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작은 우연들
마리 노엘 샤를 지음 | 윌컴퍼니
세상을 바꾼 작은 우연들
마리 노엘 샤를 지음
윌컴퍼니 / 2014년 05월 / 280쪽 / 15,000원
주방 보조가 된 마그네트론 - 전자레인지의 탄생
퍼시 스펜서(Percy Spencer)는 미국 물리학자로 마그네트론(magnetron)을 만드는 레이온사(Raytheon 社)에서 일하고 있었다. 마그네트론은 강력한 극초단파를 발생시키는 장치로, 적군의 비행기를 탐지하는 레이더의 성능을 높여주는 혁신적이고 새로운 기술의 도구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영국에서 개발된 이후로 이제는 대량으로 생산되는 단계에 이르러 있었다. 스펜서가 레이온사에서 맡은 일은 공장의 생산 라인 가운데 하나를 감독하는 것이었다. 스펜서는 독학으로 공학을 공부한 물리학자로, 전자공학의 천재이자 호기심 많고 열정적인 재주꾼이라는 칭찬을 듣는 인물이었다. 특히 초콜릿 앞에서는 과하다 싶을 정도의 애정을 드러내며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가 좋아한 초콜릿은 포장지만 봐도 단번에 알 수 있는 제품, 바로 노란색 바탕에 진홍색 글씨로 상표가 찍힌 ‘미스터 굿바(mr. Goodbar)’라는 이름의 땅콩 초콜릿 바였다.
1945년 10월의 어느 날 아침, 스펜서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마그네트론 몇 대를 무작위로 골라 성능을 검사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첫 번째 마그네트론의 테스트를 마친 후, 잠시 휴식 시간을 갖기로 하고 주머니에 있던 ‘미스터 굿바’를 무의식적으로 꺼내어 들었다. 그런데 순간 스펜서는 손에 든 초콜릿 바를 다시 확인해야 했다. 초콜릿 바에서 온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꼭 햇볕이 드는 곳에 오래 둔 것처럼 물렁하게 녹아 있는 상태였다. 작업실 내부 온도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굳이 온도를 재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초콜릿 바를 녹인 열은 마그네트론에서 나온 게 분명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스펜서의 머릿속에서는 엉뚱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걸로 음식을 익힐 수도 있을까?’ 그는 이 기발한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초콜릿보다 더 시각적이고 재미있는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실험에 들어갔다. 옥수수 알갱이 한 줌을 접시에 담아 마그네트론 옆에 갖다 둔 것이다. 그러자 잠시 후, 작업실 안은 팝콘 세례로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다!
다음 날에도 스펜서는 실험을 이어갔다. 이번에는 마그네트론으로 달걀을 삶을 수 있는지 알아볼 참이었다. 스펜서는 물이 가득 담긴 주전자에 달걀 하나를 넣고, 밤새 만들어낸 장치를 이용해 전자기파가 주전자의 물을 향해 쏘아지도록 만들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10여 초가 지나자 달걀이 터져버린 것이다! 마그네트론으로 음식을 익힐 수 있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그는 이 일을 회사 경영진에 보고했고, 경영진은 새로운 시장을 열어줄 그 상품의 수익성을 즉각 알아보았다.
상품화 계획은 극비리에 추진되었다. 특허가 등록된 가운데 스펜서는 시제품 제작의 지휘를 맡았다. 제일 중요한 기술적 과제는 전자기파를 금속 상자에 가두어 음식이 그 안에서 조리될 수 있게 만드는 것이었다. 상황은 상당히 빠르게 진행되었고, 레이온사는 1947년에 최초의 전자레인지를 내놓기에 이른다. 그런데 이 전자레인지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높이가 1.6미터에 무게는 350킬로그램이나 되어 대형 냉장고에 가까웠다. 게다가 가격은 거의 5,000달러에 달해서 일류 호텔 내지는 호화 여객선에서나 구비할 수 있는 물건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상업적인 성공은 아직 먼 이야기였다. 더구나 사람들은 전자기파를 뭔가 무서운 것으로 여기며 겁을 냈다.
이후 전자레인지는 개량을 거듭해, 1967년부터는 미국의 일반 가정에 보급되기 시작한다. 당시의 전자레인지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 비슷한 크기에 가격은 500달러 정도였다. 그리고 전자레인지의 원리, 즉 음식물 속 수분의 물 분자들이 진동해서 열이 발생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대중에게 알려진 이후로 전자기파를 겁내는 사람들도 줄어들었다. 그렇게 해서 전자레인지를 이용한 식생활의 발전이 시작되었고, ‘땡!’ 하고 울리는 알림음은 현대인의 음식 문화를 상징하는 소리로 자리매김한다.
약이 된 독가스 - 항암요법의 출발
1943년 12월 2일 오후 7시 30분, 독일군은 아드리아해 연안을 공습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의 항구도시 바리(Bari)를 겨냥한 작전으로, 특히 영미 연합군 물자 보급의 전략적 거점인 항구가 공격 대상이었다. 당시 항구에서는 화물선 서른 척의 하역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오후 8시, 독일 폭격기 100여 대가 임무를 완수했다. 연합군 입장에서 이번 일은 진주만 공습 이후로 가장 심각한 타격이었다. 리버티선(Liberty ship)이라고 불리던 7,000톤급 화물선 17척이 침몰했고, 그 가운데 존하비호(John Harvey 號)는 가라앉기에 앞서 큰 폭발을 일으켰다.
존하비호의 침몰은 비극 중의 비극이었다. 왜냐하면 이 배는 평범한 화물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존하비호에는 사실 큰 비밀이 실려 있었다. 500킬로그램짜리 겨자가스 폭탄 2,000개가 바로 그것이다. 겨자가스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처음으로 사용된 악명 높은 독가스로, 겨자 냄새가 난다고 해서 그 같은 이름을 갖고 있었다.
존하비호 폭발 당시 문제의 독가스는 공기 중으로 퍼져갔음은 물론, 바다로도 흘러들어가 연료와 함께 기름띠를 이루었다. 하지만 이처럼 물과 공기가 동시에 오염되는 사고가 일어났음에도 가스에 의한 위험 징후는 폭격이 있고 수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기름 범벅의 바닷물에서 구조된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상처를 입은 경우에는 따로 치료를 받았고, 물에 빠지기만 한 경우에는 특별한 검사 없이 모포로 덮는 정도의 간단한 조치만 받았다. 다들 눈을 헹궈내기에 급급해서 피부에 묻은 그 끈적끈적한 기름을 빨리 닦아낼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비극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물에 빠진 사람들의 피부가 온통 물집으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극심한 가려움을 호소했다. 눈에서는 진물이 흘렀고, 한동안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정도가 심한 사람들은 견디기 힘든 가슴 통증까지 호소했다. 게다가 군인들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같은 증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병원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한 의사가 이 이상한 질병의 원인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고 나섰다. 모든 증상이 제1차 세계대전 때 독가스에 중독된 군인들한테서 나타난 것과 꼭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발언은 현지 연합군 사령관의 심기를 몹시 불편하게 만들었다. 존하비호에 실려 있던 화물의 정체를 비밀에 부치라는 명령이 내려온 까닭이었다. 이후 역사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문제의 폭탄을 유럽까지 수송하라고 명령한 사람은 미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였다. 히틀러가 곧 화학무기로 공격해올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그에 반격하기 위한 작전을 준비했던 것이다.
마침내 존하비호의 비밀은 유지하기 힘든 상황에 이르렀고, 결국 사태를 자세히 조사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그래서 알제리에 있던 미군 중령이 서둘러 파견되어 이 수수께끼 같은 전염병의 원인에 관해 보고서를 작성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군의학 전문가였던 중령은 약 600명에 이르는 해군과 1,000명이 넘는 시민이 감염된 그 병이 겨자가스 노출로 인한 것임을 즉시 알아차렸다.
공습이 있고 며칠 후, 겨자가스에 많이 노출된 부상자 몇 명은 결국 숨을 거두었다. 살아남은 해군들은 격리 조치를 받았고, 일부는 휴가를 받기도 했다. 물론 모두가 자신이 걸린 질병의 원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한편, 사고로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83명에 대해서는 면밀한 검사가 이루어졌다. 검사 결과에서 무엇보다 눈에 띄는 점은 이들의 백혈구 수치가 매우 낮다는 것이었다. 이 사실에 중령은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겨자가스가 백혈구 계통의 세포를 파괴할 수 있다면 암세포의 증식 역시 억제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렇게 해서 바리의 대참사는 그 비극적인 우연을 통해 항암 화학요법이라는 새로운 의학의 출발을 가져왔다. 겨자가스에서 얻은 성분은 특히 악성 림프종의 일종인 호지킨병에 대한 처방으로 쓰이게 된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역시 독가스 계열에 속하는 많은 물질(메클로레타민, 클로람부실, 시클로포스파미드, 이포스파미드 등)이 현대 항암요법에서 빛을 보게 되었다. 어떤 이들의 죽음이 다른 이들의 생명을 구하는 힘이 된 것이다.
미치광이 괴짜 과학자 - 교류 전기의 발명
1943년 1월 7일 뉴욕의 어느 호텔. 87세의 노인이 자신이 묵고 있던 방에서 혼자 숨을 거두었다. 이 남자는 결혼한 적이 없었고, 자식도 없었다. 말년에 그는 오로지 단 한 가지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지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호텔 근처 공원에서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는 것…….
알거지에 부랑자가 되다시피 한 이 초라한 남자가 20세기가 낳은 가장 뛰어난 천재 가운데 한 명이었다는 사실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환상을 보는 사람, 혹은 지칠 줄 모르는 발견자로 통한 이 남자는 전성기 시절 수많은 기발한 발명으로 동시대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일명 ‘죽음의 광선’이라 불리는 대량 살상 무기를 생각해내면서 집단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독학으로 발명가가 된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가 바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테슬라는 1856년에 지금의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났다. 1884년에 유럽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왔고, 미국에서 연구 활동을 시작했다. 테슬라가 제일 좋아하는 분야는 전기에너지였다. 전기에너지를 누구나 공짜로 쓸 수 있게 만드는 게 그의 꿈이었다. 그는 수많은 발명품을 만들어냈으며, 특허만 해도 700개가 넘었다! 테슬라는 말 그대로 끝없이 발명을 해댔다. 우선 그는 유도전동기, 수력발전 기술, 가정용 발전기, 원격조종기, 로봇공학의 기본 원리, 네온사인, 라디오, 레이더의 기본원리, 원격조종 보트, 무선 에너지 전송 기술 등 수백만 사람의 일상생활을 크게 변화시킨 혁신적인 발명품과 기술을 만들고 생각해냈다. 또한 그는 로봇이나 수직 이착륙 비행기처럼 다소 별난 발명품을 고안하기도 했고, 폭풍우나 지진을 인공적으로 발생시키는 장치처럼 조금은 걱정스러운 아이디어도 내놓았다.
특이하면서도 창의력이 넘치는 천재였던 테슬라는 미치광이 괴짜 과학자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발명가이자 시인이었고, 산스크리트어를 포함해 12개 언어를 구사할 만큼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였다. 기억력이 워낙 뛰어나서 설계도를 따로 그릴 필요가 없었으며, 그럼에도 발명품을 완성하고 나면 언제나 예상한 그대로의 결과물이 나왔다. 그는 어린 시절에 두 가지 일로 크게 놀란 적이 있었다. 하나는 형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여덟 살 때 유행성 콜레라에 걸려 죽다 살아난 일이었다. 그 트라우마로 테슬라는 세균 공포증을 갖게 되었으며, 평생을 강박장애에 시달렸다. 밥을 먹을 때마다 음식물의 무게와 부피를 재고 계산하는 행동을 한 것도 일종의 강박이었다. 또한 그는 종종 어떤 환영을 보았다. 섬광처럼 떠오르는 영감 같은 것이었는데,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갑작스럽고도 우연하게 떠오르는 그 아이디어들은 종종 놀라운 발명으로 이어졌다.
테슬라의 가장 중요한 발명품 중 하나도 1881년에 그렇게 불쑥 떠오른 아이디어로 만들어낸 것이다. 당시 테슬라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지내면서 그곳의 전화국 기술자로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일요일, 친구이자 동료인 안탈 시게티와 공원을 산책하며 《파우스트》를 낭송하고 있는데 머릿속에 어떤 영상이 떠올랐다. 그 영상은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졌지만 번개처럼 강렬하고 또렷했다. 테슬라는 순간 몸이 훅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고, 언뜻 본 그 영상을 어서 붙잡아 놓아야 한다는 생각에 급히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들고는 공원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가 방금 상상력으로 작동시킨 어떤 기계였다!
그가 머릿속에서 본 것은 교류(alternating current, 시간에 따라 크기와 방향이 주기적으로 변하는 전류)로 작동하는 유도전동기의 설계도였다. 혁신 그 이상의 아이디어였다. 전동기는 전기에너지를 기계에너지로 변환시킬 수 있는 기계인데, 테슬라의 아이디어가 천재적이었던 것은 기계에너지를 전기에너지로 바꾸는 발전기의 원리를 거꾸로 활용하여 그 같은 변환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테슬라가 그 아이디어를 생각해냈을 당시 전동기는 직류(direct current, 전지에서의 전류와 같이 항상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는 전류)로 작동하는 것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직류는 전지로 만들어내야 하고 전송이 힘들다는 문제가 있었다. 테슬라는 교류를 이용할 수 있는 전동기를 개발하면 전기를 혁신적으로 전송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강물의 수력에너지에서부터 전기를 생산할 수 있음을 세상에 보여주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고, 여기에도 교류 시스템을 적용할 생각이었다. 실제로 그는 1895년에 나이아가라 폭포에 최초의 수력발전소를 세워 그 꿈을 현실로 옮겼다.
테슬라는 교류로 작동하는 유도전동기를 만들어낸 다음, 교류 전기를 대규모로 생산할 수 있다는 것도 보여주었다. 그 덕분에 전화(電化, electrification. 동력, 열, 빛 등을 얻기 위해 전기에너지를 이용하는 것) 작업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이와 더불어 증기기관에 따른 산업혁명 이후 제2차 산업혁명이라 불리는 기술 발전이 시작된다. 게다가 교류 유도전동기는 수많은 가전제품을 통해 가정에서도 유용하게 사용되었으며, 교통수단에도 적용되면서 전차, 배, 기차 등의 성능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
테슬라는 교류 유도전동기와 대량 전기 생산이라는 두 가지 업적만 놓고 봐도 동시대 사람들의 삶을 혁신시킨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사람들에게 잊힌 채 비참하게 죽어야 했을까? 혹자는 테슬라가 운이 없었다고 말한다. 발명가이기 이전에 시인이었던 테슬라는 사업가로서의 수완은 뛰어나지 못했고, 그런 까닭에 양심적이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기 일쑤였다. 실제로 그는 일부 발명품의 특허를 빼앗기기도 했다. 더구나 테슬라의 연구는 그 유명한 토머스 에디슨 때문에 오랫동안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에디슨은 직류 시스템을 열렬히 지지하면서 그 기술에 많은 돈을 투자했고, 투자한 만큼 수익을 거두기 위해 교류 시스템을 깎아내렸던 것이다. 에디슨이 패배를 인정했을 때 테슬라는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였다.
언제나 시대를 앞서 나간 괴짜 발명가 테슬라는 말년에 외계인과 통신할 수 있다는 주장을 내놓으면서 사람들에게 결정적으로 신용을 잃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전에 했던 발명들의 가치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테슬라의 지지자들은 그가 스스로 사람들에게 잊히는 것을 선택한 것 같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발명품이 비양심적인 자들의 손에 들어가 나쁜 용도로 사용될까 봐 두려워했다. 박애주의자였던 테슬라에게 그 같은 자각은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딴 특허들을 온갖 수단을 동원해 숨겼고, 연구는 계속했지만 그 결과물을 세상에 발표하는 일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테슬라는 삶을 마감하고 30년도 더 지난 1975년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과학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마침내 공식적인 인정을 받은 것이다. 너무 늦긴 했지만…….
부러진 프로펠러 - 스크루 프로펠러의 발명
1843년, 영국 브리스틀은 그레이트브리튼호(Great Britain 號)의 진수식으로 도시 전체가 들썩거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길이가 98미터에 이르는 이 최첨단 여객선은 나무가 아니라 금속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철제 증기선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배에는 매우 혁신적인 장치가 장착되어 있었다. 스크루 프로펠러가 바로 그것이다. 그레이트브리튼호를 만든 영국의 토목 조선 기술자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Isambard Kingdom Brunel)은 그 새로운 추진 장치의 효능을 확신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사용되어온 물레방아 모양의 외차(外車)를 달려던 생각을 바꾸어 스크루 프로펠러를 달기로 최종 결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