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인도를 만나다
공영수 지음 | 평단문화사
또 다른 인도를 만나다
공영수 지음
평단문화사 / 2014년 6월 / 296쪽 / 13,000원
제1부 인도의 소프트 파워
위대한 인도의 중산층
점점 확대되는 중산층과 그들의 역할: 21세기 새로운 인도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계층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인구 3억을 상회하는 교육받은 중산층이다. 이들은 대부분 대학교육을 받고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계층으로, 자신의 전문 직업을 갖고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인도 내에서 최상위 5퍼센트 정도가 최종 결정권자라면, 바로 그 밑의 약 30퍼센트 정도의 중산층은 오피니언메이커라 할 수 있다. 이들은 나머지 하위 계층과 상위 계층 모두와 소통이 가능한 집단이다. 인도 인구의 하위 35퍼센트는 절대빈곤층으로 분류되는데 그 수는 4억이 넘는다. 《힌두스탄 타임스》(2011. 10. 30.)에 소개된 기사에 의하면, 2011년 세계 인구가 마침내 70억을 돌파했으며, 인도 인구는 12억 4천만이 되었다. 이 추세로 간다면, 인도는 2025년에 중국 인구를 따라잡아 세계 최대의 인구를 보유한 나라가 될 전망이다. 그러나 며칠 후 인도의 현 절대빈곤층인 4억의 인구가 전 세계 절대빈곤층의 3분의 1을 차지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문제는 인구가 증가할수록 절대빈곤층도 늘어나는 것이다.
여기서 중산층의 역할은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다. 소위 중산층으로 분류된 사람들 내에서도 자신의 신분, 지위, 경제력 등을 상승시키기 위한 총성 없는 전쟁이 진행되고 있다. 좀 더 나은 교육을 받아 좀 더 나은 직장에 들어가면 좀 더 나은 임금을 받게 되고, 좀 더 나은 조건에서 부모님의 중매를 통해 배우자를 만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더 나은 두 가족이 결혼을 통해 한가족이 되어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또 노력하는 것이다.
웬만한 도시 중산층 가정은 집에 가정부를 두고 산다. 소형차일지라도 자가용을 몰고 다니고, 좀 더 부유한 사람은 운전기사를 두기도 한다. 물론 회사 일이나 외부 일로 인해 집안일을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운 점도 있지만, 도시빈민층 일꾼들의 임금이 매우 싸기 때문에 이들을 고용할 경제력이 충분히 되는 것이다. 그리고 주변의 시선과 동일 계층의 이웃이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자신의 생활 패턴도 달라진다. 오랜 세월 동안 이어져 온 인도인들의 신분 제도, 즉 카스트에 의해 각 신분마다 정형화되고 기대되는 삶이 있는데 만약 이것을 벗어나면 사회적으로 무시를 당할 뿐만 아니라, 신분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로 낙인찍히게 된다. 이런 이유로 신분에 맞는 삶의 패턴이 공고하게 다져져 있는 것이 인도 사회의 특징이다.
현대 인도의 신중산층: 194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과정에서 인도 정치계는 심각하게 분열되었다. 이후 무슬림 상류층을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로 몰아내자 영향력 있는 중상류층 중엔 힌두만이 남았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 없었다. 신분 차별이 독립 헌법에서 폐지되었고, 민주주의 정치노선을 걷기 시작한 인도에서 이들은 또 다른 변화를 시도해야 했다. 그것은 교육을 통한 기득권의 세습이었다.
식민지 시대 서양 선교사들이 세웠던 많은 미션 스쿨이 탈식민지 시대에도 교육시설로서 인기를 끌고 있다. 선진 학문과 교육 제도의 우수성뿐만 아니라 기독교적인 윤리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힌두 중상류층 부모들은 앞다투어 자녀들을 기독교 학교에 보냈다. 이들 눈에는 자녀들이 미션 스쿨에서 교육을 받으면 기독교로 개종할 위험성보다 사회에서 출세할 가능성이 더 커 보였던 것이다. 이곳에서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국내 유수의 대학을 나와 공무원 시험을 거쳐 정부 관료, 의사, 법률가, 교수, 교사, IT 관련 엔지니어 등으로 직업을 선택하여 살아가게 된다.
1991년 인도의 경제 개방으로 인해 경제적인 의미에서 중산층이 급속도로 늘어났다. 이제 20여 년이 흘렀다. 3억 이상의 이 어마어마한 인구는 인도 경제의 허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전 시대와 확연하게 다른 점이 있다면 중산층이 그 어느 시대보다 두터워졌다는 것이다. ‘신중산층’이라 불러도 될 정도다.
한국 기업들의 직접적인 마케팅 대상이기도 한 인도의 신중산층은 과연 어떤 집단일까? 나카지마 다케시는 그의 저서 『인도의 시대』에서 신중산층이 경제적인 혜택을 누리고 있지만 내적인 문제를 안고 고뇌하며 살아간다고 말했다. 자신들의 삶이 급격히 변화되면서 동시에 찾아오는 정체성의 혼란은 곧 이를 극복하려는 반작용 운동을 일으켰다. 그 반작용 중 하나가 바로 그들을 신흥 종교나 기존 힌두교에 심취하게 만드는 것이다. 소위 종교공동체주의라고 하는 종교적 극단주의가 경제 성장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강화되는 상황이 초래되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컬트적인 신흥 종교가 발흥하기도 하고 다른 종교를 강하게 배척하는 힌두민족주의 운동이 확산되기도 하는 것이다.
중산층을 위협하는 불평등과 불균형: 극단주의의 성행과 함께 소득 격차로 인한 계층 간의 갈등이 증폭되면서 절대빈곤층을 비롯한 가지지 못한 자들의 반발이 더 거세졌다. 이들은 신분상으로는 하층 카스트에 속하며, 경제적으로는 서민층과 빈곤층에 속한다. 그래서 문화적으로 혜택을 받지도 못한다. 이들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층 카스트를 대변하는 정당들을 지지하면서 정치적인 힘을 키워나가는 방법뿐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크리스토프 제프로트가 명명한 ‘조용한 혁명’이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일어나고 있다.
달리트(카스트에도 끼지 못하는 불가촉천민)와 하층 카스트의 이익을 대변하는 BSP 정당이나 SP 정당이 그 좋은 예다. 이 정당들이 정치를 잘 하든 못하든 간에 상관없이 이들의 성공 스토리가 4억 정도의 하층민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로 인도 최대 인구를 자랑하는 U.P. 주의 수상은 여성이자 달리트 출신인 BSP 정당의 마야와티다. SP 당은 2012년 U.P. 주 선거에서 압승하여 마야와티의 권력을 자신들에게로 옮겨 놓았다. 그리하여 아킬레스 야다브가 서른여덟의 젊은 나이에 새로운 수상이 되었다.
또한 가진 자들에 대한 그렇지 않은 자들의 극단적인 선택도 눈에 띄게 나타난다. ‘낙살바리’라고 하는 모택동주의자들이 하층 카스트와 부족들 사이에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이들은 테러나 전쟁도 불사하며 극단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어서 인도 정부에게는 큰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다. 이 집단은 아삼, 서벵골, 비하르, 쟈르칸드, 오리사, 차티스가르, 안드라프라데시 주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데, 이들의 활동은 신중산층과도 관련이 없지 않다. 인도의 신중산층은 도시의 서구화된 사회에서 성공을 위해 앞만 보고 달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이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뺏기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마치 고대 브라만들이 불교를 견제하면서 그랬고, 중세의 힌두 중상류층이 무굴 지배자들과의 사이에서도 그랬으며, 영국 식민지 시대에 신지식인 계층이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영어를 배우고 정당을 세웠던 것과 같이 이들도 더 거세진 경쟁 앞에서 기득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열을 올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기득권을 지키는 데 급급해 옆을 보지 못하고 있다. 세계 절대빈곤층의 3분의 1이 그들을 대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마치 19세기 중반 근대 유럽 사회가 급격히 산업화되면서 억압받는 노동자 계층을 대변하는 공산주의 사상이 대두된 것처럼 이들의 장밋빛 출세의 꿈은 머지않아, 아니 이미 큰 장벽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중산층의 위기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오랫동안 인도 정부의 외교관으로 활동했던 파반 바르마가 쓴 『위대한 인도의 중산층』이라는 책에서도 위의 문제점을 경고하고 있다. 만약 인도 신중산층이 인도 빈곤층들의 필요에 반응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중산층을 상대로 무장을 하고 신중산층이 추구하고 있는 부와 풍요를 대적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불안감은 현대 소설에서도 나타난다. 2008년 영국의 노벨 문학상이라고 하는 부커상에 빛나는 인도의 젊은 소설가 아라빈드 아디가의 『백호』라는 작품에서는 가난의 표상이라 할 수 있는 비하르 지역과 인도 경제부흥의 상징인 수도 델리의 위성도시 구르가온을 배경으로 비하르 출신 지주와 가난한 촌부의 아들인 운전기사의 삶을 동시에 다루고 있다. 지주의 아들이 결혼해서 현대식 문화가 넘쳐나는 구르가온으로 이사하고 그 집의 운전기사로 일하던 주인공도 함께 따라오면서 겪는 각기 다른 두 세계의 삶이 오버랩되면서 순진하던 운전기사가 주인 부부를 살해하게 되는 과정을 리얼하게 그렸다. 결국 이 운전기사는 돈을 훔쳐 방갈로르로 달아나고, 그곳에서 가명을 쓰면서 택시회사를 차려 출세하게 된다. 중산층 경제 신화의 어두운 모습을 보여 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실들을 근거로 유추해 보면 현재 인도의 중산층은 위대한 집단임에는 틀림없지만 자신들의 풍요를 위해 무시하고 때론 짓밟았던 경제적ㆍ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상생하는 방안을 찾는 것 또한 그들의 지속적인 출세 못지않게 중요함을 자각할 때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물질주의로 인해 경제적으로 갑자기 부유해진 이들의 조급증과 정신적 빈곤이 상대적 불균형을 양산해 낸 것도 중산층의 미래를 밝게만 볼 수는 없는 요소라 할 수 있다. 위대한 인도의 중산층은 과연 21세기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 인도 사회와 세계는 지금 그들을 주목하고 있다.
제2부 식민지와 분단의 유산
인도, 홍차를 만나다
짜이로 여는 인도의 아침: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면서 소개한 여러 문물과 제도 중 현대 인도인들에게 친숙한 인도 문화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짜이(홍차)’ 문화다. 짜이는 인도를 방문하는 한국인들이라면 누구나 쉽게 접하는 음료다. 인도인들의 짜이 사랑이 얼마나 큰지는 사회 빈곤층으로부터 상위 1퍼센트의 부유층까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매일매일 즐기는 음료라는 사실로도 쉽게 알 수 있다. 사회적 약자이자 도시 빈곤층을 대변하는 사이클 릭샤왈라(인력거꾼) 중에는 아침을 진한 짜이 한 잔과 비스킷 한 조각으로 때우고 밤에 집에 돌아갈 때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고 버티는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짜이는 서민의 애환을 담고 있는 음료이기도 하다.
짜이를 만드는 법은 간단하다. 우유와 물을 적당한 비율(나는 우유와 물을 1대 2의 비율로 섞는다)로 넣고 끓이다가 도중에 홍차 잎과 설탕 등을 첨가해 음료의 색깔이 변하는 추이를 살핀 후, 홍차 잎이나 물, 우유 등을 적당히 추가한다. 물과 우유가 펄펄 끓어 차 포트가 넘치려 하는 순간에 재빨리 가스레인지의 강불을 약불로 전환한다. 그러고는 몇 분을 더 은은하게 끓여서 수면에 유지방층이 얇게 생기면 불을 끄고 체로 찻잎을 거르면서 찻잔에 적당량을 따라서 마시면 된다. 여기에 기호에 따라 겨울엔 생강을 썰어 넣기도 하고, 마살라(향신료)를 첨가해 ‘마살라 짜이’를 만들어 마시기도 한다.
인도인들은 이렇게 만든 소위 인도식 밀크티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마시기 시작하는데 이는 기상 후 식전에 모닝 티를 마시는 영국식 차 문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나도 인도인들이 모이는 행사에 참석하게 될 때가 종종 있는데, 그때마다 커피브레이크가 아니라 티타임이 꼭 주어진다. 만약 종일 모임이 진행된다면 오전에 한 번, 점심 식사 시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저녁에 마칠 때 한 번 등 하루 모임에 티를 서너 번 마시게 되는 셈이다. 이런 모임을 일주일 동안 하게 된다면, 당신은 자연스럽게 인도 짜이를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편 전쟁과 인도 홍차와의 상관관계: 차는 본래 중국에서 시작되어 누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음료다. 한국과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에서는 고대부터 다도를 통해 예절을 배우고, 차를 마시며 이웃과 교제했다. 정치인들은 정사를 의논하기 위해 모이면서 차를 마시기도 했다. 이렇게 차는 사교적 의미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차는 찻잎을 어떻게 제조하는가에 따라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녹차다. 찻잎을 잘 말려 전혀 발효하지 않은 은은한 녹색을 띄는 한국인들이 즐겨 마시는 차종이다. 둘째는 화차다. 녹차에 자스민 향을 첨가한 차를 말하는데 녹차의 맛과 자스민 향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큰 사랑을 받는다. 셋째는 우롱차다. 중국과 일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차종이다. 이것은 찻잎을 발효 도중에 볶아서 반쯤 발효시킨 차로, 녹차와 홍차의 중간 정도라고 보면 된다. 색은 밝은 갈색을 띤다.
마지막으로 홍차가 있다. 홍차는 동아시아보다 동남아시아, 중동, 인도, 영국을 비롯한 유럽 등지에서 유명하다. 찻잎을 완전 발효시켜 짙은 적갈색을 띤다. 그래서 영어로 ‘Red Tea’ 혹은 ‘Black Tea’로 불린다. 이러한 네 종류의 차 중에서 홍차가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 각지로 퍼져 나갔다. 영국에서 홍차가 유행한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중 하나는 영국 상인들이 중국에서 녹차를 사서 본국으로 돌아가기까지 약 3개월 이상의 시간이 흐르는데, 도중에 차들이 발효되어 영국에 도착한 뒤에는 이미 홍차로 변해 버렸고, 그것으로 차를 끓여 마셔 보니 맛이 좋아 영국인들이 홍차를 자연스럽게 마시게 되었다는 설이다. 얼마만큼의 신빙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개연성 있는 재미있는 유추다.
영국인의 홍차 사랑은 역사적으로 인도와 관련이 깊다. 포르투갈, 네덜란드, 프랑스에 이어 식민지 개발의 후발 주자였던 영국은 1757년 플라시 전투 이후 인도 내에서 우위권을 잡으면서 유럽의 식민지 개발에 선두 자리를 점하게 되었다. 그 시기에 영국에서는 중국에서 수입한 홍차가 일반 일용직 노동자들까지도 애용하는 음료로 확산되었다. 통계에 의하면 1830년대 초 영국 전체의 수입 관세 비용 중 홍차가 단일 품목으로 10퍼센트나 차지할 정도였다. 연간 3천만 파운드를 수입했는데, 영국인 한 명당 1파운드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영국 정부로서는 중국과의 무역적자가 심화되어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부의 유출을 막을 길이 없었다. 영국 정부는 두 가지 자구책을 마련했다. 하나는 중국에 아편을 팔아서 그 수입으로 홍차 수입의 적자를 메우는 방법과 다른 하나는 인도 내에 홍차를 재배해서 직접 생산하는 방법이었다. 전자의 방법이 빠른 실효를 거뒀다. 중독성이 있는 아편은 피우면 피울수록 더 피우지 않을 수 없었기에 그 수요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이는 또한 중국 정부의 반발을 샀고, 두 나라는 전쟁을 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아편 전쟁이다. 그럼 영국은 아편을 어디서 생산했을까? 바로 인도였다. 인도 식민지인 비하르와 벵골 지역 등에서 재배한 아편은 중국으로 수출됐다. 일종의 삼각무역이 이루어진 셈이다.
두 번째 자구책은 인도에서 차를 재배하는 것인데, 1834년 인도 총독부의 벤팅크 총독이 차 위원회를 조직했던 것도 그 일환이었다. 결국 한 영국인에 의해 아삼 지방에서 중국 차종을 발견하게 되고, 몇 번의 실패를 거쳐 대량 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1870년대까지 아삼 차는 크게 빛을 보지 못했고, 영국에서 팔리는 차의 90퍼센트는 여전히 중국에서 수입한 것들이었다.
1880년대 이후 영국 차 재배자들과 상인들은 인도 아삼 차를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국과 호주를 중심으로 노동자 계급에서 중국차보다 싸고 진한 향을 가진 인도 차를 구입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1880년대에 실론 섬(스리랑카)에 대규모 차 농장이 세워졌다. 이 시기에 인도와 실론의 차를 대중화시킨 인물로 토머스 립턴을 들 수 있다. 현재까지 세계적인 홍차 브랜드로 알려진 립턴 티는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립턴보다 훨씬 먼저 있었던 트와이닝사는 1706년에 시작한 영국 기업인데, 커피를 주로 수입해서 팔다가 차가 대중화되면서 중국에서 다량의 차를 수입ㆍ판매했다. 그러다가 립턴과 비슷한 시기에 인도와 실론의 홍차를 대중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00년이 되자, 단지 10퍼센트만 중국에서 차를 수입하게 되었고, 인도에서 50퍼센트, 실론에서 33퍼센트를 수입하기에 이르렀다. 20세기의 시작과 함께 인도 차는 전 세계인의 차가 된 것이다. 또한 영국은 더 이상 중국에서 차를 수입하지 않게 되었다. 결국 인도의 차 재배와 생산, 수출의 확대 등의 과정이 영국이 식민지를 확장하고 세계 최강대국으로 성장하는 노정에서 함께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의 인프라와 정치력, 경제력으로 홍차는 빠르게 전 세계의 음료로 정착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