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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재판소

세기 히로시 지음 | 사과나무
절망의 재판소

세기 히로시 지음

사과나무 / 2014년 7월 / 254쪽 / 15,000원





최고재판소 판사의 숨겨진 맨얼굴

- 겉모습과 숨겨진 속내를 교묘하게 활용하는 권모술수의 책사들



재판소 인사의 실정

캐리어시스템 안에서의 상층부 인사의 실정에 대해 분석해보기로 하겠다. 소신 있는 양식파는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한다는 것은 관료조직이든 일반적인 조직에서든 상식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업의 경우 상층부가 지나치게 부패하면 실적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일정한 자정작용이 시작된다. 그러나 관료조직에서는 그러한 자정작용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악화, 부패가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되는 경우가 많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재판소처럼 국민, 시민의 권리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기관에 대해서는 이와 같은 조직의 문제를 잘 감시할 필요가 있다. 또 그렇기 때문에 재판소는 관료조직에서의 탈피, 인사의 객관화와 투명화, 법조일원제도의 실행이 필요하다.

내가 젊었을 때는 재판관들 사이에 ‘평생 일개 재판관으로 살아가겠다’는 기개가 여전히 살아 있었으며, 그런 재판관을 존경하는 기풍도 어느 정도는 존재하고 있었다. 또한 재판관 가운데 가장 많은 부분인 중간층에는 적어도 신중하게, 성실히 일을 하겠다는 장점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재판소의 분위기는 그와 같은 기개와 기풍이 거의 사라져버린 듯한 느낌이 든다. 지금의 다수파 재판관들이 하고 있는 것은 재판이라기보다 ‘사건’의 ‘처리’다. 또한 그들 스스로도 재판관이라기보다는 ‘재판하는 관료, 공무원’, ‘법복을 입은 공무원’이라고 하는 편이 훨씬 본질에 더 가깝다.

“지난달에는 12건이나 화해로 마무리 지었어.”라든가 “이번 달의 새로운 사건 중 30퍼센트는 화해로 마무리 짓지 않으면 골치 아플 거야.”와 같은 재판관들의 일상적인 언행에서 드러나듯이, 소송 당사자의 이름도, 얼굴도, 개성도, 소망도, 생각도, 슬픔도 그들의 머릿속에는 없다. 그들의 주된 관심이 되는 것은 처리한 사건의 숫자와 속도뿐이다. 재판관들의 이러한 자세 때문에 어려운 법률판단의 회피와 화해의 강요 등과 같은 일본 민사재판 특유의 문제점 그리고 영장, 특히 구류영장의 지나칠 정도로 안일한 발부와 검찰관을 추종하는 자세에서 비롯되는 억울한 죄 등 일본 형사재판 특유의 문제점이 발생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다.

지금의 재판소 인사 상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해보겠다. 먼저, 조금이나마 개성적인 재판관, 자신의 소신을 가지고 그것을 주장하는 재판관, 연구하는 재판관은 고등재판소 장관이 될 수 없다(고등재판소 장관은 전국에 8명, 최고재판소 판사에 뒤이은 지위). 설령 상승 욕구가 강해서 대체적으로 재판소 조직의 요구에 따랐으며 오히려 그것을 주도해온 사람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구체적인 인선을 살펴보면 그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판결이나 논문 등에서 최고재판소가 암묵적으로 공인하고 있는 방향과 다른 의견을 표명해온 인물은, 소장 승진이 다른 동기들보다 몇 년이나 늦어지거나 혹은 소장 후보자에서 제외되는 등의 불이익을 당한다. 그리고 동등한 지위에 있던 인물들에 대해서 예전에는 거의 볼 수 없었던 부자연스러운 인사를 단행해, 서로의 지위를 차이 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내가 잘 알고 있는 한 기(사법연수소를 수료한 기)의 도쿄 지방재판소 민사ㆍ형사 소장대행에 관한 인사를 예로 들어보겠다. 한쪽은 재판관으로서의 실적도 있고 변호사들로부터도 상당히 높은 평가를 얻고 있는 인물이고, 다른 한쪽은 추종적인 자세 덕분에 그 자리에 오른 무신념의 인물이었다. 그런데 최고재판소 사무총국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의 의견을 개진했던 전자는 멀리 지방의 소장으로, 후자는 도쿄 인근의 소장으로 각각 발령받았다. 이는 일종의 본보기로, ‘사무총국의 방침에 이러쿵저러쿵 토를 달지 말고, 군말 없이 복종하지 않으면 이렇게 된다’는 협박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지금의 재판소는 일종의 유연한 전체주의 체제, 일본 열도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정신적 수용소 군도’(『수용소 군도』는 구소련의 작가인 솔제니친의 강제수용소에 관한 논픽션의 제목)가 되어버렸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사태가 그러한 예 중 하나다. 자유주의, 개인주의, 개인의 의견, 창조적 연구, 장식품의 수준을 넘어선 교양, 조금 더 나아가 사무총국에 대해 단순한 의견 개진에 대해서도 “그러한 것들 자체가 무례한 일이다. 그런 놈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라는 데까지 타락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재판소에서의 상층부 인사 전반은 어떨까? 내가 아는 한, 역시 양식파는 대부분이 지방가정재판소장, 고등재판소 판사장에 머물며, 고등재판소 장관이 되는 사람은 드물고, 사무총장(최고재판소 사무총국의 최고위직인 이 자리는 최고재판소 장관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복종하고, 구두 바닥이라도 핥을 수 있을 정도로 뼛속까지 사법관료ㆍ관리가 아니면 도저히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은 절대로 될 수가 없으며, 최고재판소 판사가 되는 사람도 거의 없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감옥’ 속의 재판관들

- 정신적 ‘수용소 군도’의 수감자들



사무총국 중심체제-상명하복, 상의하달의 히에라르키

일본 재판소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무엇일까? 그것은 틀림없이 사무총국 중심체제와 거기에 기반을 둔 상명하복, 상의하달의 피라미드형 히에라르키일 것이다. 우선 이 피라미드형 히에라르키의 실태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보겠다. 정점에는 최고재판소 장관과 14명의 최고재판소 판사가 있다(쌍방을 아울러 부를 때는 최고재판소 재판관이라고 하지만, 이 책에서는 알기 쉽게 ‘최고재판소 판사’라는 말을 사용하겠다). 그다음이 고등재판소 장관이다. 전국에 8명이 있는데 서열은 도쿄, 오사카, 나고야, 히로시마, 후쿠오카, 센다이, 삿포로, 다카마쓰 순이라 생각한다.

다음이 도쿄, 오사카 등 대도시의 지방가정재판소장(같은 지방의 지방재판소는 가정재판소보다 격이 높다. 한편 재판소법에 의하면 최고재판소 이외 재판소의 재판관은 고등재판소 장관ㆍ판사ㆍ판사보, 간이재판소 판사뿐이며, 지방가정재판소장은 사법행정 사무를 총괄하는 사람에 불과하다)과 도쿄 고등재판소 재판장, 그 뒤를 이어서 오사카 고등재판소 재판장일 것이다. 이 부분에서부터 서열은 눈에 띄게 여러 갈래로 나뉘는데, 인사에 그다지 흥미가 없었던 나는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한다.

다음은 도쿄와 오사카 이외의 지방가정재판소장과 도쿄ㆍ오사카 이외의 고등재판소 재판장 그리고 고등재판소 지부장과 지방가정재판소 대지부의 지부장, 지방가정재판소 재판장과 고등재판소의 우배석으로, 그 서열에는 지방에 따라 상당히 큰 차이가 있다. 그다음은 고등재판소의 좌배석과 지방가정재판소의 우배석, 마지막이 지방가정재판소의 좌배석이다. 대지부 이외의 지방가정재판소 지부장은 지방가정재판소 우배석급으로까지 넓어진다. 한편 신임 판사보의 임지를 보면, 예전에는 대체적으로 성적을 첫 번째 기준으로 삼아 도쿄에서부터 순서대로 배치한 듯했으나, 요즘에는 그것이 약간 미묘해져서 한마디로는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이와는 별도로 최고재판소 사무총국에는 사무총장, 국장, 과장, 국원이 있으며, 최고재판소 조사관으로는 수석, 상석, 일반 조사관이 있고, 사법연수소에는 소장, 상석, 사무국장, 일반 교관이 있고, 재판소 직원 총연수소는 사법연수소에 준하며, 각 고등재판소에는 사무국장이 있다. 그 서열을 살펴보면 최고재판소 사무총장, 수석조사관, 사법연수소장은 고등재판소 장관과 동급이고, 사무총국 국장은 소장과 동급이며, 사무총국 과장ㆍ최고재판소 조사관ㆍ사법연수소 교관의 높은 지위는 도쿄지방재판소 재판장과 동급, 고등재판소 사무국장은 그 소재지 지방재판소 재판장과 동급이라고 보면 될 듯하다. 그리고 법무성 본성과 각 법무국으로 파견을 나가 있는 재판관도 여기에 준한 세세한 서열이 있다. 가만히 생각해가며 글을 쓰기만 해도 비위가 상할 정도인데, 이렇게 스모 선수의 순위표 같은 재판관들의 세세한 히에라르키는 재판소법을 들여다봐도 결코 알 수가 없다. 무릇 일본의 재판소가 평등을 기본으로 하는 조직이 아니며, 오히려 그 반대라는 사실을 머릿속에 잘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인사에 의한 통제와 생존경쟁

최고재판소 장관, 사무총장 그리고 그 뜻을 받은 최고재판소 사무총국 인사국은 인사권을 한 손에 쥐고 있기 때문에 재판관들을 마음대로 지배ㆍ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전혀 예상 밖의, 누가 봐도 ‘아아, 이건 아닌데…’라고 생각할 만한 인사를 두 번, 세 번 거듭 당하고 난 뒤 결국 그만둔 재판관을 나는 몇 명이나 보아왔다. 이건 젊은 재판관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재판장들도 마찬가지다. 지방가정재판소 소장들에 대해서까지 당국의 마음에 들지 않는 자는, 원래대로라면 다음에는 도쿄 고등재판소의 판사장이 되는 것이 당연한 사람을 몇 년이고 지방 고등재판소의 재판장으로 두는 식으로, 역시 보복성 인사를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인사가 무서운 것은 이 같은 보복이나 본보기가 언제, 무엇을 근거로 행해질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위헌판결을 한 경우’ 등과 같은 형태로 명시되어 있다면, 그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안심을 할 수 있을 테지만, ‘어쨌든 사무총국의 마음에 들지 않는 판결’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니 재판관들은 넙치처럼 늘 그쪽만을 엿보며 재판을 진행하게 된다. 당연히 판결의 적정성이나 당사자의 권리 따위는 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또한 사무총국은 그쪽 입장에서 봤을 때 재판관이 범한 ‘잘못’이라 생각되는 재판이나 연구 그리고 공적ㆍ사적 행동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여 결코 잊는 법이 없다. 예로 그 ‘잘못’으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지방의 소장이 되어 있는 재판관에게 “당신은 더 이상 수도권으로는 절대로 돌아올 수 없습니다. 정년까지 지방을 돌아다니기 바랍니다. 하지만 공증인이라면 할 수 있게 해드리지요”라는 형태로 최후의 통첩을 날려 언젠가는 반드시 보복을 한다. 이처럼 사무총국은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은 히에라르키의 계단을 상당히 오른 뒤에라도 간단히 내칠 수 있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재판인가?

- 당신의 권리와 자유를 지켜주지 않는 일본 재판소



통치와 지배의 근간은 언터처블

그렇다면 지금까지 얘기해온 것과 같은 재판소ㆍ재판관의 재판에는 어떤 문제가 있을까? 일본 재판의 상황을 살펴보면 최고재판소의 판결부터 문제가 크다고 느껴진다. 예를 들어 인권에 관한 재판소의 민감도를 나타내는 척도라고 할 수 있는 위헌재판 건수가, 최고재판소 스스로 헌법판단을 하는 경우를 좁게 한정 지어버렸기에, 전후 7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미미해서 애초부터 일본에 참된 의미에서의 헌법판례가 있다고 할 수 있을지조차 의문스러울 정도로 위헌재판 건수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 밖에도 1표의 가치 차이 문제에 관한 무감각, 우편함 투입을 주거침입죄로 처벌한 것(2008년 4월 11일), 애초부터 피해의 완전 보상과는 동떨어지게 산정하고 있는 교통사고 손해배상액 등에 대해서 그 주요 부분인 일실이익(사고를 당하지 않았다면 당연히 벌 수 있었던 수입)을 연 5%라는 고리로 중간이자를 공제하고 있는 실무를 그대로 추인한 것(2005년 6월 14일), 공항 소음에 대해 “공항 소음의 민사 금지는 소음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또한 야간에 한정된 금지라 할지라도 받아들일 수 없다. 행정소송이 가능할지에 대해서 우리는 관여하지 않겠다”라고 한, 그야말로 인권을 짓밟는 듯한 판결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리는(1981년 12월 6일, 대법정) 것 등등 이러한 판결들을 국민과 시민의 대다수가 진정 받아들일 수 있을지 의문을 금할 길이 없다.

간단한 해설을 덧붙이도록 하겠다. 법이론이란 순전히 이론으로만 판단할 수 없는 결론의 정당화를 위해 반드시 논리적 성격을 어느 정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인문ㆍ사회과학의 과학성에 한계가 있는 하나의 이유가 되는데, 사람들의 행동을 규정하는 규범을 연구하는 학문인 법학은 특히 이와 같은 한계가 크다. 나쁜 법이론은 처음부터 결론을 정해놓고 오로지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구축되는 경우가 많다. 이른바 ‘태초에 결론이 있었다’라는 식의 논의인데, 난해한 용어를 사용하고 또 교묘하게 조합되어 있기도 하기 때문에, 법률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일반 시민을 속이기에는 꽤나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러한 법이론의 결함을 꿰뚫어보기 위해서는 그것을 정확하고 간결하게 요약함과 동시에 일상적인 말로 옮겨 적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편함 투함에 대한 판례를 살펴보면, 자위대 관사 우편함에 자위대 이라크 파견을 반대하는 내용의 전단을 뿌린 행위가 처벌받은 내용이다(제1심에서는 무죄판결을 받았었다). 이 사건에 대해 ‘전단 살포와 같은 행위는 온당치 못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독자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사실 자위대 관사에서의 전단지 배포는 그 전까지도 계속되어왔음에도 특별히 문제 삼은 적이 없었는데, 수많은 투함 행위 가운데서 그것만을 문제 삼은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러한 행위는 “이것이 헌법 문제가 아니면 대체 무엇이 헌법 문제냐”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표현의 자유에 관한 전형적인 행동이라는 사실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단순한 전단 배포를 주거침입죄로 처벌한 사태는 일본인의 일반적인 정서상 ‘그건 좌익의 과격한 사람들에게나 일어나는 일이고 나와는 상관없으니 신경 쓸 것 없다’라고 여겨지는 것 같다. 하지만 유럽의 민주국가였다면, 인권 침해로 사람들에게 커다란 위기감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내일이라도 당신의 자식이 시민운동의 취지에 공감하여 전단 배포를 돕다가 잡혀가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비슷한 사태의 진행으로 인해 당신의 친한 이웃인 저널리스트나 사상가(좌파만이 아니다)가 날조, 혹은 일반적으로는 기소도 처벌도 받지 않는 형식적 행정법규 위반 등으로 체포, 장기 구류를 당해 저술가로서의 생명이 끝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즉 다시 말해 ‘누군가’의 자유나 권리가 오늘 침범당했다면, ‘내일은 내 차례’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두어야만 한다.

어정쩡한 태도와 추종의 민사재판

일본의 민사재판은 어떨까? 내가 33년 동안의 재판관 생활을 통해 보고 들은 바에 의하면, 가령 미국의 재판관, 특히 연방재판소의 재판관에 비해 일본의 재판관은 대체적으로 어정쩡한 태도, 머뭇거리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어려운 판단을 회피하거나 혹은 단지 선례를 따르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은 판례가 되어 법률지에 게재되는 짤막한 판결문을 보아서는 잘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내 경험에 비추어봤을 때 일본의 재판관은 일상적인 사건처리에 새로운 법리를 세우거나,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판결문을 별로 쓰고 싶어 하지 않으며, 임시의 지위를 정하는 가처분명령 절차에서의 결정(금지나 법률상 지위의 확인 같은)에 대해서도 과감한 판단을 망설이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법해석에서 법창조로의 이행은 무지개의 색깔이 서서히 바뀌어가는 것처럼 아주 미묘해서 명확히 선을 그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각 순간에 직면하는 사실이나 문제점에 대해서 재판관은 지극히 평범한 해석에서부터 매우 과감한 법창조에 이르기까지의 넓은 영역 중에서 적절한 지점을 선택하기 위해 스스로 자각과 성찰을 갖고 결단을 해야 한다. 하지만 미묘한 가치판단에 관한 어려운 법률문제, 특히 사회 현상에 이의를 제기하는 방향의 문제에 직면한 경우에 자각적이고 성찰적인 태도로 임하는 재판관은 일본에 그리 많지 않다. 대다수의 재판관들은 그저 선례에 따르거나, 기각 또는 각하하는 방향을 취하거나, 판결문을 쓰지 않아도 되는 ‘화해’라는 수단에 의지하는 등의 길을 선택한다.

또한 일본 재판관의 판결문은 길고 상세하지만 이해하기 어려우며 중요한 쟁점에 관한 기술이 부실하거나 형식논리에 빠져 냉담하게 처리한 것이 많다. 즉 딱딱한 관료의 작문처럼 보이는 경향이 강하다. 이는 지금의 법학교육에도 문제가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사안을 진지하게 대하겠다는 재판관의 마음가짐이 부족하며, 또 당사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상급심에 보이기 위해, 혹은 자기만족을 위해 판결문을 쓰는 측면이 크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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