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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 잊지 못할 대한민국 감성여행지

남민 지음 | 원앤원스타일
내 인생에 잊지 못할 대한민국 감성여행지

남민 지음

원앤원스타일 / 2014년 7월 / 500쪽 / 18,000원





광양 매화마을 - 매화 꽃망울 터지던 날, 법정 스님 살며시 오셨네



홍쌍리 새댁, 45만 평의 매화동산을 일구다

스물세 살의 밀양 아씨 쌍리가 전라도 광양 산골마을로 시집온 것은 1965년이었다. 집 앞에 섬진강이 유유히 흘러가는 아름다운 마을이었지만 먹고살기가 막막했던 시절, 이 산골마을에는 말동무조차 없었다. 감수성이 풍부했던 쌍리 새댁은 남달리 외로움을 많이 탔다. 결혼한 지 일 년이 지나고 하루는 집 뒷산에 올랐다. 이날따라 하얀 백합이 유난히 가슴속 깊이 사무쳤다. 그 꽃잎 속에 눈물이 방울방울 맺혀 있는 듯했다. 꽃잎을 툭 쳤다. 눈물이 또르르 쏟아졌다. 쌍리 새댁 입에서는 순간 즉석에서 시가 흘러 나왔다.

“외로운 산비탈에 홀로 핀 백합화야. 니 신세나 내 신세나 와 이리 똑같노. 그렇지만 니는 니 향으로 산천을 다 보듬지만 나는 사람이 그리워서 몬살겠다.”라고 읊조리며 앞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앞에는 지리산이요, 등 뒤에는 백운산이 받치고 섰고, 가운데 흐르는 섬진강의 물안개는 솜이불을 덮어놓은 양 아름다웠다. 문득 쌍리 새댁은 ‘내가 오늘 살다 내일 도망갈지라도 이곳에 천국을 한번 만들어봐야겠다.’라는 생각이 불타올랐다.

그 하얀 꽃에 반한 쌍리 새댁은 시아버지가 심어 둔 매화나무를 늘려나갔다. 하얀 매화가 만발할 아름다운 동산을 꿈꾸면서 그 넓은 밤 나무동산에 매화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돈도 안 되는 매화나무가 차곡차곡 밤나무 자리를 채워나갔다. 1960년대는 밤을 1가마 팔면 쌀을 2~3가마를 살 수 있었던 시절인데 이 젊은 새댁은 너무나도 엉뚱한 일을 시작했다. 매실이 열려도 동네 사람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지만 쌍리 새댁은 가파른 산 위까지 기어올라 빼곡히 심었다. 45만 평 밤나무동산의 잡초를 다 뽑고 매화를 심는 데 5년이 훌쩍 지났다.

법정 스님 ‘최면’에 걸린 홍쌍리 여사

그녀는 외로웠지만 이렇게 꿈은 영글어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시아버지와 시숙부가 남양(경기도 화성)에서 광산업으로 망해 하루가 멀다 하고 빚쟁이들이 달려들어 엉키고 찢기고 하는 일이 일상사가 되어버렸다. 옷이 찢기고 머리카락은 뽑히고 몸에 멍들지 않은 날이 없었다. 45만 평의 땅도 날렸다. 견디다 못해 머리를 짧게 자르고 옷도 미제 스모바지에 야전점퍼를 입으며 11년간을 버티며 살았다. 다시 땅을 조금씩 찾아왔지만 단아하고 곱던 여인은 하루아침에 남정네 차림이 되었다.

빚더미로 힘든 시절을 보내던 어느 봄날, 하얀 매화가 눈꽃같이 피던 날 스님 한 분이 오셨다. 스님은 매화동산을 거닐었다. 그 후에도 꽃이 피면 찾아왔다. 쌍리 여사는 ‘웬 중이 자꾸 오나.’ 하고 생각했다. 스님은 매화동산을 둘러보면서 뭐라고 한마디씩 툭툭 내뱉고 갔다. 그러기를 몇 차례, 어느새 스님이 오면 쌍리 여사는 자신도 모르게 스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동산을 거닐었다. 스님은 “여긴 이렇게, 저긴 저렇게 나무를 심어라.” 했고 “집은 이렇게, 길은 저렇게 내라.”고 했다. 쌍리 여사는 최면에 걸린 듯 스님이 하라는 대로 따라 하기 바빴다. 그 스님은 법정 스님이었다. 송광사 불일암에서 수행하던 시절 이곳을 자주 찾았다. 이후 스님은 쌍리 여사를 딸처럼 대하고 매화동산 가꾸는 일에 ‘훈수’했다.

어느 날 법정 스님은 “좌청룡 우백호에 코가 있고 입이 있는데 턱이 없다.”고 했다. 그 말이 도통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던 쌍리 여사는 나중에야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꺼진 땅을 두고 한 말이었던 것이다. 법정 스님은 이어 “김대중 대통령의 헬기가 앉을 자리를 만들 수 있는가?”라고 해서 그 땅을 다 메우고 나니, 법정 스님은 “이제 턱이 있어 됐다.”고 하면서 “빚 많이 졌지? 이제 이 땅 팔고 나가지만 않으면 밥은 먹고 산다.”며 쌍리 여사를 이 땅에 붙들어 맸다. 이후에도 법정 스님은 강원도와 서울에 머물면서도 쌍리 여사가 도움을 요청하면 한걸음에 달려와 쌍리 여사의 일을 도왔다.

30리 섬진강길 매화향에 취하다

전 국민의 관광지 ‘매화마을’은 이렇게 탄생했다. 그 주인공은 대한민국 식품명인 제14호 홍쌍리 여사가 운영하는 ‘청매실 농원’이다. 홍쌍리 여사는 아무도 쳐다보지 않던 매실을 우리 식탁에 올린 장본인이자 전남 광양시 다압면 매화마을의 대명사다. 호남의 명산이 백운산 자락에 터를 잡고 섬진강 물기를 빨아들여 향기로운 매화꽃을 피운 뒤 봄바람에 날려 보냈다. 이웃들도 매화농장을 가꾸기 시작했다. 섬진마을 거리마다 길게 줄지은 매화꽃 길은 이제 섬진강을 따라 10km 넘게 수놓는다. 광양이 매화의 본향(本鄕)이 된 것이다.

청매실 농원의 넒은 마당에는 매실을 담가둔 옹기 2천여 개가 줄지어 있다. 이른 시각인데도 관광객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다. 내가 찾은 날에는 흰 매화가 산비탈 아래쪽에서는 절반 이상 핀 상태이고, 고도를 높여 올라갈수록 아직 피지 않았다. 같은 땅이지만 약간의 고도차에도 꽃망울은 섬세한 차이를 드러냈다. 반면에 홍매화는 활짝 피어 마을을 온통 붉게 물들였다. 이 일대는 섬진강을 따라 30리 길에 매화꽃이 피어 향을 날린다. 대나무 숲길을 지나고 농원 가운데쯤 이르니 임권택 감독의 영화 <천년학> 촬영장이 운치 있게 자리하고 있다.

청매실 농원 아래쪽 광장에는 매화축제 준비가 한창이었다. 매화축제는 1995년 홍쌍리 여사가 마을 사람들과 동네 축제로 시작해 이후 광양시가 주도하기에 이르렀고 2012년부터는 국제적인 축제로 격상시켰다. 매년 매화축제를 찾는 관광객이 10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매화가 피는 약 한 달간은 지역 주민 수십 명이 청매실 농원에서 농산물을 판다. 이곳에서 한 달 동안 농산물을 판매해서 얻는 이익이 일 년 농사보다 많다고 하니 ‘큰 장’이 서는 셈이다. 은은한 매화향은 이처럼 시골 마을의 지역경제도 살리고 있었다.



단양 도담삼봉 - 신이 빚어낸 한 폭의 동양화



질투하는 처봉, 사랑받는 첩봉

도담삼봉(島潭三峰)은 단양팔경 중에서도 가장 동양적 정취를 풍기는 곳이다. 한 폭의 수묵화 같은 경치 때문에 옛 선비와 묵객들이 찾아 풍류를 즐긴 단골장소였듯이 오늘날에도 사람을 불러 모으는 명소다. 천의 얼굴을 가진 도담삼봉은 한 번 봐서는 그 묘미를 만끽할 수 없다. 비오는 풍경이 다르고 눈 덮인 풍경 역시 다르다. 물안개에 휘감긴 모습도 봐야 하고 일출과 일몰도 봐야 한다. 그런데 아마 10번은 찾아와도 그 많은 것을 다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보여줄 듯 말 듯한 이 도담삼봉이 일종의 ‘밀당’을 하는 연인처럼 매력을 끈다.

도담삼봉은 단양읍내에서 남한강 상류 쪽으로 차로 5분 거리 강 가운데에 3개의 기암으로 우뚝 솟아 있다. 바위가 마치 고깔(원추형)처럼 생겨 재미있다. 3개의 바위 중 가장 큰 바위가 남편봉이다. 그런데 이 남편은 바람기가 좀 있다. 양옆에 두 여인 바위를 거느렸다. 상류 쪽 작은 기암이 처봉(妻峰) 그리고 하류 쪽이 첩봉(妾峰)이다. 질투심에 가득 찬 처봉은 외로운 모습이다. 하지만 첩봉은 사랑받는 모습이 역력하다.

조선시대에는 첩문화가 흔했을 터이니 풍류를 즐기던 선현들은 이렇게 의미를 새기며 이곳에서 술잔을 기울였을 것이다. 3개의 바위가 시인에게는 시상을 안겨주었고 묵객에게는 그림이 되어주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사진작가에게는 멋진 피사체가 되어준다. 바위 3개만 있으면 무언가 부족했겠지만 이곳에는 마침 남편봉에 운격 있는 정자까지 있어 극한 풍치를 자아낸다. 바로 삼도정(三島亭)이다. 물안개가 휘감길 때는 형언하기 힘든 장관을 연출한다. 이 정자에 걸터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풍류를 즐겼을 상상을 하니 이보다 더 낭만적인 운치가 어디 있을까 싶다.

이 경치에 시 한 수 안 남긴 선비 없다

도담삼봉을 더 심오하게 느껴보는 방법 중 하나가 선현들이 남긴 한시를 읽어보는 것이다. 수려한 경치를 몸소 느끼고 그 흔적을 살펴보고 한시 몇 수라도 읊조리면 멋진 여행이 될 수 있다. 조선시대 단양군수, 충청도 관찰사, 암행어사 그리고 유람 온 선비 등 총 180명이 노래한 한시 천여 수가 수록된 책도 있지만 그것을 다 보기는 무리다. 퇴계 이황 등의 한시 몇 수만 봐도 당시 선비들의 풍류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다.

산은 단풍잎 붉고 물은 옥같이 맑은데(山明楓葉水明沙, 산명풍엽수명사)

석양의 도담삼봉엔 저녁놀 드리웠네(三島斜陽帶晩霞, 삼도사양대만하)

신선의 뗏목을 취벽에 기대고 잘 적에(爲泊仙斜橫翠壁, 위박선사횡취벽)

별빛 달빛 아래 금빛파도 너울지더라(待看星月湧金波, 대간성월용금파)



위의 한시는 퇴계 이황이 1548년 단양군수로 부임했을 때 지은 시다. 이 외에도 도담삼봉을 노래한 시는 무수히 많다. 영의정을 거쳐 영중추부사가 된 이종성은 조물주의 신기한 솜씨로 빚은 도담삼봉이 진시황이 그린 영주산과 봉래산보다 낫다고 노래했다. 도담삼봉은 선비들의 시심(詩心)을 자극하는 원천이었다. 또한 조선의 화백인 단원 김홍도와 최북, 이방운이 도담삼봉을 화폭에 옮겼고, 추사 김정희도 암행어사 시절에 이곳을 놓치지 않았다. 이 묵객들은 같은 삼봉을 보고도 저마다 상상의 나래를 달리한 작품을 남겼다. 조선 최고의 묵객들이 펼친 화폭을 견주어보는 것도 또 다른 재미다. 오늘날 디지털기기의 굴레 속에서 자연을 벗 삼아 명상의 시간을 가져보자. 나는 오늘도 선현들이 바라보았던 바로 그 풍광을 나만의 시각으로, 느린 시간을 즐겨본다.

정도전, 호를 ‘삼봉’이라 짓다

‘도담삼봉’ 하면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을 빼놓을 수 없다. 정도전은 어린 시절을 단양에서 보냈다. 그의 유년 시절은 불우했다. 정선 사람들은 아름다운 도담삼봉이 얼마나 탐이 났던지 남한강 상류인 강원도 정선의 삼봉산이 홍수로 떠내려 와 이곳에 멈춰 도담삼봉이 되었다며, 단양 사람들에게 이 삼봉을 즐기는 대가로 세금을 내라고 요구했다. 단양 사람들은 거절했고 양쪽이 화해의 실마리를 풀지 못하자 소년 정도전이 기지를 발휘했다.

정도전은 “우리가 삼봉을 떠내려 오라 한 것도 아니요. 오히려 물길을 막아 피해를 보고 있는데 아무 소용 없는 봉우리에 세금을 낼 이유가 없으니 도로 가져가시오.”라며 반격했다. 정선 사람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했고 다툼은 말끔히 해결되었다. 도담삼봉에 각별한 애정을 갖게 된 정도전은 훗날 자신의 호를 ‘삼봉’이라고 지었다. 주차장 광장 옆에 정도전의 동상도 세워져 있다.

이런 천혜의 경치를 품은 도담삼봉도 아픔이 있었다. 충주호가 생기고 태풍이 몰아쳤지만 수도권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충주호 수문을 마음껏 열지 못했다. 그 결과 이곳 정자까지 침수된 일이 있었다. 지금도 맑은 날이면 도담삼봉의 절반이 물에 잠겼던 흔적을 볼 수 있다. 또한 과거 태풍으로 정자가 두 차례나 무너지기도 했는데, 이곳에 자리한 기업 성신양회 회장이 정자를 튼튼하게 지어 군에 기증했다고 한다.

백 척의 돌무지개, 석문

상류 쪽 가파른 산기슭에는 단양팔경의 또 다른 명소인 석문(石門)이 있는데 함께 둘러봐야 할 곳이다. 지형이 무지개처럼 둥글게 떠 있고 그 아래에는 커다란 구멍이 난 것처럼 뚫려 있어 석문이라 부른다. 도담삼봉에서 상류 쪽 산의 가파른 계단을 올라 오솔길을 잠시 걸어가면 있다. 5분 정도의 거리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도 귀찮다고 여겨 도담삼봉만 보고 가지만 그냥 돌아가지 말고 꼭 보기를 권한다. 이 석문을 산 쪽에서 바라보면 굴속으로 보이는 남한강과 그 너머 도담리 마을의 전경이 마치 카메라 렌즈 속으로 들어온 듯 아름답다.

이 석문의 경치도 무척 아름다워 옛 선비들이 유명한 시를 많이 남겼다. 추사 김정희는 『완당집(玩堂集)』에 ‘석문(石門)’이라는 제목의 멋진 한시를 읊었다.

백 척의 돌무지개가 물굽이를 열었으니(百尺石霓開曲灣, 백척석예개곡만)

신이 빚은 천불에 오르는 길 아득하네(神工千佛杳難攀, 신공천불묘난반)

거마가 오가는 발자취를 허락하지 않으니(不敎車馬通來跡, 불교거마통래적)

다만 연기와 안개만이 오갈 뿐이네(只有煙霞自往還, 지유연하자왕환)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이해조는 석문이 있는 산을 중국의 별천지 ‘구지산(仇池山)’에 비유하고 돌부채가 하늘에 매달려 있다고 노래했다. 구름다리처럼 생긴 석문 위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위험하므로 오르지 않는 것이 좋다. 이곳은 카르스트 지형(석회암 대지에 발달한 침식 지형)이어서 언제 균열이 생겨 무너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제천 옥순봉ㆍ단양 구담봉 - 퇴계를 사모한 애틋한 두향



마흔여덟 퇴계와 열여덟 두향의 운명적 만남

18살의 관기(官妓) 두향은 빼어난 미모에 시와 거문고에 능했다. 어린 나이에 매화 가꾸는 재주도 뛰어났다. 미모와 지성을 두루 갖춘 두향은 새로 부임하는 군수(사또)를 모실 관기로 배정받았고, 영특했던 그는 사또의 취향을 미리 파악하며 맞을 준비를 모두 마쳤다. 1548년 정원, 조선 최고의 학자 퇴계 이황이 단양 군수로 부임했다. 그의 나이 48세 꽃중년이었다. 나이와 신분을 초월한 이 둘의 운명적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퇴계는 부임 전후 몹시 힘든 시기를 겪었다. 첫 부인에 이어 두 번째 부인과도 사별했고, 을사사화로 삭탈관직되었다가 복직되자 단양 군수를 자원한 것이었다. 또 부임 한 달 만에 둘째 아들 채마저 잃었고 그 자신은 늘 병마에 시달렸다. 선비의 기품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으나 그도 마음만은 아팠던 때였다. 그 무렵 두향이 곁에 있었다. 두향은 퇴계 역시 매화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퇴계에게 매화를 선물했다. 그것은 돌아가신 어머니가 물려준 것으로 두향이 8년간이나 길러온 화분이었다. 청백리(淸白吏)인 퇴계는 그것도 뇌물이라 생각해 받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두향은 “매화는 고상하고 격조가 높으며 향기로운 데다가 엄동설한에도 굽힘이 없는 기개를 가졌으니 우리 고을도 그렇게 잘 다스려 달라.”며 퇴계를 설득했다. 이 말을 들은 퇴계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퇴계의 마음을 사로잡은 두향은 구담봉과 옥순봉 근처 두항리라는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2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10살 때 어머니까지 잃은 외로운 처지에서 관기 신분이 되었다. 그의 이름은 마을 이름과 비슷한 발음을 따와 두향으로 지었다. 자라면서 옥순봉의 아름다움에 빠져 있던 두향은 청풍(현재의 제천) 관할인 옥순봉을 단양에 편입시켜달라고 새 사또 퇴계에게 청을 넣었다. 하지만 청풍 부사가 거절했다. 그러자 퇴계는 옥순봉 석벽에 ‘단구동문(丹丘洞門)’이라는 글을 새겨 ‘단양의 관문’임을 선언했다. 훗날 청풍 부사가 그 글씨에 감탄했고 퇴계는 옥순봉을 단양팔경 중 하나로 편입했다. 지금은 물론 제천 땅이다. 이 단구동문 암각은 안타깝게도 호수 속에 잠겨 있다.

단양팔경 완성 그리고 이별

두 사람은 산수가 수려한 남한강 주변을 다니며 시를 읊고 거문고를 탔다. 그리고 함께 단양팔경을 완성해냈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퇴계가 단양 군수를 10개월 만에 그만두게 된다. 자신의 친형 온계 이해가 충청도 관찰사(도지사)로 부임하자 “형제가 한 지역에서 상하관계로 일하면 나랏일이 공평함을 잃을 수도 있다.” 해서 이웃인 경상도 풍기 군수로 자원한 것이다. 이별의 술잔 앞에서 퇴계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일이면 떠난다. 기약이 없으니 두려울 뿐이다.” 말없이 먹을 갈던 두향이 붓을 들어 서글픈 심정을 시 한 수로 표현했다.

이별이 하도 설워 잔 들고 슬피 울제

어느덧 술 다하고 님마저 가는구나

꽃 지고 새 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이후 두 사람은 영영 만날 수 없었다. 퇴계가 떠나자 두향은 관기에서 나와 고향마을 강선대 옆에 초가를 짓고 퇴계를 그리워하며 외롭게 생활한다. 단숨에라도 달려가 만나고 싶었지만 공직에 있는 퇴계를 위해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두향이었다. 퇴계 역시 두향을 잊지 못했다. 이들은 가끔 편지를 주고받았다. 퇴계는 두향에게 쓴 편지에 시 한 수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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