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첼 카슨
윌리엄 사우더 지음 | 에코리브르
레이첼 카슨
윌리엄 사우더 지음
에코리브르 / 2014년 4월 / 632쪽 / 35,000원
1부 수중 세계
“카슨 양의 책”
1962년 8월 28일 오후 4시, 케네디 대통령의 기자회견이 끝나갈 무렵 대통령은 이례적인 질문을 받았다. “과학자들 사이에 살충제를 널리 사용하는 데 따르는 장기적인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정부당국에 이 문제를 좀 더 면밀하게 조사하도록 요청하실 의향이 있습니까?” 뜻밖의 질문에 케네디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이미 농무부와 공중보건국에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아, 물론 카슨 양의 책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대화를 기점으로 세상을 움직일만한 새로운 변화가 일었다. ‘보존’이라는 점잖고 낙관적인 개념이 마침내, 장차 ‘환경주의’라고 알려질 몹시 논쟁적인 개념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케네디가 언급한 책의 저자가 바로 레이첼 카슨이라는 여성이다. 그녀는 바다를 다룬 세 권의 베스트셀러를 써낸 작가였고,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고 사랑받는 작가 가운데 한 명이었다. 카슨의 새 책 『침묵의 봄(Silent Spring)』은 무차별적인 살충제 사용에 대한 거침없는 반론이었다. 아직 출간하기도 전에 책에서 발췌한 세 편의 글이 《뉴요커》에 연달아 실렸고, 케네디가 기자회견을 열었을 때는 이 기사가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대중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런데 이 후폭풍에 휘말린 여인은 도무지 논란의 중심에 설 만한 인물처럼 보이지 않았다. 55세의 카슨은 성인이 된 이후의 세월 대부분 글을 쓰고, 새를 관찰하고, 해안을 찾아다니면서 보냈다. 그녀는 메릴랜드 주 실버스프링의 울창한 교외 지역에서 고양이 한 마리 그리고 자신이 입양한 조카의 아들과 함께 조용히 살고 있었다.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동물학 석사 학위를 따긴 했지만, 과학자의 길을 걷지는 않았다. 그녀는 전업 작가로 나서기 전에 연방 정부 산하 어업국에서 정보 전문가로 일했다. 어업국은 나중에 생물조사국과 함께 어류야생동물조사국(FWS: Fish and Wildlife Service)으로 통합된 기관이다.
카슨은 FWS에 근무하던 1947년, 살충제인 DDT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는 일을 수행한 적이 있었다. 당시 그녀는 DDT에 관한 정부기관의 과학 보고서를 일상적으로 접하면서 DDT의 무분별한 사용이 자연의 조화 전체를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인간이라는 종은 자연 세계에 잘 적응했지만, 비자연적으로 달라진 세계에서는 생물학적으로 무방비 상태에 처해 있다. 살충제와 방사능은 독성의 종류만 다를 뿐 둘 다 돌연변이를 일으킬 가능성이 많다. 생체세포의 조직을 이끌고 미래 세대에 청사진을 제공해주는 유전물질에 해를 입힐 수 있다. 어떤 고립된 특정 장소의 환경뿐만이 아니라 지구 생태계 전반을 오염시키는 물질은 부득이하지만 위험을 내포한 현대적 발전의 소산이다.” 이러한 그녀의 생각을 글로 옮긴 것이 바로 『침묵의 봄』이다.
한낮의 태양처럼 빛나는
1942년 5월, 레이첼 카슨이라는 생물학자가 어류야생동물국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젊고 예쁘장한 카슨은 준수한 용모에 키 162cm, 몸무게 55kg의 아담한 체구였다. 생물학자였지만 팸플릿이나 보도 자료를 작성하고, 다른 직원들이 쓴 과학 논문을 편집하는 것이 그녀의 일이었다. 그녀의 고용 서류에는 한 가지 특이한 사항이 기록되어 있었다. 1941년, 『바닷바람을 맞으며』라는 책을 출간했다는 것이다. 카슨은 항상 작가를 꿈꾸었다. 그녀는 11살 때 《세인트 니컬러스》라는 어린이 잡지에 <구름 속의 전투>라는 글을 기고하여 은메달을 받은 적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열렬한 독서광이자 글 솜씨 좋은 학생이었다. 그녀는 펜실베니아 여자대학에 진학하고 처음에는 영문학을 선택했다가 생물학에 흥미를 느껴 전공을 바꾸었다. 당시 미국에서 여학생이 과학자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쉬운 선택은 아니었다.
4학년이 되어 진로를 고민하던 어느 날 밤 카슨은 앨프리드 테니슨의 시 <록슬리 홀(Locksley Hall)>을 읽고 있었다. 늦은 시각 기숙사 밖에서는 천둥을 실은 매서운 폭풍우가 퍼붓고 있었다. 시 마지막 줄에서 화자는 황무지를 훑고 바다로 몰려가는 폭풍우에 대해 들려주었다. “폭풍우여. 록슬리 홀로 밀려오렴. 비나 우박 또는 불이나 눈과 함께. 강풍이 일어 노호하며 바다로 밀려가면, 나도 가리니.” 이때 카슨은 불현듯 바다야말로 자신의 운명이라는, 자신이 새롭게 사랑에 빠진 과학이 언젠가 당도할 곳이라는 강한 확신에 사로잡혔다. 바다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어쩐지 바다야말로 자신이 쓰고자 했던 바로 그것이라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생물학으로
매사추세츠 주 우즈홀에 있는 해양생물학연구소(MBL)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과학 현장 연구소다. 카슨을 가르쳤던 생물학과 교수 멜리 스콧 스킨커는 여름이면 MBL에서 원생동물(다양한 수생 단세포동물)학을 연구하며 시간을 보냈다. 스킨커는 카슨에게 졸업 후 대학원 진학과 MBL 여름 연구원 자리에 지원해 볼 것을 권유했다. 대학 실험실과는 달리 우즈홀에서는 학생들이 해안이나 습지는 물론이고 연구용 선박을 타고 바다까지 나가 살아 있는 표본을 수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서는 온전히 생물학에만 빠져들 수 있다. 스킨커 교수의 권유에 따라 카슨은 존스홉킨스 대학원에 진학하여 전액 장학금을 받았다. 8월에는 MBL에서 일하면서 장학금까지 받았다.
대학원에서 카슨은 공부에 푹 빠져 지냈지만 경제적으로는 어려움을 겪었다. 가족 중에 돈을 버는 사람은 그녀밖에 없었기 때문에 대학 학자금 대출액도 상환하지 못할 정도였다. 시간제 일을 하면서 반일제 학생으로 수업을 듣다 보니 도무지 생물학 연구를 진척시킬 수 없었다. 카슨을 가르친 교수들은 그녀에게 교수로서의 능력이 있다고 확신했지만, 의미 있는 과학적 연구를 수행할만한 능력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었다. 1935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카슨은 28세의 오갈 데 없는 가장이 되고 말았다. 그녀는 존스홉킨스의 박사과정을 중도에 그만두었다. 카슨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그해 10월 어업국 볼티모어 사무실의 현장조수로 임명되었다. 맡은 업무는 “대서양 연안에 서식하는 물고기의 자연사와 보존에 관해 공식적으로 배포할 정보를 수집하는 일”이었다. 그녀의 주요 업무에는 <바닷속 로맨스>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짧은 대본을 쓰는 일도 있었다. 어업국이 CBS 라디오와 손잡고 제작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어업국에서 카슨이 떠안은 숙제는 과학에 대한 글을 쓰는 일이었다. 그것은 마치 돈을 받고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을 하는 격이었다. 간편하게 소비되는 짤막한 라디오 대본 쓰는 일을 진행하노라니 자신 안에 있는 이야기꾼이 다시 살아났다. 어업국 일을 시작하고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카슨은 체서피크 만의 청어잡이에 관한 원고를 《볼티모어 선》에 보냈다. 1936년 3월 1일, 카슨의 첫 신문 기고문 <곧 청어의 시대가 올 것이다>가 신문에 실렸다. 그로부터 4년 동안 카슨은 《볼티모어 선》에 수시로 기고하면서 야생 동식물에 관한 여러 가지 주제의 글을 쓰고, 편당 10~20달러의 원고료를 챙겼다. 카슨의 글에는 전통적인 저널리즘 요소가 거의 없었고, 대개 자신이 전혀 가보지 않은 장소나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장소나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들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헨리 윌리엄슨과 깊은 바다
헨리 윌리엄슨은 젊은 시절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었다. 전쟁이 끝난 후 윌리엄슨은 전시의 경험을 소설로 쓰면서 오토바이를 타고 시골길을 누비는 일에 몰두했다. 1919년, 윌리엄슨은 영국 자연주의 작가 리처드 제프리스의 『나의 마음 이야기』라는 얇은 회고록을 발견했다. 이 책은 제프리스가 자연 세계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어느 때는 더없이 아름답게, 어느 때는 마법처럼 신비롭게 보여주었다. 전쟁의 공포와 어리석음에 상처를 입은 윌리엄슨은 이 책이 심오하다고 느꼈다. 윌리엄슨은 영국 남서부 전원 마을에 있는 수달 사냥 클럽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1927년, 『수달 타카의 일생』을 출간했다. 이 책으로 그는 일약 유명 작가가 되었다. 야생동물의 전기로서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를 개척한 이 책은 영국의 전원을 따뜻하게 담아냈다. 윌리엄스는 데븐셔 조지햄 마을에 작은 집을 얻고 집필을 계속했다. 그는 이곳에서 하루에 몇 시간씩 강에 나가 직접 관찰한 것을 바탕으로 1935년, 『연어 살라』를 출간했다. 이후 윌리엄슨은 히틀러 치하의 독일을 여행하고 나치 동조주의자가 된다.
1937년, 카슨은 《애틀랜틱먼슬리》에 <해저>라는 글을 실었다. <해저>는 카슨이 바다에서 살아가는 숱한 생명체에 관해 직접 알아냈거나, 과학 문헌을 통해 배운 모든 것에서 정수만을 가려낸 생동감 넘치는 글이었다. 이 글은 헨드릭 반 룬이라는 저술가의 눈을 끌었다. 그는 사이먼앤드슈스터 출판사를 소개하면서 카슨에게 바다에 관한 책을 써 볼 것을 권했다. 카슨은 바다에 사는 생명체를 그 생명체의 관점에서 기술하는 내러티브 방식으로 가장 적합한 것은 헨리 윌리엄슨의 『연어 살라』와 같은 방식이라고 믿었다. 이렇게 해서 1941년, 카슨은 『바닷바람을 맞으며』라는 책을 내놓게 된다. 그녀의 책은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지만 판매는 부진했다. 카슨은 훗날 그 책이 참패한 것을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탓으로 돌렸다. 카슨은 나치 동조주의자인 윌리엄슨에게 영감을 받은 책이 전시에 판매가 부진하다는 사실에서 무언의 메시지를 얻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카슨은 늘 제프리스-윌리엄슨-카슨으로 이어지는 문학적 계보가 은총이며, 『바닷바람을 맞으며』는 그 계보가 낳은 자식이라고 믿었다.
이 아름답고도 숭고한 세계
1943년, 카슨은 FWS의 정보전문가라는 직위로 승진을 했다. 공무원 생활이 나쁘지 않았지만 그녀는 뭔가 다른 것을 간절히 꿈꾸었다. 사무실에서 그녀가 작성한 대부분의 보도 자료는 잡지에 실릴만한 글감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1945년, 따분한 일과의 틈바구니에서 카슨의 신경을 건드린 것은 DDT에 관한 보도 자료였다. 당시 카슨은 ‘DDT는 섭취할 경우 인간과 동물에 독성이 있으며, 시설에 사용해 식품이 오염되면 심각한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보도 자료를 작성하였다. 1946년, 봄 카슨은 버지니아 연안에 있는 친커티그 국립야생동물보호구역으로 파견되었다. 연방보호구역의 역사를 기록하고 FWS가 그 지역에서 하는 일을 설명하는 야심찬 팸플릿 시리즈의 1편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보존활동>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이 시리즈는 그녀의 기획이었다. 카슨이 진단하기에 야생동물은 종류에 따라 저마다 구체적인 세부사항만 조금씩 다를 뿐 국부를 지속적으로 탕진하는 비극의 연속이라는 점에서는 같았다. 한때는 무궁무진해 보이던 자연이 남획으로 인해, 자연 서식지의 파괴로 인해, 그리고 수많은 사냥감 종의 생태에 관한 무지로 인해 지속적으로 고갈된 것이다.
보존활동 시리즈는 카슨에게 통상적인 정부 업무를 넘어서는, 뭔가에 관해 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1948년, 카슨은 새로운 책에 대해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저명한 과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이 쓴 글의 수정을 부탁하고, 그들로부터 연구결과를 얻었다. 또한 그녀는 한 저작권 대리인과 계약을 맺었다. 편집자이자 추리소설가인 마리 로델이었다. 카슨은 로델에게 <바다로의 회귀>라는 가제를 단 새 책을 위해 미리 써둔 ‘섬의 탄생’에 관한 꼭지를 보내주었다.
큰 승리를 거둔 작가
마리 로델은 제목을 <바다로의 회귀>에서 <우리를 둘러싼 바다>로 바꾸고 책의 발간을 주선하였다. 카슨은 옥스퍼드 출판사로터 선인세를 받고 집필에 몰두했다. 1950년 12월, 《에일 리뷰》에 실린 <섬의 탄생>으로 과학저널이 주는 상을 수상했다. 이 상으로 카슨은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FWS에서의 업무 부담도 커졌다. 카슨은 정보부서 편집장으로 승진했고, 연봉도 올라갔다. 1951년 3월, 런던 소재 출판사에서 『우리를 둘러싼 바다』의 영국판을 내기로 했고, 카슨은 명망 있는 구겐하임 지원금을 받게 되었다. 4월에는 옥스퍼드에서 책의 신간 견본이 나왔고, 5월에는 《뉴요커》에서 5200달러의 인세를 받았다. 카슨은 FWS에 1년의 무급 휴가를 신청했다. 그녀는 로델에게 『우리를 둘러싼 바다』 덕분에 향후 몇 년간은 충분히 먹고살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때까지 확고하게 자리 잡은 전업작가가 되지 못한다면, 난 나가 죽어야 해!”
『우리를 둘러싼 바다』의 열 꼭지가 <바다: 잊히지 않는 세계>라는 제목으로 《뉴요커》에 연달아 실렸다. 반응은 뜨거웠다. 카슨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많은 독자들이 잡지사에 편지를 보냈다. 잡지사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발송했다. “카슨 양은 어업국에서 수생생물학자로 일했으며, 현재는 FWS의 편집장입니다. 바다를 묘사하기 위해 북대서양으로 해양 탐험 여행을 다녀왔고, 플로리다 산호초에서 다이빙을 하기도 했습니다.” 카슨의 글이 실린 《뉴요커》가 전 국민들 침대 맡에 놓여 있을 때인 1951년 7월 2일, 드디어 『우리를 둘러싼 바다』가 옥스퍼드 출판사에서 발행되었다. 책이 나오자 카슨에 대한 열광은 폭발적이었다. 카슨의 특별한 재능은 과학을 너무도 생생하게 만들어 독자들이 그것을 과학이라고 의식하지 않게끔 해준 것이었다. 카슨은 해양학의 정수만을 뽑아내 세상에서 가장 매혹적이고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다. 까다로운 주제를 보통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는 평이한 언어로 풀어놓은 것이다.
『우리를 둘러싼 바다』는 1951년 9월,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 1위에 올랐고 그해의 나머지 기간 동안 부동의 1위 자리를 지켰다. 1952년 4월에는 옥스퍼드에서 재발간한 『바닷바람을 맞으며』가 베스트셀러 10위 목록에 올랐다. 카슨은 이제 미국에서 손꼽히는 논픽션 베스트셀러 작가로 떠올랐다. 강연 요청이 쇄도했고 1952년, 내셔널 북어워드 수상을 비롯하여 상복이 터지기 시작했다. 카슨은 시상식 참석, 인터뷰와 축하연 등으로 정신없는 일정을 보내야 했다. 『우리를 둘러싼 바다』는 영화로도 제작되어 다큐멘터리 부문 아카데미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1952년, 봄 카슨은 자기 시간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 키웨스트로 떠났다. 그녀는 FWS에 복귀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녀의 사직서 퇴직 사유란에는 “집필에 전념하기 위해서”라고 적혀 있다.
2부 침묵의 봄
도로시
1953년, 카슨은 메인 주에 있는 사우스포트 섬에 별장을 지었다. 그 섬에는 도로시 프리먼이라는 여자가 살고 있었다. 『우리를 둘러싼 바다』를 읽은 적이 있는 도로시는 카슨이 그곳에 여름용 별장을 짓는다는 신문 기사를 읽고 깜짝 놀랐다. 도로시는 카슨에게 그 섬에 오게 된 것을 환영한다는 편지를 보냈다. 도로시는 답장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카슨에게서 답장이 왔다. 카슨은 도로시가 새로 맞을 이웃에게 그토록 사려 깊고 매혹적인 인사를 건네준 데 감사했다. 1953년 6월, 도로시는 남편 프리먼과 함께 카슨의 별장을 방문했다. 카슨은 프리먼 부부를 보자마자 그들이 좋아졌다. 비록 그들이 나이가 더 많았지만 카슨은 세 사람이 메인 해안과 자연 전반에 느끼는 감정이 정말이지 비슷하다고 느꼈다.
카슨과 프리먼 부부는 별장 아래 해안선을 같이 거닐었다. 도로시는 해안선의 바위 틈새에 그토록 많은 바다 생물이 살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우리를 둘러싼 바다』의 저자는 도로시가 기대한 것과 달랐다. 그렇게 왜소한 사람이 그토록 많은 지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도로시는 갑작스러운 명성에 압도당한 것처럼 보이는 카슨에게서 슬픔을 감지했다. 하지만 카슨은 소박하고 친절했다. 두 사람은 편지에 공식적 호칭이 아닌 이름을 쓰면서 즐거운 우정이 시작된 것을 서로 기뻐했다. 편지를 교환하면서 카슨은 도로시에게 자신이 최근 관찰한 다양한 바다 생물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두 사람은 사우스포트 섬에서 처음 만난 여름, 6시간 정도밖에 함께 있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나 짜릿하고 놀랍게도 둘 다 상대의 매력에 푹 빠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