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창조자들
이종호, 박홍규 지음 | 인물과사상사
세상을 바꾼 창조자들
이종호, 박홍규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14년 7월 / 352쪽 / 15,000원
제1부 과학의 창조자들
자연법칙은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 - 탈레스: 자연 관찰
그리스에서 태동한 현대과학: 그리스 문명은 중앙집권적인 왕국이 아니라 분산된 도시국가 형태로 발전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기원전 4세기에 그리스를 통일할 때까지 느슨한 구조를 유지했다. 그리스의 역사를 둘로 나누어 알렉산드로스 이전 시대를 헬레나 시대(기원전 600년~기원전 300년), 이후를 헬레니즘 시대(기원전 334년~기원전 30년)라 부른다.
현대과학은 그리스에서 태동했다고 하는데 이는 헬레나 시대에 태어났다는 뜻이다. 헬레나 과학은 다른 고대 문명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과학적 이론, 즉 ‘자연철학’의 발명이다. 우주에 관한 초기 그리스인의 생각과 헬레나 시대의 다소 비실용적으로 보이는 추상적 지식 탐구는, 그리스인의 과학에 근본적으로 새로운 요소를 추가했다. 자연철학이야말로 과학의 진로를 바꾸어놓는 계기였다. 두 번째 특징은 제도적 지위에 관한 것이다. 헬레나 시대에는 그리스 과학에 대한 어떤 국가적 지원도 없었고, 과학을 위한 제도적 기관도 없었다. 그리스 문화에 몇몇 중요한 학파가 출현했지만 그것들은 교육기관이라기보다는 사적 모임이나 동아리에 가까웠다. 헬레나 시대에 과학자들은 어느 곳에도 얽매이지 않은 자연인이었으므로 자연 세계에 관한 일련의 추상적 사변을 발전시키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다른 고대 문명에서 지식은 실용적인 목표와 목적을 지향했다. 그러나 헬레나 시대의 그리스에서는 철학을 사회적ㆍ경제적 목적과 분리했다. 예를 들어 플라톤은 자연에 관한 지식의 추구를 생산이나 기술 같은 하찮은 활동에서 분리할 것을 주장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인들은 자연철학을 놀이나 유희로, 또는 이성의 삶이나 철학적 성찰과 관련된 더 높은 목표를 위해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헬레나의 자연철학은 새로운 유형의 과학, 의도적인 이론적 자연 탐구였다.
그리스의 과학은 이집트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다양한 마술, 민간전승, 연금술, 점성술, 종교적 신비주의 등이 헬레나 시대 민중에게 유행했다는 사실은 이들이 상호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리스의 고대 문명은 관개 농업과 식량 생산에 기반을 두고 발생했지만, 그리스 도시국가의 농업은 거의 전적으로 계절 강수와 산악 지대의 눈 녹은 물에 의지했다. 그리스는 큰 강과 광활하고 비옥한 범람원이 없었기 때문에 소규모의 물 관리 시설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신석기 시대의 산림 감소와 침식으로 절대적 인구를 먹여 살리는 데는 부족했다. 그리스는 식량을 자급할 수 없어 수입 곡물에 의지해야 했는데, 그리스인이 기원전 8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지중해 연안에 20여 곳의 식민지를 만든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지리 여건도 그리스 문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산이 지역을 여러 계곡으로 나누었으므로 헬레나 문명은 정치적으로 분산적이며 작고 독립적인 도시국가로 나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같은 절대군주 왕국처럼, 사회적ㆍ문화적 활동을 국가로 집중시키는 완벽한 관료 체제를 형성할 만큼의 부를 축적하기도 힘들었다.
이와 같은 토양에서 그리스인들은 법과 정의에 관해 상당한 수준의 정치적 토론을 해 왕정, 귀족정, 민주정, 폭군정 등을 분석했다. 그리스에서만 새로운 과학 문화가 발생한 이유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과학적 연구나 가르침에 사회적 가치를 결부시키지 않고 고등교육을 위한 학교를 공적으로 지원하지 않는 사회에서 그리스의 과학은 나름대로 독특한 모양을 갖추었다. 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과학의 선구자들도 낳았다.
최초의 과학자 탈레스: 기원전 640년경 탈레스는 그리스의 식민도시인 밀레투스에서 태어났다. 과학사가들은 탈레스를 최초의 과학자이자 수학자일 뿐 아니라, 동시대의 입법가인 솔론과 함께 고대 그리스의 ‘7대 현자’의 하나로 거명한다. 탈레스가 태어날 당시, 문화의 중심지는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였다. 탈레스는 당대 최고의 문명을 배우기 위해 이집트로 유학을 갔다. 이집트에 도착한 탈레스는, 이집트인의 선조가 그리스보다 2,000년이나 전에 쿠푸의 대피라미드 등을 건설했지만, 정작 피라미드의 높이를 측정하는 지식은 없다는 것을 알았다. 탈레스는 닮은 삼각형의 성질을 이용해서 피라미드의 높이를 측정했다. 훗날 탈레스는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바다에서 선박까지의 거리를 측정했다.
탈레스는 내친김에 이집트와 학문적으로 쌍벽을 이루는 바빌로니아로 가서 천체에 관련된 수학과 과학을 연구한 뒤 그리스로 돌아와 학교를 차려 학생들에게 자신이 배운 지식을 전달했다. 우선 그리스 인에게 작은곰자리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작은곰자리를 찾으면 북극의 위치를 알 수 있고 따라서 항해에 절대적 도움이 되었다. 그가 이룬 전설적 업적 중 하나는 기원전 585년의 일식을 예언한 것이다.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일식은 사디아와 메디아라는 두 나라가 6년에 걸쳐 싸우던 전쟁 마지막 해에 일어났다. 탈레스의 예언대로 일식이 일어나자, 두 나라 지도자들은 전쟁의 어리석음을 일깨우기 위해 신이 내린 징조라 확신했고, 전쟁을 종결하고 지속적 평화 유지 협약을 맺었다.
자연 관찰로 돈을 벌다: 탈레스는 세상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당대의 상식은 신이 세상을 만들었다는 것이었지만, 탈레스는 이런 고차적 의문은 그리스신화로는 풀 수 없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우주는 신들이 멋대로 만든 것이 아니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자연법칙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자연법칙을 인간이 주의 깊게 관찰한다면 그 법칙을 실생활에 이용할 수도 있다고 설파했다. 우박이 떨어져 올리브 농사를 망친 것은 농부가 제우스나 헤라의 노여움을 사서 자초한 징벌이 아니라, 대기 속의 물이 얼어붙는 자연현상으로 생성된 우박이 불운하게도 농부의 올리브 농장에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탈레스는 말했다. 그러므로 탈레스는 ‘신들을 몰아냈다’라고도 일컬어지는데, 요컨대 탈레스는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우주를 이해하려고 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탈레스는 과학이라는 개념을 인간에게 접목시켜 이후 인류 문명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것이 그를 ‘과학의 탄생’이라는 커다란 발자국을 남긴 인류 최초의 과학자로 거론하는 이유다. 그는 종종 “자연법칙은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를 시기하는 사람이 “자연법칙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탈레스가 정말로 현명하다면 그는 부자가 될 수 있었을 텐데, 그가 부자가 아니라는 것은 탈레스가 현명하지 않다는 증거다”라고 조롱했다. 이 소문을 들은 탈레스는, 어느 해에 올리브가 풍작이 될 것이라고 예측한 후 올리브기름을 짜는 기계를 남몰래 매점했다. 그의 예측대로 그해 올리브가 풍작을 이루자 올리브기름을 짜는 기계의 수요가 급증했고 탈레스는 기계를 비싼 가격으로 대여해서 큰 부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조롱했던 사람들에게 자연법칙을 아는 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올리브 압착기를 매점했을 뿐, 이후 두 번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업적은 자연을 관찰하는 것이 인간에게 이롭다는 사실을 알린 것이다.
그 밖에도 탈레스는 다방면에 걸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어떤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사전에 질문을 상정해 이를 토대로 답을 전개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말하고, 모든 사물에 대한 질문이 연상으로 이어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런 태도야말로 인간의 사고를 한 차원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한마디로 탈레스에 의해 비로소 실용적인 적용에서 추상적인 원리를 도출하는 방법이 창안되었다는 말이다. 이것은 한 문제의 해답에서 다른 문제의 해답도 얻을 수 있음을 뜻한다. 탈레스는 무엇에서 무엇이 도출되는지를 규정할 규칙의 필요성을 의식하고, 최초로 논리적 추론의 체계를 발명했는데 이로써 인류가 현대과학 문명 시대로 들어가는 데 필요한 논리를 정립했다.
사과는 떨어지는데 달은 왜 떨어지지 않을까? - 아이작 뉴턴: 만유인력
인류를 과학 문명으로 이끌다: 미국의 《라이프》지(誌)가 ‘지난 1,000년을 만든 100인’에 뉴턴을 여섯 번째로 선정하고 아인슈타인을 스물한 번째로 선정했다. 이는 사물의 운동 법칙을 망라한 뉴턴역학 등 우리가 실제 피부로 느끼는 중요성에서 아인슈타인보다 뉴턴이 더 높기 때문이다. 뉴턴역학의 편리성은 행성의 운동을 간단하게 기술할 수 있는 데서 알 수 있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적용하면 그때까지 역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던 수많은 천체의 운동을 완전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요하네스 케플러의 행성 운동 법칙을 완벽하게 뒷받침함으로써 인간이 천체를 바라보기 시작한 이래 설명되지 못한 수많은 행성의 움직임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뉴턴 물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분리되었던 천상과 지상을 마침내 통일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이 뉴턴 이후로 진정한 과학 문명 시대로 들어서게 되었다고 우리가 말하는 이유다.
이상한 아이 뉴턴: 뉴턴은 1642년 12월 25일에 영국 링컨셔의 울스토르프에서 유복자이자 조산아(早産兒)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작은 농장을 경영하고 있었지만 그가 태어나기 3개월 전에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도 목사와 재혼했기 때문에 어린 시절 뉴턴은 할머니와 둘이 살았다. 뉴턴은 6세 때에 학교에 들어갔는데 농부의 아들인 데다가 친구를 사귈 줄도 모르고 언제나 혼자 있기를 좋아해 성적은 아주 나빴다. 교사들은 뉴턴이 이상한 아이고 머리도 좋지 않다고 평했다. 공부보다도 기계를 만지는 일에 더 열중하던 뉴턴은 13세에 그랜텀킹스 중학교에 들어갔으나 성적은 여전히 좋지 않았고 5년이면 졸업할 수 있는 학교를 7년 만에 졸업했다. 그래도 뉴턴은 졸업 2년 전부터는 공부에 매달렸고, 덕분에 졸업할 때의 성적은 아주 우수했다. 뉴턴의 재능을 알아본 교장의 추천으로 1661년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뉴턴의 대학 생활은 다른 학생과 마찬가지로 평범했다. 1665년 영국에서 페스트가 크게 유행해서 같은 해 8월에 대학이 폐쇄되자 뉴턴은 자신의 고향인 울스토르프로 돌아왔다. 그는 그때부터 1667년 초 다시 케임브리지로 돌아갈 때까지 약 1년 반 동안 연구에 전념하여 ‘만유인력의 법칙’을 비롯해 ‘이항정리’, ‘미적분학’, ‘백색광의 구성 성분’ 등 현대과학사상 가장 중요한 기초과학과 물리학 이론의 대부분을 정립했다. 과학사에서는 이해를 ‘기적의 해’라고도 부른다. 1669년 뉴턴의 스승인 아이작 배로가 퇴임하자 그는 26세의 나이에 제2대 루카스 수학 교수가 되었다.
만유인력은 우주의 기본 힘: 뉴턴이 태어나기 전까지 유럽에서 2,000년간 절대적인 진리로 알려진 아리스토텔레스 역학에서는 강제 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고 이 힘은 오로지 접촉을 통해 전달된다고 했다. 물체가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자연스런 운동이므로 힘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천체가 원운동을 하는 것 또한 자연스런 운동이므로 이에 힘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중세의 과학자 중에는 천체에 이것을 미는 천사가 하나씩 붙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 것은 지구 주위를 도는 달의 움직임이었다. 달은 지구 반지름의 약 60배가 되는 반지름의 원을 그리면서 지구를 도는데, 원형의 궤도를 그리는 달이 결코 지구로 떨어지지 않는 이유가 뉴턴은 궁금했다. ‘사과는 떨어지는데 왜 달은 떨어지지 않는가?’ 젊은 뉴턴은 줄곧 이 문제를 생각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달은 지구로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원형의 궤도를 그리면서 지구 주위를 돌고 있는 것이야말로 달이 지구를 향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라는 착상을 했다. 뉴턴은 달이 원의 접선 방향으로 자꾸만 날아가려고 하지만, 지구의 인력에 의해 시시각각 지구를 향해 계속 떨어지고 있기 때문에 항상 원형 궤도상을 돌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것이 그 유명한 ‘질량을 가진 모든 물체는 두 물체 사이의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두 물체의 질점 사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만유인력의 법칙이다.
지구에서 일어나는 일 대부분이 만유인력(중력)과 결정적인 관련이 있다. 바다의 밀물과 썰물은 지구와 달과 태양이 서로 끌어당기는 힘에 의해서 발생한다. 차가운 공기가 밑으로 가라앉고 밀도가 낮은 뜨거운 공기는 위로 솟아오르는 것도 중력 때문이며, 이것은 기후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만유인력은 지구와 달 사이뿐만 아니라 행성과 태양 사이에도 작용한다. 뉴턴은 케플러의 행성 운동에 관한 법칙으로 간단하게 이 사실을 이끌어냈다. 실제로 행성의 궤도를 원으로 생각할 경우 행성의 운동도 지구 주위를 도는 달의 운동과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뉴턴은 태양과 행성 사이에 작용하는 힘을 계산했다. 그 결과 자신이 유도한 만유인력 법칙에 꼭 들어맞으며 우주의 모든 물체에 이 법칙이 성립한다는 것을 확신했다.
뉴턴이 만든 고전역학: 뉴턴은 1687년에 출간된 『프린키피아』로 불멸의 이름을 얻는다. 자연현상에 대한 실생활에서의 오차 없는 적용과 정교한 수학적 이론의 제시 등으로 『프린키피아』는 인간의 모든 자연 탐구 지식 중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했다. 그는 ‘물리적 힘’이라는 개념으로 그 당시의 일반적인 물리학적 사고를 완전히 재편했다. 뉴턴의 이론은 천문학과 운동의 과학을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것이다. 또 그는 과학의 다른 모든 분야와 물질적 특성의 본질이라는 기본 개념을 부분적으로 조화시켰다. 뉴턴은 수학과 실험이 자연철학을 공식화하는 공동의 기본 열쇠임을 분명히 알려주었다. 과학자들은 뉴턴이 구축한 역학을 주로 ‘고전물리학’이라고 부르는데 20세기에 원자와 우주를 다루게 되면서 뉴턴역학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있다고 해서 뉴턴의 이론이 사장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뉴턴역학이 우리에게 얼마나 직결되어 있는지를 알려주는 사건은 여러 가지가 있다.
▲ 핼리혜성의 발견: 1682년 별안간 밝은 혜성이 나타나 사람들을 놀라게 했는데 당시 혜성은 한 번 나타나면 사라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뉴턴은 혜성도 역시 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른다고 말했다. 뉴턴의 친구인 핼리는 뉴턴의 생각에 따라 1682년에 나타난 혜성의 궤도를 계산해보았다. 그 결과 이 혜성은 76년마다, 즉 1531년, 1607년에도 나타났다는 자료가 있었다. 핼리는 이들 혜성은 모두 같은 것이라 생각하고 1750년, 1835년, 1910년에도 이 혜성이 나타날 것으로 예언했다. 훗날 핼리혜성으로 불리게 된 이 천체는 핼리의 예언대로 1986년에도 나타났는데, 이것은 뉴턴역학이 현대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한 것이다.
▲ 해왕성의 발견: 1781년 영국의 천문학자 윌리엄 허셜이 토성의 바깥쪽에서 천왕성을 발견했다. 그러나 이 행성의 궤도는 당초 천문학자들이 예상한 궤도에서 상당히 어긋나 있었다. 천문학자들은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에 따라 천왕성보다 훨씬 먼 곳에 또 하나의 행성이 있어서 그 인력 때문에 이런 어긋남이 생긴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 말대로 1846년 9월 23일 독일의 요한 갈레에 의해 해왕성이 발견되었다. 해왕성은 행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사전에 알고 발견한 최초의 행성이다.
▲ 지구 형태의 발견: 뉴턴은 지구는 가로로 긴 타원체라고 기술했다. 지구 회전에 따른 원심력 때문에 극지방은 조금 납작하고 적도 지방은 약간 부푼 모양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1684년과 1701년 두 차례에 걸친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측량에서 뉴턴의 주장과는 달리 지구가 세로로 긴 타원체라는 결과가 나왔다. 뉴턴은 이 결과에 의문을 품고 측량이 정확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결국 뉴턴이 옳았다는 게 확인되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건 뉴턴이 죽은 지 10년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