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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헤드라인 100

제임스 말로니 지음 | 행성:B잎새
세계사를 바꾼 헤드라인 100

제임스 말로니 지음

행성:B잎새 / 2014년 10월 / 384쪽 / 17,000원





1페니 우표의 그림(Penny Postage Pictures) - 《Liverpool Standard》, 1840년 5월 12일

1840년 이전까지만 해도 우편은 값비싼 서비스였다. 편지 한 통 부치는 데 드는 돈이 하루 임금과 맞먹는 수준이었다. 우편 요금은 편지지 매수와 보내는 거리에 따라 정해졌으며, 보내는 사람이 아닌 받는 사람이 돈을 지불해야 했다. 다만 국회의원이나 상류층 귀족들은 우편을 공짜로 보내거나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누렸다.

워낙 비용이 비싸다 보니 멀리 떨어진 곳의 가족이나 친구들과 우편으로 소통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그래서 편지를 부친다는 것이 부유층의 특권으로 인식되었다. 여유 있는 사람들조차 비용을 아끼기 위해 편지지 앞뒷면에 빼곡하게 글을 썼다. 당시엔 봉투도 없었다. 편지지를 접어 밀랍으로 봉인하는 게 전부였다. 물론 우체통 또한 없어 직접 우체국으로 가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인적이 드문 곳에 사는 사람은 편지를 받아보지 못하는 일도 허다했다. 받는 사람이 우편 요금을 피하기 위해 수신을 거부하는 일도 자주 일어났다.

1830년대 영국 정부는 이런 불편과 부작용을 우려했다. 던디 출신의 서적상 겸 인쇄업자였던 제임스 차머스가 최초로 선불식 접착성 라벨을 고안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우표와 근대적 우편 체제의 아이디어를 최초로 생각해낸 인물로 우스터셔 주 키더민스터 출신 공무원인 ‘롤랜드 힐’을 꼽는다.

롤랜드 힐은 사랑하는 약혼자가 보낸 편지를 돈이 없어 받지 못해 슬퍼하던 여인의 모습에서 우편 개혁안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 1835년 힐은 우편 체계에 대한 연구에 착수했고 2년 뒤 「우체국 개혁: 우체국의 중요성과 실용성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개혁안의 핵심은 바로 ‘페니 우편’이었다. 힐은 약 14그램 이하의 우편이라면 1페니에 영국 전 지역으로 배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아이디어는 좋았지만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당시 우정국장 리치필드는 힐의 제안을 두고 ‘내가 본 비현실적인 발상 가운데서도 가장 허황된 것’이라며 조롱 섞인 반대를 하고 나섰다. 하지만 상인들과 다수의 개혁세력은 힐의 생각을 지지했다. 힐이 제안한 선불식 우편은 도장을 겨우 찍을 만한 작은 종이를 편지지에 붙이는 식이었다. 1페니짜리 세계 최초의 우표인 ‘페니 블랙’은 이렇게 탄생했다. 아울러 힐은 편지 봉투를 도입하자고 제안했다.

힐은 그의 형 에드윈을 초대 우표통제관으로 임명했다. 에드윈은 32년간 통제관 직무를 수행했으며, 편지 봉투 제조기계도 발명했다. 우표 디자인은 화가 윌리엄 멀레디가 맡았다. 멀레디는 당시 영국의 국왕이던 빅토리아 여왕의 젊은 시절 초상을 우표에 새겨 넣었다. 우표의 바탕은 검정색이었으며 상단에는 ‘우편 요금(POSTAGE)’이라는 문구가, 하단엔 비용을 나타내는 ‘1페니(ONE PENNY)’가 적혀 있다. 가장자리는 화려한 별과 장식으로 마무리했다. 1판에 240장씩 인쇄된 우표 전지를 우체국장이 가위로 잘라서 판매했다.

페니 우표 법안은 1839년 8월 17일 영국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선불식 1페니 우표인 ‘페니 블랙’은 1840년 5월 1일에 발행되기 시작했다. 새 우편 체계의 도입으로 우편량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페니 블랙은 1년도 못 돼 사라지는 운명을 맞았다. 소인을 찍는 데 사용된 붉은색 잉크가 우표의 검정색 바탕 때문에 잘 보이지 않을뿐더러 쉽사리 지워졌다. 이를 악용해 한 번 사용한 우표를 재활용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1841년 우정총국은 우표의 바탕을 붉은색으로 바꾼 ‘페니 레드’를 도입하고 검정색 잉크로 소인을 찍도록 했다.

19세기 초부터 1840년대 말까지 영국에서 1억 6,000만 통의 편지가 배달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23억 통으로 배달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편지 봉투의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연애편지와 같은 개인적인 내용이 담긴 편지를 안전하게 주고받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접착식 우표는 점차 세계 여러 나라로 퍼져나갔으며, 통치권자의 초상은 우표 디자인의 단골 메뉴가 되었다. 한편 페니 블랙과 2페니짜리 펜스 블루는 세계 최초의 우표이기 때문에 영국 우표라는 국명을 표기하지 않는다. 영국은 우표 종주국의 위상을 지금까지 이어가고 있다.



남극 정복(The Conquest Of The South Pole) - 《Manchester Guardian》, 1912년 3월 9일

《맨체스터 가디언》은 로알드 아문센의 성공을 마지못해 축하했지만 의혹의 씨앗을 뿌리기도 했다. “정말 아문센이 남극점을 최초로 정복한 사람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아직 로버트 스콧으로부터 어떤 말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문센이 남극점에 도달했다면 그것이 언제인지, 또 두 사람의 경쟁에서 누가 승리했는지 여전히 불확실하다.”

아문센과 스콧, 두 탐험가는 서로 매우 다른 전략으로 남극점 도전에 나섰다. 아문센은 개와 썰매에 의존해 필요한 보급품을 운반했다. 반면 스콧은 조랑말과 기계 썰매를 선택했다. 하지만 조랑말들은 추위에 쓰러졌고 기계 썰매 역시 무용지물이었다. 결국 스콧 일행은 그들 스스로 보급품과 장비를 끌고 목적지까지 가야 했다. 아문센의 노르웨이 탐험대는 일반적인 겨울용 두터운 털옷 대신 에스키모 인들이 혹한용으로 입는 늑대 가죽 옷을 준비했다. 거기에 버버리에서 만든 가벼운 소재의 방수방풍용 재킷까지 갖추었다.

스콧은 1901년부터 1904년까지 남극 탐험선인 ‘디스커버리 호’를 직접 이끌고 누구도 밟지 않은 지구 최남단 지역까지 갔다가 영국으로 복귀, 일약 영국의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그는 탐험의 초점을 과학적 연구에 맞췄다. 이에 반해 아문센은 오직 남극점 최초 정복이라는 목표에 모든 관심을 쏟았다. 바로 이 차이점이 아문센을 성공으로 이끌었고, 반대로 스콧에게 커다란 시련을 가져다주었다.

아문센과 그의 팀은 1910년 6월 3일 오슬로를 떠나 ‘프람 호’를 타고 항해를 시작했다. 당시 노르웨이는 1905년 스웨덴으로부터 독립한 신생국가였다. 그들은 영국의 외교적 지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영국을 자극하지 않으려 남극 탐험 계획 자체를 쉬쉬했다. 아문센 일행은 1911년 1월 14일 ‘로스 빙붕’이라 불리는 거대한 빙하에 도착했다. 그곳에 ‘프람하인’ 기지를 세웠다. 첫 번째 남극점 도전에 실패한 아문센은 그해 10월 19일 올라브 브잘란드, 헬메르 한센, 스베르 하셀, 오스카 위스팅과 함께 재도전에 나섰다. 그들은 1911년 12월 14일 남극점에 도착했고, 텐트와 그들의 성공을 담은 편지를 남겼다. 무사귀환을 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한 것이었으나 다행히 1912년 1월 25일 프람하인 기지로 되돌아왔다. 그들의 성공은 3월 7일 오스트레일리아 호바트 항에 도착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영국 탐험대를 태운 ‘테라 노바 호’는 1910년 6월 1일 런던의 서인도 부두를 출발해 남극을 향한 항해를 시작했다. 6개월의 항해 끝에 1911년 1월 로스 섬에 도착, 그곳에 기지를 세웠다. 스콧은 그의 최종 동반자로 에반스 하사관, 보워즈 중위, 윌슨 박사, 오츠 대위를 선발했다. 그들은 10개월의 준비 끝에 그해 11월 1일 기지를 떠나 남극점 정복에 나섰다.

목적지를 16킬로미터 정도 앞둔 상황에서 보워즈 중위가 지평선 저 멀리 보이는 검은 점 하나를 발견했다. 그들은 썰매와 스키 흔적, 개의 발자국을 가로질러서 그곳에 도달했다. 1912년 1월 17일 스콧 일행은 그 검은 점이 텐트임을 확인했다. 텐트 안에는 아문센이 한 달 먼저 남극점에 도착했다가 떠났다는 내용이 담긴 편지가 있었다. 남극 정복의 꿈이 무너진 스콧 대장은 그날 저녁 일기에 이렇게 썼다. “위대한 신이시여! 이곳은 어떤 보상이나 특권을 바라지 않고 가혹한 노력을 기울인 우리들에겐 너무나도 끔찍한 곳입니다.”

아문센은 남극점에서 기지로 향하는 길 중간에 식량과 보급품을 보관한 장소를 선명하게 표시해 두었다. 반면 스콧 일행은 보급품도 부족했지만 그 표시를 제대로 해두지 않아, 눈보라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기 일쑤였다. 설상가상으로 에반스 하사관이 썰매를 몰던 도중 동상으로 인해 한 손을 절단해야 했다. 그는 결국 2월 17일 숨을 거두었다. 3월이 되면서 오츠 대위 역시 심한 동상으로 고통을 겪었다. 스콧은 그의 일기에 오츠 대위가 자신은 가망이 없으니 남겨두고 가라고 했지만 대원 모두 그를 독려해 함께 여정을 계속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3월 17일, 잠에서 깬 오츠 대위가 “이제 나는 침낭에서 나와 걷는다. 아마도 잠시 걸을 뿐이겠지.”라고 말하고 어디론가 향했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아무도 그를 다시 볼 수 없었다. 그로부터 12일 뒤인 1912년 3월 29일에 스콧과 윌슨 박사, 보워즈 중위 역시 눈보라를 피해 텐트에서 추위와 사투를 벌이다 결국 모두 숨을 거두었다.

스콧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차 두 잔 끓일 정도의 연료와 이틀 분의 식량밖에 없다. 텐트 밖은 사납게 떠다니는 유빙과 눈보라뿐이다. 나는 지금 상황보다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도저히 가질 수 없다. 우리는 끝까지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갈수록 약해지고 있고 그 끝이 멀지 않았다는 걸 직감한다. 가엾게 보이지만 나는 더 이상 일기를 쓰지 못할 것 같다. R. Scott.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를 돌봐주소서.” 8개월 뒤인 1912년 11월 12일, 수색 요원들이 스콧 일행의 텐트를 찾아냈고 그들의 시신과 일기를 발견했다. 그들은 모두 텐트 아래에 묻혔다. 그리고 그들의 무덤 위에는 작은 이정표가 세워졌다.



이스라엘 건국(State Of Israel Is Born) - 《Palestine Post》, 1948년 5월 14일

텔아비브 박물관에서 거행된 건국식에서 유대인기관의장이자 초대 이스라엘 총리에 오른 다비드 벤구리온은 “우리는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이라는 국호를 가진 유대인의 나라를 세운다는 사실을 엄숙히 선포합니다.”라고 힘줘 밝혔다. 그러자 박물관 주변에 운집한 군중들이 큰 박수로 이를 환영했다. 이날이 오기까지 유대인들은 수많은 전쟁을 치러야 했다. 이스라엘 건국을 선포한 바로 다음 날 역시 요르단, 이집트, 레바논, 시리아, 이라크 등 아랍국가들이 이스라엘의 건국을 방해하기 위해 침공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모두 격퇴했다.

영국은 오스만제국의 몰락 이후 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팔레스타인을 할양받아 관리해왔다. 1917년 영국 외무장관 밸푸어가 ‘밸푸어 선언’을 통해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의 국가를 수립하는 데 영국이 동의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아랍권의 반대와 분쟁을 이유로 영국은 1930년대까지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배를 계속해왔다. 1947년 영국 정부는 아랍 국가와 유대인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고 인정하고, 팔레스타인에서 철수한다고 선언했다.

새로 창설된 유엔(UN)은 11월 29일 팔레스타인을 나누어 아랍 국가와 유대인 국가로 분리하는 계획을 확정했다. 그 과정에서 인구가 팔레스타인의 절반도 되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의 땅 절반 이상을 소유하도록 규정했다. 이에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팔레스타인은 인접한 아랍국가들의 지원을 받아 유대인들과 전쟁을 벌였고, 영토회복에 나서기로 결의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유엔이 할양해준 영토를 지키는 데 성공했다. 이후 1년 동안 지속된 교전 끝에 종전이 선언되었다. 그리고 ‘녹색선(Green Line)’이라는 임시 국경이 그어졌다. 요르단은 ‘서안’과 동예루살렘을 복속시켰고, 이집트는 ‘가자지구’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게 되었다.

1950년 이집트는 이스라엘 선박의 수에즈 운하 이용을 금지했다. 이어 이스라엘과 국경을 사이에 두고 곳곳에서 충돌이 발생했다. 1956년 7월 26일,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이 영국과 프랑스가 공동소유하고 운영해온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겠다고 선언했다. 나세르 대통령은 수에즈 운하에서 나온 수익으로 아스완 댐 건설비용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이스라엘은 수에즈 운하 이용권을 되찾기 위해 비밀리에 영국, 프랑스와 손을 잡았다. 같은 해 11월 영ㆍ불 동맹군이 카이로에 공격을 시작했다. 1957년 4월, 수에즈 운하는 다시 개방돼 이전처럼 선박의 통행이 자유롭게 되었다.

그러나 양측의 갈등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1967년에 아랍국가들이 군사력을 동원하기 시작하자 이스라엘이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이라크에 선제 공습을 감행했다. 이 전쟁은 당시 이스라엘 국방장관이자 후일 총리가 된 이츠하크 라빈에 의해 ‘6일 전쟁’으로 명명되었다. 성서에 신시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했다는 데서 착안한 작명이었다. 전쟁이 오래 가진 않았지만 매우 잔인했고 많은 희생이 있었다. 이스라엘에서 1,0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집트는 그 10배가 넘는 1만여 명이 전사하거나 부상 또는 실종되었다. 6일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 가자지구, 요르단 강 서안, 골란고원, 구 예루살렘을 모두 자신들의 영토 안으로 귀속시켰다.

1979년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협정에 따라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를 이집트에 반환했다. 1993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는 ‘오슬로 평화협정’에 공동서명했다. 이 협정으로 팔레스타인은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 자치정부 수립을 보장받았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은 아직도 해결되지 못하고 현재진행형으로 지속되고 있다.



당신이 당신인 이유(Why You Are You) - 《News Chronicle》, 1953년 5월 15일

DNA는 다음 세대에 유전적 특징을 전달하는 유전자 물질인 ‘디옥시리보핵산(Deoxyribo Nucleic Acid)’이다. 이 DNA의 구조를 최초로 해독한 사람은 1953년 2월 28일 캠브리지 대학 연구소의 생물학자인 프란시스 크릭과 제임스 와슨이었다. 자신의 성취에 흥분한 크릭은 동네 선술집에 들어가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여보게들, 나와 내 친구가 생명의 비밀을 마침내 발견했다네!”

다른 사람들은 크릭이 술에 취했다고 생각했겠지만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크릭과 와슨은 아무도 찾아내지 못한 DNA의 이중나선구조를 발견했다. 이중나선구조는 2개의 선이 서로를 감고 있으며 각각 서로에게 보완적 소요로 존재하고, 감긴 상태가 풀어지면 본래의 것과 같은 두 개의 복제물을 생산한다. 이것은 생명의 유전적 정보가 존재한다는 이론을 실제로 뒷받침하는 대단한 발견이었다.

크릭은 런던의 유니버시티칼리지에서 물리학을, 캠브리지 대학에서 생물학을 공부했으며, 1949년 캠브리지 대학 캐븐디시 연구소의 의학연구팀에서 일했다. 당시 그를 지도한 교수는 1915년에 25세의 나이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던 로렌스 브래그 박사였다. 1951년 시카고 출신의 제임스 와슨이 팀에 합류했는데, 당시 23살의 와슨은 크릭보다 12살이나 어렸지만 두 사람은 DNA 구조를 연구하는 데 호흡이 잘 맞았다.

한편 이들보다 앞서 X-레이 회절을 DNA 연구에 활용한 사람들은 런던킹스칼리지의 모리스 윌킨스와 로잘린 프랭클린이었다. 이들의 성과는 크릭과 와슨이 이중나선구조를 발견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브래그 박사는 1953년 4월 8일 벨기에에서 열린 학회에서 제자들의 연구 결과에 대해 자랑스럽게 발표했지만, 당일 현장에 기자들이 없던 관계로 이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지는 않았다.

크릭과 와슨의 DNA 이중나선구조 발견은 1953년 4월 25일에 간행된 과학전문지 《네이처》를 통해 공식 발표됐다. 5월 14일 브래그 박사가 런던 가이즈 병원 의과대학에서 이에 관한 강의를 했는데, 그 내용이 다음 날 《뉴스 크로니클》의 과학 담당 편집자인 리치 캘더에 의해 기사화되었다. 생명의 비밀을 밝힌 이 엄청난 발견을 기사화한 영국 유일의 신문이었다. 1962년 크릭과 와슨은 모리스 윌킨스와 함께 노벨상을 받았다. 로잘린 프랭클린은 역시 DNA 구조를 밝히는 데 크게 기여했으나 4년 전 37세의 나이에 암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수상자에서 제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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