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아픈 줄도 모르고
가토 다이조 지음 | 나무생각힐링
나는 내가 아픈 줄도 모르고
가토 다이조 지음
나무생각힐링 / 2014년 8월 / 272쪽 / 13,800원
1장 심리적 핸디캡을 자각한다
자신의 위치를 올바르게 이해한다
인생에 대한 불안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신의 위치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서 ‘자신의 위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손자와 자신의 관계를 착각하는 할머니를 예로 들어보자. 손자와 가장 가까운 사람은 그 어머니다. 자신과 손자의 관계는 ‘할머니와 손자’의 관계일 뿐, 자녀와 어머니의 관계는 아니다. 하지만 할머니와 아이 어머니의 관계가 나빠지면, 즉 자신과 며느리의 관계가 나빠지면 할머니는 착각을 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손자와 가장 가까운 관계이고, 며느리보다 자신이 더 손자와 가깝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손자의 입장에서 볼 때 가장 가까운 사람은 누구인가?’ 하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것이 자신의 위치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의 사고방식이다. 그런 오해로 인해 며느리와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기 쉽다. 상대와의 거리를 이해하는 태도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때뿐만 아니라 상대를 배려할 때에도 매우 중요하다. 좀 더 이해하기 쉬운 예를 들어보자. 어제 알게 된 사람이 어린 시절 소꿉친구 같은 태도로 대화를 건넨다면 상대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당연히 기분이 떨떠름할 것이다. 인간관계에는 제각기 그 깊이에 따른 거리라는 것이 있다. 그 사람과 자신이 어느 정도의 관계인지를 먼저 생각한 이후에 그에 걸맞은 거리로 대해야 한다. 상대방이 자신과 금전적 거래만 하는 사람인지, 어느 정도 사적인 친분과 친밀감이 형성되어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얼굴만 알고 지내는 사이인지, 그런 친밀한 정도를 이해하는 것이 인간관계의 거리감을 잘 이해하는 사람의 태도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가깝게 지내고 싶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당연히 상대 역시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오해한다. 이런 행동은 자신의 기대를 상대에게 외재화(外在化, externalization)하기 때문에 나타난다. 고민에 빠진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고민이 상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이 고민을 얘기하려고 일부러 먼 곳까지 달려왔는데 상대가 살갑지 않게 대하면 “나는 이렇게 힘들게 찾아왔는데……” 하면서 화를 낸다. 자신이 얼마나 힘들게 찾아왔건, 얼마나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건 그런 독선적인 행동이 상대의 반응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이런 단순한 사실조차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인간관계에서의 거리감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학교 씨름부 학생이 천하장사 같은 태도로 주변 사람들을 대한다면 주변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신입사원이 사장 같은 태도로 거래처 사람을 대한다면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일까? 어제 알게 된 이성과 대화를 나누면서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연인 같은 표정을 짓는다면 상대는 어떻게 생각할까? 이십 대 청년이 노년의 스님을 상대로 인생론을 펼친다면 스님이 어떻게 생각할까? 자신의 위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혼을 해서 자녀를 두어도 독신 시절과 마찬가지로 행동한다.
누구나 본인에게 어울리는 운명이 있다. 그 결과, 현재의 ‘나’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자신의 위치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안에 사로잡히는 사람이 정말 많다. 그들은 늘 할 수 없는 일을 하려고 애쓰다가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으면 불안해하거나 크게 좌절한다. 예를 들어, 당뇨병에 걸린 사람이 스테이크를 먹고 싶다고 말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는 현재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다. 당뇨병에 걸렸다면 당뇨병을 치료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문제이지만, 치료를 할 생각은 하지 않고 먹고 싶은 음식을 먹을 수 없다는 데에 불평이나 늘어놓는 것이다.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하나하나 처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위치를 이해할 수 있다.
심리적 핸디캡은 당신 탓이 아니다
육체적 핸디캡을 짊어지고 있는 사람은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심리적 핸디캡을 짊어지고 있는 사람은 그 사실을 잊고 심리적 핸디캡이 없는 사람과 대등하게 경쟁하려 한다. 물론 심리적 핸디캡은 그 사람의 책임이 아니다. 세상에 태어나 보니까 부모가 심각한 신경증(neurosis) 환자였을 뿐이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다면 당연히 심리적으로 건강하게 성장하기 어렵다. 따라서 자신이 심리적 핸디캡을 짊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주어진 운명에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자신이 낯을 가린다고 해서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좋은 사람을 부러워하며 일생을 보낼 필요는 없다.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대개 사람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러나 나는 ‘나’일 뿐이다. “나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이렇게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받아들이면 된다. 이런 수용 능력이야말로 자신에게 어울리는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첫걸음이다. 사랑을 받고 싶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으며 인정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할 필요는 없다. 어린 시절부터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에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한 사람이 도움을 받으며 자란 용기 있는 사람과 같은 인생을 살기 위해 스스로를 다그치는 것은 잘못된 선택이다. 용기 있는 사람은 어린 시절에 믿을 만한 사람이 곁에 있었다.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 있었다. 만약 나에게 용기가 없다면, 스스로를 다그치는 대신 용기 있는 사람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존경하면 된다.
용기 있는 사람을 존경하는 것은 용기 없는 자신을 비하하는 것과는 다르다. 용기 있는 사람을 솔직하게 존경하는 것과 용기 없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모순되지 않는다. 그것이 ‘나는 나, 그 사람은 그 사람’이라는 사고이고, 자신의 위치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태도다. 반면, 용기가 없는데 용기 있는 사람 같은 충족감을 추구하는 것은 자신의 위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의 태도다. 용기가 없는데 왜 굳이 용기 있는 사람인 척 행동해야 하는가?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 그렇지 않은 사람인가 하는 것은 ‘자신의 운명에 어떤 태도로 임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사회에 큰 공헌을 할 정도로 용기가 있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그는 사실 신경안정제를 복용하면서 간신히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고 개인적으로 용기 있게 살아가는 사람보다 못할까? 그렇지 않다. 양쪽 모두 솔직하게 스스로를 인정하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며 살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자신이 어두운 성격이라고 해서 밝고 행복한 사람을 부러워할 필요도 없다. 증오로 가득 찬 부모와 같은 지붕 아래에서 생활한 사람과 사랑이 넘치는 부모와 같은 지붕 아래에서 생활한 사람은 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똑같은 수준의 심리적 안정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태도다.
증오로 가득 찬 부모와 함께 생활하면서 늘 밝은 표정을 짓는 행동은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래서는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수 없다. 부모의 열등감을 치유하기 위한 치료제처럼 자란 아이와 본인 스스로의 성장을 위해 자란 아이는 당연히 다르다. ‘치료제처럼 자란 아이’는 부모가 가슴에 끌어안고 있는 마이너스적 감정의 배출구 역할을 하며 자란다. 예를 들면 부모에게 ‘너 따위는 살 가치가 없어’라는 식으로 경멸을 받으면 자란 사람이다. 부모로부터 ‘이런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식의 비현실적인 기대를 받으며 자란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야단을 맞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부모의 노예로 성장한다. 자신의 본성을 억누르고 그저 ‘착한 아이’가 되려고 노력한다. ‘치료제처럼 자란 아이’가 자신의 위치를 잘 이해하려면 어떤 사고를 갖추어야 할까? 부모에게 할 수 없는 일을 요구받으며 자랐다면, 성인이 된 다음에도 잘못된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 자신의 위치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기본적인 태도다. 특히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강한 욕구 때문에 잘못된 선택을 해서는 안 된다.
2장 열등감에서 벗어난다
다른 사람보다 나아진다고 행복해지지 않는다
심각한 열등감이 있는 사람은 무엇보다 우월감을 우선시하기 때문에 다른 감정이 뒤로 밀려나버린다. 이런 사람이 결혼을 하면 자신이 결혼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독신 시절과 마찬가지로 행동한다. 부모가 되어도 마찬가지다. 자녀가 있을 때와 없을 때는 사회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언행이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자신이 부모라는 자각이 없기 때문에 독신의 즐거움을 맛보면서 동시에 자녀로부터 얻는 행복감도 맛보려 한다. 이것을 신경증적 욕구라 한다.
정신분석학자 카렌 호나이는 신경증적 욕구의 특징으로 “어울리는 노력을 하지 않고 바라기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경우 결혼 생활을 유지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결혼 생활이 유지되기를 바란다. 또한 나이를 먹어도 자신이 나이를 먹었다는 사실 역시 이해하지 못한다. 어떤 여성은 움직여서 돈을 버는 것은 싫어하면서 명품 핸드백을 가지고 싶어 한다. 이것은 모두 자신의 위치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착각이다. 자신의 위치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성숙한 어른의 조건이다.
욕구 불만에 차 있는 토끼가 있다. 그리고 자기 부재, 자기 상실에 빠져 있는 거북이 있다. 이들이 이솝 우화에 등장하는 ‘토끼와 거북’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거북은 본래 자신이 있어야 할 물속 세계에서 뛰쳐나와 육지로 기어오른다. 모래 위에서 거북은 편하고 빠르게 걸을 수 없어 좌절감을 맛본다. 이 거북처럼 최선을 다해 노력을 해도 뭔가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에는 자신이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살아갈 장소를 잘못 선택하면 이상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토끼가 말을 걸어온다. “거북아, 넌 왜 그렇게 느리니? 세상에서 너만큼 걸음이 느린 동물은 없을 거야.” 이는 명백히 쓸데없는 참견이지만 거북은 자기도 모르게 “나는 느리지 않아!” 하고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며 토끼의 페이스에 말려든다.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장소를 선택하여 잘못된 상대를 만나고 잘못된 삶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거북은 토끼와 달리기 경쟁을 해서는 안 된다. 토끼가 “왜 그렇게 느리니?” 하고 참견을 하면 “나는 토끼가 아니고 거북이기 때문이야”라고 대답해야 옳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북은 절대로 토끼에게 휘둘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솝 우화에 등장하는 거북에게는 중심축이 없다. 그래서 “나는 거북이다”라는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그 때문에 토끼에게 휘둘려 무모하고 의미 없는 경쟁을 한다. 이와 관련하여 프로이덴베르거는 ‘탈진 증후군’이라는 개념을 생각해 냈다. 탈진 증후군에 걸리는 이유는 문제가 있는 보트에 올라타기 때문이다. 문제 있는 보트를 선택한 이상 아무리 열심히 노를 저어도 앞으로 나아가기가 어렵다. 그런데도 상황을 판단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죽을힘을 다해 노를 젓는다. 이런 의미 없는 의지와 노력 때문에 그들의 내면세계는 결국 붕괴된다.
설사 거북이 토끼에게 이긴다고 해도 자기 상실이라는 심리 상태는 바뀌지 않고, 불행한 삶도 변하지 않는다. 불행한 사람, 불안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이기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안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래서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우화는 거북이 이기는 내용으로 그려져 있지만 누가 이기든지 상관은 없다. 승리를 거둔 쪽은 다음에는 사슴과 경쟁해서 이기고 싶을 테니까. 이것이 내가 말하는 데모스테네스 증후군이다. 아무리 큰 성공을 거두어도 불안정한 자아는 변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큰 성공을 거둔 데모스테네스도 결국에는 자살로 삶을 마감한 것이다. 성공을 거두고 자살을 하는 사람은 많이 있다. 심리학 교수 마틴 셀리그먼은 이것을 두고 ‘성공한 사람의 우울증’이라고 했다. 거북이 누가 오래 살지를 경쟁한다면 올바른 선택이다. 물속에서 거북끼리 경쟁을 하는 것도 올바른 선택이다. 하지만 육지에서 토끼와 달리기 경주를 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보트에 올라타는 것과 같다. 애당초 토끼의 영역인 육지에 거북이 합류하는 것 자체가 정상이 아니다.
열등감이 강하면 무리한 행동을 한다
어느 유명 대학에 입학한 대학생의 이야기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에 심각한 열등감에 휩싸여 있었다. 그래서 유명 대학에 입학하면 열등감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학에 입학한 후 동아리에 가입해서 다른 친구들을 상대하면서 더욱 강한 열등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 친구들은 깊은 사고력을 갖추고 있어요. 제게는 다른 삶이 더 어울리는 것 같아요.” 때로는 조증 증세도 있었는지, 고등학교 시절에 ‘나는 신이다!’라거나 ‘세계를 정복할 것이다!’라는 생각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로 실행에 옮기기 위해 군사학 등을 연구하기도 했다. 이것은 심각한 열등감, 달리 표현하면 자신의 위치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의 병적인 사례다.
불안감에 사로잡힌 사람 중에는 “나는 인류를 구하고 싶다”고 역설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착각을 ‘메시아 콤플렉스’라고 부르는데, 이 역시 자신의 위치를 올바르게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의 사고 가운데 하나다. 물론 이런 사람은 절대로 인류를 구할 수 없다. 자신이 그 일을 하기에 어울리는 사람인지 냉정하게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자신의 위치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과 자신의 관계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노력을 할 경우 반드시 그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된다.
반대로, 자신의 체력은 기껏해야 동네 뒷산 정도를 오를 수 있는 수준인데 무모하게 히말라야를 등반하겠다고 나선다면 당연히 그 노력은 보상받을 수 없다.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는데도 되는 일이 없어”라고 불만을 털어놓는 사람이 있다. 옆에서 봐도 정말 열심히 노력하지만 노력만큼의 보상을 받지 못한다.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노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인간관계에서도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신이다!”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심리적 토양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신처럼 대우를 받고 싶다는 심리다. 그 정도로 애정에 굶주려 있다는 증거이고, 그렇게까지 주변 사람들로부터 거부당하고 있다는 증거다. 현재의 삶이 괴롭다는 뜻이다. 칭찬을 듣고 싶지만 사람들은 그를 칭찬해 주지 않는다. 또는 칭찬을 듣고는 있지만 더 많은 칭찬을 원한다. 이런 경우, 신이 되면 자신의 바람을 실현시킬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신이다!”라고 자신을 신격화시켜 현실을 초월하고, 자신의 불만을 해소하려 한다.
이것은 결국 주변 사람들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기도 하다. 그렇게라도 외치지 않으면 현실을 견뎌낼 수 없다. 하루하루가 두렵고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주변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나는 신이다!”라고 말하는 청소년은 외로움에 휩싸여 있다. 마음속에도 주변 사람들에 대한 증오가 가득 차 있다. 본인은 마음속에 존재하는 고독이나 증오를 깨닫지 못하지만 무의식에는 주변 세계가 모두 적이라는 인식이 심어져 있다. “나는 신이다!”라는 말에서의 ‘나’는 그 자신의 살기가 투영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 해결 방법은 지금 하고 있는 일, 지금 해야 할 일을 묵묵히 실행하는 것이다. 그렇게 노력하다 보면 자신에게 어울리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그들에 의해 길이 열린다. “나는 신이다!”라는 비현실적인 생각을 하면 그 순간부터 이상한 사람들이 모여든다. 이런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가장 어려운 문제는 평범한 생활이다. 하지만 그를 정말로 구원해 주는 것 역시 평범한 생활이다. “나는 신이다!”라는 착각을 버리지 않는 한 그는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다. 자신의 위치를 잘못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행복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3장 인간관계가 원만하지 않은 원인을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