면 수제비는 마음 시리고 그립지만 되돌리고 싶지는 않은 추억에 잠기게 한다. 중장년층에게는 특히 그렇다. 수제비에는 밀반죽을 손으로 뚝뚝 떼어내 끓는 국물에 넣어주던 어머니의 모습이 투영돼 있다.

한국인이 수제비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의 뿌리는 가난이다. 힘들었던 시절의 상징이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먹을 것이 없었을 때 끼니를 잇게 해준 음식이 수제비다.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는 원조 물자로 들어온 밀가루를 반죽해 끓인 수제비로 힘든 시기를 넘겼다. 그래서 배고픈 시절을 직접 겪지 않은 세대에게도 수제비는 마음 찡한 추억이 서린 음식이다.

한 시절, 민족과 고난을 함께 겪었지만 사실 수제비는 역사가 무척 오래된 전통 음식이다. 기원을 따져보면 국수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뿌리가 깊다. 뿐만 아니라 일반 상식을 깨는 음식이다. 옛날 수제비는 형편 어려운 사람들이 끼니를 때우려고 대충 만들어 먹던 음식이 아니었다. 양반들의 잔칫상에도 올랐던 고급 요리였다. 근대 초기까지만 해도 양반집에서는 별식으로 수제비를 만들어 먹었다. 밀가루가 흔치 않던 지역에서는 밀가루 대신 쌀가루로 수제비를 끓여 잔칫상에도 올렸다. 지금도 그 시절을 추억하는 노인들이 생존해 계시니 아득히 먼 옛날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쌀수제비라고 하면 낯설게 느껴지지만 추수가 끝났으니 쌀은 넉넉한데 밀가루는 없고, 그렇다고 밀가루를 살 만한 현금도 없으니 굳이 쌀을 팔아 밀가루로 바꾸는 대신 쌀가루를 반죽해 수제비를 끓였다. 쌀 수제비는 농촌에서 추수 무렵, 한철에만 먹을 수 있었던 별미 중의 별미였던 것이다. 근대 요리책인 『조선요리학』의 저자인 홍선표가 1938년 신문에 발표한 글에서도 수제비를 가난한 사람들이 먹던 음식이 아니라 특별한 날 먹는 별식으로 그리고 있다. “여름 중에도 삼복에 먹는 음식으로 증편과 밀전병, 수제비라는 떡국이 있는데 여름철 더위를 물리치는 데 필요한 음식”이라면서 “수제비는 닭국이나 곰국에다 만들어 먹을 때도 있지만 미역국에 많이 만들어 먹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여름철 삼복의 복놀이 잔치에 수제비가 없으면 복놀이 음식이 아니 되는 줄로 알고 누구나 다 수제비를 만들어 먹는다”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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