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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숨에 정리되는 세계사 이야기

정헌경 지음 | 좋은날들
단숨에 정리되는 세계사 이야기

정헌경 지음

좋은날들 / 2014년 4월 / 296쪽 / 12,800원





지중해에서 시작된 서양 최초의 문명

우리 일상 곳곳에는 고대 그리스가 숨어 있습니다. 그리스신화의 세세한 내용은 모르더라도 치명적인 약점을 ‘아킬레스건’이라 표현하고, 악성 프로그램에 붙은 ‘트로이의 목마’라는 이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또한 위급할 때 울리는 사이렌은 노랫소리로 선원들을 유혹하던 바다 괴물 세이렌에서, 빙산에 부딪혀 침몰한 대형 여객선 타이타닉은 거대한 신 티탄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그 밖에도 올림픽과 마라톤, 스파르타 교육 등 우리가 자연스레 알고 있는 많은 사실이 고대 그리스와 그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제 서양 문명의 요람인 고대 그리스의 면면을 살펴보겠습니다.

서양 최초의 문명이 탄생하다: 인류 최초의 문명은 기원전 3500년경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탄생했습니다. 오늘날의 이라크에 해당하는 이 지방의 남쪽, 수메르에서 최초로 도시 국가가 세워졌습니다. 그 후 이집트의 나일 강 유역, 중국의 황허 강 유역, 인도의 인더스 강 유역에서 문명이 탄생했습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은 가까운 지중해로 전해졌습니다. 지중해의 동쪽에 자리한 오늘날의 그리스와 터키 사이에는 에게 해가 있습니다. 이 일대에서 기원전 3000년경 에게 문명이라는, 서양 최초의 문명이 탄생했습니다. 에게 해의 남쪽에는 크레타라는 큰 섬이 있습니다. 크레타 섬 사람들은 배를 타고 소아시아와 이집트를 오가며 발달된 문명을 받아들여 그리스 본토보다 더 빨리 문명을 탄생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 문명을 섬 이름을 따서 크레타 문명, 또는 미노스 왕의 이름을 따서 미노아 문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미노스 왕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신화가 전해집니다.

어느 봄, 페니키아의 공주 에우로페가 바닷가에 나가 꽃을 꺾고 있었습니다. 에우로페에게 반한 제우스는 소로 모습을 바꾸어, 에우로페를 등에 태우고 바다를 건너 크레타로 갔습니다. 제우스는 다시 신의 모습이 되어 에우로페와 결혼했고 둘 사이에서 미노스가 태어났습니다. 미노스는 크레타의 왕이 되었는데,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노여움 때문에 미노스의 왕비는 소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왕비는 소와 사랑을 나눈 끝에 소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가진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낳았습니다. 미노스 왕은 아주 복잡하게 얽힌 미궁을 만들어 미노타우로스를 가두고, 해마다 아테네로부터 소년과 소녀 일곱 명씩을 제물로 받아 미노타우로스의 먹이로 삼았습니다. 그러자 아테네의 왕자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로스를 처치하러 크레타로 옵니다. 테세우스는 미노스 왕의 딸 아리아드네와 사랑하게 되고 아리아드네의 지혜 덕분에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는 미궁에서 빠져나옵니다.

이 신화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에우로페가 살았던 페니키아는 오늘날 시리아와 레바논의 해안 지대입니다. 제우스가 페니키아의 공주를 크레타로 데려왔다는 것은 크레타 문명이 그리스 동쪽 문명의 영향을 받았음을 말해 줍니다. 페니키아 공주 에우로페(Europe)는 오늘날 ‘유럽’이라는 이름으로 남았습니다. 제우스가 소로 변신한 것을 비롯해 이 신화 속에는 소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요. 이를 통해 당시에 소를 숭배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테네가 크레타에 소년 소녀 제물을 바쳤다는 것은 크레타가 그리스 본토의 왕국들을 굴복시킬 만큼 세력이 강했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친 것처럼, 나중에는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본토 왕국들의 세력이 강해집니다.

트로이 전쟁의 배경, 미케네 문명: 크레타 문명이 몰락할 무렵, 그리스 본토에서 내려온 미케네 사람들이 에게 해를 장악해 문명을 이루었습니다. 신화에 따르면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이 그리스의 총사령관으로서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하지요. 트로이 전쟁 이야기는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고 적힌 황금 사과를 놓고 세 여신이 다투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트로이 왕자 파리스의 결정에 따라 그 사과는 아프로디테가 차지합니다. 아프로디테의 답례로 파리스는 스파르타 왕비 헬레네의 사랑을 얻습니다. 파리스가 헬레네를 데려가자,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가 형 아가멤논과 함께 오늘날 터키의 서쪽 연안에 위치한 트로이를 치러 떠나지요.

이렇게 시작된 트로이 전쟁의 영웅은 아킬레우스입니다. 아킬레우스는 바다의 여신 테티스와 인간인 펠레우스 왕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테티스는 아들 아킬레우스가 신성을 반만 가진 것이 못내 안쓰러웠습니다. 그래서 신처럼 죽지 않는 존재로 만들려고 아킬레우스를 저승과 이승의 경계를 흐르는 스틱스 강에 담갔습니다. 그런데 남편 펠레우스가 방해하는 바람에 테티스가 잡고 있던 아킬레우스의 발뒤꿈치 언저리는 강물에 닿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킬레우스는 유일한 약점인 이 부위에 화살을 맞고 죽습니다. 발뒤꿈치 위쪽의 굵은 힘줄을 가리키는 ‘아킬레스건’은 여기서 유래한 말이지요.

목마 속에 숨어 있던 그리스 병사들을 비롯해 트로이 전쟁 이야기는 흥미롭습니다. 트로이 전쟁이 정말 일어났는지에 대한 학계의 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최근에는 당시 그리스 왕국들 중 가장 강했던 미케네가 소아시아로 진출해 트로이 전쟁을 일으켰을 거라는 주장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미케네 문명은 점차 세력이 약해지다가 기원전 1200년경에 멸망했습니다. 그 후 그리스 세계는 약 400년간 암흑기에 들어갑니다. 고대 그리스의 암흑기는 기록이 사라져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시기입니다. 그런 뒤 아테네, 스파르타 등 폴리스들의 새로운 역사가 펼쳐집니다.



제국으로 발전한 로마의 성공 비결

서양사의 바탕이 된 두 가지로 흔히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꼽습니다. 헬레니즘은 그리스 문화, 헤브라이즘은 크리스트교를 말하지요. 이 두 가지를 서양에 널리 퍼뜨린 나라가 로마입니다. 테베레 강가의 작은 나라에서 출발한 로마는 지중해 일대를 넘어 영국에서 아라비아 사막에 이르는 영토를 정복하여 거대한 제국을 이루었습니다. 이렇게 넓은 영토를 장악한 것은 알렉산드로스나 이슬람, 몽골 제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로마는 공화정과 그에 뒤이은 제정(帝政)이 유지된 기간만 해도 천 년이나 됩니다. 다른 어떤 나라도 로마만큼 오래도록 번영을 누리지는 못했습니다. 로마의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요?

200년이나 걸려 완성된 로마 공화정: 로마 역사를 쓴 책 중에 폴리비오스가 쓴 《역사》가 있습니다. 폴리비오스는 그리스의 역사가인데 전쟁 중에 포로가 되어 로마에 끌려왔습니다. 보통 그리스 학자들이 로마에 오면 세력 있는 사람에게 맡겨져 편하게 지냈습니다. 포로긴 해도 학자니까 귀한 대접을 받은 것이지요. 폴리비오스는 로마 귀족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쇠락한 조국 그리스와 달리 로마가 빠르게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그리스로 돌아가 자유인이 되었지만 자주 로마에 찾아왔고, 3차 포에니 전쟁에도 참전해 로마의 숙적 카르타고의 멸망을 지켜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20년 동안 보고 듣고 느끼며 로마에 대해 쓴 책이 《역사》 40권입니다. 그는 로마 성공의 비결을 정치체제에서 찾았습니다. 로마 공화정은 왕정, 귀족정, 민주정의 요소를 모두 가진 가장 이상적인 정치체제라는 것입니다.

로마는 건국 이래 200여 년간 일곱 명의 왕이 왕정을 이어가다가 기원전 509년에 공화정을 이루었습니다. 라틴어로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라고 하는 이 공화정은 공공의 것(public thing)을 뜻합니다. 즉, 개인이 권력을 독점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왕정에 대립되는 말이지요. 이 말은 공화국(republic)의 어원이 되었지만, 공화국과는 엄연히 다릅니다. 공화국에서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데, 고대 국가가 그랬을 리 없지요. 로마 공화정은 귀족이 특권을 누리는 귀족정이나 소수가 지배하는 과두정에 가까웠습니다. 기원전 509년, 로마 귀족들은 왕정을 무너뜨린 후 집정관(콘술) 두 명과 원로원 의원 300명을 뽑았습니다. 집정관은 임기가 1년뿐이었고 서로 반대할 수 있는 권리가 있어서 상대방을 견제하면서 독재를 막았습니다. 처음에는 귀족들이 집정관과 원로원 의원 자리를 모두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기원전 5세기에 이르러 평민들이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참정권을 요구했습니다. 당시에는 전쟁이 일어나면 남자 시민들은 자기 돈으로 갑옷과 투구, 무기를 마련하여 무장하고 전쟁터에 나갔습니다. 귀족은 기병, 평민은 보병 부대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중장 보병의 밀집 대형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자 평민들의 입지가 강화된 것입니다.

기원전 494년, 평민들은 집단행동에 들어갔습니다. 평민들끼리 따로 국가라도 세울 태세였습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귀족들은 매우 당황했습니다. 곧 다시 전쟁에 나서야 하는데 평민들이 참전하지 않는다면 그보다 더 큰 일은 없었습니다. 평민들은 자신들 중에서 두 명을 호민관으로 뽑고 평민회를 조직했습니다. 호민관의 호(護)는 ‘보호한다’, 민(民)은 ‘평민’을 뜻합니다. 말 그대로 평민을 보호해 주는 관직이 생긴 것입니다. 기원전 449년에는 12표법이 민회에서 통과되었습니다. 12표법은 로마 최초의 성문법으로, 법을 열두 개의 청동판 또는 목판에 기록하여 광장에 세워 두었기 때문에 ‘12표법’이라 불리었습니다. 그 후 귀족과 평민 사이의 결혼이 가능해졌고, 집정관 둘 중 하나를 평민 중에서 뽑게 되었습니다. 기원전 287년에는 호르텐시우스법에 따라, 평민회에서 의결한 내용이 원로원의 승인 없이 법률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로마는 기원전 509년부터 거의 200년 동안 귀족과 평민 간의 갈등과 투쟁이 이어진 끝에 공화정을 완성했습니다. 왕을 대신하는 집정관, 귀족의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는 원로원, 평민을 지켜 주는 호민관과 민회가 모여, 폴리비오스가 말했던 이상적인 정치체제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후 로마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원조, 로마 귀족들: 상류층의 도덕적 의무를 흔히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합니다. ‘노블레스’는 귀족, ‘오블리주’는 의무를 뜻합니다. 이 말은 지체 높고 돈 많은 사람이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거나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줄 때 쓰이지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처음 실천한 사람들은 로마 귀족들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2차 포에니 전쟁 때 있었습니다. 이때 카르타고의 한니발은 북쪽의 알프스를 넘어 로마에 쳐들어왔습니다. 북쪽을 거의 무방비 상태로 두었던 로마 사람들은 크게 당황했고, 한니발은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와 이탈리아 남부 일대까지 점령했습니다. 전쟁이 여러 해 동안 계속되면서 농토는 짓밟히고 집은 불타고 사람들은 굶주렸습니다. 카르타고를 물리치려면 군대와 식량, 무기를 보충해야만 했습니다. 집정관들이 식량과 돈을 나라에 바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시민들은 돈도 없고 식량도 없는데 무엇을 바치라는 말이냐며 거세게 항의했습니다. 이때 집정관 라이비누스가 원로원으로 가서 귀족들이 먼저 부담을 져야 시민들이 따를 것이라는 연설을 합니다. 마음이 움직인 원로원 의원들은 재산을 국가에 바쳤고, 덕분에 로마는 카르타고를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로마 귀족들은 병역과 납세에서도 모범을 보였습니다. 병역은 재산 정도에 따라 부과되어, 재산이 많을수록 무장을 많이 하고 전쟁터에 나갔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적에게 재산을 빼앗기느니, 자신의 재산은 스스로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승전하면 전리품도 얻을 수 있으니 병역의 의무가 괴로운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세금 또한 재산 정도에 따라 부과되었습니다. 특권에 상응하는 의무를 지닌 귀족들의 모습을 보며 시민들은 기꺼이 병역을 지고 세금을 냈습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작은 나라였던 로마가 넓은 영토를 정복하고 번영을 누리기까지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공화정 말기부터 소수에게 부와 권력이 집중되고 도덕이 무너지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서서히 사라져 갔습니다. .

군사력 이상으로 뛰어난 통치 기술: 4세기에 베게티우스는 《군사학 논고》에서 로마 사람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로마 사람은 갈리아 사람보다 아이를 많이 낳지도 않고, 에스파냐 사람보다 몸집도 작으며, 아프리카 사람처럼 부유하거나 기민하지도 않고, 기술이나 이성적인 능력에서 그리스 사람만 못하다.” 로마 사람 자체로 봐서는 여러 나라를 정복하고 제국으로 성장할 만한 요인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베게티우스는 로마의 성공 비결을 최강의 군사력에서 찾았습니다. 로마 군대가 엄격한 규율과 정확한 상벌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승전을 거듭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군사력만 가지고는 그토록 오랫동안 넓은 영토를 장악할 수 있었던 이유가 설명되지 않습니다. 로마는 이웃 나라들을 하나씩 정복해 갔고, 정복한 다음에는 효율적으로 다스려 로마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사실 정복하는 것보다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장 짧은 시간에 넓은 영토를 정복했지만 결국 분열되고 만 알렉산드로스 제국과 확실히 비교되는 지점입니다.

로마는 우선 이탈리아 반도의 나라들을 정복하고 나서 편입 또는 동맹의 방법으로 이들을 다스렸습니다. 편입하는 경우 시민권을 주어 로마 시민으로 대우했습니다. 그런데 시민권에는 투표권이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로마와 민족이 같은 라틴 동맹국에게는 일반 동맹국보다 권리를 더 많이 주었습니다. 일반 동맹국들은 군대와 군함을 로마에 바쳐야 했고, 외국과 조약을 맺을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로마는 정복한 나라들을 각각 다르게 통치함으로써 분열시키는 한편, 시민권을 얻기 위해서라도 로마에 협조하게끔 만들었습니다. 기원전 88년쯤에는 이탈리아 동맹국들이 모두 시민권을 얻었습니다. 로마는 이들을 자치 도시로 삼아 최소한의 감독만 하고 전통과 관습을 존중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시민으로서의 혜택과 자율성을 주는데 동맹국들이 로마를 배신할 리 없었겠지요. 이들의 협조는 로마가 영토를 점점 더 확대하고 제국으로 성장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여러 민족을 정복하면서도 다른 민족에게 배울 것이 있으면 적극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로마 성장의 큰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초기에 로마는 북쪽에 있던 에트루리아의 지배를 받았는데, 에트루리아의 문화 수준은 상당히 높았습니다. 로마가 수도교, 개선문 같은 뛰어난 문화유산을 남기게 된 것은 에트루리아로부터 건축 기술을 배운 덕분입니다. 로마는 그리스의 영향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스신화는 물론 철학과 문학, 알파벳도 받아들였습니다. 지중해를 둘러싸고 숙명의 대결을 펼쳤던 카르타고에게도 배운 것이 있습니다. 해군이 약했던 로마는 카르타고의 배 한 척을 붙잡아 분해하고 연구하여 똑같은 배를 만들어 냈습니다. 또한 카르타고의 배를 모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장치를 달았습니다. 쇠갈고리가 달린 연결 다리를 설치한 것입니다. 비장의 무기가 달린 이 배는 해전에서 카르타고를 물리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중세 유럽을 지배한 크리스트교

19세기까지는 교황을 만나면 교황의 신발에 키스하는 전통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전통은 사라졌지만 지금도 교황은 권위 있는 존재입니다. 교황이 중요한 존재로 부각된 것은 중세부터입니다. 중세 서유럽에서는 크리스트교, 즉 로마 가톨릭의 권위가 하늘을 찔러 교황이 황제를 능가하기도 했습니다.

크리스트교, 둘로 나뉘다: 크리스트교를 믿던 지역 중 예루살렘, 시리아, 이집트 일대는 7세기에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후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교회만 남았는데, 그중 로마 교회가 크리스트교를 이끌게 되었습니다. 로마는 오랫동안 세계 제국의 중심지였던 데다가 바울과 베드로가 순교한 곳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로마 교회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 일인자인 베드로를 계승한 교회라 단연 특별했습니다. 로마 교회의 주교 레오 1세는 베드로의 후계자임을 내세웠습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가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줄 것을 약속했다고 합니다. 이에 따라 로마 주교는 신과 인간을 이어 주는 존재로서 ‘교황(pope)’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삼은 이 제도는 지금까지 약 2천 년간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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