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 축구의 신
루카 카이올리 지음 | 중앙생활사
메시, 축구의 신
루카 카이올리 지음
중앙생활사 / 2014년 6월 / 296쪽 / 13,000원
어린 시절
메시는 1987년 6월 24일 아르헨티나의 로사리오에서 호르헤 메시와 셀리아 메시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첫 돌잔치가 열렸을 때 이모와 삼촌은 뉴웰스 올드 보이스 팀의 축구 셔츠를 선물로 사주었다. 네 번째 생일을 맞던 날 부모님은 메시에게 축구공을 선물했다. 아마도 이때부터 그는 축구에 빠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메시의 첫 번째 축구 선생님은 아파리치오 씨다. 그는 레오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기억한다. “가장 어린 선수였고 몸집도 가장 작았지. 하지만 눈에 가장 띄는 선수였다네. 녀석은 본능적으로 어떻게 경기를 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지. 그가 공을 가지면 아무도 막을 수 없었어. 한 경기에서 4~5골을 기록할 정도였으니 말이야. 녀석은 모두를 제치고 마지막에 골키퍼까지 제치면서 골을 성공시키더군.” 그는 진한 금빛 머리카락을 지닌 어린 소년의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너무 커서 헐렁거리는 셔츠를 입고 아주 짧은 다리를 가진 이 아이는 한 손에 자신의 키만 한 트로피를 쥐고 있었다. 바로 리오넬 메시의 생애 최초 우승컵이었다.
빨강과 검정의 유니폼
빨강과 검정 유니폼으로 대변되는 뉴웰스 팀은 메시 가족 모두가 좋아하는 팀이다. 메시의 아버지는 청소년 시절 이 팀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형 로드리고와 마티아스도 뉴웰스의 축구교실에 참여했고, 메시 역시 형들의 뒤를 따랐다. 당시 뉴웰스의 코치진은 메시의 경이적인 재능을 확신하고 메시의 부모에게 축구 교실에 메시를 입학시킬 것을 권했다. 1994년 3월 메시는 6살의 나이에 뉴웰스의 정식 멤버가 되었다. 1903년 설립된 뉴웰스는 로사리오 시를 대표하는 팀이다. 유서 깊은 팀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한 것은 어린 메시에게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메시가 어린 시절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우승 트로피는 1996년 페루에서 열린 칸톨라오 국제 축구 대회에서 받은 것이다. 뉴웰스에서 메시를 가르쳤던 에르네스토 베치오는 말한다. “그는 영리한 플레이를 했고 빠른 다리를 갖고 있었죠. 팀 동료를 위한 경기를 하면서도 혼자서 상대 팀의 절반을 따돌리는 능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골키퍼가 수비 위치에 있는 메시에게 패스를 하자 그 공을 한 번에 몰고 나가서는 상대 팀 골문에 넣더군요. 굉장한 장면이었어요. 메시는 저한테 배울 게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마라도나나 펠레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메시는 뉴웰스에서 뛰면서 챔피언십이나 토너먼트 대회, 친선 경기 등 모든 경기에서 최고의 실력을 보여주었고 한 시즌에 100골을 기록했다.
대서양을 건너
1997년 메시의 부모는 성장이 느린 셋째 아들을 걱정하며 호르몬 관련 내과 병원을 찾았다. 그때 메시의 나이는 9세, 키는 127cm에 불과했다. 검사 결과 성장 호르몬 결핍 증세가 있었다. 의사는 성장 호르몬 치료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 병을 가진 환자는 발육이 끝날 때까지 하루에 한 번씩 피하주사를 맞아야 한다. 성장 호르몬이 신체에 미치는 악영향은 매우 크다. 혈류의 흐름을 막고, 갑상선 기능 항진증, 고혈압, 종양 등 많은 병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이런 의혹과 공포 속에서 치료비용도 문제가 된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성장 호르몬 치료 비용이 한 해 60만 페소(약 1억 7천만 원)에 이르는데, 이 문제 때문에 메시 가족이 떨어져 사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떠들기도 한다. 바르셀로나 팀은 이 정도 비용을 충분히 지원할 수 있는 유일한 팀이기 때문이다.
2000년 9월 메시는 아버지와 함께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갔다. 바르셀로나 유소년 팀에서 테스트를 받기 위해서였다. 일주일 동안 그는 모든 경기마다 득점을 기록했다. 코치들은 모두 아르헨티나에서 온 소년의 실력을 칭찬했다. 이때 메시의 입단을 결정한 기술 감독 칼리 렉사흐는 이렇게 기억한다. “매우 작은 체구였지만 자신감을 가진 특별한 아이였습니다. 몸놀림만 빠른 게 아니라 머리 회전도 빨랐습니다. 저를 보고 메시를 발굴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설사 화성인이라고 해도 그의 경기를 보면 메시가 얼마나 특별한 아이인지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렉사흐는 메시의 단점도 설명해 주었다. “우선 녀석은 타국 출신입니다. 규칙상 외국 선수는 스페인 전국 리그에 출전할 수 없습니다. 둘째, 녀석은 아직 어립니다. 바르셀로나 선수로 성장할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셋째, 발육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지속적인 치료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런 단점마저 감수하고도 메시를 데려와야 한다고 확신했다. 메시는 너무나 뛰어난 선수였기 때문이다.
2001년 1월 입단 계약이 체결되었고 메시는 바르셀로나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이전 소속 팀에서 이적에 필요한 동의 절차에 응해주지 않아 이적 첫 해에는 지역 대회와 친선 대회에만 출전할 수 있었다. 여기에 다리 부상까지 겹쳐 메시는 한 해 내내 힘겨운 날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2002년 들어 이적 문제가 해결되었고, 메시는 바르셀로나에 온 지 1년 만에 스페인 리그 챔피언십에 참가할 수 있었다. 그해 3월 메시는 바르셀로나 팀의 챔피언십 우승 멤버가 되었고, 그 이후 성공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청소년 A팀으로 옮겨 30회 출장, 36득점, 세 번의 해트트릭, 한 경기 4점 기록, 두 번의 우승 기록을 세웠다. 당시 메시의 신장은 162cm, 몸무게 55kg으로 팀에서 가장 왜소했지만 그는 재능 있는 모든 선수가 모인 그 팀에서도 핵심 선수였다.
데뷔
2003년 11월 16일 포르투갈의 포르투에서 열린 축구경기에서 메시는 성인 축구팀에서의 데뷔 무대를 가졌다. 이 경기는 바르셀로나 청소년 팀이 과연 프로 1군 선수들과 함께 선발 출장이 가능할지 그 실력을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메시는 교체 투입되어 15분 만에 두 골을 성공시켰다. 메시는 한 시즌 만에 청소년 팀을 거쳐 바르셀로나 성인 3부 리그 C팀에서 2부 리그 B 팀으로 승급하였다. 2부 리그 2003~2004년 시즌에 바르셀로나는 우승 타이틀을 놓고 경합을 벌이고 있었다. 에스파뇰과의 중요한 시합에서 메시는 마술 같은 멋진 경기를 펼치면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해 메시는 공식 경기 36골, 친선경기 50골 득점이라는 대단한 기록을 세웠다.
비디오테이프
“한 소년이 바르셀로나에서 경기하는 모습을 촬영한 비디오테이프를 보았습니다. 소년이 경기하는 모습이 무척 마음에 들었지만 그가 너무 어리다는 게 마음에 걸렸습니다. 저는 소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된 후에 그를 만날 스케줄을 잡았습니다.” 이 비디오 속의 소년이 바로 메시다. 이 테이프는 뉴웰스의 감독이었던 클라우디오 비바스가 아르헨티나 청소년 팀의 책임자였던 휴고 토칼리에게 보낸 것이다. 메시가 마음에 든 토칼리는 남미 팀과의 친선 경기에 메시를 출전시켰다. 메시는 파라과이와 우루과이의 경기에서 교체 출전하여 모두 골을 기록했다. 우루과이 전에서는 두 골과 네 번의 어시스트를 기록하여 모두를 놀라게 하였다. 토칼리는 다음 해 1월 열리는 FIFA 20세 이하 월드컵 예선에 메시를 국가대표로 합류시켰다. 메시는 예선에서 교체 멤버로 출전하면서 3골을 넣었다. 영원한 라이벌 브라질과의 경기에서는 결승골을 넣기도 하였다. 네덜란드에서 열린 본선 대회에 나간 메시는 스페인과의 8강전에서 2골을 넣어 3-1로 경기를 마무리 지었다. 브라질과의 4강전에서는 선제골과 결승골을 넣어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나이지리아와의 결승전에서도 메시는 2골을 넣으며 아르헨티나를 우승시켰다. 메시는 대회 최우수선수로 뽑히면서 새로운 축구 스타의 탄생을 알렸다.
드라마 같은 이야기
2005년 5월 1일 메시는 바르셀로나 1군 경기에 출전하여 알바세테 팀을 상대로 호나우지뉴의 패스를 받아 완벽한 득점을 올렸다. 이 골로 리그 대회에서 득점을 올린 선수 가운데 역사상 가장 어린 선수가 되었다. 7월 8일 스페인 축구협회는 귀화 선수에 대한 조항을 수정했다. 스페인 클럽의 유소년 팀을 거쳐 선발된 17~19세의 비유럽 선수도 리그(스페인 프로축구 1부 라 리가)에서 경기를 치를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이다. 새 규정에 대해 스페인의 다른 클럽들은 바르셀로나와 레오에 대한 특혜라고 반발했다. 결국 축구 협회의 새로운 규정은 프로축구리그 위원회를 통과하지 못하면서 발효되지 못했다. 하지만 메시는 아무 문제 없이 챔피언스리그 경기에 참가했다. 바르셀로나 팀이 유럽 축구 연맹에 이 문제를 알리고 동의를 구했기 때문이다. 유럽 축구 연맹은 메시의 스페인 귀화를 인정했다. 9월 26일 메시는 아르헨티나 국적을 유지하면서 스페인 시민권을 취득하는 법적 절차를 완료했다. 이에 따라 스페인 축구협회도 메시가 자국 리그에서 뛸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단 일 분도 뛰지 못한 레오
2006년 독일 월드컵에 참가한 선수 중에 최우수 선수 후보로는 브라질의 호나우지뉴, 호나우두, 잉글랜드의 데이비드 베컴, 프랑스의 지네딘 지단 등이 있었다. 당시 메시는 중간급의 스타였다. 그는 차세대 마라도나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아르헨티나 국민은 메시가 선발 출장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는 코트디부아르, 세르비아 몬테니그로, 네덜란드가 있는 죽음의 조에 속했다. 첫 번째 코트디부아르와의 경기에서 벤치를 지킨 메시는 세르비아와의 두 번째 경기에 교체 선수로 출전했다. 메시는 15분을 뛰면서 1골 1 도움을 기록하는 환상적인 데뷔전을 치렀다. 멕시코와의 16강전에서는 1-1 동점 상황에서 추가 시간에 교체 멤버로 들어왔다. 메시는 수비진을 파고들어 막시 로드리게스에게 공을 연결시켜 멋진 득점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8강전 독일과의 대결에서 아르헨티나는 연장전까지 가는 격전 끝에 승부차기에서 4-2로 패하고 만다. 메시는 이 경기에서 1분도 뛰지 못했다.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 경기 진행 상황 때문에 메시를 투입할 수 없었다는 설, 감독의 실수라는 설, 일부 선수들의 잘못된 조언 탓이라는 설 등이 있다. 어느 것이 진실일지는 모른다.
메시와 마라도나
“메시 선수! 무려 네 명의 헤타페 선수를 제치고 골을 넣었습니다. 이 비교가 적절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1986년 월드컵에서 잉글랜드를 상대로 마라도나가 득점한 장면이 연상되는군요.” 이 해설은 2007년 4월 18일 바르셀로나와 헤타페의 경기 실황 중계방송 중 일부이다. 두 선수가 입은 유니폼은 다르지만 두 경기 모두 특별했다. 한 경기는 코파 델 레이의 준결승이었고 다른 경기는 월드컵 준준결승이었다. 두 경기를 지켜본 해설자들은 장편 서사 영화를 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며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이처럼 메시는 어린 시절부터 마라도나와 비교되었다. 메시를 가르쳤던 감독들은 이렇게 말한다. “제가 지금까지 겪어본 선수 중에 메시가 마라도나와 가장 많이 닮았습니다.” “메시가 전력 질주하는 모습이나 플레이하는 모습을 보면 마라도나가 연상됩니다.” 축구 황제 펠레는 말한다. “메시는 마라도나와 다른 축구 스타일을 구사합니다. 스피드는 메시가 더 빠르다고 할 수 있지만 재능은 마라도나가 압도적으로 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978년 아르헨티나를 우승시켰던 메노티 감독은 말한다. “메시를 마라도나와 혼동하지 마십시오. 메시는 마라도나가 아닙니다. 메시는 메시일 뿐입니다.” 메시와 마라도나는 작은 키에 왼발잡이이며, 뉴웰스에서 성장했고 청소년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마라도나는 TV 토크 쇼에서 메시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방송에서 메시를 후계자로 인정하고 축복했지만 마라도나는 최고의 자리를 내어준다는 발언은 하지 않았다. 아마도 최고의 자리에 있던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명예에 대한 집착일 것이다.
실망
2007년 바르셀로나 팀은 총 8개 대회에서 우승을 바라보았지만 결국 그들이 건진 것은 스페인 슈퍼컵뿐이었다. 정말 초라한 성적이었다. 온통 우승만을 생각해 온 메시는 가슴이 아팠다. 팀은 좋지 않은 성적을 기록했지만, 메시는 그해 최우수 외국 선수상을 받아 그마나 위로를 받았다. 메시의 축구 인생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그에게 주어진 과제는 코파아메리카 대회에서 자신감을 찾는 일이었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우승에 목말라 있었다. 메시는 페루와의 준준결승과 멕시코와의 준결승에서 잇달아 골을 넣었다. 결승전은 브라질과의 대결이었다. 메시는 바르셀로나 팀 동료인 브라질 대표 호나우지뉴와 카카가 결승전에 불참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승전에서 아르헨티나는 브라질에 3-0으로 대패했다. 메시는 역사를 바꾸기에는 경험이 부족했다. 브라질의 전담 마크를 당한 메시는 미로에 빠진 것처럼 속수무책이었다. 경기가 끝났을 때 메시는 허탈한 표정으로 경기장에 앉아 있었다. 메시는 분노와 슬픔을 느꼈다.
동메달과 은메달
대중 매체는 메시를 두고 풍부한 영감과 뛰어난 재능을 갖추었고 만지는 것은 모두 황금으로 만드는 능력의 선수라고 극찬한다. 2007년 메시는 《프랑스 풋볼》이 선정하는 발롱도르와 FIFA가 선정하는 올해의 선수상 후보로 올랐다. 발롱도르 수상식에서 메시는 카카, 호날두에 이어 3위(동메달)에 올랐다. 카카는 이번 시즌 큰 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한 점이 메시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고 말했다. 15일 후 열린 FIFA 시상식에서 메시는 카카에 이어 2위(은메달)를 차지했다. 시상식이 끝나고 아버지가 메시에 관한 인터뷰를 했다. “메시는 이제 겨우 20살이지만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선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습니다. 지금처럼만 한다면 언젠가는 1위 자리로 올라설 거라고 믿습니다.”
금메달을 위한 여행
2008년 메시는 아르헨티나의 올림픽 대표팀에 선발되었다. 하지만 바르셀로나 관계자는 챔피언스리그 예선전을 치르는 동안 메시의 부재를 용납할 수 없었다. 이들은 메시의 올림픽 출전을 막을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보았다. 이후 메시를 놓고 아르헨티나 축구협회와 바르셀로나 구단 사이의 대립은 지속되었다. 메시가 올림픽 예선전이 시작되기 전에 대표팀에 합류하는 시나리오를 구상했던 아르헨티나 축구협회는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 사건은 FIFA에서 직접 나서서 새로운 규정을 만들고, 국제 스포츠 중재 재판소에서 법적 다툼까지 벌인 뒤에야 끝이 났다. 바르셀로나는 비록 법적 분쟁에서는 이겼지만 아르헨티나 팀에 메시의 차출을 허락했고, 메시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올림픽에 아르헨티나 대표 선수로 출전하였다.
순조롭게 예선을 통과한 아르헨티나는 준준결승에서 네덜란드를 만났다. 메시는 선제골을 넣고 결승골을 어시스트 하면서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준결승에서 만난 브라질과의 대결은 바르셀로나 팀 동료인 호나우지뉴와의 대결이기도 했다. 메시는 각오를 다졌다. “저는 아직도 코파아메리카 결승에서 브라질에 패한 순간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저희 차례입니다.” 메시의 말대로 아르헨티나는 3-0으로 브라질을 농락했다. 결승전 상대는 나이지리아였다. 양 팀은 무더운 날씨 속에 지루한 공방전을 벌이다가, 후반 12분 메시의 패스를 받은 디마리아가 왼쪽 측면을 빠르게 돌파하여 결승골을 성공시켰다. 아르헨티나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우승을 차지한 이후 4년 만에 다시 세계 정상의 자리에 오르며 올림픽 2연패를 달성했다. 이 금메달은 메시의 올림픽 참가를 반대한 사람들과 법정 공방까지 가는 상황에서 일궈낸 값진 메달이었다.
행복
2009년 바르셀로나는 스페인 클럽으로는 처음으로 트리플을 달성하는 영예를 안았다. 메시는 라 리가에서 23골을 넣어 득점 순위 4위에 올랐다. 코파 델 레이에서는 6골을 넣어 대회 최다 득점자로 선정되었고 챔피언스리그에서도 9골로 최다 득점자로 기록되었다. 메시는 이런 활약에 힘입어 스페인 감독들이 뽑은 최우수 외국인상을 받았다. 메시는 하루가 다르게 기량이 성장했으며, 늘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경기에 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