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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설 인물 삼국지

김경한 지음 | 북오션
평설 인물 삼국지

김경한 지음

북오션 / 2014년 3월 / 352쪽 / 16,000원





1장 한나라 멸망의 원인



조조 2 _ 도덕성은 따지지 않다

유재시거(唯才是擧). 오직 재능에 의거해 인재를 선발한다는 뜻이다. 조조가 그랬다. 도덕성은 고려하지 않고 재능만 봤다. 그가 오직 재능에 의거해 인재를 등용한 대표적인 사례가 정비라는 사람이다. 정비는 자가 문후(文候)로 원래 조조와 동향 출신이며, 일찍부터 그를 따라 종군했다. 조조는 동향인 데다가 초창기에 함께 거병했던 사람들 중 하나인 정비를 특별히 너그럽고 친밀하게 대했다. 정비는 재물을 탐해 재산을 늘리는 일에 열심이었는데, 이 과정에서 여러 번 법을 어긴 적도 있었다. 조조는 그때마다 용서를 해줬다. 법령 시행이 엄격하기로 유명한 조조로서는 극히 예외적인 일이었다.

건안(建安) 말기, 정비는 동오를 정벌하러 나선 조조를 따라가게 됐다. 이때 정비는 군용 소와 비루먹은 자기 집 소를 슬쩍 바꿔치기했다. 이 일로 정비는 체포돼 옥에 갇혔다. 이번에도 조조는 정비의 관직을 삭탈하는 데 그쳤을 뿐 형벌을 가하지는 않았다. 백의종군하게 된 정비를 본 조조가 물었다. “문후, 인수는 어데 뒀소?” 정비 역시 조조가 희롱하는 것을 알고 농담으로 대꾸했다. “떡과 바꿔 먹었습니다.” 조조가 웃으면서 좌우를 돌아보고 말했다. “동조연 모개가 여러 차례 이 사람에 대해 말하면서 무겁게 죄를 다스리기를 주청했으므로 나는 이 사람이 맑고 어질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소. 내가 정비를 쓰는 이유는 비유하자면 인가에 쥐를 잘 잡는 도둑고양이를 두는 것과 같소. 도둑질을 해 비록 약간의 손해가 나더라도 그 덕에 내가 쌓아놓은 곡식자루가 온전히 보전되기 때문이오.”

후일 정비는 조조가 동관에서 마초와 대결할 때, 조조의 목숨을 구해줌으로써 빚을 갚았다. 조조의 군대가 황하 북쪽으로 도하를 시도할 때, 마초가 만 명의 기병을 이끌고 기습에 나섰다. 조조는 후방에서 불과 수백 명의 병사만을 거느린 채 지휘를 하고 있었으므로 매우 위급한 상황이었다. 이때 조조의 막하에서 전군교위(典軍校尉)로 있던 정비가 일제히 군용 말과 소를 풀어놓았다. 마초의 병사들이 소와 말을 노획하기 위해 흩어지는 바람에 조조는 간신히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역사의 裏面] 동양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조조는 매우 뛰어난 병법가였다. 그가 군대를 운용하는 능력은 손무와 오기에 필적했다. 군사작전에 임했을 때 그는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하는 것이 마치 귀신과 같았고, 늘 기이한 계책으로 적을 기만해 승리를 거뒀다. 직접 10만여 자로 된 ‘병서’를 지었는데 여러 장수들은 정벌 시 이 신서(新書)에 따라 일을 처리했다. 조조의 명령을 따른 자는 모두 승리를 거뒀고, 지시를 위반한 자는 패배를 맞봤다. 조조는 나는 새도 활로 쏴 떨어뜨릴 정도로 무용이 뛰어났다. 한번은 남피(南皮)에서 사냥을 했는데 하루에 꿩을 63마리나 잡았다. 조조는 거병 초기 양주에서 병력을 얻어 돌아올 때, 반란을 일으킨 병사 수십 명을 혼자서 해치운 적도 있었다.

조조는 시문에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먼저 그의 시구 하나를 감상해보자. 악부 형식의 시 <호리행(蒿里行)> 의 마지막 구절이다.

백골이 들판에 널려 있고, 천 리 안에 닭 울음소리 들리지 않는구나. 白骨露於野, 千里無鷄鳴살아남은 사람은 백에 하나뿐. 이를 생각하면 단장이 끊어지는 듯하다. 生民百遺一, 念之斷人腸

전란의 상흔이 절절이 느껴지지 않는가. 조조는 한(漢) 대의 오언고시를 완성한 최고의 시인 중 하나였다. 그와 조비, 조식 부자를 중심으로 건안문학이 꽃을 피우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조조는 30여 년간 군대를 지휘하면서도 손수 글쓰기를 그치지 않았다. 낮에는 군사작전을 궁리하고 밤에는 경전을 사색했다. 또한 조조는 음악에도 정통해 높은 곳에 오르면 반드시 시(詩)와 부(賦)를 지었고, 이것을 다 관악기와 현악기의 운률로 옮겨 악장(樂章)으로 만들었다. 한나라 후반에는 초서(草書)가 유행했는데, 조조는 가장 뛰어난 서예가의 한 사람이었다. 또한 토목 기술에서도 일가를 이뤄 업성에 궁전을 지을 때 자신의 뜻대로 설계했으며. 정밀하게 참호와 보루를 축조해 그에게 한 번 포위되면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이를 보면 조조는 르네상스적 인간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능력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천부적 재능을 지녔다 할지라도 각고의 노력이 없었다면 이처럼 다방면에서 높은 성취를 이룰 수는 없었을 것이다. 조조는 젊은 시절 학업에는 관심이 없고 임협방탕하게 놀기를 좋아했다. 그랬던 그가 언제 이토록 다양한 능력을 키울 수가 있었을까. 이는 말 그대로 처절한 몸부림의 결과였다. 한나라 조정의 무능과 부패에 실망한 나머지 고향인 초현으로 낙향한 조조는 난세를 예감하며 시대의 변화와 자신의 행로를 깊이 고민했다. 조조는 세상을 바로잡을 실력을 축적하기 위해 치열하게 공부하고 사색했다. 그의 다재다능함은 다 이런 노력의 결과였다.



2장 군웅쟁패의 시대



공손찬 _ 스스로를 과신한 자의 비참한 최후

공손찬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이었다. 공손찬이 편집증적인 자기 신뢰를 갖게 된 것은 그가 키 크고 매우 잘생겼을뿐더러 목소리도 우렁차고 미성이어서 보는 사람마다 흠모의 감정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공손찬이 출세의 길을 걷게 된 것도 그의 잘난 용모 덕분이었다.

공손찬은 출신성분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공손찬의 아버지는 요서군 영지현에서 제일가는 부호였지만, 어머니가 기생 출신의 천첩이었다. 당시 자식은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게 돼 있었으므로 공손찬은 정상적으로는 출세할 길이 없었는데, 태수에게 뇌물을 바치고 나서야 겨우 군의 하급관리가 될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손찬은 요서태수의 눈에 들어 그의 사위가 됐다. 문벌이 지배하는 사회 풍조로 볼 때 거의 파격적인 일이었다. 아마도 태수의 딸이 그에게 반했기 때문 아니었을까. 태수는 공손찬을 키워주기 위해 노식 문하에 유학을 보내기까지 했다. 그곳에서 만난 유비는 그를 형님으로 모시며 따랐다. 고대에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인물이 출세에 큰 영향을 미치기는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자기가 잘나서 사람들이 무조건 따를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잘난 인물에 능력까지 뒷받침됐다면 좋았겠지만, 공손찬은 능력이 부족했다. 공손찬은 제 생각대로만 일을 처리했으며, 과거의 성공 경험에만 의지했다.

공손찬이 요동속국(遼東屬國)의 장사(長史)가 됐을 때의 일이다. 공손찬은 수십의 기병을 거느리고 요새 밖을 순찰하러 나갔다가 갑자기 나타난 선비족 기병 수백 명에게 포위당했다. 버려진 관사의 담벼락에 의지해 버티던 공손찬은 사졸들을 모아놓고 결의를 다졌다. “오늘 중으로 이 포위망을 뚫지 못하면 우리는 다 죽은 목숨이다. 내가 앞장서서 돌파를 시도할 테니 귀관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나와 함께 싸우겠는가?”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걸고 결사적으로 싸워 포위를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공손찬이 이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오자 그의 이름이 처음으로 널리 알려졌다. 공손찬은 변방에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탁현 현령으로 승진했다.

공손찬의 이 경험은 후일 몇 번의 싸움을 통해 더욱 강화됐다. 공손찬이 장순과 오환족의 연합군을 추격해 적진 깊숙이 들어갔다가 요서(遼西) 관자성(管子城)에서 고립된 일이 있었다. 이때 공손찬은 2백여 일간 농성하며 버티다가 적이 해이해진 틈을 타서 포위를 뚫고 돌아왔다. 유우가 10만 대병으로 역경을 포위했을 때도 공손찬은 성에 의지해 방어하다가 유우군이 방심한 틈을 노려 반격을 가해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이때부터 고립된 성에서 농성하다가 적이 해이해진 틈을 타 반격을 가하는 전술이 그의 주특기가 됐다. 공손찬은 창의력이 부족했으므로 늘 이 전술을 들고 나왔다. 이 전술은 그 후에도 몇 번 더 성공을 거뒀지만, 결국은 이 답답한 전술이 패망의 원인이 되고 만다. 유주의 반군과 국의가 이끄는 원소군이 역경에서 공손찬을 포위했을 때도 군량이 떨어진 원소군과 유주 반군의 연합군 병사들이 흩어져 달아났기 때문에 승리를 거둔 것이었다. 원소가 대대적으로 군대를 동원해 공격에 나서자 공손찬은 다시 역경에 틀어박혔다. 공손찬은 끝까지 농성했으나 원소는 단단히 준비를 마친 후였다. 원소는 해를 넘기면서까지 계속 공격해 결국 열 겹의 성으로 이뤄진 역경을 함락시켰다. 최후의 순간에 공손찬은 처자식들을 다 목매어 죽인 후 누각에 불을 질러 자살했다. 비참한 최후였다.

[역사의 裏面] 그의 패망을 막아주지 못한 성채, 역경: 공손찬은 원소와의 싸움에서 연전연패한 후 역경이라는 거대한 성채를 수축하고 그곳에 틀어박혔다. 역경이 소재한 역현은 역하(易河)를 통해 발해와 연결돼 각종 물자의 수송과 운반이 용이했다. 역경의 규모는 열 겹의 성채와 열 겹의 참호로 이뤄졌다. 각 성채 위에는 누각과 누대를 세웠는데, 당시 도량형을 요즘 기준으로 환산해볼 때, 중앙 누각 높이는 약 22.3미터에 달했으니 지금으로 쳐도 10층 건물 높이에 해당한다. 공손찬은 이 성 안에 3백만 석의 곡식을 쌓아놓았다.

공손찬은 휘하의 여러 장수들에게 성벽과 누각을 구역별로 할당해주고, 가족들과 함께 그곳에 거주하면서 각자 책임하에 성을 방어하게 했다. 이러한 누각과 누대의 수가 천 개나 됐다. 엄청난 규모의 성곽과 누각을 축조하고 3백만 석의 곡식을 쌓아놓기 위해 어마어마한 물자와 인력이 동원됐다. 공손찬이 유주 백성들을 무한대로 수탈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술상의 이점만 생각했지 백성들의 삶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것이 공손찬의 특성이었다.

역경 수축이 완료된 후 공손찬은 큰소리를 쳤다. “예전에 나는 손가락을 한 번 휘저으면 천하를 평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소. 지금 보니 그것은 내 맘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소. 힘써 농사를 지으면서 양곡을 축적하고 병사를 휴식하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소. 병법에 의하면 누각이 100개면 공격이 불가능하다 했소. 지금 우리는 누각과 망루가 천 개나 되오. 이 곡식들이 다 떨어질 때쯤이면 천하의 대사가 결정될 수 있을 것이오.”

그러나 이 거대한 성곽도 공손찬의 패망을 막아주지는 못했다. 원소군이 진격해 들어오자 공손찬은 휘하의 부장들을 지원해주지 않았다. 자꾸 지원해주면 대장의 지원만 기다리며 스스로 살아남을 방도를 찾지 않게 될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자 공손찬의 부장들은 일단 포위를 당하면 바로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어차피 버텨봐야 구원병은 오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공손찬은 별장들이 연이어 원소군에 항복하자 순식간에 포위망이 역경으로 좁혀졌다.

이제 공손찬은 처첩들 이외에는 아무도 믿을 수 없게 됐다. 자신이 거주하는 중앙의 높은 누각에 철문을 만들어 달아 안팎의 출입을 차단하고, 그 안에는 가족을 비롯해 비첩과 여종들만 거주하게 했다. 밖에서 보고할 일이 있으면 성문 밖에 달아놓은 바구니에 문서를 넣어두게 한 후, 성 안의 비첩들이 물 긷듯이 끌어올렸다. 그는 또 처첩과 여종들에게 큰 소리로 말하는 법을 연습시키고는 지시할 일이 있으면 이들에게 고함을 질러 명을 전달하게 했는데, 그 소리가 수백 보 거리까지 들렸다 한다.



3장 소년배, 난세의 주역들



하후돈_ 조조가 가장 믿은 친구이자 창업동지

조조가 처음 위왕이 됐을 때 옛 부하 장수들은 다 새로 세운 위나라의 관직을 받았다. 그런데 하후돈 만은 한나라의 관직 그대로였다. 이 점이 불만스러웠던 하후돈은 상소를 올려 항의했고 이에 조조가 회답했다. “내가 듣기로 가장 높은 것은 사신(師臣)이고 그 다음은 우신(友臣)이라 하오. 구차스럽게 위나라의 신하가 되어 나에게 굽신거려야 만족하겠소?” 하후돈을 신하로 삼지 않음으로써 옛 친구와 같이 대접하려는 것이 조조의 의도였다. 하후돈이 고집을 부렸으므로 조조는 하는 수 없이 그를 위나라의 전장군에 임명했다.

하후돈은 조조와 사촌형제였다. 조조의 아버지 조숭의 성이 원래는 하후씨였기 때문이다. 하후돈은 젊어서 스승을 모욕한 사람을 죽인 후, 수배를 피해 강호를 떠돌다가 조조가 처음 기오에서 병사를 일으켰을 때 참여했다. 변수의 싸움에서 함께 싸웠고, 양주지방에서 신병을 모집할 때 조조를 죽음의 위험으로부터 구해내기도 했다. 또 조조의 일생일대 위기였던 여포의 연주 침입 시, 무력으로 조조의 근거지인 견성을 지켜낸 것도 하후돈이었다. 이로써 조조는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조조는 하후돈을 무척 신뢰해 자신이 대군을 이끌고 출정할 때마다 후방을 지키는 역할을 그에게 맡겼다. 특히 관도대전이 일어났을 때 대부분의 군ㆍ현급 군벌들은 원소에게 승산이 있다고 보고 다 그에게 붙으려는 조짐을 보였다. 하후돈이 위력으로 이를 누름으로써 후방이 안정됐다. 이에 조조는 안심하고 관도에서 지구전을 펼칠 수 있었다. 북방이 다 평정되고 난 후, 조조는 강동의 손권에 대비해 26개 군을 남쪽 경계선에 배치했다. 이때 26개 군 전체를 지휘ㆍ감독하는 책임을 하후돈에게 맡겼다.

조조는 친우이자 평생의 동지인 하후돈을 몹시 후대했다. 조조는 말년에 번성을 포위한 관우를 견제하기 위해 각지의 주둔군을 마피로 불러 모았다. 옛 장수들이 모두 군대를 이끌고 도착했다. 하후돈이 도착하자 조조는 직접 마중을 나가 함께 수레를 타고 돌아왔다. 하후돈만이 조조의 거실에 수시로 드나들 수 있었다. 다른 장수들 중 이런 대접을 받는 자가 없었다. 조조의 입장에서 하후돈은 언제나 흉허물 없이 속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나 마찬가지인 유일한 존재였다. 조조가 하후돈을 자신의 신하로 사기를 거부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조조가 죽고 조비가 황제가 됐을 때, 하후돈은 대장군에 임명됐다. 그러나 하후돈 역시 그 후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조조가 죽자 너무 비통해하다가 생긴 병이 깊어졌기 때문이다. 하후돈이 이토록 슬퍼하고 상심한 이유는 조조가 제위에 오르지 못하고 왕의 신분으로 죽었기 때문이다. 일찍이 조조를 제위에 오르게 하려던 논의가 있을 때마다 하후돈이 나서 만류하곤 했었다. 다 조조의 의중을 헤아려 한 것이었다.

맨 처음 조조의 칭제 논의가 일었을 때, 하후돈 역시 조조에게 하늘과 백성의 뜻에 순응할 것을 권유했다. 조조가 이때 하후돈에게만 은밀히 말했다. “만약 천명이 나에게 있다면 나는 주문왕(周文王)이 되고자 하오.” 젊은 시절 한나라에 충성을 맹서했던 조조는 스스로 이 맹서를 깨고 싶지 않았다. 주문왕이 되겠다는 것은 찬탈의 악역을 충성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자신의 후계자에게 넘기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후돈은 두뇌가 명석한 편은 아니었으나, 조조의 의중만은 누구보다 정확히 꿰뚫었다. 그 후 칭제 논의가 일 때마다 하후돈이 나서 여론을 잠재웠다. “의당 먼저 촉을 멸해야 합니다. 촉이 망하면 오는 즉시 복종할 것입니다. 이 두 지방이 평정된 후라면 순리에 따라 순(舜) 임금과 우(禹) 임금의 궤적을 따라가는 것도 가능합니다.”

조조는 삼국을 통일하지 못했다. 조조가 결국 제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자 하후돈은 생전에 자신이 했던 말을 무척이나 한스러워했다. 이로 인해 병을 얻게 된 것이 그의 사망 원인이었다.

하후돈은 지모와 능력이 탁월하지는 않았다. 하후돈은 여포의 공격을 받은 유비를 구원하기 위해 소패로 출병했을 때, 여포군의 대장 고순에게 크게 패했을뿐더러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눈알 하나를 잃어 애꾸가 되기까지 했다. 박망파의 싸움에서도 하후돈은 판단 착오로 유비에게 대패했다. 이를 볼 때 하후돈은 그다지 유능한 장수가 아니었다. 능력보다는 오직 충성과 의리로 헌신했기에 조조는 그를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때로는 리더에게 능력과 재능이 탁월한 부하들보다 이러한 유형의 사람들이 더 소중한 경우가 많다.

[역사의 裏面] 하후돈 납치 사건의 전말: 여포가 연주를 습격하자 복양성에 주둔하고 있던 하후돈은 급히 병력을 점고해 당시 조조의 근거지였던 견성을 향했다. 조조의 모든 가족들이 견성에 있었기 때문이다. 견성에 도착하기 전, 날이 저물자 하후돈은 길가에 군영을 설치하고 유숙했다. 그때 복양성에 남아 있던 장수 10여 명이 찾아왔다. 이미 복양성이 함락돼 도망쳐 나오는 길이라 했다. 하후돈이 정보를 입수하기 위해 직접 면담을 하자 이들이 갑자기 돌변해 병장기를 꺼내들고 하후돈을 납치했다. 이들은 사전에 진궁에게 포섭된 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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