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된 건축
이경훈 지음 | 푸른숲
못된 건축
이경훈 지음
푸른숲 / 2014년 5월 / 376쪽 / 15,000원
도시 건축의 기본 조건 - 트윈트리타워
경복궁을 오른편에 두고 남쪽으로 걷다 보면 동십자각이 보인다. 처음부터 거기에 있던 건물이지만 왠지 달라 보인다. 그것은 동십자각이 마치 뒤로 새 병풍을 두른 듯 새로운 배경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 열두 폭 병풍 건물이 트윈트리타워다. 건축가 조병수의 작품이다. 이 쌍둥이 건물은 한국일보사가 있던 자리에 새로 지은 것이다. 전형적인 서울 도심의 건물이다. 특이할 것도 없고 유난한 점도 없는, 그렇고 그런 17층짜리 건물이다. 유리가 많이 쓰여 밤이면 경복궁을 밝히는 등불같이 보여서 눈에 띄기는 하지만, 얼핏 보기에는 근처에 있는 많은 사무소 건물 중 하나다.
언젠가 회의에서 만난 한 중년의 여성 도시 전문가가 열을 내며 이 건물을 비난한 적이 있다. “경복궁에서 길 하나 건넌 자리에 저렇게 현대적인 건물을 무식하게 지어도 되나요? 도대체 저런 걸 허가해주는 공무원들은 뭘 하는 거죠?” 그녀의 얘기는 런던과 파리 등 외국의 사례로 이어졌고, 고궁 주위로는 건물 높이를 낮추고 나무를 많이 심어야 한다고 훈수를 더하는 것으로 끝났다. 건축 전문가의 의견을 묻기에 짧게 대답했다. “밤이면 근사해요. 경복궁을 밝히는 등불처럼 차분해 보인답니다.”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그 건물의 장점을 얼른 생각해내서 몹쓸 건물로 몰리는 것은 막았기에 그녀도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고, 화제는 다른 데로 넘어갔다.
외려 나는 이 건물이 서울에서 몇 안 되는, 도시적으로 모범적인 건축물이라고 생각한다. 이 평범한 건물이 모범적이며, 더 나아가 ‘도시적으로 모범적’이라는 찬사를 받을 만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명호는 벌판에 있는 평범한 나무 뒤에 흰색 천으로 배경을 만들거나 사막에 흰색 천을 둘러서 바다처럼 보이게 하는 사진 작업을 하는 작가다. 천이 드리워지는 순간 평범했던 나무는 예술이 되어 날아오른다. 나뭇가지의 작은 디테일이 보이면서 나뭇잎이 한 잎 한 잎 드러난다. 트윈트리타워는 이명호의 흰색 천과 같다. 스스로 배경으로 물러나 동십자각의 디테일과 실루엣을 부각시킨다. 기와 하나하나가 새롭게 빛나고 용마루의 잡상들이 살아나 포효한다. 동십자각은 잊힌 과거에서 21세기로 소환된다.
그랬구나! 동십자각도 어엿한 건물이었구나! 그것은 돌로 된 기단(基壇)이 있고 기둥이 있으며 들보와 서까래와 용마루가 있는 건물이었다. 더구나 궁궐 맨 앞에 광화문과 나란히 서서 임금을 지키던 초소요 망루였다. 왕의 권위를 지키는 파수병이었다. 그런 건물이니 허술하게 지었을 리 없을 터. 길 한가운데 초라하게 나와 있어 눈길이 제대로 가 닿지 않았을 뿐이다.
도시의 건축은 땅에서 출발한다
건축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의 육중한 덩어리가 땅에 어떻게 놓이는가를 결정하는 순간이다. 이때 취하는 방법이나 태도는 건축가의 수만큼 다양하다. 어떤 건축가는 이 순간을 논리적으로 접근하고, 어떤 건축가는 감에 의존하기도 한다. 어떤 이는 많은 스케치를 그리는 반면, 어떤 이는 머릿속에서 모든 것을 정리한 후 한 번에 한 호흡으로 그려낸다. 어떤 이는 전략적으로 접근하고 어떤 이는 감성적으로 만들어낸다. 이는 때로는 쉽게 풀리기도 하지만 대개는 고통스럽게 해결된다. 이 고통 이후에 보상처럼 따라오는 기쁨이 건축가들을 이 어려운 직업에 붙들어 매어놓는다. 마치 마라토너의 ‘러너스 하이(Runner’s high)’처럼 극단의 고통 뒤에는 극단의 환희 같은 것이 따른다. 나의 은사는 이 순간을 기관차에 비유했다. 크고 힘찬 기관차만 마련하면 그 뒤에 붙어 있는 잡다하고 번잡한 문제들은 그 힘에 이끌려 절로 풀리니 원하는 방향으로 전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트윈트리타워의 기관차는 대지다. 즉 둘쭉날쭉한 땅의 모양과 바로 길 건너편에 있는 동십자각의 존재가 전체의 프로젝트를 이끄는 기관차다. 골칫거리일 수도 있는 문제를 오히려 해결의 동력으로 바꾸어 여러 문제를 단번에 매끄럽게 풀어냈다.
트윈트리타워는 길 건너편의 동십자각이 만들어냈다. 이는 도시적이기는 하지만 서울에서는 그리 일반적인 방법은 아니다. 길 건너편으로 동십자각에 바짝 다가가는 것은 부담스러운 배치다. 동십자각은 형태상으로 이질적일 뿐만 아니라 한낱 망루가 아니라, 그 뒤로 열 지어 서 있는 경복궁을 대표해 앞으로 튀어나온 형국이어서 더욱 그렇다. 더구나 경복궁은 조선의 경궁이며 서울을 넘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랜드마크가 아닌가! 트윈트리타워가 전통과 현대가 만나는 인터페이스, 즉 접속 면인 셈이다. 이런 경우 열에 아홉은 자랑스러운 전통 건축을 존중하고 보존한다며 최대한 멀리 띄워 배치한다. 그러고는 사이에 공지(空地)를 두겠다며 물러섰을 것이다. 이른바 ‘착한 건축’, ‘전통을 존중하는 건축’을 주장하는 것이다. 앞서 말한 여성 도시 전문가가 기대한 건축이 이런 유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건물은 가로(街路)의 선형을 따라 바짝 붙어서 이질적인 재료로 거대한 벽을 세웠다. 위악적이라 할 만하다. 그 때문에 건물의 배치가 매우 특이하며 도전적이다. 또한 전통 건축에 대한 존중과 경의는 다른 방법으로 표현했다. 우선은 형태를 단순화해서 전통 건축의 배경이 되고자 했다. 고건축의 대표 선수인 동십자각을 최대한 부각시키는 ‘바탕화면’이 되고자 한 것이다. 일정한 높이로 형태를 단순화하고 수평의 띠를 일정한 간격으로 둔 건조한 태도를 취한 것이 그 증거다.
스스로 주인공이기보다는 배경이 되고자 하는 태도는 병풍의 형태적인 특성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그리고 이 병풍의 패턴은 전통 건축의 문창호지를 연상시킬 정도로 단순하지만 미묘하게 흐트러져 있다. 다음으로는 동십자각에서 뒤편의 피맛길로 향하는 통로를 만들었다. 마치 동십자각에서 레이저 빔이라도 나와서 건물을 두 동강 낸 듯하다. 자동차가 통행할 정도로 넓은 길은 아니지만 그 좁고 정형화된 통로가 전통 건축과 도시를 긴장감 있게 연결한다. 그 자체로 피맛길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른바 ‘시각 통로’라는 것이다. 시각 통로란 한 점에서 조망의 대상을 바라보는 경로를 말한다.
산에 올라가 아래쪽의 한 지점을 바라보는 시선을 따라 나무가 줄지어 심어져 있는 것도 시각 통로라고 부를 수 있지만, 도시에서는 그 뜻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거칠게 원어대로 번역하면 ‘시각 복도(view corridor)’이기 때문이다. 즉 건축물들 사이의 도로를 통해 중요한 조망의 목표물을 바라볼 때 이를 전형적인 시각 통로라고 할 수 있다. 조망의 목표물이라는 것은 경치일 수도 있고, 주요한 건축물이거나 조각상일 수도 있으며, 비어 있는 허공, 푸른 하늘일 수도 있다.
도시 쪽에서 쌍둥이 건물 사이로 동십자각을 바라봤을 때 시각 통로라는 말은 더 극단적인 의미를 얻는다. 어떤 사물이든 액자에 넣어 박물관에 걸어놓으면 훨씬 ‘있어’ 보이는 것과 같은 효과다. 이 작은 망루는 더 이상 갈라진 길 사이에 어정쩡하게 놓여 어쩔 줄 몰라 하는 남루한 건물이 아니라, 예술의 대상으로 격상된다. “아!”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는 순간이다. 현대적인 재료가 단순하게 만나 액자를 만들고, 그 사이에 드러나는 동십자각은 홀로 있을 때보다 훨씬 화려하며 품위가 있다.
이 두 가지를 통해 동십자각은 다시 숨을 쉰다. 동십자각은 원래 경복궁 담장 모퉁이에 있던 건물이다. 반대편에 서십자각이 있었지만 일제강점기 때 놈들 손에 헐렸다. 삼청동 쪽으로 도로를 낸다며 경복궁 담을 잘라내어, 동십자각 혼자서 애처롭게 서 있게 되었다. 그런데 트윈트리타워가 이를 병풍처럼 받쳐내고 시각 통로를 통해 도시와 연결하면서 동십자각은 다시 빛을 발한다. 이는 도시의 문화재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며 소통의 매개체로 만드는 극적인 시각적 연결이다. 어느 도시도 가질 수 없는 역사의 흔적을 박물관에서 꺼내어 현대 도시에 녹아들게 한 것이다.
트윈트리타워는 500년 도시에 대한 찬사다
시각 통로를 만드느라 건물이 둘로 갈라졌다. 그리고 ‘트윈트리’라는 이름을 얻었다. 트윈트리라는 이름은 사실 모순이다. 세상에 쌍둥이 나무는 없다. 더구나 두 동으로 나뉘어 있기는 해도 엄밀히 말해 쌍둥이는 아니다. 쌍둥이로 만들려고 했다가 여러 사정으로 실패한 것이 못내 아쉬워 억지로 갖다 붙인 이름도 아니다. 오히려 의도된 흐트러뜨림이다. 아니 그보다는 건축가의 설명처럼, 나무둥치 모양의 이 두 건물은 같은 태도와 정신으로 만들어졌음을 설명하기 위한 문학적인 표현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맞을 듯하다.
트윈트리타워는 대칭의 조건을 의도적으로 흐트러뜨린다. 길을 사이에 두고 비슷한 크기의 두 덩어리로 나뉘었지만, 이를 비슷하지만 같지 않게 흔든다. 마치 대칭이라도 되면 앞의 동십자각을 크기나 형태나 재료로 압도할까 두려워 최대한 몸을 낮춘 형국이다. 두 건물의 통일감을 유지하면서도 자체의 힘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노력은 섬세한 배려로 성공을 거둔다. 두 건물 간의 미묘한 차이는 전체적인 통일감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동십자각을 압도하지 않는다. 나무의 유기적인 성장과 다양함을 닮았다. 비슷하지만 일란성 쌍둥이는 아닌 건물의 이름으로는 절묘한 작명이다.
트윈트리타워가 대칭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흐트러뜨린 것은 그 자체로 굉장한 의도를 갖고 있다. 그 의도란 스스로 중심이 되기를 포기한다는 것이다. 이는 동십자각이라는 고건축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다. 또한 대칭이 되었을 경우 건물이 갖게 되는 힘에 대한 절제다. 도시는 박람회장이 아니며, 도시의 건축은 스스로를 낮추고 양보할 때 도시의 경관이라는 보상을 받는다. 그리고 그 경관을 만드는 데 참여한 건축이 경관을 누릴 자격을 얻는다.
트윈트리타워의 설계에서 기관차 역할을 했던 대지는 더욱 힘을 낸다. 언덕을 오르는 기차처럼 마지막 힘을 다한다. 대지를 만드는 여러 요소 가운데 주변 도로가 율곡로의 선형을 따라 건물 전체의 모양을 빚어낸다. 역동적으로 휘감아 도는 가로의 선이 건물에 의해 한 번 강조되고, 건축은 도시의 공공 공간과 일체가 되는 느낌으로 이뤄진다. 가로라는 공공의 영역을 존중하고 이 공간이 정확한 형태를 갖도록 몸을 굽히는 것, 이른바 공화의 정신이다. 한 뼘의 땅마저도 아까워서 인색하게 바짝 붙인 것이 아니다. 법규에서 요구하는 공지와 조경은 도로에서 볼 때 옆과 뒤로 빼놓았다. 공공적인 가로에 바짝 다가서서 도시의 응접실을 이루는 한쪽 벽을 적극적으로 만들겠다는 선언이다.
대개 가로변의 공지를 내주는 건축은 스스로 돋보이기 위해서이거나 불규칙한 땅에서 정연한 건물을 만들기 위해, 불필요한 모양의 땅을 면적만 계산해서 내놓는 경우가 많다. 인색해 보이지 않으면서 건물의 쓰임새를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트윈트리타워의 건축 방법은 정반대다. 정연한 도시 공간을 만들기 위해 스스로의 모양을 구부리고 찌그러뜨린다. 건축물은 찌그러지는 대신 길과 공지는 모양을 갖추어야 비로소 시각적이며 기능적인 도시 공간이 태어날 수 있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트윈트리타워가 북향이라는 점이다. 어째서 이 건물은 북향으로 들어섰으며, 그 도시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한국의 건축은 대개 남향으로 건물을 앉힌다. 이런 점에서 보면 트윈트리타워는 파격적인 북향이라는 점이 더욱 돋보인다. 주변 건물들과 비교해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대지의 생김새와는 상관없이 깍두기 모양으로 네모반듯하게 만들어 남쪽을 향해 늘어놓은 건물들과는 그 차이가 뚜렷하다. 트윈트리타워 남쪽에도 작지만 도로가 나 있고, 이웃한 대부분의 건물처럼 남향을 정면으로 가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남쪽으로도 입구가 나 있다.
하지만 트윈트리타워는 북쪽, 즉 경복궁과 동십자각을 향한 방향이 정면임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가장 유리한 남쪽의 입면을 답답한 재료로 마감했다. 가건물에나 쓰일 법한 공업적인 재료로 남쪽의 입면을 막고서 작은 창문만 내놓고는 스스로 정면이 아니라고 선언한다. ‘이 건물을 온전히 보려면 북쪽에서 봐야 합니다!’ 마치 안내문을 써 붙이듯 정면성을 부인하고, 남향의 입구는 뒷길로 난 쪽문으로 만족한다. 이 북향의 태도는 동십자각을 향한 병풍의 역할과 시각 통로가 우연이 아님을 되새기게 한다. 주변의 도시 공간을 위해 스스로를 철저히 낮추겠다는 의도를 강조한다. 또한 이를 위해서는 북향조차 마다하지 않는다. 이것이 진정한 도시의 건축이다! 도시의 공공 공간을 위해 기꺼이 아파트를 북향으로 배치할 때, 서울은 비로소 완벽한 도시가 될 것이다.
도시의 건축이 갖춰야 할 조건
트윈트리타워는 도시의 건축이 어떻게 달라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혁신적인 기술의 진보를 보여주진 않지만, 주어진 조건에서 최대의 효과를 얻기 위해 평범하지 않은 시도를 했다. 50미터 높이 제한이 있는 지역이다 보니, 그 안에 최대의 층수를 넣기 위해 최대의 기술을 동원했다. 되도록 구조를 얇게 만들어서 17층의 건물을 완성했다. 또 전면을 곡면으로 처리한 방법도 창의적이다. 이중 곡면의 면을 만들기 위해 한 층을 여섯 개의 칸으로 나누고, 각 칸의 면은 단일 곡면으로 만들었다. 이는 수평적으로 강력한 형태 요소이자 기술적인 해결 방식이다.
트윈트리타워가 도시적으로 완벽한 것은 아니다. 가장 아쉬운 점으로 지하 공간을 들 수 있는데, 이는 건축가의 의지라기보다는 건축주의 의사에 따라 만들어진 듯 보인다. 트윈트리타워를 지하 8층까지 파내려가 주차장을 쑤셔 넣은 것은 도시 전체의 입장에서 바람직하지 않을 수도 있다. 지하는 법규상 용적의 제한을 받지는 않지만, 지상 층과 마찬가지로 교통이나 환경에 실제로 영향을 주는 건축 공간이다. 이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트윈트리타워는 도시 건축이 갖춰야 할 조건을 보여준다. 역사와 도시의 역동적인 힘에 몸을 맡겨 스스로 제 형태를 깎아내고, 개별적인 건축의 입장에서는 매우 불합리하고 불리하더라도 도시라는 공동체를 위해 기꺼이 양보한다. 그 양보를 통해 ‘공공의 선’이 생겨났고 이 혜택을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누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공공의 선은 도시 전체의 자산이 되었다. 역사와 현재, 도시와 시민을 잇는 인터페이스가 되기 위해 기꺼이 불편함과 불리함을 감수하는 건축, 이것이 도시의 건축이다.
도시의 건축을 향하여 - DDP(Dongdaemun Design Plaza)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문을 열었다. DDP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건물을 같이 살펴보아야 한다. 바로 ‘쿤스트하우스 그라츠(Kunsthaus Graz)’다. 그라츠는 오스트리아 제2의 도시로,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천년의 고도(古都)다. 도시 전체가 가파른 빨간 기와지붕들로 단장되어 있고, 고색창연한 벽돌이 동화와도 같은 장면을 연출한다. 그런데 여기에 유리로 반짝이는 외계인 건물이 내려앉았다. 2003년에 완성한 ‘쿤스트하우스’다. 영어로는 ‘아트하우스’, 우리말로는 ‘예술회관’ 정도로 번역할 수 있지만, 수장고나 수장품 없이 순회 전시만 하는 전시장이다.
DDP와 쿤스트하우스는 여러 면에서 서로 닮았다. 외형이 닮아서 표절이 의심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떤 건물과도 닮지 않았다는 점이 닮았다. 개성이 넘치며 창의적 설계 방법을 택했다는 점이 유사하다. 두 건축가의 성향이나 이력이 엇비슷하고 설계 경기(design competition)를 통해 선정되었다는 점이 같다. 기술적 대담함이 공통으로 드러나며 무엇보다 역사 도시에서 ‘기괴하다’라는 일반의 민망한 평가를 듣는 것이 닮았다. 두 건물은 모두 독창적이다.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조형물이다. 이는 디지털 건축이라는 최신의 방법을 택한 결과다.
DDP의 건축가 자하 하디드는 이라크 태생으로 영국에서 공부했으며 지금도 런던에 기반을 두고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1983년 홍콩의 한 설계 경기에 당선되면서 화려하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 후 그녀의 설계는 유명세를 떨쳤지만 정작 지어지는 건물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러다 21세기로 넘어오면서 그녀의 설계 사무소는 폭발적으로 일이 밀려들었고 세계에서 가장 바쁜 곳 중 하나가 되었다. DDP를 설계할 즈음에 중국 광저우의 오페라하우스, 런던 올림픽 수영장 등을 설계했고, 최근에는 카타르 월드컵 주경기장, 도쿄 올림픽 경기장 등 전 세계의 굵직굵직한 프로젝트에 이름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