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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처럼 써라

정제원 지음 | 인물과사상사
작가처럼 써라

정제원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14년 7월 / 236쪽 / 13,000원





제1장 처음을 어떻게 쓸 것인가?



단순하게 써라

『안나 카레니나』는 “행복한 가정은 모두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를, 『모비딕』은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를, 『이방인』은 “오늘 엄마가 죽었다”를, 『논어』는 “즐겁게 공부하고 때때로 복습도 해보자”를 첫 문장으로 하고 있다. 대부분 글의 시작은, 문장이든 단락이든 이렇게 평범하다. 비범하게 평범하다. 글쓰기 초심자들이 가장 먼저 명심해야 하지만, 가장 나중에야 깨닫게 되는 것이 바로 평범하고 수수하게 글을 쓰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이다.

윌리엄 진서의 『글쓰기 생각쓰기』에 실린 글 중 하나인 「간소한 글이 좋은 글이다」의 도입 단락을 살펴보자. 작가이자 글쓰기 교수인 진서의 이 책은 초심자들에게 지난 수십 년 동안 꾸준히 사랑받아온 고전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대체로 글을 난삽하게 쓰는 병이 있다. 불필요한 단어, 반복적인 문장, 과시적인 장식, 무의미한 전문용어 때문에 숨이 막힐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 사람들은 대체로 뭔가 있어 보이기 위해 말을 부풀리는 경향이 있다. 잠시 후 상당한 양의 강우가 예상된다고 말하는 비행기의 기장은 비가 올 것 같다고 말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문장이 너무 간소하면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간소한 글, 즉 좋은 글을 쓰는 비결은 무엇일까? 진서는 다음 단락에서 이 물음에 답한다.

좋은 글쓰기의 비결은 모든 문장에서 가장 분명한 요소만 남기고 군더더기를 걷어내는 것이다.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는 단어, 짧은 단어로도 표현할 수 있는 단어, 이미 있는 동사와 뜻이 같은 부사, 읽는 사람이 누가 뭘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게 만드는 수동 구문, 이런 것들은 모두 문장의 힘을 약하게 하는 불순물일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불순물은 대개 교육과 지위에 비례해서 나타난다.

우리는 글쓴이의 교육과 지위에 비례해서 군더더기가 많이 보인다는 진서의 지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식을 자랑하고자 하는 명예욕이나 높은 지위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생겨난 권위의식은 독자들이 쉽게 공감하는 글을 쓰는 데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글쓰기에 처음 도전하는 사람이, 초라한 지식이나 지위밖에 가진 것이 없다면 좋은 글을 쓰는 데 일단 합격이다.

군더더기를 걷어낸 명료한 문장은 쓰기 어렵다. 거듭되는 퇴고를 거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명료한 문장이다. 겨우겨우 초고를 쓰긴 썼는데, 그다음에 무엇을 어떻게 고쳐야 할지 막막하기만 한 글쓰기 초심자들은 자신에게는 글쓰기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퇴고를 쉽게 포기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진실과 거리가 멀다. 오랫동안 글쓰기를 가르쳐온 진서는 충고한다. “글쓰기가 힘들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글쓰기가 정말로 힘들기 때문이다.” 재능을 탓할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분명 글쓰기는 대단한 재능 혹은 높은 교육 수준과 지위를 요구하는 작업이 아니다. 글쓰기 전문가든 초심가든, 똑같이 평범한 삶을 산다. 다만 전문가와 초심자의 차이는 바로 ‘퇴고’에 있다. 독자와 공감할 수 있는 자신의 생각으로 도입 단락을 간소하게 장식하고, 글의 나머지 단락들을 도입 단락에서 기술한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끌고 나갈 수 있는 힘은 여러 차례의 퇴고에서 나오는 것이다. 글은 아무나 ‘쓸’ 수 있지만, 아무도 ‘쉽게 쓸’ 수는 없다.

한국 한문학과 관련한 다양한 저술로 탁월한 인문 교양 글쟁이로 인정받고 있는 정민은 자신의 스승 이종은과의 에피소드를 들려주며 ‘글 잘 쓰는 법’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오래전 정민이 한시를 번역할 때였다. 번역하려는 문장은 “空山木落雨繡繡(공산목락우수수)”라는 글귀였다. 정민은 이렇게 번역했다. “텅 빈 산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비는 부슬부슬 내리는데.” 이 글을 본 스승은 대뜸 “야, 사내자식이 왜 이렇게 말이 많아?”라고 면박부터 주었다 그러고 나서 ‘空(빌 공)’ 자를 손가락으로 짚더니 물었다. “여기 ‘텅’이 어디 있어?” 정민의 해석에서 “텅”을 지웠다. 그다음은 “나뭇잎”에서 ‘나무’를 빼버리며 다시 물었다. “잎이 나무인 것을 모르는 사람도 있나?” 다음에는 “떨어지고”에서 ‘떨어’를 지웠고, “부슬부슬 내리고”에서는 ‘내리고’를 덜어냈다. 남은 문장은 “빈 산 잎 지고 비는 부슬부슬.” 정민은 새삼 스승이 준 가르침을 곱씹으며, 불필요한 것들만 줄여도 글이 달라진다고 강조했다.

그렇다. ‘불필요한 것들을 줄이기’가 바로 글쓰기의 핵심이다. 그 ‘불필요한 것들’이 ‘억지나 과장, 불필요한 감정이나 논리’를 만들기 때문이다. 정말로 글을 잘 쓰는 이는 독자의 공감을 얻기 위해 편하게 읽히는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간결한 자기 생각과 사실 설명 이상을 글쓰기의 목표로 삼지 않는 겸손한 사람이다.

객관적으로 써라

“인간에게는 치명적으로 과한 것 세 가지와 부족한 것 세 가지가 있다. 바로 말은 많고 아는 것은 부족한 것, 소비는 많고 가진 것은 부족한 것, 생각은 많고 가치는 부족한 것이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말이다. 글쓰기로 말하면 첫째와 셋째가 의미심장하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설명할 만한 지식은 부족하면서 우주와 인생의 비밀을 아는 듯한 글쓰기, 가치를 판단할 깜냥이 안 되는 상태에서 자신의 오랜 생각을 신성하게 믿는 글쓰기. 그야말로 치명적 글쓰기다. 아래는 권오길이 쓴 「우리 모두 기적의 산물이다」의 도입 단락이다. 생명의 시작에서 탄생까지의 과정을 간단히 요약한 글로, 「우리 모두 기적의 산물이다」가 ‘어떤 글’인지 글 전체의 내용을 잘 나타내고 있다.

생명의 시작에서 탄생까지를 아주 간단히 요약해보자. 우선 질 안쪽 깊숙이 뿌려진 정자들은 떨어지는 순간 줄달음질을 시작한다. 물론 가능한 정자를 난자 가까이에 던져놓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해 깊숙이 삽입하여 정자를 뿌려 놓은 뒤다. 마라톤 출발을 알리는 총소리는 벌써 났다. 밀고 밀치고 야단법석이다! 난자가 있는 난관(나팔관, 수란관) 쪽으로 죄다 시끌벅적 떼 지어 올라간다. 말 그대로 걷잡을 수 없는 질주를 감행한다. 찬밥 신세가 되고 싶지 않거든 한달음에 달리고 또 내달려야 한다. 뒤떨어지면 끈 떨어진 뒤웅박 꼴이 되기에 그러지 않기 위해 눈물겹도록 최선을 다하는 씨앗들! 여기서부터 약육강식과 생존경쟁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면 뒤에 어떤 단락들이 이어질지 쉽게 알 수 있다. 실제로 「우리 모두 기적의 산물이다」의 2번째 단락은 수정의 과정을, 3번째 단락은 자궁벽에 수정란이 착상되어 분만 일보 직전까지 성장하는 과정을, 4번째 단락은 산모의 진통과 분만의 과정을 설명한다. 이제 마무리 단락의 전문을 보자.

실은 다음 것들을 이야기하자고 긴 글을 썼다. 수정란이 약 41번의 세포 분열을 끝내고 만들어진 태아는 여태 탯줄로 흘러든 피를 통해 산소와 영양분들을 얻었지만 이제 탯줄이 잘렸으니 산소 공급이 차단되고 만 셈이다. 그러면 숨이 차오기 시작한다. 핏속에 이산화탄소가 자꾸 늘어가는데 이젠 자기가 알아서 숨을 쉬어야 한다. 이것이 아기의 첫 울음소리다. 지축을 흔드는 고고지성(呱呱之聲)이 강하면 강할수록 건강한 아이다. 이 소리 지르기를 통해 여태 양수에 잠겨서 쭈그러든 풍선 같았던 허파가 확 펴진다. 또 심장에서도 우심방에서 좌심방으로 흐르던 곳이 판막으로 막히는 등 신체적으로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난다(이것 하나만 잘못 막혀도 심장 판막증이 된다). 그냥 아이가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생리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낯설고 물 선’ 이 세상에 당신은 태어났다. 필자도 한살이를 살아봐서 아는데, 이제 산전수전 다 겪어야 하는 험난한 앞길이 기다리고 있다. 녹록잖은 인생길, 제발 무탈하고 티 없이 잘 커야 한다. 아가야!

이 글을 쓴 권오길의 문장력이 일품이다. 그 덕분에 ‘기적’이라는 성스러운 단어에 맞지 않게 이 단락에서는 신명이 느껴진다. 어떤 테마에 대해 글을 쓸 때, 그 테마에 대한 과학적 설명으로 도입 단락을 삼는 것만큼 친절한 방법도 없다. 모든 글이 ‘객관적ㆍ과학적 사실 설명’으로 도입부를 이루어야 하는 것은 분명 아니지만 글쓰기 초심자들이 기본기를 쌓기에는 이만한 방법도 없다.

우선 ‘객관적 사실 설명’부터 이야기해보자. ‘객관적 사실 설명’으로 도입 단락을 쓰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일단 풍부한 일반 상식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대형서점에 가보면 내게 꼭 맞는 교양 상식 책을 10여 권은 만나게 될 것이다. 인터넷 또한 결코 등한시할 수 없다. 글쓰기 테마가 결정되면 그 테마와 관련된 방대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 다음으로 ‘과학적 사실 설명’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글을 쓸 때 아이디어를 처음 떠올리기 위해 과학 서적을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글쓰기와 관련된 가장 어이없는 편견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 편견은 “과학책은 딱딱하고 읽기 어려우니 글쓰기에 그다지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이다. 과학자들이 쓰는 글도 그저 수많은 글 중 하나요, 과학적 설명 역시 수많은 설명 중 하나다. 따라서 과학자들의 글쓰기라고 세련된 기술적 장치가 없으란 법은 없고, 과학적 설명이라고 글맛을 살리려는 에세이스트의 노력이 배제된다는 법도 없다. 과학자와 글쓰기, 이 둘은 결코 배타적인 관계가 아니다.

두 번째 편견은 “철학적 사유가 필요한 글을 쓸 때, 과학책보다는 철학서나 인문학 책을 읽는 것이 유리하다”는 생각이다. 유시민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나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데, 뇌과학 관련 진화심리학 책들로부터 인문학 책보다 더 큰 도움을 얻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나는 ‘인문학의 빈곤’이라는 말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다. 국내 저자의 인문학 책이 해외 저자의 책에 비해 양적이나 질적으로나 크게 빈곤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리어 나는 ‘과학의 빈곤’이라는 말에는 동의한다. 서울대 선정 인문 고전은 있어도 서울대 선정 과학 고전은 없다. 번역서와 국내 저자의 책 사이에 존재하는 양적ㆍ질적 차이도 현저하다. 나는 생각한다. 많은 사람의 염려대로 인문학이 빈곤하다면, 그 이유는 과학이 빈곤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걱정한다. 인문학과 과학이 모두 빈곤해져, 가뜩이나 빈곤한 글쓰기 현실이 더욱 빈곤해질까 봐.



제2장 중간을 어떻게 쓸 것인가?



부정하라

글쓴이는 글에서 자신의 설명이나 주장에 부합하는 단락(플러스 단락)만 쓰지는 않는다. 때로는 부합하지 않는 단락(마이너스 단락)을 쓰고, 이어서 플러스 단락을 써서 강조 효과를 기대하기도 한다. 또 플러스 단락을 부정하면서 마이너스 단락을 쓴 후 그 마이너스 단락을 재부정해서 자신의 설명이나 주장을 심화해나가기도 한다. 그래서 글에는 의외로 ‘하지만’, ‘그러나’, ‘그렇지만’ 등의 연결어로 시작하는 부정 단락이 많다.

부정의 대상이 될 마이너스 단락을 앞에 두고 그 단락의 주제나 주제문을 부정하는 단락을 이어 쓰는 경우는 매우 흔히 볼 수 있다. 이때 처음 등장하는 마이너스 단락은 글쓴이가 글 전체에서 하고자 하는 설명이나 주장에 부합되지 않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아래의 글은 홍성욱의 「과학과 미술」의 중간쯤에 있는 글이다(「과학과 미술」은 미술과 과학의 통섭을 주장하는 글로, 홍성욱은 과학도들에게 실험실을 벗어나서 미술관으로 발걸음을 옮겨보기를 권한다).

(가) 상식적으로 사람들은 과학과 미술이 마치 자석의 양극처럼 상반된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과학은 이성, 논리적 추론, 엄밀한 실험에 근거한 반면에, 미술에서는 상상력과 자유로운 창작 활동이 중요하다고 본다. 또 과학은 자연에 존재하는 대상을 객관적으로 탐구하는 데에 반해서, 미술은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심성을 주관적으로 구성해낸다고 믿는다. 과학과 미술을 이렇게 보았을 때, 둘 사이에 겹치는 부분은 거의 존재하지 않고 둘이 상호작용할 가능성도 크지 않다.

(나) 그렇지만 최근의 과학사, 예술사의 연구들은 과학과 미술이 스펙트럼처럼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과학에서도 상상력이 필요한 만큼 미술에서도 논리와 실험이 중요하며, 과학자의 발견이 탐험가가 무인도를 발견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구성’의 과정을 포함하듯이, 예술가의 창작도 마치 과학처럼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지고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과학은 이성의 산물이고 예술은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라, 과학과 예술 모두 이성과 상상력이 결합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과학과 예술의 차이는, 본질의 차이라기보다는 정도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가)는 전형적인 마이너스 단락으로, 과학과 예술이 자석의 양극처럼 상반된 점이 많다는 통념을 내용으로 한다. 이를 부정하는 (나)는 최근의 과학사나 예술사의 연구 성과들에 의하면, 과학과 예술 모두 이성과 상상력이 결합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과학과 예술의 차이는 ‘정도’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는 홍성욱의 주장에 부합한다. 전형적인 플러스 단락이다.

앞의 예와 달리, 아래의 글은 그저 앞 단락을 흠집 내는 수준의 부정으로 단락을 이어가는 방법이다. 이때 부정이라기보다는 보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아래는 앤서니 그레일링의 「동물들에게도 변호사가 필요하다?」라는 글의 도입부이다.

(가) 인간은 지금까지 다른 동물들을 음식물과 노동력으로 썼고, 최근에는 과학 실험실의 재료로도 썼다. 그리고 큰 양심의 가책 없이 그렇게 한 것은 일반적으로 동물은 인간과 같은 도덕적 고려 같은 것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 최근 역사에서는 많은 나라에서 동물 학대를 범죄시하고 농부와 도살장 노동자, 사냥꾼, 동물원 사육사, 서커스 단원, 실험실 연구자가 동물을 다루는 방식을 규제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나) 하지만 동물과 동물의 도덕적 지위에 관심을 기울인 오랜 역사를 생각하면 이것도 너무 늦었고 여전히 불충분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였던 테오프라스토스는 기원전 4세기에 동물도 인간의 도덕적ㆍ감정적 특성 가운데 일부를 공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채식주의와 동물에 대한 처우의 개선을 촉구했다. 물론 그의 견해는 아주 소수의 견해였고, 기독교 시대에는 더욱 그렇게 되었다. 기독교 시대에는 성경에서 동물이 인간의 지배를 받는 것을 승인했고, 이것이 인간의 편의를 위해 오랜 세월 너나없이 동물을 착취한 것을 더욱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었다.

(가)는 이 글의 주제 혹은 주제문과 거의 일치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플러스 단락이다. 그레일링은 (가) 다음에 (나)와 같이 부정 단락을 이어 써서 (가)에 흠집을 내고 있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였던 테오프라스토스에게서 이미 동물의 도덕적 지위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었는데, 최근에야 그 인식을 실천에 옮긴 것을 나무라고 있다. 동시에 왜 이제야 동물 학대를 범죄시하고 동물을 다루는 방식을 규제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느냐고 지적하고 있으니, 이 단락은 마이너스 단락이면서 플러스 단락이 아닌가? 사정이 이러하기 때문에 (나)가 (가)를 부정하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가)를 보완하는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부정하는 방법을 통해 단락을 이어 쓰는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앞서 예를 든 홍성욱의 「과학과 미술」이다. 우리는 통념이나 편견에 대해 부정하는 훈련을 쌓을 필요가 있다. 그러한 훈련으로 적합한 책은 많다. 버트런드 러셀의 『행복의 정복』, 『게으름에 대한 찬양』 등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명시하라

글쓴이가 단락의 형식을 스스로 규정하는 ‘명시하기’는 그야말로 다종다양하다. 논리적 비약이 지나치게 심하지만 않다면, 그 어떤 내용의 단락도 이전 단락에 이어 쓸 수 있지 않겠는가? 표준적인 형식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글쓰기는 자유로운 사색의 결과이기 때문에 지나치게 형식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따라서 ‘단락의 성격에 대한 명시적 언급’은 단락 이어 쓰기의 가장 자유로운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아래의 글은 정재승ㆍ전희주의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문제는 바로 해석에 있다」의 도입부에 해당하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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