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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지상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 아브라함 스코르카 지음 | 율리시즈
천국과 지상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 아브라함 스코르카 지음

율리시즈 / 2013년 6월 / 308쪽 / 16,000원





하느님에 대하여



[스코르카] 우리 두 사람은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고 형제와 같은 우정을 지니고 있습니다. 저는 탈무드에 나오는 내용을 분석하면서 우정이란 음식을 함께 나누고 시간을 공유하는 의미라는 걸 알았습니다. 끝 부분에 이르러 탈무드는 자기 속마음을 거짓 없이 드러낼 수 있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우정의 증거라고 말합니다. 의심할 바 없이 우리가 함께할 수 있도록 만든 가장 중요한 요인은 하느님이시고, 우리 각자가 걸어온 길이 만나도록, 그리하여 서로에게 마음을 열도록 허락하신 이 또한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늘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하느님에 대해 분명하게 말해본 적은 없습니다. 우리 삶에서 너무나 중요한 하느님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우리의 대화를 글로 남기고자 하는 계획, 이러한 교류의 시작은 아주 의미 있는 일일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저는 ‘길’이란 단어가 참 좋습니다! 길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는 하느님에 대한 제 개인적인 경험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길을 따라 걷고, 움직이고, 찾아 나서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두 길이 만나는 순간이 있습니다. 한편으로 우리가 하느님을 찾아가는 길은 마음에서 흘러나온 본능에 의한 충동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하느님을 만나면, 하느님께서는 예전부터 우리를 찾고 계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은 우리보다 먼저 우리를 찾고 계셨습니다. 종교적 경험은 길을 걸으며 시작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세기 12:1). 이것은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입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그 길에서 수세기 동안 하느님과의 연대가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하느님과의 제 개인적인 경험이 길을 따라서 생겨났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하느님을 찾아가는 길, 하느님이 저를 찾으신 길 모두가 그러합니다. 비록 그것이 고통의 길, 기쁨의 길, 빛의 길, 혹은 어둠의 길일지라도 말이지요.

[스코르카] 하느님을 경험한다는 것은 역동적입니다. 하지만 요즘처럼 하느님에 대한 생각이 훼손되고 신성 모독적이며 중요하지도 않게 된 때에 우리가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프란치스코]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자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라는 것입니다. 생각이 분산되면 내부에 균열이 일어납니다. 생각이 많으면 자신의 본모습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거울을 볼 수 없게 됩니다. 거기에 핵심(씨앗)이 있습니다. 스스로 묵묵히 억제하는 과정에서 대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더러 이것을 통하는 길이 너무나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느님과 만나는 경험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라고 말해줍니다. 그래서 저는 욥(Job)이 고난의 시간을 맞아 결국 모든 것을 잃고 나서 하느님께 고백한 내용을 아주 좋아합니다. “당신에 대해 귀로만 들어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욥기 42:5) 저는 사람들에게 귀로만 하느님을 듣지 말라고 말합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은 우리 마음속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분이십니다.

[스코르카] 욥기를 통해 저는 큰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그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존재를 미묘하게 드러내십니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고통은 미래에 있을 다른 고통에 대한 대답일 수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우리 자신이 과거의 어떤 무언가에 대한 답일지도 모릅니다. 유대교에서는 하느님이 드러내 보이신 계율들을 따름으로써 하느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추기경께서 언급하신 것처럼, 모든 사람과 모든 세대는 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을 좇고 하느님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길을 말입니다.

[프란치스코] 맞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손으로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내리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그러한 선물을 주셨지만 동시에 이 땅을 다스리는 과제도 주셨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부여하신 과제에서 너무 멀리 가버린 순간이 왔습니다. 인간은 야망에 넘쳐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자 지구 온난화와 같은 생태학적인 문제들이 발생했지요. 이것은 새로운 형태의 문명 파괴입니다. 이제 하느님 앞에서, 그리고 자신 앞에서 인간이 할 몫은 하느님이 주신 선물과 과제 사이의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선물만을 누리고 주어진 과제를 하지 않는다면 미션을 완성하지 못할 것이고 원시 상태에 머물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과제에 대한 과욕에 넘쳐 선물은 잊은 채 구성주의 윤리를 만들어 내기에 이르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은 모든 것은 노력의 산물이며 선물 따윈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제가 말하는 ‘바벨증후군’입니다.

[스코르카] 랍비 문헌에는 하느님이 왜 바벨탑을 싫어하셨는지를 질문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하느님은 왜 사람들로 하여금 각각 다른 언어를 쓰게 해 탑 쌓기를 중단하게 하셨을까요? 그 문헌 내용을 읽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늘에 닿기 위해 탑을 쌓는 일은 이교도나 하는 짓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행동은 하느님에 대한 오만함의 표현입니다. 미드라쉬(유대교에서 구전 전승으로 성서 본문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방법으로 성서에서 얻은 법률과 비법 자료들을 모아놓은 대전집을 말함)에도 적혀 있습니다. 하느님이 가장 언짢게 여기신 것은 탑을 쌓는 자들이 그렇게 높은 곳에서 혹시 인부가 추락할까 봐 걱정하기보다는 벽돌 한 장이라도 분실할지 몰라 연연해했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벌어지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과 과제 사이의 줄다리기와 같습니다. 완벽하게 균형을 맞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오로지 경제적 성공만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류의 평안은 가장 하찮게 생각합니다.

[프란치스코] 정말 대단한 말씀입니다. 바벨 증후군은 단지 구성주의적인 자세뿐만 아니라 언어의 혼란이라는 양상으로도 나타납니다. 바벨 증후군은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은 무시하고 사명만이 과장된 전형적인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 순수한 구성주의는 대화의 결핍을 가져오며 동시에 공격성, 잘못된 정보, 긴장 관계 등이 수반되지요. 마이모니데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이 두 현대 철학자들의 글을 읽다 보면 그들은 항상 스스로를 경쟁자의 입장에 놓고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서로의 관점에서 대화를 나눕니다.

[스코르카] 탈무드의 해석에 따르자면, 니므롯은 바빌로니아를 장악한 독재자였습니다. 그랬기에 그 지역의 사람들은 단 하나의 언어(니므롯의 언어)만을 사용했습니다. 이 폭군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하늘까지 닿는 높은 탑을 쌓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육체적으로 하느님 가까이에 다다를 수 있다고 여겼던 거죠. 탑을 쌓는 목적은 인류를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보편적인 언어가 아닌 독재적인 언어를 사용하면서 오로지 자신을 위해 탑을 쌓다가, 사람들은 저마다 어느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쓰게 되는 벌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이며 이 부분은 지극히 더 중요합니다. 죄에 대하여



[프란치스코] 죄는 두 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규범을 위반한 범죄와 죄책감이라는 심리적 느낌이 그것이지요. 후자는 종교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실수를 저질렀다거나 잘못을 했다고 지적하는 내면의 목소리 같은 것으로, 아마 종교적 감정을 대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죄책감에 사로잡혀 살아가느라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심리적 감정은 건전하지 않습니다. 제 경우에, 이런 죄책감을 느끼는 동안은 신의 자비를 받아들이기가 훨씬 쉽습니다. 고해를 하러 갈 수 있고 그러면 하느님께서 저를 용서해주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단지 얼룩을 지우기만을 바란다면, 그것은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규범의 위반은 단순한 얼룩보다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범죄를 저지르고 신의 자비와 마주하고 나서, 그러한 경험을 오로지 자신들의 얼룩을 지우기 위해 세탁소에 가는 일쯤으로 치부해버립니다. 그 모든 것을 한낱 하찮은 것으로 비하시켜버리는 것이지요.

[스코르카]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민간의 지혜나 죄의식을 유도하는 전형적인 유대인 어머니들도 그러한 예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본질적인 죄 개념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죄를 저지르면 스스로 속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똑같은 죄를 다시 저지르지 않도록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물론 기도를 올리거나 진심에서 우러난 기부를 하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다만 그것 역시 변하고 싶은 간절한 바람에서 나온 행동이어야 합니다. “종교는 죄를 사해준다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개념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 우리는 죄를 저지른다고 해서 세상이 끝난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지만, 우리는 상황을 고치고 바로잡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다시 그 같은 잘못을 해선 안 된다는 것이겠지요.

[프란치스코] 단지 우상을 숭배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죄는 다만 인간의 또 다른 자원이지요. 죄를 저지르고 속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장할 수 없습니다.

[스코르카] 저는 죄책감을 오로지 종교적인 느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화적인 요소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이렇게 해라” 혹은 “저렇게는 하지 마라”라고 말하면서 죄책감을 강화시킵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옳은 것과 그른 것의 차이를 인식하도록 가르칩니다. 그런 방법으로 죄를 저지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도록 돕고, 형벌과 처벌의 개념을 알게 합니다. 우리는 또한 처벌은 인간이 내리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 언젠가 하느님 앞에서 해명할 날이 올 것임을 굳게 믿습니다. 결국 ‘도둑질하지 마라’, ‘살인하지 마라’ 등의 계율을 알려주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프란치스코] 예전에는 흔히 부기맨(못된 아기를 데려간다는 귀신으로,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 부기맨이 온다는 이야기를 했음)에 의지했습니다. 지금은 부기맨이 오고 있다고 말하면 아이들은 면전에서 웃겠지만, 우리가 어렸을 때는 어른들의 부기맨 얘기에 겁을 먹곤 했지요.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과장에 불과할 뿐, 나쁜 교육 방법입니다. 청교도 체제는 주로 그런 방식을 썼습니다. 우리의 과제는 범죄를 설명하면서, 사람들을 하느님에게서 떼어놓는 무언가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구원과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한 말을 생각해봅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담과 이브의 죄를 언급하면서 ‘행복한 잘못’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저는 그 말을 믿습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얼마간의 죄를 허하노라. 너희 얼굴이 수치심으로 가득 찰 수 있도록”이라고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자비와 하느님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은 이라면, 행동은 올바르게 할지라도 마음에는 오만이라는 나쁜 습성이 있는 그리스도교도일 것입니다. 때때로 죄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더욱 겸허하게 만들고 용서를 구하게 합니다.

[스코르카] 그 말씀에도 동의합니다. 죄는 우리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 존재합니다. 완벽해지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무언가 잘못을 저지릅니다. 죄를 지으면 자신이 혼자 힘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따라서 아무리 조심하고 선한 의도를 지녔다고 해도 때때로 좌절하게 됩니다. 혼자 모든 일을 처리하려 들면 삶은 망가집니다.



교육에 대하여



[스코르카] 종교는 우리의 세계관을 분명하게 만들어주고, 교육은 이 세계관을 전해줍니다. 따라서 둘은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죠. 서로 다른 문화들이 형성되는 방식을 연구할 때는 두 가지 요소를 살펴야 합니다. 하나는 사회의 기술적 발전이고, 다른 하나는 문화의 발전입니다. 삶의 방식에 영향을 주는 가치들로 입증되는 문화 말이지요. 문화는 본질적으로 세 가지 의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자연이란 무엇인가?”, “하느님이란 무엇인가?” 학생들이 이런 의문과 더불어 종교가 주는 답변을 공부하는 것은 교육 과정에서 중요합니다. 하지만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어느 한 가지 시각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사상과 접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들이 있습니다. 저는 물론 이런 생각에 동의합니다. 그래서 과거의 수업 진행 방식을 고수하는 공립학교가 종교 수업을 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프란치스코] 저 역시 가톨릭을 믿지 않는 학생들을 차별하는 종교 교육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교실에서 접할 수 있는 다양한 영역의 학문들처럼, 종교도 학교 교육의 한 부분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종교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삶을 바라보는 종교적인 시각도 가르치지 않고, 역사적 사건들의 의미도 알려주지 않는 교육 역시 차별이기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스코르카] 동의합니다. 아이들에게서 종교에 대해 배울 기회를 박탈하는 것은 많은 것들을 빼앗는 것이죠. 이왕에 말을 꺼냈으니 말이지만, 각 교구나 지역에서 종교를 상세하게 가르칠 필요가 있습니다. 나중에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한 부분이 된 유대교의 기본은, 타고난 본능을 극복해서 더욱 훌륭하게 행동할 수 있는 존재로 인간을 교육시키는 것입니다. 교육에서 종교가 중요한 이유는 인간의 뛰어난 조건과 그 조건을 다루는 방법을 재확인시켜주기 때문입니다. 국가가 운영하는 공립학교는 어느 식으로든 종교 교육을 실시해야 합니다. 가치를 전달해주는 것이 교육의 기본 역할이기 때문이지요.

하느님의 개념을 가르치는 순간 인간중심적인 사고는 옆으로 비켜납니다. 그러나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지 않으면, 사람들과 그들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게 되죠. 일단 종교적 변수를 가르치면, 다른 주제들에 대해서도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게 됩니다. 교육에 대한 책임을 방기하면 우리의 목적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지금 여기의 삶의 방식에만 초점을 맞추게 되지요. 그러나 종교에서 초월의 개념은 기본적인 것입니다. 지금의 행위는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지금 같은 물질주의적인 세계에서는 이런 개념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프란치스코] 성경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교육자로서 보여주십니다. “너에게 이 신을 신기고, 걷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신도들의 의무는 젊은이들을 기르는 것입니다. 남자나 여자 모두 각자의 종교적 가치로써 자녀들을 교육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런 권리를 박탈하는 국가에서는 나치즘과 같은 것이 생겨날 수 있고, 이런 상황에 놓인 아이들은 부모의 가치가 아닌 다른 가치에 세뇌당합니다.

[스코르카] 우리는 언제나 말 또는 행동, 아니면 반대로 침묵하거나 행동하지 않는 것 등을 통해서 아이들에게 모종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언제나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 일을 다른 누군가에게 떠넘기는 것일까요. 종교는 삶의 의미를 찾는 인간에게 가르침을 줍니다. 종교는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진리를 이미 알고 있는 철학자와 같습니다. 타인들과 진리를 공유해야 합니다. 물론 진리를 듣고 싶은 사람은 들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귀 기울이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누구나 이 진리에 다가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종교에 필수적인 태도예요. 이런 태도가 없으면 어떤 종교 단체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프란치스코] 학교가 종교적인 세계관의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아이들의 조화로운 발전에 장애가 생깁니다. 교육은 아이의 정체성 형성이라든가 부모님과 똑같은 가치를 자녀에게 전수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교육이 없으면, 아이는 결국 종교와 문화적 유산을 박탈당합니다. 교육에서 부모의 전통이 빠지면 이데올로기만 남을 것입니다. 삶은 삐딱한 시선으로 보이고, 공평한 해석은 교육에서조차 존재하지 못합니다. 말에는 역사와 삶의 경험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누군가 여지를 남겨두면, 가족의 전통과는 거리가 먼 다른 사상들이 이 자리를 채웁니다. 이데올로기는 이렇게 생겨납니다. 고등학교 때 만났던 사회주의자 선생님이 생각나는군요. 우리는 그 선생님과 아주 사이가 좋았습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온갖 질문을 다 퍼부었는데, 그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었죠. 하지만 그분은 우리에게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언제나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성서와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은 어떠한지를 우리에게 말씀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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