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대통령과 종교

백중현 지음 | 인물과사상사
대통령과 종교

백중현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14년 11월 / 312쪽 / 15,000원





이승만 - “한국을 완전한 예수교 나라로 만들겠다”



목사로 불리는 ‘장로 대통령’ / “우리 대통령은 신앙자다”

건국 이후 개신교는 대통령 선거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미국인들 사이에서 목사로 불렸던 이승만의 집권기에는 1948년, 1952년, 1956년, 1960년 등 모두 네 차례의 정ㆍ부통령 선거가 있었는데, 이 중 1952년 제2대 정ㆍ부통령 선거에서 개신교는 가장 조직적으로 개입했다. 한국기독교연합회(KNCC의 전신)는 중앙에 기독교선거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그 조직을 각 도-군-개체 교회까지 세분화했다. 또 대책위는 정ㆍ부통령 선거 직전 주일을 ‘선거 기도일’로 정해 전국적 차원의 기도회를 여는 등 이승만 당선에 앞장섰다. 개신교는 이승만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주목례로 바꾸고, 군종제도를 실시한 친개신교 인물이라는 점을 들어 지지를 호소했다.

개신교 국가를 꿈꾸다

이승만은 한국을 개신교 국가처럼 운영했다. 그는 첫 국회인 제헌의회를 기도로 시작하고, 대통령 취임식 석상에서도 자신의 종교 성향을 자주 드러냈다. 이승만의 친개신교적 성향을 말해주는 사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제헌의회 선거일 연기다. 당초 첫 국회의원 선거인 제헌의회 선거일은 1948년 5월 9일 일요일로 정해졌다. 하지만 한국기독교연합회 등 개신교 단체는 이날이 ‘주일’이라는 이유로 연기를 요청했고, 이에 따라 선거일은 하루 늦춰진 5월 10일 월요일로 연기되었다. 둘째, 국영방송을 통한 선교를 허락했다. 1947년 3월부터 매주 주일마다 국영방송인 서울중앙방송을 통한 복음 전도가 이루어졌다. 셋째, 건국 이후 첫 민간방송으로 1954년 기독교방송(CBS)을 인가했다. 넷째, 이승만은 해마다 성탄 메시지를 발표했다. 다섯째, 국기배례를 주목례로 바꾸었다.

개신교와 이승만의 몰락

이승만 정권을 위기로 몰고 간 직접적 계기는 1960년 3ㆍ15부정선거였다. 3월 15일 마산에서 시작된 부정선거 항의 시위는 전국으로 확대되어 마침내 4ㆍ19혁명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이 같은 시국 상황을 바라보는 개신교계의 안일한 태도도 이승만 정권의 몰락을 부채질했다. 3ㆍ15 부정선거 규탄 열기가 고조되고 있는데도 이승만이 다니는 정동제일교회에서는 이승만과 이기붕의 당선 축하 전보를 발송하고, 3월 마지막 주일예배를 당선 축하 예배로 드리기로 결정했다. 게다가 목사 자질 시비를 불러온 ‘가짜박사 사건’, 막대한 선교자금을 허술하게 관리하면서 발생한 ‘달러 파동’, 개신교 국회의원인 황성수ㆍ박영출 의원의 ‘국제시계 밀수 사건’ 등 개신교의 공신력을 추락시키는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하자, 반(反)개신교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박정희 - 반공과 친미로 절묘하게 만난 개신교와 군사정권



주일학교 선생, 박정희 / ‘주일 국가행사’가 부활하다

박정희의 종교를 불교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재임 기간 그가 보여준 ‘불교진흥책’ 때문이다. 또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그의 부인 육영수의 영향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통념과는 달리 박정희에 대한 기록에서는 불교보다 개신교와 얽힌 이야기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1917년 경북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에서 태어난 박정희는 15~16세까지 집에서 500미터 떨어진 상모교회를 다녔고, 교회 주일학교 선생으로도 활동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박정희의 집권 초기 종교 정책의 틀은 ‘개신교에 대한 규제 강화’와 ‘형평성 차원에서 불교 지원’으로 요약된다. 이승만에 의해 개신교에 기울었던 특혜 정책을 폐지하고, 외견상 종교적 평등을 이루자는 의도였다. 미션스쿨의 종교교육 규제, 미션스쿨 등 사립학교의 학교법인법적용, 중등교육 평준화 조치 등이 있었고, 또 개신교계의 요구로 이승만이 금지시켰던 ‘주일 국가행사’를 부활시켰으며, 이승만에 의해 주목례로 바뀌었던 국기배례도 원상 복구했다. 한발 더 나아가 ‘국기에 대한 맹세문’까지 추가했다. 반면에 불교계에는 여러 혜택을 주었다. 그동안 개신교가 독점적으로 누려왔던 군종제도와 형목제도에 불교계의 참여가 가능해졌다. 불교의 교도소 포교 참여는 1961년, 불교의 군종제도 참여는 1969년에 각각 실시되었다. 또 불교의 기념일인 석가탄신일도 1975년 국가공휴일로 지정되었다.

반공을 외치다

박정희가 개신교에 대해 규제 정책을 썼다고 해서 개신교를 적대적으로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박정희는 개신교의 도움이 절실했던 사람이다. 정권의 기반이 취약했던 박정희는 정권 유지를 위해 반공 이데올로기에 의지해야 했고, 또 미국 등 국제사회의 지지도 필요했다. 그런데 당시 이를 지원할 수 있는 민간 세력은 개신교가 유일했다. 한편 개신교는 5ㆍ16쿠데타 직후 환영 성명을 발표하는데, 지지의 근거로 삼은 게 바로 반공이었다.

전군 신자화 운동과 대형 집회

개신교는 군사정권에 협력하며 박정희에게서 지원과 협조를 얻어냈다. 대표적인 것이 개신교 성장에 중요한 발판을 마련한 ‘전군 신자화 운동’과 개신교가 주최한 ‘대형 집회’에 대한 지원이었다. 전군 신자화 운동은 당시 제1군 사령부에서 진행된 ‘군종업무 시행지침’에서 시작되었다. 군대 내 신앙을 가진 신자가 늘어날수록 사고가 줄어든다는 조사가 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신교는 이 시기 대형 전도 집회를 열며 교세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개신교가 교회 성장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65년을 ‘한국 복음화 운동의 해’로 정하고부터였다. 이후 성장을 위한 각종 전도 집회들이 속속 기획되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1973년 5월 진행된 ‘빌리 그레이엄 전도집회’다. 이 같은 대형 집회는 군사정권의 협조 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당시는 10월유신과 긴급조치 발효로 집회의 자유는 물론 표현의 자유마저 엄격히 제한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하늘이 내려준 ‘성장 기회’

박정희 정권이 진행한 산업화의 최대 수혜자는 개신교였다. 산업화로 인해 급격히 도시로 유입된 이농민들을 흡수하며 개신교는 이 시기 급격한 교세 성장을 경험했다. 급격한 도시화는 공동체의 붕괴, 정체성의 혼돈, 도시 빈민의 급증, 빈부 격차 문제 등의 새로운 사회문제를 양산했는데, 개신교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즉 고향을 떠나서 도시에 정착해야 하는 이들을 위로하는 역할을 했다. 이를 통해 여의도순복음교회 같은 초대형 교회들이 속속 탄생했다.

반독재민주화운동의 중심에 선 개신교

1970년대 들어 종교계에 새로운 흐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부조리한 사회 현실과 군사정권의 장기집권 움직임에 맞서 종교인들의 인권운동과 반독재민주화운동이 시작되었는데, 개신교는 1968년 노동자들의 인권 문제를 다루기 위한 도시산업선교회를 출범시키는 한편, 박정희의 장기집권을 반대하는 반독재민주화운동을 시작했다. 이후 개신교는 1969년 7월 3선개헌반대운동을 시작으로, 1973년 4월 남산부활절연합예배 사건, 1973년 12월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 1976년 3월 3ㆍ1민주구국선언, 1979년 11월 YWCA 위장결혼 사건 등에 관여하며 1970년대 반독재민주화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천주교의 저항과 3대 사건

천주교의 저항 움직임도 1970년대부터 본격화되었다. 일부 신부들에 의해 노동사목, 농민사목, 인권사목 등이 진행되며 천주교는 사회 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 시기 천주교의 저항 정신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3대 사건이 일어난다. 1967년 강화 심도직물 노동조합 사건, 1974년 지학순 주교 구속 사건, 1976년 함평고구마 사건이 그것이다. 강화 심도직물 노동조합 사건과 함평고구마 사건이 천주교의 노동자와 농민 인권운동에 영향을 미쳤다면, 지학순 주교 구속 사건은 천주교가 반독재민주화운동에 나서는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진보 종교인의 탄생

박정희 집권 후반기 그동안 정권에 협조적이었던 종교계에 새로운 흐름이 형성되었다. 이른바 ‘진보 종교인’의 탄생이다. 이들은 1970년대 인권운동과 반독재민주화운동을 주도하면서 강력한 체제 저항 세력이 되어갔다. 진보 종교인의 탄생에는 국가 주도의 산업화로 인해 등장한 인간소외현상과 군사정권의 장기집권 움직임이라는 시대적 배경이 있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정신적 뿌리는 1960년대에 열린 국제회의에서 찾을 수 있다. 1968년 스웨덴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 제4차 총회와 1962년부터 4년간 로마 바티칸에서 열린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그것이다. 이 두 국제회의는 모두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면서 교회가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하고 나섰다.

두 국제회의 이후 전 세계적으로 진보신학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남미의 해방신학, 미국의 자유주의신학, 국내의 민중신학 등이 그것이다. 1970년대 진보 종교인의 탄생도 이런 배경과 연관되어 있었다. 개신교나 천주교와는 달리 토착적 성격이 강했던 불교에서는 1980년대 들어서야 체제 저항적인 진보 종교인이 탄생했다. 그 정신적 뿌리는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자행된 10ㆍ27법난이었다.



전두환 - 당근과 채찍을 겸비한 ‘국풍 대통령’



불교에 귀의한 ‘천주교’ 대통령

전두환의 종교 성향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실제 전두환은 집권 전후 여러 종교를 넘나드는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했다. 전두환의 종교는 원래 천주교였다. ‘베드로’라는 세례명까지 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이 전두환의 종교를 불교로 보고 있다. 퇴임 후 강원도 백담사에서 생활한 모습이 언론에 많이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전두환이 처음부터 불교 신자였다면 집권 기간 중 최대의 불교 탄압 사건이었던 ‘10ㆍ27법난’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전두환은 백담사 칩거 이후 불교 신자로 변해 있었다.

국가가 종교를 통제하다

전두환에게 종교는 정권에 협조적인지 그렇지 않은지가 가장 중요했다. 여기에 뒤따르는 당근과 채찍도 확실했다. 전두환은 취임 초기부터 종교를 통제하기 위한 여러 조치를 내놓았다. 대통령 취임 두 달이 안 된 시점에 전국 5,000여 개 사찰을 압수 수색하는 초강경 불교 정화운동을 벌였다. 사이비종교를 규제한다는 명목으로 ‘종교법인법’ 제정을 추진하기도 했다.

대형 종교 집회의 홍수시대

불교계와 달리 개신교는 신군부 세력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역시 ‘반공’과 ‘친미’ 때문이었다. 개신교는 신군부와의 우호 관계를 바탕으로 군사정권의 막대한 혜택을 받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1980년에 열린 ‘1980 세계복음화 대성회’였다. 연인원 1,600만 명이 참석해 세계 최대 집회로 기록된 이 집회는 신군부의 적극적인 지원 없이는 불가능했다. 전두환 집권기에는 유독 대형 종교 집회가 많았는데, 천주교까지 합세하며 대형 종교 집회의 홍수시대를 열었다.

난장판이 된 국풍81

전두환 집권기에 이르러 민족 종교들은 전통문화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으며 빛을 보기 시작했다. 참고로 전두환은 헌법에 전통문화와 민족문화를 계승ㆍ발전시켜야 한다는 의무조항을 삽입하는 등 전통문화에 관심을 보였다. 한편 전두환의 민족문화 중흥책은 정치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국풍(國風)81’ 행사였다. 1981년 5월 28일에서 6월 1일까지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이 행사는 신군부의 적극적인 지원 하에 진행되었는데, 출연자만 1,300여 명에 달했고 연인원 1,000만 명을 끌어 모았지만 결국 실패작이 되었다. 5ㆍ18광주민주화운동 1주년이 되는 시점에서 열려 행사 의도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가 많았고, 참석자들조차 민족문화보다 가요제 등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결국 ‘국풍81’은 ‘이용’이라는 대중가수를 만들어놓고 1회 대회로 끝을 맺었다.

반공 지상주의를 깨다

5ㆍ18광주민주화운동은 개신교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5ㆍ18 이후 ‘미국의 책임론’이 제기되며 국내에 반미 여론이 일기 시작했는데, 당시 군사작전권을 쥔 미군이 신군부 군 병력의 광주 이동과 민간인 발포에 대해 몰랐을 리가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친미 일색이던 개신교 내에 새로운 흐름인 ‘반미 세력’을 형성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1982년 발생한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은 그 시발점이 되었는데, 특히 이를 주도한 사람이 개신교의 보수교단 신학교에 다니는 학생이었다는 점에서 개신교는 충격에 빠졌다. 이후 대구문화원 방화 사건,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등의 항의 시위가 이어지며 반미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K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등 진보 성향 개신교 단체를 중심으로 ‘주한미군 철수’ 등의 주장이 나오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5ㆍ18민주화운동은 개신교의 친미적 행보뿐만 아니라 개신교의 근간이었던 반공 지상주의에도 파열음을 냈다. 5ㆍ18민주화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민주화운동이 빨갱이로 매도당하는 현실에서 민주화에 앞서 평화통일이 선결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기존의 ‘선민주, 후통일’ 주장이 ‘선통일, 후민주’로 바뀌기 시작했고, 대북 정책 기조도 반공에서 평화통일의 흐름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개신교를 필두로 한 종교계의 통일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해외에 거주하는 개신교인들이 북한을 방문하며 남과 북의 다리 역할을 해주었고, 이후 국내에서도 문익환 목사, 권호경 목사, 김동완 목사 등이 방북하며 한국 사회의 평화통일운동을 주도했다.



노태우 - 개신교의 근간인 ‘친미’와 ‘반공’이 흔들리다



부처님 귀를 닮은 ‘불자 대통령’

노태우는 불교 대통령의 이미지가 강하다. 그의 종교가 불교이기도 했지만, 그의 넓적한 귀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노태우의 과거 종교 행적은 알려진 게 그리 많지 않다. 의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 신자로 알려졌다. 그리고 노태우의 부인 김옥숙도 독실한 불교 신자였는데, 김옥숙은 경북 김천의 직지사에 자신의 법명을 딴 만덕전을 세웠으며, 대구 동화사 약사여래불을 조성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한편 노태우는 퇴임 이후 개신교로 개종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맏딸인 노소영은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2010년 하용조 목사님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했고, 어머니도 최근 회심해 아버지를 위해 기도하신다”며 “아버지는 1995년 비자금 사건으로 수감생활을 하면서 재임 시절 친분이 두터웠던 조용기, 김장환 목사와 면회하며 전도를 받고 《성경》을 정독, 믿음의 씨앗을 키워왔다”고 덧붙였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노소영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독실한 불교 집안에서 유일한 개신교인이었던 노소영은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물론, 최태원 SK 회장과 딸, 아들까지 모두 개신교로 이끌었다.

노태우의 불심 달래기

노태우는 집권과 동시에 풀어야 할 숙제 한 가지를 갖고 있었다. ‘성난 불심 달래기’가 그것이었다. ‘10ㆍ27법난’이 발생한 지 7년이 지났지만, 불교계의 분노는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상당수 불교 인사들은 정부에 비판적이었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10ㆍ27법난에 대한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고 있었다. 더욱이 대통령 선거 기간에 지지해준 불교계를 외면할 수도 없었다. 이를 위해 노태우가 가장 먼저 한 조치는 ‘전통사찰보존법’ 제정이었다. 이 법은 1962년 제정된 불교재산관리법을 한 단계 발전시킨 것으로, ‘사찰의 자율권 확대’를 핵심으로 하고 있다.

평화통일운동을 싹틔운 개신교 / 종교인들의 방북

이 시기에 평화통일운동과 반미운동이 구체화되었는데, 이 운동을 주도한 세력은 KNCC를 중심으로 한 진보 성향의 개신교 세력이었다. 개신교 내에 진보-보수 흐름이 뚜렷해진 것도 이 시기부터였다. 한편 처음으로 남한 개신교인들의 북한 방문이 잇달아 추진되었다. 1992년 1월 KNCC 총무인 권호경 목사가 조선기독교연맹의 초청을 받아 북한을 공식 방문했다. 노태우 정부의 허가 없이 방북을 결행한 종교인도 있었다. 1989년 3월 문익환 목사는 당국의 허락을 받지 않고 방북해 김일성과 두 차례 면담했다. 문익환 목사 방북 3개월 후에는 천주교인 임수경이 전국대학생 대표자협의회 대표 자격으로 허가 없이 방북하면서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