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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인문학의 탱고

황진명, 김유항 지음 | 사과나무
과학과 인문학의 탱고

황진명, 김유항 지음

사과나무 / 2014년 8월 / 512쪽 / 18,000원





part Ⅰ 패러다임을 바꾼 창조적 반란과 집념의 과학자들



다윈의 진화론 - 종교적 논쟁과 원숭이 재판

천동설을 뒤집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과학혁명에 불을 댕겨 심오하고 중대한 지성의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면, 다윈의 ‘진화론’은 당시 지배적이었던 창조설을 뒤집는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의 전환을 가져왔다. 생물학 분야뿐만 아니라, 인류의 자연 및 정신문명에 커다란 발전을 가져와 많은 다른 학문 분야(사회학, 경제학, 고고인류학, 심리학, 법학, 의학 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다윈의 생애와 업적: 찰스 다윈은 1809년 영국 슈르즈버리의 의사 집안에서 6남매의 다섯째로 태어나, 첫눈에 보기에도 전혀 혁명가의 면모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수줍고 겸손한 청년으로 자랐다. 어릴 적부터 자연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다윈은 나중에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식물학을 공부했다. 22세 때인 1831년, 식물학 교수 헨슬러의 권유로 해군측량선 비글호에 무보수 박물학자로 승선하여 남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남태평양의 여러 섬(특히 갈라파고스 제도) 등지를 두루 탐사했다. 그는 5년 동안 동식물을 관찰하고 지질 등을 조사하며 생물들과 화석 표본을 수집하였는데, 이 수집품들이 훗날 진화론을 제창하는 데 기초가 되었다.

칠레 남단의 갈라파고스는 스페인어로 ‘큰 거북’이라는 뜻으로 그곳에는 여러 종류의 거북이 서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갈라파고스 제도 부근은 해류가 강해 거북들이 왕래하지 못하고 제각기 다른 섬에서 그 환경에 맞게 진화된 것을 볼 수 있었다. 즉 몸의 크기, 껍질의 모양, 색깔, 두께가 제각기 달랐다. 마찬가지로 갈라파고스 제도 곳곳에 서식하고 있는 핀치(finch)라는 작은 새 역시 환경의 영향을 받아 200만~300만 년에 걸쳐 크기나 부리의 모양이 먹이를 먹기에 적합하게 14종으로 진화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1836년 10월 비글호가 영국으로 돌아온 후, 다윈은 자신의 관찰과 경험을 바탕으로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론의 기초적인 윤곽을 세우고 2년에 걸쳐 발전시켰다. ‘자연선택설’이란 어떤 생물 종의 개체 간에 변이가 생겼을 경우, 주어진 환경에 가장 적합한 종만 살아남고, 부적합한 종은 멸종하고 만다는 견해이다. 즉, 먹이 등 한정된 자원을 놓고 개체 간에 경쟁이 생기고, 자연의 힘으로 선택이 반복되는 결과, 진화가 생긴다는 설이다. 그러나 다윈의 명저 『자연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은 그가 처음 그 이론을 만들어내고 20년이 지난 1859년에야 출판되었다. 다윈이 그의 아이디어를 공표하는 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은 종교계의 반발과 심지어 기존의 과학계로부터의 반발이 두려워서였다.

‘종의 적응’이란 개념이 당시에 그렇게 급진적인 것은 아니었다. 다윈이 이론으로 내세우기 전부터 과학자들 사이에 동물이 진화되었는지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만일 다른 영국의 동식물 연구가인 월리스가 1858년 놀랍게도 비슷한 이론을 독립적으로 제안하지 않았더라면, 『종의 기원』은 아마 출판되지 못했을 것이다. 다윈은 월리스의 발표에 힘입어 이미 20년 전에 똑같은 결론을 얻은 자신의 연구를 발표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친구인 후커와 라이엘의 배려로 다윈은 1858년 린네학회에서 월리스의 논문과 함께 자신의 논문을 발표한다. 다윈은 생명의 역사를 큰 나무에 비유하였는데, 나무의 몸통은 공통의 조상을 나타내고, 나뭇가지와 잔가지는 공통 조상들로부터 진화된 수많은 다양한 생명을 나타내는 광범위한 체계로써 표현했다.

창조론과 진화론 논쟁: 당시는 기독교 교리가 유럽 사회를 지배할 때여서 지구상의 모든 생물체는 신의 뜻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창조설’에 정면 도전하는 다윈의 ‘진화론’은 엄청난 논쟁을 불러왔다. 인간을 포함해 존재하는 모든 ‘종’이 지속적이고 무작위한 변화를 통해 오랫동안 진화되었다는 개념은 성경의 창세기에서 신이 모든 생명체를 그들의 본성에 따라 한꺼번에 창조하여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특별 창조설’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다윈의 이론은 기독교의 중심사상뿐 아니라, 자연의 질서에서 사람은 신이 주신 특별한 위치에 있다는 다른 종교도 부정하는 것이어서 영국의 종교 지도자들은 즉각적이고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영국의 가톨릭 추기경은 “정확히 말해서 신은 없고, 원숭이가 우리의 조상이라는 잔인한 철학”이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1860년, 영국의 과학진흥협회가 주최하는 모임에서 영국의 각계 인사들이 모여 인간의 조상이 원숭이냐 아니냐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다윈을 지지하는 측에서는 ‘다윈의 불도그’라는 별명이 붙은 생물학자 토머스 헉슬리가 나오고, 기독교를 지지하는 측에서는 19세기 영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성공회 주교인 새뮤얼 윌버포스가 나왔다. 논쟁은 생중계되었고, 논쟁 후반에 윌버포스가 헉슬리를 향해 “그대의 할아버지 쪽 선조가 원숭이인가, 아니면 할머니 쪽이 원숭이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에 헉슬리는 “진리를 찾기 위해 자신의 삶을 다 바치고 있는 사람들을 왜곡하는 데 자신의 재능을 잘못 사용하고 있는 인간을 할아버지로 두기보다는 차라리 정직한 원숭이를 할아버지로 두겠다”고 응수하여 논쟁은 종결되었다. 이 논쟁으로써 진화론은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헉슬리는 자신의 신학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기 위해 불가지론(경험을 넘어선 것의 존재나 본질은 인식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철학적 입장)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냈는데, 이는 오늘날에도 사용되고 있다.

이후 기독교와 과학자들 간의 의견 충돌이 끝나지는 않았지만, 종교 사상가들은 과학계의 안마당에서 직접적으로 진화론에 도전하는 것을 좀 더 조심하게 되었다. 결국 20세기 초 가톨릭을 포함한 몇몇 종파에서는 진화론을 신이 주관하는 생물학적인 메커니즘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다윈이 임종을 맞게 되었을 때인 1882년, 그는 당대의 가장 위대한 과학자로 인정을 받았다. 게다가 그의 이론이 도전을 받았던 바로 그 교회에서 국장이 치러졌고, 웨스트민스터 성당의 뉴턴의 묘 옆에 묻혔다. 그러나 동시대 사람들 중에는 그를 성당에 매장한 것 자체가 영국에서의 과학과 종교의 불안한 휴전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었다.

법정으로 간 진화론 - 스콥스 재판, 일명 원숭이 재판: 진화론이 미국 사회에서 이슈가 된 것은 19세기 말 시카고의 유명한 복음 전도사인 무디를 포함하여 많은 기독교 강사와 작가들이 다윈의 진화론이 공중도덕과 성경의 진실을 위협한다고 맹비난했기 때문이다. 1890~1930년 동안 교리상의 차이가 점점 커져감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기본적 이념에는 대체로 일치를 보여왔던 미국의 신교 교파들이 점차 두 진영으로 나뉘게 되었다. 이른바 한쪽은 신학적으로 진보적인 신교이고 다른 한쪽은 복음주의자, 즉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신교이다. 진보주의자들은 새로운 이론이나 사상을 그들의 종교적인 교리에 통합시키려고 한 반면, 보수주의자들은 이러한 상황 변화에 저항했다.

그러다가 1920년 초 진화론이 이들 신교를 분열시키는 가장 중요한 쟁점의 하나로 떠올랐다. 학교 생물 시간에 다윈의 이론을 가르치는 것으로 쟁점이 옮겨가서 교육적인 차원에서 맞붙게 된 것이다. 이 이슈는 복음주의자들의 주된 단골메뉴가 되었다. 열렬한 복음주의자이자 대통령 선거에 세 번이나 출마했던 정치가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이 진화론에 맞서 전국적인 십자군전쟁(?)의 선봉장이 되었다. 브라이언과 복음주의 교회 지도자들의 강력한 권고에 의해 1925년 테네시 주 의회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신의 창조를 부정하거나, 인간을 저등동물의 후손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범죄라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테네시 주에서 진화론 수업 금지 법안이 발효되자 곧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은 이는 시민권에 대한 침해이자 국교를 금지한 헌법 1조에 대한 위반이라고 주장하며, 이 법률을 위반하는 어느 과학 교사든 변론을 해주겠다고 제의한다. 그러자 테네시의 시골 마을 데이턴에서 진화론을 가르치던 과학 교사 존 스콥스가 미국시민자유연맹의 제의에 응하면서 이른바 ‘스콥스 재판’, 또는 ‘원숭이 재판’이 시작되었다.

테네시 주를 상대로 한 스콥스 재판은 언론의 대대적인 홍보와 함께 수백 개의 신문사에 보도되고 라디오를 통해 생중계되었다. 스콥스의 변호인단은 브라이언을 증인으로 요청하여 브라이언에게 성서 속의 사건들 중에 불합리하거나 비현실적인 사건들을 조목조목 따져 물었다. 이에 대해 브라이언은 성서 속의 사건은 신의 기적의 조화로, 어떤 사건은 글자와 다르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며 비논리적이고 일관성 없는 답변으로 횡설수설했다. 두 시간 동안의 공방에서 많은 지역 주민들은 브라이언 편이었지만, 대부분의 신문기자나 다른 참관인들에게는 브라이언의 대답이 일관성이 없고 허둥대며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이 재판에서 스콥스는 10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받았으나 대법원에서는 스콥스에게 무죄를 선고하였다. 이 재판은 진화론을 지지하는 진영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불러왔지만, 반진화론 움직임을 막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이 법률은 수십 년이 지난 1967년에 이르러서야 폐기되었다.

20년 전쯤, 몇 명의 인하공대 교수들과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해 토론한 적이 있었다. 그때 깨달은 것은 종교적 교리에 관한 토론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과학은 과학자에게, 종교는 신학자에게 맡기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평생 과학도로 지내온 사람으로서 종교 지도자들께 바라는 것이 있다. 소위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생명과학 분야의 연구가 날로 발전하여, 생명 복제라든가 유전자 조작 연구가 세계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는데, 이 분야에서 앞으로 파생될 수 있는 여러 가지 심각한 윤리적 문제(한 예로 프랑켄슈타인 공상 소설이 현실화될 우려나, 유전자 조작에 의한 맞춤형 생명의 탄생이라든지)를 성직자나 종교인들이 미리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노력해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part Ⅱ 준비된 자에게 찾아온 우연한 행운



페니실린의 우연한 발견 - 2차 대전과 페니실린의 대량생산

페니실린은 미생물의 일종인 푸른곰팡이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항생제이다. 항생제란 다른 미생물의 발육을 억제하거나 사멸시키는 수단으로 박테리아나 균류에 의해 주위에 방출된 천연 화합물이다. 이러한 현상은 아주 오래전부터 알려져왔는데 고대 이집트인들은 곰팡이가 핀 빵을 끓는 물에 적셔 찜질제를 만들어 감염된 상처 부위에 붙였으며, 유럽에서는 중세기부터 주요 민간요법으로 페니실륨(Penicillium)으로 추정되는 푸른곰팡이가 생긴 빵을 곪은 상처 치료에 사용했다.

곰팡이는 진균류에 속하는 생물로서, 우리가 먹는 식용버섯도 진균류에 속한다. 이들은 가느다란 균사들이 엉키면서 자라는데, 때때로 열매를 맺기도 하며 하나의 열매는 생산을 위해 포자라고 불리는 수백만 개의 씨앗을 대기 중에 뿌린다. 포자가 우연히 좋은 환경에 내려앉으면 새로운 곰팡이의 몸을 이루는 균사를 만들기 시작하고 대사작용을 통해 부산물들을 만들어낸다. 페니실린은 페니실륨이라고 분류되는, 최소 650종이나 되는 곰팡이들이 활동 중에 만들어내는 부산물로, 20세기 가장 위대한 발견의 하나로 기록된다. 페니실린의 발견으로 모든 항생제약 산업의 기초를 이루는 항생제 혁명의 시대가 열렸다. 인류 역사에 크게 공헌한 위대한 발견은 종종 아주 우연한 사건과 그것을 간단히 그냥 넘겨버리지 않는 과학자의 호기심과 끈질긴 집념으로 이루어지는데, 1928년 스코틀랜드 미생물학자 알렉산더 플레밍 또한 페니실린이 박테리아를 죽이는 기능이 있다는 것을 우연히 발견했다.

우연한 실수가 가져다준 발견: 플레밍은 1881년 스코틀랜드의 록필드에서 가난한 소작인의 8남매 중 7번째로 태어났다. 어느 날 그의 아버지가 수렁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한 소년의 목숨을 구하는데, 그 소년이 바로 훗날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 수상 처칠이다. 처칠의 아버지 랜돌프 처칠 경은 아들의 목숨을 살려준 보답으로 의사가 되고 싶어 하는 가난한 농부 아들의 교육비를 지원했고 덕분에 알렉산더 플레밍은 런던 대학의 세인트메리 의과대학에 진학해 미생물학자가 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플레밍은 군의관으로 프랑스로 파병되는데, 여기서 그는 수많은 부상자들을 목격하게 된다. 많은 부상자들이 세균 감염으로 죽어갔지만, 당시엔 감염을 치료할 약도 없었고 감염을 예방하는 소독약은 세균뿐 아니라 인체조직까지 파괴하는 독성이 강한 것들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학교로 돌아온 그는 인체에는 해롭지 않고 세균만을 죽이는 약을 만드는 데 온 노력을 기울이는데, 특히 배양접시에 미생물을 키우면서 미생물의 성장을 억제하는 물질을 찾아내는 일에 관심을 가졌다. 플레밍이 일하던 연구실 아래층에는 곰팡이를 연구하던 라투슈가 실험을 하고 있었다. 1928년 9월 28일 금요일 아침, 휴가에서 막 돌아온 플레밍은 포도상구균을 기르던 배양접시를 실수로 열어두고 간 것을 발견했는데, 뜻밖에도 이 시료가 오염되어 배양접시 위에 푸른곰팡이가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곰팡이 주변의 포도상구균은 깨끗이 녹아 있었다!

이 우연한 실수가 인류의 수명 연장에 크게 기여한 페니실린을 발견하는 계기가 된다. 플레밍은 우연한 사건을 단순한 실수로 넘기지 않고, 곰팡이가 포도상구균의 성장을 억제하고 녹이는 물질을 만들어낸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문제의 곰팡이를 배양하고 배양액을 1/1000까지 희석시켰음에도 포도상구균의 번식이 억제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를 통해 플레밍은 곰팡이 배양액 속의 ‘어떤’ 물질이 강력한 항균작용을 한다는 것을 확인했고, 페니실륨에 속하는 그 곰팡이가 만든 물질을 ‘페니실린’이라고 명명했다. 플레밍은 곰팡이 배양액이 연쇄상구균, 수막염균, 디프테리아균과 같은 넓은 범위의 박테리아를 죽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연구 보조원들에게 곰팡이 배양액으로부터 순수한 페니실린을 분리하는 작업을 수행하도록 했다. 그러나 페니실린이 매우 불안정하기 때문에 이 작업은 무척 까다로워서 순수한 원료 대신 불순물이 섞인 용액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1929년 6월 플레밍은 영국 실험병리학 학술지에 “만일 페니실린을 대량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치료적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만 간단히 언급했다. 그는 처음에는 페니실린이 사람 몸에 안전하고 항균제로서 매우 유용할 것이라고 낙관했으나, 막상 페니실린을 정제하는 단계까지 도달하지 못하자 마음을 바꾼다. 페니실린이 몸속에서 해로운 박테리아를 죽이는 데 필요한 기간 동안 지속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1931년 연구를 중단한 것이다. 그는 1934년 다시 임상실험을 시작했지만, 페니실린을 정제하는 일을 대신해줄 사람을 찾지 못해 결국은 포기하고 말았다. 그리고 1940년 마침내 영국의 플로리와 체인 등이 처음으로 페니실린을 화학적으로 안정한 형태로 만들어 분말 상태로 분리하여 항생제 시대를 열게 되었다.

플로리, 체인, 히틀러와 페니실린 정제: 영국의 병리학자 플로리, 독일 태생의 생화학자 체인 그리고 옥스퍼드 대학 병리학과의 동료들은 페니실린이 박테리아와 싸우는 데 가장 효과적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1939년부터 페니실린의 정제와 효능에 대해 연구를 시작했다. 마침내 1940년 플로리의 연구 팀에 생화학자 히틀러가 합류해 페니실린 시료의 활성도를 측정하는 새로운 기법을 고안해내고, 페니실린을 배양액에서 효율적으로 정제하는 역추출 방법을 개발한다. 플로리 팀은 페니실린이 중요한 항생제로서 사용될 수 있는가를 시험하기 위해, 1940년 5월 치명적인 연쇄상구균에 감염된 쥐에 페니실린을 주사했다. 그러자 연쇄상구균에 감염된 쥐들 중 페니실린을 주사한 쥐는 모두 회복되었으나, 주사하지 않은 쥐는 전부 죽었다. 이 결과를 토대로 플로리는 효과적인 감염 치료가 영국의 전쟁 수행에 매우 중요한 기여를 할 것이며, 따라서 생산량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플로리는 임상실험을 할 만한 페니실린이 준비되자, 인체를 대상으로 실험에 들어갔다. 1941년 2월, 장미를 가지치기하다가 가시에 찔려 입 부분에 상처를 입은 43세의 경찰관이 최초로 옥스퍼드 페니실린의 수혜자가 되었다. 서정적 시인의 대명사 릴케가 장미 가시에 찔려 사망하지 않았던가? 바로 이 경찰관도 눈과 얼굴, 폐에 엄청난 농양이 생겨 목숨을 위협하는 패혈증에 걸렸다. 그에게 페니실린을 정기적으로 나흘 동안 주사하자 상당한 호전을 보였으나 완치되기 전 페니실린이 다 떨어져 2주일 후 경찰관은 죽고 말았다. 그래도 다른 환자들의 임상실험에서 좀 더 좋은 결과를 얻게 되자, 플로리는 페니실린이 보여준 가능성과 잠재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기대에 부응하는 치료약으로 적정한 양을 공급하려면 페니실린의 대규모 생산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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