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 소풍
전선명 지음 | 북노마드
프라하, 소풍
전선명 지음
북노마드 / 2014년 6월 / 256쪽 / 12,800원
프라하의 여행자처럼
프라하 거리를 걸었던 첫날
여행자가 아닌 생활자로서 해야 할 일상의 숙제들을 대강 마친 다음, 도착한 지 며칠이 지나서야 프라하 시내로 나가 ‘관광 명소’들을 둘러보기로 했다. 9월의 프라하는 여름의 끝자락에 걸쳐 있다. 햇볕이 너무 따갑다고 투덜거리던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이 짧은 계절이 프라하에서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것인지 말이다. 프라하의 겨울은 지독히 춥고 길다.
프라하에 오면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블타바 강을 사이에 둔 말라스트라나 구역과 구시가지, 신시가지, 이 세 곳을 주로 찾는다(모두 프라하 1지구에 해당한다). 우선 메트로 B 라인의 나로드니 트쥐다 역으로 향했다. 이 역 주변은 트람바이 정류장과 대형마켓인 테스코 및 상점들이 즐비해 늘 인파들로 붐빈다. 그러나 테스코 맞은편 편의점 옆 골목길로 들어서면 분위기는 순식간에 바뀐다. 오스트로브니 거리에는 원래는 직육면체 형태였지만 닳아서 모서리가 둥그스름해진 돌들이 바닥에 촘촘히 박혀 있다. 그 모양과 보는 방향에 따라 무채색 길 위에 미묘하게 다른 색들이 더해진다. 자동차가 지나갈 때면 우구르르 구르는 소리가 묵직하게 울려 퍼진다. 이 골목에는 가격대가 저렴한 식당과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카페들, 헌책방 그리고 ‘성 미할라 교회’ 등이 있다. 자연스레 헌책방으로 먼저 발길이 향했다. 문득 체영사전이 필요한 게 떠올라 열심히 찾아보았다. 하지만 독일어나 프랑스어 등 다른 사전들만 있을 뿐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물어보니 체영사전은 워낙 인기가 좋아 헌책방에서도 구하기 힘들다고. 그림책 코너를 둘러보니 체코의 옛 동화가 담긴 두꺼운 책이 눈에 띄었다. 체코 일러스트레이터 안토닌 스트르나델의 드로잉과 종이 콜라주 작품에 반하기도 했고, 마침 할인 중이라 가격도 놀랍도록 저렴해 일단 사기로 했다. 35K?(약 2,000원)를 주고 책을 건네받는데, 코끝에 안경을 걸친 주인아저씨가 말을 걸어왔다.
“어디서 왔어요?”
“저-는 한국 사람입니다.”
“오, 꼬레이스키! 반가워요. 그런데 한국어로 ‘안녕’은 어떻게 말해요?”
재빨리 쪽지에 ‘안-녕-하-세-요’를 적고 알파벳으로 발음을 달아주었다. 아저씨에게 한국어는 그림으로 보일 테지만, 남편이 아닌 다른 누군가와 짧은 대화를 나눈 것만으로도 나는 기뻤다. 운 좋게 구한 동화책을 껴안고 책방을 나와 시원한 스타로프라멘 생맥주와 마늘소스가 듬뿍 스며든 로스트치킨을 먹으며 하루를 마감했다. 이 도시에 와서 처음으로 맛있게 먹은 식사였다.
체코의 국민 예술가, 요셉 라다의 고향 마을 산책
프라하에 온 지 어느덧 넉 달 가까이 흘러갔다. 유난히 흐린 날, 우중충한 하늘 아래 갇힌 이 도시가 너무 답답했다. 어디로든 떠나고 싶었던 우리는 잠시 프라하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나들이의 목적지는 한 시간 남짓이면 갈 수 있는 작은 마을, 흐루시체. 이곳은 체코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사랑받아온 예술가이자 동화작가인 요셉 라다(Josef Lada, 1887~1957)의 고향이다.
프라하 거리를 걷다 보면 서점이나 기념품 가게에서 달력, 그림책, 머그잔 등 온갖 물건에 그려진 라다의 일러스트를 흔히 볼 수 있다. 예스러우면서도 개성이 뚜렷하고, 동유럽 만화풍이 느껴지는 그의 작품은 눈에 익으면 바로 알아볼 수 있다. 체코의 작가 야로슬라브 하셰크의 『대전 중의 용감한 병사 슈베이크의 운명』 이야기를 생생하고 익살스럽게 묘사한 삽화, 『검은 고양이 미케슈의 모험』에 등장하는 빨간 목도리를 두르고 빨간 장갑을 낀 장화 신은 고양이 캐릭터는 무척 유명하다. 특히 함박눈이 펑펑 내려 온 동네를 하얗게 덮은 날, 모두들 뒷동산에 모여 썰매를 타거나 눈싸움을 즐기고, 저 멀리 언덕 너머 마을에서는 작은 불빛들이 새어나오고 굴뚝으로 모락모락 연기가 올라오는 풍경을 담은 그림을 보자마자 흐뭇한 미소를 짓게 만든다. 그 밖에도 체코의 평범한 시골 풍경과 일상을 계절별로 묘사한 라다의 그림들을 모아 만든 달력은 선물용으로 인기가 높다.
야로슬라브 하셰크가 살던 마을의 이름은 흐루시체이지만, 그곳에 가려면 ‘미로쇼비체 우 프라히’라는 간이역에서 하차해야 한다. 기대와 달리 황량한 역 풍경에 잠시 당황했지만, 곧 역 건물 뒤편으로 난 작은 오솔길 입구에서 마을로 가는 방향을 가리키는 안내판을 발견했다. 표지판을 믿고 30여 분을 걸었지만, 마을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고 길은 어느새 숲으로 변했다. 얼마가 지났을까. 작은 숲을 통과해 마침내 눈앞에 나타난 라다의 고향은 그의 그림 속 풍경과 닮아 있었다. 소박한 교회, 여기저기 굴뚝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겨웠다.
마을 입구에는 손글씨로 쓴 “라다의 흐루시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문구와 라다의 동화에 등장하는 늙은 요정이 앉아 있는 팻말이 달려 있다. 마을 중앙에 위치한 선술집에 가면 벽에 슈베이크 병사가 그려져 있으며 그 밖에도 마을 지도 등 곳곳에 라다의 그림 속 주인공들이 손님을 맞이해준다. 각종 안내판이나 담벼락에는 라다의 작품들과 손글씨를 아기자기하게 활용한 그림과 문구가 넘쳐난다. 그의 생가와 기념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을 돌아다니다 보면 그의 동화 속 세계에 들어온 것 같다. 특히 다양한 크기의 삼각지붕이 얹혀 있는 집의 구조는 라다의 그림 속 집들과 꼭 닮아 있다. 곁에 작은 시내가 흐르는 라다의 생가 주변을 둘러보면 그의 그림이 그토록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것은 이 마을, 또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 덕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라다의 기념관에는 그의 그림들로 만든 익살맞은 종이 시계, 트레이드 마크인 동그란 뿔테 안경을 비롯해 생전에 작업할 때 사용했던 필통과 잉크, 물감과 연필 등 손때 묻은 도구들, 다른 나라에서 출판된 라다의 책들이 소중하게 전시되어 있다. 기념품 코너에서 흐루시체를 닮은 마을 풍경이 그려진 엽서를 산 다음, 여행을 떠나는 ‘미케슈’의 뒷모습이 그려진 기념 스탬프를 찍으면서 우리의 짧은 여행은 막을 내렸다.
체코의 핫도그
‘파렉 프 로흘리쿠.’ 의미를 모르면 뭔가 근사하게 들리지만, 직역하면 ‘긴 빵 안의 소시지’라는 뜻이다. 즉 체코식 ‘핫도그’라는 말이다. 10여 년 전 한동안 일본에서 생활했을 때, 늘 배고픈 유학생이 그나마 마음 편히 사먹을 수 있었던 유일한 음식은 집 근처 세이부이케부쿠로 역의 매점에서 판매했던 50엔짜리 멜론빵이었다. 그야말로 ‘눈물 젖은 빵’이었던 셈이다. 프라하에선 파렉 프 로흘리쿠가 우리의 ‘눈물 젖은 빵’이었다.
파렉 프 로흘리쿠는 프라하 및 남부 보헤미안 지방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길거리 간식이다. 항상 관광객들로 붐비는 바츨라프 광장에 줄지어 있는 ‘간이식당’들뿐만 아니라, 버스 정류장 등 곳곳에서 파는 이 핫도그는 우리 돈으로 채 2천 원이 안 된다. 우리는 주로 나로드니 트쥐다 역 근처의 테스코 앞에 있는 작은 이동식 마차나 나메스티 미루 역에 있는 간이매점에서 사먹곤 했다.
모양과 맛은 익히 알고 있는 서양식 핫도그와는 조금 다르다. 일단 ‘로흘릭’은 활처럼 살짝 휘어진 모양의 작은 롤빵인데, ‘호우스카’라는 이름의 둥그스름한 빵과 함께 슈퍼마켓이나 식료품점, 제과점에서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판다. 처음에는 바게트처럼 딱딱하지만, 비닐봉투에 잠시 넣어두거나 오븐에 살짝 데우면 고소하고 맛있다. 무엇보다 개당 100원도 안 될 정도로 저렴해 사람들이 이 빵을 잔뜩 사가는 모습을 일상적으로 볼 수 있다.
체코식 핫도그는 바로 이 로흘릭에 길게 구멍을 내 그 안에 따끈한 소시지, 머스터드 또는 케첩을 넣은 것으로 간단하게 한 끼 때우기엔 아주 그만이다. 수업을 마치고 나서, 시내를 배회하고 나서, 배가 고프면 늘 이 핫도그를 먹었다. 때로는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싶었지만, 가벼운 주머니 사정은 늘 우리를 핫도그 매점으로 향하게 했다. 그럴 때마다 떡볶이, 어묵, 순대, 컵라면이 떠오르면서 이 핫도그의 심심하기 짝이 없는 맛이 아쉽기도 했지만 지금은 가장 그리운 ‘체코의 맛’이 됐다.
프라하의 생활인처럼
맥주는 곧 ‘마시는 빵’
예전에 잡지에서 얀 슈반크마이에르 감독의 인터뷰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대화 도중 기자가 이른 아침 프라하의 골목을 걷다가 우연히 선술집을 들여다봤는데, 체코 사람들이 그 시각에 맥주를 마시고 있더라는 이야기를 하자 슈반크마이에르 감독은 이런 말을 했다. “아마 그들은 술을 마시며 긴 밤을 지새웠을 것이다. 체코 사람들에게 맥주란 마시는 빵과 같은 존재다.” 체코 사람들에게 맥주가 어떤 의미인지 알게 해주는 재미있는 답변이었다. 프라하에 온 다음부터 우리 역시 저녁이면 맥주 한 병씩 마시는 것이 일상이 됐다. 맥주가 맛있기로 소문난 나라답게 동네 식료품점에만 가도 다양한 브랜드의 맥주들이 잔뜩 진열되어 있어 마음껏 골라 마시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프라하 시내에 있는 테스코나 알베르트 같은 대형 마트에 가면 맥주와 와인 그리고 그 밖의 술들을 모아놓은 코너가 있다. 그곳에 가면 대표적인 체코 맥주로 잘 알려진 ‘필스너 우르켈’부터 ‘감브리누스’, ‘부드바이저 부드바르’, ‘스타로프라멘’ 등은 물론 지방 양조장 출신의 다양한 맥주들을 손쉽게 접할 수가 있다. 우리는 프라하에 와서 처음으로 접한 ‘미예스탄’이라는 맥주를 즐겨 마셨다. 미예스탄은 체코의 대표적인 맥주 제조사인 ‘피보바리 스타로프라멘’에서 만드는 소규모 로컬 브랜드 맥주로, 무난한 맛과 구수한 향이 특징이다. 풍성한 콧수염을 가진 아저씨가 그보다 더 풍성한 거품이 가득 찬 맥주잔을 들고 환히 웃고 있는 일러스트가 그려진 라벨도 무척 정겹다.
맥주 외에도 체코산 와인을 비롯해 각종 수입 주류들도 접할 수 있는데 생소한 동유럽산 술들을 저렴한 가격에 맛볼 수 있다. 체코의 명물로 알려진 약초주 ‘베헤로프카’, 슬로바키아식 ‘에그녹’, 여러 종류의 러시아 보드카 등 날이 갈수록 누슬레 집 부엌 창가에는 호기심에 마셔본 술병들이 하나둘 늘어갔다. 고흐를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의 영혼을 뼛속 깊이 취하게 만들어 판매가 금지되었다는 독주 ‘압생트’도 프라하에서는 제법 손쉽게 구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점원에게 슬쩍 물어봤더니 판다고 해서 주머니에 쏙 넣어오기도 했고, 어린 시절 읽던 책에서 셜록 홈즈가 사람들에게 종종 브랜디를 권하던 것이 떠올라 자두맛 브랜디를 사서 맛보기도 했다.
사실 프라하에서는 맥주가 물보다 싸다. 그래서 기름진 음식을 먹을 때뿐만 아니라 갈증이 날 때면 부담 없이 맥주를 잡게 된다. 게다가 보통 슈퍼마켓에서 맥주를 구입하면 병 값(3K?, 약 20원)이 추가되는데, 슈퍼마켓 한쪽에 설치된 공병 수거기계에 병을 넣으면 병 값을 돌려받을 수 있다. 우리 부부는 열심히 맥주를 마시고, 열심히 공병을 모아 며칠에 한 번씩 그 동전들로 또 맥주를 사오곤 했다. 소소한 안주거리를 앞에 두고 남편과 말없이 맥주를 마실 때마다 슈반크마이에르 감독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 맥주는 정말 씹지 않고 넘기는, 목을 타고 흐르는 빵과 같구나. 매일의 양식이자 친구이며 자부심이자 생활 그 자체구나.’ 유난히 어둠이 짙은 프라하의 밤, 먼지 같은 이방인이 조금이나마 체코 사람들과 같은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해준 매개체가 바로 맥주였다.
극단 ‘크레프스코’
내 코가 얼굴에 붙어 있기는 한 것인지 의심이 들 정도로 엄혹한 추위가 계속되던 겨울의 한복판. 6개월간의 체코어학교 코스가 끝나고, 나는 프라하 1지구 바츨라프 광장 근처에 있는 영어학원에 다니기로 했다. 수업 시간은 아침 7시. 새벽의 추위를 뚫고 학원으로 향하면서 후회할 때도 있었지만, 그곳에서 잊을 수 없는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일본 고베에서 온 아카사키 미마. 그녀는 처음부터 친근하게 먼저 말을 걸어왔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니, 지금 생각하면 참 신기한 일이다. 주로 사진으로 추상적인 이미지를 만드는 아티스트인 미마는 이후로 색다른 공연이나 전시 소식을 알려주었다.
어느 날, 미마가 학원 로비에서 들뜬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내가 다가가자 그녀는 공연 현장을 담은 사진들을 보여주며 감탄을 쏟아냈다. “무대 소품이나 연출되는 장면 하나하나가 그림 같지 않아?” 사진에는 천장과 가까운 높이에 매달린 그네를 타고 있는 여자의 뒷모습과 그 아래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밴드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크레프스코’라는 퍼포먼스 그룹의 공연이라고 했다.
프라하에서는 다양한 공연을 즐길 수 있다. 1지구에 있는 프라하국립극장과 오페라극장에서는 <카르멘>, <백조의 호수> 등 잘 알려진 명작 오페라나 발레를 자주 만나볼 수 있으며, 도시 곳곳에 ‘디바들로’-단순히 ‘극장’이라고 하기엔 복합적인 의미를 가진 곳으로, 다양한 퍼포먼스가 진행되는 무대를 갖추고 있다-라고 불리는 크고 작은 공간들이 있다. 미마가 추천한 극단 크레프스코를 보려면 극장 ‘노드’로 가야 한다. 1지구 들로우하 거리에 있는 극장 노드는 ‘독립 예술가들의 개성 있는 실험 장소’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소극장이다. 함께 있는 갤러리에는 회화, 사진, 카툰 등이 늘 전시 중이고, 트렌디한 분위기의 카페는 아티스트들과 관객들로 붐빈다.
극단 크레프스코는 2001년에 만들어졌으며, 프라하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독일, 헝가리, 네덜란드 등 여러 나라의 배우와 스태프들로 구성된 퍼포먼스 그룹이다. 이들은 주로 비언어극, 우스꽝스러운 블랙유머 그리고 시적인 유희에 초점을 맞춰 동작과 소리에 집중한 극을 선보인다. 약 10여 편의 작품들을 돌아가며 공연을 하고, 프라하 외에도 유럽의 여러 도시의 극장에서 공연을 하거나 각종 페스티벌에도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다.
내가 본 크레프스코의 공연은 <지구에서 가장 작은 여자>라는 작품이었다. 작은 여자에 대해 강박관념을 갖고 있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그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여자를 찾아 헤매고 있으며, 그 과정을 사랑이라고 여긴다. 공연 소개 글에 따르면 ‘크기, 욕망, 집착 그리고 매우 특이한 사랑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공연장으로 향하는 좁은 통로에 들어서자 독특한 조각 작품과 작은 나무상자 그리고 관객들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는 광대 분장의 여배우가 있었다. 그 순간, 자리에 앉기도 전에 이미 공연이 시작되었음을 깨달았다. 무대에는 바퀴 달린 나무상자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공연 내내 그 상자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온갖 형태로 변신을 거듭했다. 양쪽으로 문을 열면 작은 실험실이 되는 식으로, 단순한 소품이 아니라 그 자체가 이 공연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모두 품고 있었다. ‘지구에서 가장 작은 여자’는 손가락 인형으로 표현했는데, 주인공 남자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있자니 왠지 웃음이 나왔다. 이처럼 크레프스코의 공연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소품들을 매우 독특하게 활용한다는 점에 있다. 소품이 단순한 오브제에 그치지 않고, 그 자체로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조형미를 갖추고 있으며 무엇보다 기발한 발상이 시선을 끈다.
공연이 끝난 후에는 입구에서 주인공 역할을 한 배우가 작은 판매대를 걸치고 “우리가 직접 만들었어요”라고 말하며 성냥갑 속에 들어 있는 앙증맞은 인형들, 즉 ‘지구에서 가장 작은 여자’들을 팔기도 했다. 미마는 당연하다는 듯 그 손가락 인형을 하나 샀고, 나는 ‘크레프스코’의 공연에 나오는 음악들을 모은 시디 한 장을 샀다. <난쟁이의 3월>, <위험한 피에로>, <밤의 새> 등 제목만 들어도 두근거리는 퍼포먼스 음악들이 담겨 있던 그 시디는 겨울밤 긴 산책의 동행이 돼주곤 했다.
블타바 강에서 짧은 수상여행을
좀처럼 오지 않을 것 같던 봄이 슬쩍 고개를 내밀자 검푸르게 가라앉아 있던 블타바 강도 다시 반짝이기 시작했다. 부쩍 상냥해진 바람과 햇빛을 느끼며 블타바 강변을 따라 걷다가 ‘조핀’ 궁전이 자리 잡은 공원으로 향했다. 아담한 정원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블타바 강 위에 떠 있는 작은 숲이자 섬이라 할 수 있다. 19세기 네오르네상스 시대 양식으로 지어진 조핀 궁전의 홀에서는 콘서트, 무도회 등의 행사가 종종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