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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3년, 다시 여자를 준비할 시간

임서영 지음 | 라이스메이커
엄마 3년, 다시 여자를 준비할 시간



임서영 지음

라이스메이커 / 2014년 6월 / 208쪽 / 13,000원





아기가 태어나다 엄마가 되다



‘모성’은 본능이지만 ‘육아’는 본능이 아니다

병원에서 퇴원해 아기를 안고 집 현관문을 들어서는 순간, ‘그래도 아기가 뱃속에 있을 때가 제일 편한 거야’ 하던 친정엄마의 말씀이 딱 떠오른다. 출산 후 내 몸 또한 아프고 불편한데 아기가 울어대면 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실 아기를 안는 것도 서툴고, 아직 탯줄이 달려 있는 아기를 날마다 목욕시켜야 하는 일도 겁나고 조심스럽다. ‘이 아이를 앞으로 어떻게 키워야 하지? 아기를 낳으면 이런저런 일들을 척척 잘하게 될 줄 알았는데 뭐 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으니…….’ 하나하나가 낯설고 부담스러운 왕초보 엄마는 결국 좌절하고 만다. 아기를 낳기 전에 책을 통해, 주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육아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었지만 듣는 것과 현실에서 직접 겪는 것은 다르다. 학습한 대로 엄마 역할을 해보려 해도 마음과 몸이 일치하지 않으니 애가 탄다.

백일쟁이 민석이의 엄마가 어느 날 전화를 했다.

“소장님, 모성은 본능일까요, 학습일까요?”

순간 곰곰이 생각했다. 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민석이 엄마가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마음을 헤아려 보기 위해서였다.“저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것이니 모성은 본능이 맞겠죠.”

“모성이 본능이라면 그냥 저절로 돼야 하는 거 아녜요? 밥 먹고 화장실 가고 그런 것처럼요. 그런데 저는 아이를 키우는 게 너무 힘들어요. 남편은 도와주지도 않고. 민석이하고 씨름하는 일도 본능처럼 자연스럽게 저절로 되지 않고……. 제가 모성이 부족한 건가요?”

많은 사람이 착각하는 한 가지가 있다. ‘모성’은 본능이다. 하지만 ‘육아’는 본능이 아니다. 육아는 학습이며 부모와 아이의 스타일에 따라 육아 방식이 제각각 다르다. 여태 살면서 한 번도 이런 상황에 처해 본 적이 없다. 아니, 상상조차 한 적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마치 예전부터 해온 일인 것처럼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겠는가. 육아 관련 서적을 수십 권 쓴 사람도 아마 자신이 완벽하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둘째는 첫째와 다르고, 다른 집 아이와 내 아이도 다르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늘 생소한 ‘처음’이다. 그래서 힘든 거다. 자기만 그런 게 아니라 ‘엄마’가 된 많은 이들이 다 그렇게 힘들다. 단지 내색하지 않고 삭일 뿐이다. 내색하면 다른 누군가가 ‘무슨 엄마가 저래? 애 하나도 제대로 못 돌보네’ 하고 비난할까 봐 애써 참는 것이다.

하지만 억지로 눌러 덮는다고 해서 불편하고 힘든 일들과 감정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랬다가는 오히려 병이 된다. 차라리 민석이 엄마처럼 누군가에게 묻거나 하소연하는 게 낫다. 그렇다고 해서 친정엄마나 시어머니께 했다가는 오히려 불필요한 잔소리를 두고두고 듣게 될 테니 금물. 마땅히 그런 말을 나눌 사람이 없다면 차라리 인터넷 카페나 전문가들의 블로그를 찾아가서 질문을 남겨 보는 게 낫다. 비슷한 고민을 하는 엄마들과 얘기를 하다 보면 도움이 되고 위로도 받을 수 있다.

초보 엄마들은 초보 운전자와 비슷하다. 면허를 따고 새 차를 뽑았는데, 막상 운전하려니 겁이 난다. 끌고 나갔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쩌나, 긁히기라도 하면 어쩌나 조심스럽다. 아무리 좋은 차라고 해도 그게 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으면 답답하다. 어느 차 뒤에 “나도 내가 무서워요 - 초보운전”이란 글귀가 붙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마음이 십분 이해가 간다. 초보 엄마도 마찬가지다. 자식에 대한 ‘모성 본능’과는 별개로, 아직 익숙하지 않은 육아에 대해서 조심스럽다. 자신이 제대로 해내지 못할까 봐 겁이 난다. 하지만 걱정은 덮어라. ‘이 아이를 언제 다 키우지?’ 하고 고민하고 발 동동 구르는 사이에 아이는 훌쩍 커 있을 것이다. 물론 그때는 또 다른 고민거리가 눈앞에 놓이겠지만, 그래도 괜찮다. 생각해 보면, 현실의 나는 그런 과정을 거쳐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하는 게 아니던가. 우리 부모님도 우리를 그렇게 키우셨을 것이다.

남긴 음식이 아까우랴, 내 자신이 아까우랴!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누군가 남긴 밥을, 옷 앞자락에 흘린 밥을 자신이 주워 먹게 되리라고는……. 많아 봤자 반 공기, 적으면 한두 숟가락이다. 버려도 될 만한 그 밥을 아무렇지도 않게, 마치 조금 전까지 자신이 먹고 있던 밥처럼 후룩후룩 먹어 치우는 엄마들. “어이구, 배불러 죽겠다. 너무 많이 먹었어.” 누가 먹으라고 했나? 혼자서 이것저것 남은 반찬 다 긁어 먹어 놓고 속이 부대낀다며 소화제 꺼내 마시고 가슴을 주먹으로 툭툭 치고…….

내가 그랬다. 버리기에는 아깝고 그렇다고 먹기에는 배부른 상태에서, 그냥 ‘먹어 버렸다.’ 가끔은 자신이 잔반 처리기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 생긴 습관이 계속 이어졌다. 어느 날 남은 반찬 몇 가지와 밥을 거둬 먹고 있는 나를 보며 딸애가 말했다.“엄마, 배부르다면서 왜 먹어? 그냥 버려.”

“아깝잖아. 조금 남았는데 먹어 치우지 뭐.”

“엄마, 나는 남은 음식 버리는 것보다, 그거 먹고 고생하는 엄마가 더 아까워.”

그 말을 듣는 순간 목이 턱 막혔다. ‘아무렴, 세상에! 남긴 음식이 아까우랴, 내 자신이 아까우랴!’ 당장 일어나 싱크대로 가서 남은 음식을 다 버렸다. 그리고 나 자신이 제일 아깝다고 생각하면서 살기로 마음먹었다.

그다지 알뜰살뜰한 편이 아니요, 그렇다고 음식에 대한 집착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내 어머니가 ‘음식 버리면 벌 받는다’ 하고 꾸역꾸역 드시던 것을 보며 자랐기에 알게 모르게 엄마를 따라 하고 있었다. 버려지는 음식이 아깝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것을 먹고 부대껴서 안절부절못하거나 살이 쪄서 속상해 할 내 자신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출산 이후 육아가 힘들어 살이 빠지는 엄마들도 있지만 대개는 출산 전보다 몸이 불어난다. 머리숱이 반으로 줄어들고 얼굴에 기미도 생긴다. ‘아기 낳고서 훨씬 날씬하고 예뻐졌어요’ 하고 말하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반면 그런 자신의 외모 변화 때문에 속상해하는 사람은 많이 보았다. 엄마도 여자라는 사실을, 주변인들은 물론 엄마들 자신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외출했을 때와 정장에 힐을 신고 외출했을 때 몸가짐이 달라지는 경험을 해보았을 것이다. 아기띠를 둘러메고 기저귀 가방까지 걸치고 나섰을 때와 가벼운 핸드백 하나 들고 나섰을 때의 마음이 달라짐을 알 것이다. 차림새가 달라진다고 해서 사람까지 달라지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동과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뒤에서 누군가 “아가씨!” 하고 부르면 아가씨처럼 조신하게 대답해야 할 것 같고 “아줌마!” 하고 부르면 (속으로는 화가 나지만) 아줌마처럼 대답이 툭 튀어나온다.

남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느냐 그리고 자신이 스스로를 어떻게 여기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게 사람이다. 옛 어른들은 집안에서 귀하게 대접받은 사람이 밖에 나가서도 귀한 대접을 받는다고 하여, 어린아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이놈 저놈 하지 않았다. 하물며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자신을 스스로 귀하게 여기지 않는데 누가 그 사람을 귀하게 여기겠는가? 자신을 잔반 처리기로 취급하는 사람은 남들에게 잔반 처리기로 대접받는다. 자신을 부엌데기로 여기고 한탄한다면 남들도 부엌데기로 보고 동정할 것이다. 자신의 가치를 매겨 보자. 찬밥 한 덩어리? 어림없다. 1억? 10억? 아니다, 당신의 몸무게만큼 황금덩어리를 준다고 해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귀하고 유일한 존재다. 그런데 가끔 당신은 그 사실을 잊는다. 그래서 찬밥 한 덩어리, 반찬 찌꺼기와 자신을 바꾸려 한다.

‘자존감’은 자아존중감의 줄임말로, 자기 스스로를 존중하는 태도와 감정을 말한다. 다시 말해, ‘나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과 관심을 받을 만한 소중한 사람이다’라는 자기가치감과 ‘나는 유능한 사람이다. 내게 맡겨진 일을 잘 해낼 수 있다’라고 믿는 자신감, 이 두 가지를 합한 의미다. 자존감은 다른 사람의 평가나 객관적인 조건과 상관없이 자기 스스로의 평가에 의해 높낮이가 결정된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전전긍긍하면서 불안해한다. 자신감이 부족하고 열등감이 심해서 속앓이를 하거나 오해를 많이 산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대인관계가 좋을 리 없다. 자신의 모습이 이와 같은가?

물론 자존감이 지나치게 높으면 안하무인격의 왕재수가 되기도 한다. 뭐든 지나치면 문제가 생긴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여자들은 대개 자존감이 낮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보부아르의 말처럼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특히 엄마가 된 이후는 자존감이 더욱 낮아진다. 그러나 잊지 마라. 자존감 낮은 엄마가 자존감 낮은 아이를 만든다! 자신의 아이가 자존감 높은 아이로 살아가길 바라는가? 답은 뻔하다. 누군가 “자신을 사랑하십니까?” 하고 물었을 때 선뜻 “네!” 하고 대답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라.



아이가 자란다 엄마도 성장해야 한다



나는 엄마다

아이는 30개월 이전에 평생 살아갈 기초를 습득한다. 그리고 습관도 만들어진다. 그 시기의 아이들에게는 이성적인 설득이나 논리가 소용없다. 외부 작용의 80퍼센트 이상을 감정과 직관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마들에게 어린아이들을 어떻게 야단쳐야 할지 그 요령에 대해 말하곤 한다. 일명 ‘칭찬의 탈을 쓴 선도(善導)’다.

30개월 이전의 아이들에게는 무조건 칭찬해 주어라. 아이가 크레파스로 벽에 낙서를 했다면, ‘우와, 멋진 그림을 그렸구나! 다음에는 여기 스케치북에 그려 보겠니? 그러면 우리 ??가 그린 그림을 할머니께 보여 드리기가 좋을 것 같아’ 하고 과장된 반응과 칭찬으로 아이의 자존감을 높여 준다. 그러나 4세 이후가 되면 해도 되는 일과 해선 안 되는 일, 반드시 해야 할 일 등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아이가 성장하면 양육하는 방식 또한 달라져야 한다. 시기에 따라 알맞은 양육법을 찾는 엄마가 현명한 엄마다. 어린이집에 다니는 4살 무렵의 아이에게 무조건적인 칭찬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은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살핀다. 옷매무새를 고치고 머리를 다듬는다. 거울만큼 자신의 존재를 잘 비춰 주는 것이 있으니 바로 ‘타인’이다. 거울이 자신의 존재를 잘 비춰 주는 데 반해, 타인은 심리적인 모습을 비춘다. 그래서 타인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살펴볼 수 있다. 인생에서 첫 번째로 타인 역할을 하는 사람은 ‘부모’다. 아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모라는 거울을 통해 자아상을 만들어 간다. 만약 아이를 주로 양육하는 사람(부모, 할머니, 친척, 보모 등)이 행복한 표정으로 아이를 대한다면 아이는 자신이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좋은 사람’이라고 인식한다.

반대로 양육하는 사람이 짜증스런 표정을 짓고 있으면 아이는 자신을 ‘나쁜 사람’이라고 여긴다. 문제는 이때 형성된 자아상이 이후 살아가는 데 두고두고 영향을 미치며, 변화의 기회를 갖지 않는 한 후대에게 그대로 대물림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아이에게는 좋은 거울이 되어 줄 양육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부모만 자아상 형성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 아이의 생활 반경이 넓어짐에 따라 부모에서 유치원, 학교 선생님, 친구들로 점점 확대된다. 아이는 다양한 거울에 자신을 비춰 보면서 자아상을 만들어 간다.

한 번은 분당 쪽에 사는 30대 엄마와 상담을 한 적이 있다. 4세 남자아이가 방에서 잠을 자지 않고, 신발을 벗어 놓는 현관 입구에서만 잠을 잔다는 것이다. 잠든 아이를 방에 눕혀 놓으면 어느 새인가 다시 그쪽으로 가서 눕는다고 했다. 현관 쪽으로 못 가게 하면 목이 쉴 때까지 울어서 하는 수 없이 현관 쪽에서 잠들 때까지 놔둔다는 것이다. 그 집 엄마와 상담을 하는 동안 아이는 졸린 눈을 비비며 현관 쪽에서 가서 누웠다. 나는 재빨리 아이 쪽으로 가서 그 옆에 구부리고 누웠다. 아이는 잠을 자려다 말고 벌떡 일어나 앉더니 멀뚱멀뚱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든 말든, 나는 모른 체하고 누워서 자는 체를 했다. 5분쯤 지났을까, 아이가 슬금슬금 나를 피해 엄마 품으로 안겼다.

“엄마, 자자. 저기 가서 자자.” 아이는 자기 방을 가리키며 칭얼거렸다. 아이를 안고 방에 들어간 엄마는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거실로 다시 나왔다. 아이가 곯아떨어졌다는 것이다. “어머, 소장님! 어떻게 이런 일이……. 도대체 무슨 일을 하신 거예요?” 엄마는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은 채 신기하다는 듯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거울요법이라는 거예요. 내가 현관에 눕자 아이는 그때서야 다른 사람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 거죠. 현관 쪽에 신발과 같이 누워 있는 자신의 행동이 적절하지 않다는 걸 깨달은 겁니다. 그래서 방으로 들어가야겠다고 스스로 판단한 거예요. 앞으로 다시는 현관에 눕거나 하지 않을 거예요.” 이것 또한 타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는 일례다.

엄마가 자녀의 인격 형성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알고 나면 갑자기 두려운 생각이 든다. 내가 과연 누군가의 인생에 영향을 줄 자격이 있는 걸까? 혹시나 내가 잘못된 영향을 주면 어떡하지? 나 때문에 잘못되면 어떡하지? 내가 지금 잘 살고 있는 건가? 공공장소에서 예의 없이 굴거나 어른들께 버릇없이 행동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도대체 저 애는 부모가 교육을 어떻게 시킨 거야?’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한편으로는 자기가 아이에게 너무 엄격한 것은 아닌지, 다른 애들은 천방지축으로 행동하는데 자기 아이만 주눅이 들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기도 하다. ‘적당히’란 기준이 사람마다 달라서, 모자라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는 그 선을 찾기가 힘들다. 내 속으로 열 달 동안 품고 있었지만 그 속을 알지 못하는 게 자식이다. 너무 힘들고 답답해서 ‘저 애를 어떻게 키워야 하나’ 지칠 때 속으로 백 번도 넘게 외친 말이 있다. ‘나는 엄마다!’

세상에 그 아이의 엄마는 단 한 명이다. 객관적인 조건으로 따져 볼 때 좀 부족할 수는 있지만,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절대 부족하지 않은 존재다. 엄마로서 당당할 때, 아이는 자신에 대해 긍정적인 감정을 갖게 되고 자존감이 높아진다. 소설가 박완서 선생님은 “부모의 사랑은 아이들이 더우면 걷어차고, 필요할 땐 언제든지 끌어다 덮을 수 있는 이불 같아야 한다”고 했다. 이불이 너무 크면 답답하고 작으면 추운 법. 그 크기를 조절하는 것 또한 엄마의 역할이리라. 아침에 일어나 하루에 열 번 “나는 엄마다”를 외쳐 보라. 그러면 엄마 노릇이 더 이상 힘에 부치지 않을 것이다. 입을 통해 한 말이 귀로 들어오면서 뇌를 자극하고, 그 자극에 힘입어 더 멋진 엄마로 거듭날 것이다.

아이가 독립을 준비할 때 엄마도 독립을 준비한다

현명한 엄마는 유아 발달에 대한 정보를 꿰차고 있다. 아이의 육체적ㆍ심리적ㆍ정신적 상태를 모르고서 어떻게 아이의 눈높이에 맞는 교육을 할 수 있으랴. 언제쯤 아이에게 ‘안 돼!’를 가르쳐야 하는지, 아이에게 자립심과 독립심을 길러 줄 준비는 언제쯤 해야 하는지를 알고 그것에 따라 엄마도 계획을 세워야 한다.

아이가 끊임없이, 영원히 부모의 도움을 필요로 할까? 절대 아니다. 아이는 스스로 걷고, 음식을 먹고, 말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독립을 준비한다. 그러한 준비 상태에서 아이들은 ‘내가 할 거야’라는 말을 종종 한다. 스케치북에 엉망으로 색칠하는 아이를 도와주기 위해 “자, 엄마가 하는 걸 봐. 먼저 이렇게 바깥쪽으로 선을 따라서……” 하고 가르치려는 순간, 아이는 엄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내가 할 거야!” 하고 스케치북을 빼앗아 버린다. 엄마는 아이를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에 “어허!” 하고 엄포를 주지만 아이는 막무가내로 자기 생각을 고집한다. 죽이 되는 밥이 되든 자기가 알아서 할 테니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다. 독립을 선언한 아이와 아이를 놓지 못하는 엄마의 갈등은 이렇게 서서히 막이 오른다. 그게 만 4세 지날 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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