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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옥과 함께하는 클래식 산책

최영옥 지음 | 다연
최영옥과 함께하는 클래식 산책





최영옥 지음

다연 / 2014년 7월 / 312쪽 / 15,000원





시련에 대처하는 영웅의 자세_ 피아노 소나타 17번 <폭풍>





피아노 소나타 17번 <폭풍>은 1802년 작곡된 것이다. 베토벤이 평생에 걸쳐 작곡한 피아노 소나타 32곡은 피아노 음악의 금자탑으로 손꼽히고 있는데, 이 중 31번의 세 곡 중 두 번째 곡이다. 당시는 귀가 멀기 시작한 베토벤이 절망의 늪에 빠져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썼던 때이다. 조수였던 신들러가 이 곡을 이해할 단서를 달라고 하자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폭풍)」를 읽어보라고 했다는 말 때문에 ‘템페스트’라는 별칭을 얻은 곡이다.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는 단 하루라는 짧은 시간, 외딴 섬이라는 제한된 공간, 그곳에서 펼쳐지는 그리 길지 않은 이야기다. 밀란의 대공이던 푸로스퍼로가 욕심 많은 동생 앤토니오에게 공국을 빼앗기고 어린 딸과 함께 무인도에 버려지면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우연한 계기에 마법의 힘을 얻은 푸로스퍼로는 복수를 꿈꾸지만 결국 증오와 분노를 내려놓고 용서와 화해로 끝을 맺는다. 간결하지만 분명하고 단순하게 하나의 목소리를 위해 한눈팔지 않는 이야기인데, 갈등, 고뇌, 분노 같은 것들은 비교적 억제되어 있다. 대신 용서와 화해라는 메시지가 채워져 있다. 소나타 <폭풍>을 만들었던 베토벤의 무게중심도 ‘분노’보다는 ‘화해’였을까? ‘Yes’일 것이다.



우리가 베토벤을 ‘악성(樂聖)’으로 추앙하는 이유는 그가 평생을 발목 잡았던 고난과 불운을 딛고 일어선 거인이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평범한 인간들로선 가늠할 수도 없을 고통을 극복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용기과 화해, 그로써 얻게 되는 ‘환희’를 우리에게 제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원작의 내용이 간결한 만큼 한 음 한 음에 의미를 담았으면서도 곡을 이루는 데 꼭 필요한 음들로만 이루어진 <폭풍>을 듣다 보면 저절로 깨닫게 될 것이다. 특히 숨 막히게 도전해오며 격하게 터지는 불꽃같은 3악장을 대하면,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스페셜리스트 굴렌 굴드의 유독 숨 가쁜 터치를 듣게 된다면 말이다.



화가가 시력을 잃었다면 최대의 형벌일 것이다. 음악가가 청력을 잃었다면 이 또한 다르지 않을 터. 보통 사람이라면 무릎이 꺾이고 좌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웅의 다른 점은 시련에 대처하는 자세이리라. 베토벤은 그런 어마어마한 시련 속에서도 음악을 잃지 않았고 존재를 상실하지 않았다. 잃었거나 빼앗겼을 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악성다운 격렬한 용기로 웅변하며 우리를 인도한다. 삶이 격하게 요동칠 때, 가끔 길을 잃어 방향을 찾고자 하는 이들을 대할 때 이 음악을 권하고 싶은 이유다.



힘찬 축포와 함께 한 해를 아듀!_ <1812년 서곡>





The 4th of July, 7ㆍ4절이라고 불리는 이날은 미국의 독립기념일이다. 1776년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한 날이다. 이날을 기리기 위한 많은 축제가 열리며 독립기념일의 상징인 불꽃놀이가 전국적으로 펼쳐지는데, 이와 함께 종종 연주되는 것이 차이콥스키의 <1812년 서곡>이다. 1812년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영국이 미국의 해운업을 규제하려 하자 영국과 미국 사이에 일어났던 전쟁을 떠올리는 의미에서라고 한다. 1812년이라는 공통점이 있긴 하지만 차이콥스키의 <1812년 서곡>이라니……. 축포를 쏘아야 하는데 마침 적절한 음악이기도 하겠고, 어쨌든 재미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 장면을 보는 프랑스인들과 러시아인들은 또 어떤 기분일까 싶기도 하고…….



<1812년 서곡>은 나폴레옹이 60만 대군을 이끌고 모스크바를 침공하였다가 혹한과 러시아군의 공격으로 패퇴한 역사적 사실을 묘사한 곡이다. 러시아에서는 이를 ‘조국 전쟁’이라 부르는데, 영하 40도의 혹한이 이어지는 러시아의 기후를 견디지 못한 프랑스 군인 50여만 명의 목숨이 스러져간 채 퇴각했던 사건을 러시아인들의 심정으로 그리고 있다. 차이콥스키가 이 곡을 작곡한 것은 1880년 당시 모스크바 음악학교 교장이던 니콜라이 루빈시타인의 권유 때문이었다. 1812년 모스크바를 침공한 프랑스의 65만 대군을 물리친 일은 러시아 사람들에게 가장 영광스런 역사적 사건 중 하나인 만큼 차이콥스키는 관현악 작곡가의 뛰어난 기량을 모두 발휘, 이 저항과 승리의 과정을 그림처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제정 러시아 국가 ‘신이여, 차르를 보호하소서’ 선율로 시작되는 현악기들의 숨죽인 연주가 전쟁의 불길한 그림자를 표현하며 시작되는 음악은 이내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로 연결된다. 러시아 민중의 고통과 슬픔을 느끼게 하는 네 개의 러시아 민요 선율이 ‘라 마르세예즈’와 격렬하게 얽히더니, 어느덧 러시아 민요가 ‘라 마르세예즈’를 압도하며 전쟁은 막바지로 달려간다. 마침내 러시아 국가 선율이 포르티시모로 울려 퍼지며, 찬란한 크렘린의 종소리와 16발의 대포 소리가 장대하게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나폴레옹 군을 물리치고 모스크바를 탈환한 러시아 민중의 기쁨과 환호가 더없이 생생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래서이다. 대포 소리를 묘사하는 큰북이 연주되는 부분에서 실제로 대포를 쏘는 일도 적지 않아서 축제음악으로도 최고다. 드물기는 하지만 서곡을 연주할 때 이 대목에 가사를 붙여 합창단이 노래하는 경우도 있다.



구소련 시절 서방세계와의 냉전을 종식하는 의미에서 소련은 이례적으로 자국의 예술가를 기리는 음악회를 가졌다. 이를 위해 선택된 예술가가 차이콥스키였고, 그의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는 콘서트가 레닌그라드 궁전에서 열렸다. 당시 소련을 대표하는 지휘자 유리 테미르카노프와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서방세계의 예술가 요요 마, 제시 노먼 등이 함께 호흡을 맞춘 역사적인 공연이 열렸다. 이날 레닌그라드 궁전을 뜨겁게 달구었던 피날레 음악이 <1812년 서곡>이었다. 자유로운 상상의 예술가를 그리 존중하지 않은 사회주의 체제가 자국의 예술가를 ‘냉전 종식의 상징’으로 내세웠던 탓일까? 이후 소련은 붕괴되었고, 러시아의 영광을 재현했던 <1812년 서곡>처럼 러시아가 부활했다.



지난 일이지만 내한하는 프랑스 오케스트라에게 기획사 측이 <1812년 서곡>을 주문하는 바람에 공연이 취소된 일이 있었다. 곡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었던 기획사 측의 실수다. 프랑스 연주팀이 이 곡을 연주하거나 녹음한 경우는 거의 없는데도 말이다. 따라서 미국 독립기념일에 위풍당당하게 연주되는 모습이 프랑스인들에게는, 또 러시아인들에게는 서로 다른 의미로 느껴질 것이다. 프랑스를 빼면 <1812년 서곡>은 그 장엄함으로 사랑받는 곡이다. 영화 <브이포 벤데타>와 <노다메 칸타빌레>, 2012년 12월 31일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제야음악회에서도 이 곡이 연주되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국가와 민족, 조국애, 스스로에 대한 정리와 재점검을 하는 데 더할 나위 없는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축포와 함께 어김없이 많은 이야기가 있던 2012년을 아듀! 기억될 만한 축제가 아닌가.



스칼라에 도전한 아이다의 그 남자_ <아이다> 중 ‘청아한 아이다’





막이 열리고 오페라가 시작되었다. 보무도 당당하게 등장한 이집트의 라다메스 장군. 마음속에 품고 있던 에티오피아의 공주 아이다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기 시작한다. 이름 하여 ‘청아한 아이다’이다.



영광스런 군대를 거느리고 싸워서 이긴다면, / 나 살아 돌아와 아이다에게 청혼하리라 / 그리고 그대를 위해 목숨 걸고 싸웠노라 말하리라



라다메스의 노래가 한껏 고조될 무렵, 급작스럽게 관객석에서 야유와 휘파람 소리가 터져 나왔다. 물론 스칼라 무대에서 드문 일은 아니었다. 가수에게 까다롭기로 소문난 스칼라 관객들이 노래나 연주가 마음에 안 들면 종종 벌이는 스트라이크였고, 가수들도 일종의 통과의례처럼 여기고 견디는 것이 보통이던 터였다.



그런데 이날은 이변이 일어났다. 야유와 휘파람이 나오는 순간 라다메스가 노래를 딱 멈추더니 쓰고 있던 투구를 벗어던지고 갑옷까지 벗어버리며 퇴장해버린 것이다. 오히려 얼음장이 되어버린 것은 관객들이었다. 한동안 입을 딱 벌리고 있던 관객들을 되돌아오게 한 것은 대역이던 안토넬로 팔롬비가 청바지 차림으로 뛰어나와 남은 무대를 노래하면서였다.



스칼라 극장 사상 최초로 주역 가수가 퇴장 소동을 일으켜 전 세계 언론마저 톱뉴스로 다루게 했던 주인공은 로베르토 알라냐였다. 알라냐는 ‘청중이 위협적이었다. 공산국가에서 그랬던 것처럼 내 자신을 맘대로 표현하는 데 불안을 느낀다’며 스칼라와 관계를 끊겠다고 선언했다. 게다가 세기의 커플로 불리며 사랑받고 있는 미모의 아내 소프라노 안젤라 게오르규의 스칼라 무대도 보이콧하겠다고 격분했다. 스칼라 측도 이에 맞서 ‘알라냐의 앞날이 심히 염려된다’는 협박성 유감을 성명으로 발표했다.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오페라의 거장 베르디의 대표작 <아이다>를 두고 벌어진 이날의 사건은 사실 단순한 일회성 해프닝은 아니었다. 물론 성악가들의 작은 실수 하나에도 잔인할 만큼 야유와 혹평을 늘어놓는 스칼라 관객들에 대한 해묵은 앙금이 꼬투리가 되었겠지만, 그보다는 알라냐라는 가수에 대한 이탈리아인들의 유감 때문일 것이라는 게 중론이었다.



알라냐는 20세기 후반 가장 주목받는 테너 중 한 사람이다. 노래, 연기, 외모의 3박자를 두루 갖춘 가수인 데다가 아내 게오르규와 함께 꿈의 커플로 꼽혀왔다. 문제는 그가 이탈리아 시칠리아인 부모를 두고 있다는 것. 성악의 종주국으로서 맥이 끊길 위기에 놓인 이탈리아인들이 이것을 놓칠 리 없었다. 그리스 출신 마리아 칼라스에게 이탈리아 소프라노가 차지했던 최고의 스타 자리를 빼앗긴 이후, 다른 파트의 자리마저 타국 가수들에게 내어주고 있는 상황이 이탈리아의 오늘이다. 그런 이들에게 알라냐는 유일했던 이탈리아 테너 스타 파바로티를 이을 너무나 반가운 존재였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알라냐 자신은 프랑스에서 나고 자란 프랑스인이라고 얘기한다. 이는 우리도 확인한 바 있다. 지난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이탈리아와 프랑스가 맞붙었을 때 마침 알라냐는 그의 아내와 함께 공연 차 내한해 있었다. 그에게 기자들이 이탈리아와 프랑스 중 어느 나라를 응원할 것이냐 묻자 알라냐는 두말할 것도 없이 프랑스를 꼽았다. 그렇지 않아도 다혈질인 이탈리아 사람들에게는 속깨나 쓰린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 서로에 대한 유감이 <아이다> 무대를 통해 곪아터져버린 것이었다. 일각에서는 ‘프랑스인’임을 공언하고 다니는 알라냐를 벼르던 이탈리아 사람들의 계획된 보복이었다는 설도 있다. 알라냐 또한 이에 대한 강한 생각을 갖고 스칼라 공연에 임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돌았다. 물론 노래할 수 있는 무대가 다양하게 많아진 가수 입장에서 스칼라의 보이콧이 더 이상 공포가 아니었을 테니 악수(惡手)를 둔 쪽은 스칼라였다는 것이 유감이라면 유감이었을 뿐…….



아무튼 본의 아니게 알라냐가 보이콧한 <아이다>는 오페라의 백화점이라고 불릴 만큼 스펙터클한 걸작이며 오늘날 공연 횟수가 가장 많은 오페라다. 2013년은 베르디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는 해였다. 이 점에서 반드시 떠오르는 작품이라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휘황찬란한 이집트의 영광이나 화려한 개선 행진, 야자나무 잎이 무성한 나일 강변의 이국적인 밤 풍경 등을 비롯해 클라이맥스의 배경인 2층으로 나뉜 무대 등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2층에는 사랑했던 라다메스를 아이다에게 빼앗기고 상심에 빠진 왕녀 암네리스가, 무대 아래 지하 감옥에서는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며 죽어가는 라다메스와 아이다가 동시에 등장하는데, 거대하고 입체적인 비극이 이어지는 최고의 무대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다. 베르디를 국민 작곡가로 여겼던 이탈리아인들에게 분명 2013년은 축제의 해였을 것이다. 그들이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 최고의 이탈리아 테너까지 등장할 수 있었다면 더할 나위 없었을 테지만 말이다.



작별을 말할 땐 센스 있게, 유머 있게_ 교향곡 45번 <고별>





헝가리의 에스테르하지 가문은 많은 예술가를 지원해서 서양문화의 발달에 큰 기여를 해왔다. 그리고 결국 ‘교향곡의 아버지’가 된 하이든이라는 위대한 결과물을 남겼다. 하이든은 클래식 음악엔 유머가 없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신선한 유머와 센스로 미소 짓게 하는 음악들을 남긴 작곡가다. 생전에 무려 108여 개의 교향곡과 80여 개의 실내악곡, 4개의 오라토리오와 34개의 가극 등을 비롯한 수많은 음악 작품을 남겼다는 점도 위대하지만, 그의 음악을 아는 사람들은 그가 친근하고 인간적인, 그러면서도 유머와 기지 가득한 음악들을 남긴 작곡가라는 점을 더 높이 산다.



그런 하이든의 유머가 잘 드러난 작품들이 여러 개 있는데, 특히 음악회에 와서 졸고 있는 귀족들을 골려주기 위해 작곡했다는 ‘놀람 교향곡’은 유명하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작품이 바로 교향곡 45번 <고별>이다. 하이든 시대의 음악가들은 대개 귀족들의 후원으로 생활하거나, 아예 귀족들의 집에 속한 전속 음악가로 살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고별>을 작곡할 당시 하이든은 에스테르하지 후작의 성에서 전속 악단을 이끄는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에스테르하지 후작의 성은 시내에서 한참 떨어진 숲 속에 있었다. 그러다 보니 하이든을 비롯한 악단 모두가 가족과 떨어져 생활했는데, 문제는 1년이 넘도록 후작이 휴가를 줄 생각을 하지 않는 데서 비롯되었다.



단원들의 원성이 점점 높아지면서 악단의 책임자인 하이든은 후작에게 어떤 식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설명할까 고민했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음악을 택했다. 왠지 모르게 쓸쓸한 슬픔의 선율로 음악을 시작한 단원들은 하이든의 지시에 따라 무대 위에 켜 있던 촛불을 끄며 하나씩 퇴장했다. 연주는 계속 진행되고 마침내 클라이맥스. 제1바이올린이 마지막 촛불을 끄고 퇴장하자 지휘를 하던 하이든이 어둠 속에서 조용히 악보를 접고 돌아 나갔다. 결과가 어땠을까? 잠시 눈치가 없었을 뿐 머리가 아주 나쁘지는 않았던 후작은 이내 이들의 반항(?)을 알아채고 껄껄 웃으며 흔쾌히 휴가를 내주었다.



교향곡 <고별>은 그래서 들을 때마다 센스 있게, 그러면서도 밉지 않게 작별을 고한 하이든의 기지가 떠올라 유쾌해지는 작품이다. 물론 어떤 작별이 슬픔 없이 유머로만 가능하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할 수만 있다면 미소 지으며 상쾌하게 작별을 고하고 또 가뿐히 받아들이고 마음을 비우는 법, 그것 또한 살아가는 또 하나의 참신한 모양새 아닐까? 모쪼록 우리 일상의 소통은 이렇듯 유쾌하고 원활하게 교류되길 바란다.



추운 날 더 애틋하게 그리운 외로운 소시민의 안주_ ‘명태’





마지막 곡은 ‘명태’였다. 공연 내내 진지했던 베이스 가수가 소주 한 병과 명태를 들고 나왔을 때 관객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가수는 노래를 시작했다. 아! 명태…….



검푸른 바다 바다 밑에서 / 줄지어 떼 지어 찬물을 호흡하고

길이나 대구리가 클 대로 컸을 때 / 내 사랑하는 짝들과 노상 꼬리 치고 춤추며 밀려다니다가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 밤늦게 시를 쓰다가 쐬주를 마실 때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 짜~악 짝 찢어지며 내 몸은 없어질지라도

내 이름만은 남아 있으리라 / 명태 명태라고 이 세상에 남아 있으리라





술이, 그것도 소주가 절로 확 당기는 노래다. 술을 즐기지 않는 이들도 소주가 생각날 정도니, 더 말해 무엇할까? 반드시, 우리나라 가수에게서 만나기 어려운 깊은 저음이 가히 독보적이라 할 수 있는 베이스 오현명의 익살맞으면서도 현학적인, 한편으로는 더없이 쫄깃쫄깃한 표현으로 불려진 ‘명태’여야 한다. 특히 ‘쐬주를 마실 때’ 하며 노래 중간 오현명이 뱉는 감탄사 ‘캬!’는 그가 아니고서는 절대 맛볼 수 없는 생생함이라, 들으면 들을수록 ‘명태=오현명’이라는 찰떡궁합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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