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에 길을 묻다
김성균 외 지음 | 이담Books
지리산에 길을 묻다
김성균 외 지음
이담Books / 2014년 4월 / 204쪽 / 20,000원
프롤로그: 지리산에게 길을 묻다
사람, 삶, 터가 있는 곳, 산내
설화에서는 지리산을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를 낳은 어머니의 산인 동시에 고유의 신선사상을 낳은 산으로 표현하고 있다. 고유신앙과 불교사상을 융합시킨 16세기의 유학자 남명 조식의 사상이 자리 잡은 산이자, 외침과 변혁의 시기를 당당히 맞서가면서 민족수호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기도 한 산이다. 지리산은 농민항쟁과 동학농민전쟁, 의병전쟁의 주 무대로 근대 변혁기의 각축장이기도 하였다. 그 외에도 교종불교와 선종불교가 공존하면서 불교사상이 성숙할 수 있었던 것은 지리산의 계곡과 준령 덕분이 아니었나 싶다.
지리산은 고유신앙과 불교사상이 융합한 한국사상의 산실, 호족세력을 키워낸 곳, 실천을 강조한 남명학파의 본산, 불교의 혁신과 팔만대장경 등 불교문화의 보고, 변혁과 개혁 민족운동의 거점, 영호남의 구심점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리산의 지세가 삶의 모습을 바꾸어왔다면 지금은 어떠한가? 지리산의 변혁과 개혁을 잊지 말라는 듯 지리산의 한 자락 산내가 새로운 변혁을 도모하고 있다. 흔히들 모둠살이 하면 더불어 사는 모습을 연상한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길목에서 모둠살이를 상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지리산 깊은 산자락에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유일하게 지리산 자락과 인연이 닿은 곳이 있다. 백무동 쪽 길목을 가노라면 전라남도 남원시 산내면을 지나 경상북도 함양군 마천면과 휴천면을 지나게 된다. 산내면은 1914년 남원군에 편입되기 전까지 운봉현(모산현)에 속해 있었으며 지리산 안쪽에 있는 동네라고 하여 붙은 이름으로 백제 때부터 산내방이라 불러왔다. 지금의 산내면은 임진왜란을 피해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마을이 생기기 시작했으며, 1880년대 양반계급이 무너지고 사회가 혼란스러워지면서 이주해오는 사람이 늘어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1970년에는 6,711명으로 가장 많은 인구를 기록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후 새마을운동 등 조국근대화가 요동치던 1985년 3,873명까지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게 된다.
지리산 자락의 작은 마을들이 모여 있는 곳, 산내지역이 보여주듯이 지리산은 그저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몰락해가는 시골마을에 불과했다. 그러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실상사를 중심으로 사회변혁 운동이 싹트게 된다. 그 화두의 중심은 마을공동체의 복원이다. 실상사를 중심으로 더불어 사는 모둠살이에 대한 이야기가 회자되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대안학교의 한 형태인 중등과정 작은 학교를 개교한다. 지리산 생명문화연구원이 생명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교육장으로 자리 잡고, 실상사를 중심으로 주변 마을에 젊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그래서 아마도 전국에서 시골의 인구와 초ㆍ중등학교 학생 수가 유일하게 증가하고 있는 곳 중 하나가 산내지역이 아닌가 싶다. 과거에 지리산이 주었던 변혁의 장소의 대통을 잇는 듯 지리산 자락 산내지역의 구산선문의 본산 실상사의 위엄을 지키려는 듯 이런저런 깨달음들이 모여 새로운 마을공동체 만들기를 바라는 희망이 싹트고 있다.
지리산 깊은 계곡과 푸른 강 마을, 마천
함양군 마천면은 지리산 국립공원 면적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지리산 주능선 중 가장 높은 천왕봉을 비롯하여 중봉, 제석봉, 촛대봉, 칠선봉 등을 행정구역 안에 두고 있어 그야말로 지리산면이라 부를 만한 곳이다. 동쪽으로는 산청군의 금서면(今西面)과 삼장면(三壯面)에 접해 있고, 북쪽으로는 함양읍과 휴천면(休川面), 남쪽으로는 하동군과 산청군, 서쪽으로는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山內面)에 접해 있다. 총 9개 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농경지 면적은 고작 7.9%인데, 대부분 산의 비탈진 경사면에 석축을 쌓아 만든 다랑논들이다. 마천면의 마을들은 지리산 계곡 중에서도 가장 깊고 길다는 칠선계곡과 지리산 마고할미가 백 명의 자식들을 무당으로 보냈다는 백무동 계곡을 따라 끼고 형성되었거나, 임청강 주변의 강을 끼고 형성되었다.
마천면의 마을들은 원래 산내면에 위치한 신라천년고찰 실상사를 중심으로 마천면의 벽송사, 금대사, 안국사 등의 사찰 아래에 세워진 사하촌이었다. 고려시대 때 마천면의 원래 이름은 마천소(馬川所)와 의탄소(義灘所)였는데, 소(所)란 고려시대의 특수행정집단으로 지방특산물을 중앙에 공납하기 위해 만들어진 행정구역이었다. 마천소와 의탄소는 종이와 숯을 굽는 지소와 탄소였다. 종이 사용이 많았던 사찰에 종이를 공급하고, 숯을 구워 중앙에 공납했던 가난한 마을들이 모여 살던 곳이 마천이었다.
19세기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지리산은 깊고 험하지만 화전민도 천석(千石)을 한다고 할 정도로 그 골이 넓고 깊다고 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역사에 패자로 몰린 유민들이 쫓겨 산속으로 은거한 곳이 지리산이었다. 그중 마천지역은 가락국의 마지막 왕인 양왕이 신라에 쫓겨 최후를 맞이했다는 전설이 곳곳에 전해 내려오는 곳이다. 구양리 마을 뒷산의 빈대궐터, 추성리의 추성산성과 두지터 등이 그것이다. 또한 우리 역사의 근현대사에서는 민족 간 좌우익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되었던 현장이 이 지역이기도 했다. 지리산에서도 가장 깊다는 칠선골과 백무동은 남로당 빨치산들이 10여 년간 치열한 무장투쟁을 벌이던 곳이었다.
이렇게 역사의 상흔을 안고 있는 마천은 지리산의 아름다움을 한데 모아 놓은 곳이기도 하다. 지리산을 둘러싸고 있는 어느 지역보다 지리산을 가깝게 그리고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 마천이다. 임천강을 사이에 두고 천왕봉과 지리 주봉들을 마주 보고 있는 금대산은 금대제일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지리 주능의 전모를 가장 지척에서 볼 수 있는 곳이다. 금대산 바로 밑의 안국사 인근에서는 맞은편 아래로 마천의 다랑논 풍경이 펼쳐진다. 이곳은 풍경사진작가들에게도 몇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아름다운 촬영 포인트다. 백무동ㆍ칠선골의 원시 비경의 아름다움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 골들에서 흘러나온 명경지수가 이룬 임천강의 용유담은 연중 짙푸른 물 깊이와 옥빛 물색이 주위의 천태만상을 한 바위들과 어우러져 일대 장관을 연출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담과 바위에는 신라의 기승(奇僧) 마적도사에 관한 전설이 얽혀 있어 신비함을 더한다. 오도재를 넘으면 만나게 되는 등구마을은 판소리 변강쇠전에서 주인공인 변강쇠와 옥녀가 전국 각지를 떠돌다 정착한 마을로 유명하다.
마천은 산이 높고 골이 깊은 산촌마을들이지만 외지와 고립된 벽지는 아니다. 덕유산과 지리산 등지에서 발원한 강물이 인월 산내를 거쳐 마천의 임천강을 이루고 산청의 경호강과 합수해 진주 남강이 된다. 남강은 마침내 낙동강이 되어 남해에 이르기까지 물길을 낸다. 이렇듯 마천은 예로부터 물길로 이어진 주요 교통로였고, 지리산 동부지역의 물산교류를 담당하는 젖줄이었다. 지금도 지방 60번 도로가 강을 끼고 경상도와 전라도를 남북으로 잇고 오도재와 지안재의 잿길도로는 함양을 동서로 잇는 주요 교통로가 되고 있다.
묻혀버린 우리들의 모둠살이, 매동마을
괭이골[猫洞], 묘동(墓洞) 그리고 매화꽃 마을[梅洞]
동서울터미널에서 함양을 거쳐 지리산 백무동 종점에 이르기 바로 전 구산선문 선가도량의 본산으로 유명한 실상사를 코앞에 둔 마을이 매동마을이다. 매동마을은 남원시 산내면의 관문이 되는 곳이다. 동면에서 흘러오는 풍천이 마을 옆을 흐르는 매화형국을 띠고 있는 길지라 해서 매동이라 불리는 마을이다. 매동마을은 운봉군 산내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유평마을, 대전마을 장항리에서 분리하여 묘동매골과 합쳐지면서 매동(梅洞)이라고 불리게 됐다. 현재의 매동마을은 유평, 대전, 소년대, 매동, 백장 등 5개의 마을이 합쳐져 매동마을을 이루고 있다.
매동마을의 이름 내력은 다양하게 전해진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마을 앞 200m 위치에 ‘고양이’ 모양의 바위가 있어 고양이의 준말 ‘괭이골’, 한문으로는 고양이 묘(猫)자 묘동(猫洞)이라 불리었다. 또 한편 마을의 위치가 명당이라 하여 무덤 묘(墓)자를 넣어 묘동(墓洞)으로 불리었다는 설도 있다. 그리고 고종7년(1870) 땅의 모양이 ‘매화꽃’ 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마을 이름을 다시 매동(梅洞)으로 변경하여 사용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쏠쏠한 푸른 향을 품다
지리산 산촌마을들은 어느 마을이건 마을 뒤편에 울창한 소나무 숲 한 동 정도는 갖고 있다. 명산 지리산에 자리한 마을이라는 점도 그러하려니와 마을에 조성된 송림의 규모와 수령은 그 마을의 역사를 여과 없이 푸르게 전해준다. 매동마을의 역사와 내력 또한 마을을 둥글게 감싸고 있는 네 개의 송림과 더불어 늙어간다. 오씨ㆍ김씨ㆍ서씨ㆍ박씨 문중의 송림은 그대로 이 마을 네 입향조의 역사다.
소나무 군락은 지리산 자락에 모둠살이를 이루면서 시작한 무중이 들어오면서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서씨 문중의 경우 고려 충해왕1년인 1340년 충숙공(忠肅公) 서성(徐?)의 6세손인 서명세(徐命世)가 관직을 버리고 지리산에 은거하려 들어가다 마을 터가 따뜻하고 지형이 매화형국의 길지인지라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는 입향조 이야기가 있다. 서씨가 매동마을에 들어온 이후 그 후에도 조선조에 들어서 선조 원년 1650년에 솔고개[大井]에서 김해김씨들이 이주하여 들어왔고, 또한 조선 후기 공조참판을 지낸 매천(梅川) 박치기(朴致箕)가 수양차 들어와 일가를 이룬 밀양박씨 송림이 있다. 그리고 가장 뒤늦게 소년대 마을에 자리 잡은 동복오씨 귀은공파 송림도 마을 한쪽 동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매동마을의 송림은 수령이 적어도 50~60년 내외는 돼 보이는 적송무리들이 붉은 기운을 띠고 마을 사면에서 각각 언덕 한쪽씩을 차지하고, 이 마을의 입향조 종중의 권세를 뽐내듯 서 있다.
숨어 있는 마을의 미학
매동마을 입구 도로 맞은편 강가 쪽에 자리하고 있는 송림을 따라가다 보면, 묵은 세월을 말해줄 것 같은 누각이 시야에 잡힌다. 그리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고풍스러운 멋을 간직한 누각은 잠시 지나가는 발길을 멈추게 한다. 1870년 가선대부(嘉善大夫)의 공조참판을 지낸 매천 박치기가 산책과 풍류를 즐기기 위해 세운 누각 퇴수정(退修亭)이다. 퇴수정은 박치기가 벼슬에서 물러나 심신을 단련하기 위해 지었다고 하여 정해진 이름이다. 팔짝지붕에 겹처마 형식으로 지은 정자는 단청이 없어 세월의 흐름을 고즈넉하게 나뭇결에 새겨 넣고, 뒤로는 우거진 소나무에 둘러싸이고 앞으로는 만수천이 흐르는 뛰어난 풍광을 지니고 있다. 만수천이 너럭바위와 큰 바위들이 어우러져 큰물이 휘돌아 나가는 지점에 위치해 있는데 가히 신선들이 노닐다가 간 자리라 할 만하다.
퇴수정 앞에는 지리산에서 자리한 물줄기 하나를 이룬 만수천이 흐르는 람천을 질투라도 하듯이, 아니면 벗을 삼으려고 하는지 소년대ㆍ노인암ㆍ세진대가 퇴수정과 어우러져 있다. 소년대는 철종 때 안용이라는 사람이 빼어난 경치를 사랑하여 집을 짓고 살았으며, 전라감사 윤봉구가 소년대(少年臺)라 새겼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흐르는 시냇물, 퇴수정에서 본 풍광 그리고 암석은 밤에 비추는 보름달의 달빛을 더욱 황홀하게 하고 있다. 퇴수정 안쪽에는 박치기의 심신을 달래려는 듯 누각에 비추는 달과 맑은 바람을 맞아주는 방 한 칸이 마련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정자 안에 문을 달지 않은 작은 방이다. 그곳에 들어가 앉아 보니 주위 사방의 뛰어난 경치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절로 시 한 수가 나올 법하다. 향토사료를 찾아보니 먼지를 털어내는 대라고 하여 이름 붙은 세진대(洗塵臺)에 모여 풍류를 즐겼다고 하는데 그 숫자가 족히 일백 명에 달했다고 한다.
마을 교육기관 촌숙 학고재
매동마을에는 학고재(學古齎)라는 서당이 있었다. 학고재는 율포 박상호가 설립했다고 한다. 박상호의 아우 조카와 더불어 이곳에 서재를 지어 후생들을 강학했다고 전해진다. 서당은 초등교육을 담당하는 민간사설의 촌숙(村塾)을 의미한다. 면, 동, 리를 단위로 하여 형성된 사학교육기관으로, 17세기와 18세기에 이르러 문중이 설립하고 운영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따라서 서당의 설립이 향교와 서원의 기능을 대신하여야 하는 입장을 갖게 되면서 강학소의 역할 이외에 문중단결과 집안화목이란 보족(保族)과 의가(宜家) 등 문중의 크고 작은 일을 처리하고 집행기관의 역할도 동시에 수행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서당은 마을의 요구에 따라 향악주례를 주관하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5일의 일상, 인월장
매월 3일과 8일이 되면 산내, 마천 사람들은 분주해진다. 인월에서 장이 열리기 때문이다. 시장 가는 길에 버스 안에서 만나는 이웃과의 만남은 그동안의 안부를 묻기도 하고 걱정과 푸념이 섞여 나오기도 한다. 하얀 적삼을 곱게 차려입은 백발의 할머니부터 갓난아이를 업고 가는 젊은 아낙까지 인월장으로 가는 걸음은 분주하다.
전라북도 남원시 인월면 인월리에 위치한 인월시장은 5일마다 열리는 정기 재래시장이다. 인월 5일장은 조선시대부터 농축산물 및 생활필수품 물물교환으로 시작된 5일장이다. 예전에는 지리산에서 자란 산채, 약초, 한봉, 한지, 죽제품이 주로 거래품목이었다. 봄에는 지리산의 향기를 담은 산나물과 묘목 그리고 한 해 농사를 기름지게 해줄 씨앗이 장터에 자리한다. 그 외에도 메주와 장류, 농기구와 옛 물건이 한쪽에 자리하면서 장터의 볼거리를 더한다. 지리산의 명물인 흑돼지와 인월 막걸리로 목을 축이기도 하며 고로쇠 약수로 몸의 기운을 달래기도 한다.
발우깎기 고집쟁이, 김대현 할아버지
원백일마을에 계시는 발우깎기 고집쟁이 김대현 할아버지는 사람들이 찾아오면 귀찮아하신다. 나도 그렇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만 들으러 왔다는 것이 왠지 죄송스러운 마음이다. 김대현 할아버지는 19세 때부터 목기깎기를 시작했다. 당시 산내공업기술중학교 목공교사로 계셨던 작은할아버지의 권유로 목기깎기에 입문을 하게 되었다. 어르신들은 기술을 배워야 먹고사는 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신다. 김대현 할아버지의 작은할아버지도 이런 연유에 의해 권유를 했을 것이다.
지리산 자락 동네 뒷산에 널려 있는 나무는 유일한 놀잇감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목기쟁이는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고 회고한다. “목기는 우리가 내놓고 싶어도 자랑거리도 못 되고 옛날에 이씨 조선 500년 양반 상놈 찾고 그 당시에는 나무때기 맞추고 그랬지.” 일제강점기 시절에 일본인들도 이 깊은 산골까지 들어왔다. 일본인들이 들어와서 나무를 활용하여 물건을 만들기 시작했던 것이 목공예가 뿌리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2년제 고등학교 과정에 목공과가 개설되면서 목공기술이 전수되기 시작했고, 2년제로 시작한 학제는 나중에 3년제로 전환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생활고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 3년 과정 전체를 수학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학교에서는 칠하는 법, 깎는 법 등 목공기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옆에 현재 10단짜리, 거기서 기계를 여러 대 갖다놓고 칠 바르는 거 배울 사람은 배우고 깎는 거 배울 사람은 배우고 그랬지. 기술중학교인 공업기술학교라고 명칭을 붙여 가지고 학교가 하나 있었지. 그래 가지고 이제 이 깎는 사람은 배우고 배우는 사람은 많고 어느 정도 목기라 그러면 형식적으로 돌아간다는 걸 알기는 아는데 이게 일이라는 것이 참 고달픈 거야. 3년제는 나도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못해 못 다녔지. 스무 살 안짝부터 시작한 거지. 내 그때 당시 우리 제부님이 인자 공업기술학교 목공예강사로 가르치기도 하고 선생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그래 가지고 그분한테 배웠어.”
김대현 할아버지는 20세 즈음부터 목기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전국으로 입소문난 목기의 대표주자는 남원목기다. 그 남원목기가 산내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산내목기가 남원목기가 된 사연을 들으니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자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장인들이 남원으로 가면서 남원목기가 태어난 셈이다. “지금의 운봉목기는 원래가 이곳 산내야. 그때 산내가 운봉현에 속했었다구. 그래서 운봉목기였고 최근 시군통폐합이 되면서 남원목기가 된 지 몇 년 안 되었지. 그러니까 운봉목기의 원조는 산내라고 할 수 있지. 산내 사람들이 시내에 가서 직접 공장을 운영한 게 아니고 공장 차린 사람한테 공장장이나 기술자로 가서 날품팔이가 된 거지. 그러니깐 산내 기술자들이 남원에 기술을 다 가르쳐준 셈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