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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으로 보는 고려왕조실록

석산 지음 | 평단문화사
심리학으로 보는 고려왕조실록

석산 지음

평단문화사 / 2014년 4월 / 328쪽 / 14,000원





1장 어지러운 후삼국 시대의 영웅들



신라 말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 도처에서 천하평정의 기치를 내건 세력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섰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암울한 시대에 사람들은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해 줄 무언가를 고대한다. 이런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고 사람들의 기대를 만족시키는 데 가장 적합한 도구가 바로 신화다. 이야기가 신화로 수용되려면 두 가지 요소를 갖추어야 한다. 첫째, 그 집단에 전래한 신화적 상징을 빌려야 한다. 둘째, 집단 구성원에게 동일한 희망을 심어 주며 모두를 감싸 안는 내용이어야 한다. 고려를 세운 왕건 가문의 신화는 이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했다.

고려 왕조 신화에 나오는 왕건의 5대조 호경은 부소산(송악산)에서 호랑이로 변한 산신을 만난다.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은 당나라로 가는 배를 타다가 서해 용왕으로 가서 용녀와 결혼을 한다. 이로써 왕건의 선대 모계는 용과 연결이 된다. 작제건의 장남인 륭은 어느 날 꿈속에서 미인을 만나 연분을 맺기로 약조한다. 그 뒤 륭은 송악의 거리에서 꿈속의 여인과 똑같은 여인을 만나 혼인을 했다. 륭은 송악 남쪽에 새 저택을 지었는데 한 승려가 보더니 “기장을 심어야 할 땅에 삼을 심는구나.”라는 말을 남기고 가 버렸다. 이를 전해들은 륭이 쫓아가 보니 그 승려는 도선이었다. 도선은 륭을 데리고 산수의 맥을 살핀 후 지맥을 잡아 주며 일렀다. “내년에 반드시 성자를 낳으리니 이름을 왕건이라 하라.”

이처럼 왕건의 탄생 신화는 호랑이와 용, 식량(기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호랑이는 삼한 민중이 신령하게 보는 동물이고, 용은 바다의 주인인 동시에 중국의 수호신이다. 이처럼 보편적 숭배 대상을 조상으로 둔 왕건이 도선 대사에 의해 식량을 주는 구체적인 인물로 소개되고 있다. 왕건의 탄생을 예언한 도선 대사는 왕건을 일컬어 ‘삼이 아니라 기장’이라고 했다. 이는 무슨 말일까? 신라의 마지막 태자는 삼베옷을 입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최후를 맞이했다. 반면에 기장은 쌀, 보리, 조, 콩과 더불어 오곡 중의 하나로써 쌀이나 보리가 귀했던 당시 가장 중요한 곡식이었다. 당시 신라는 지배층의 사치와 향락으로 백성들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신화에서 왕건을 두고 삼이 아니라 기장이라 한 것은 배고픈 백성에게 먹을 것을 주겠다는 의미이다.

892년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고 901년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우면서 후삼국 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904년 궁예는 철원으로 천도하고 본격적으로 신라와 후백제를 공략했다. 궁예가 견훤을 앞지르는 데는 왕건의 공이 컸다. 연전연승하며 세력이 확대되자 궁예는 중앙집권적 왕권 강화에 몰두했지만 지방 호족의 사병에 대해 통제를 하면서 호족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호족과의 갈등이 심해질수록 궁예의 불안은 깊어져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자들을 가차 없이 제거했다. 반면 왕건은 인내하며 포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왕건 주위에 장수들이 모이고 백성들이 존경을 보내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왕건은 드러나지 않게 왕의로서의 상징화 작업을 진행했다. 철원 출신 궁예의 시대가 끝나고 송악 출신 왕건이 새 시대를 열 것이라는 내용의 조작된 예언이 민간에 유포되어 민심이 왕건으로 쏠리게 하였다. 이렇게 집단심리가 형성되자 민중은 자연스럽게 왕건을 대망하게 되었다.



2장 고려 역사의 문을 열다



왕건은 궁예를 무너뜨리고 고려의 제1대 왕이 되었다. 과대망상에 빠져 자기우상화에 몰입하는 궁예를 지켜봤던 왕건은 명시적인 우상화 대신 내밀한 상징조작으로 여유롭게 혁명에 성공했다. 왕건은 자신을 삼한 사람들이 신령시하면서도 친숙하게 여기는 호랑이와 용의 후손으로 설정했다. 이렇게 신비감을 조성하면서, 자신이 송악에서 탄생한 것도 풍부한 식량을 주기 위함이라는 비유적 신화로 삼한인을 설복하였다. 태조 왕건은 연호를 천수라 하고, 국호를 고구려를 이어간다는 뜻에서 고려로 정한 뒤에 본격적으로 후백제의 견훤과 세력을 겨뤘다. 견훤은 왕위 세습 문제로 맏아들 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왕건에게 항복해 버렸다. 견훤에 이어 신라의 경순왕도 고려에 항복을 결정했다. 이로써 천년 신라가 문을 닫게 되었다. 왕건은 936년 10만 대군을 일으켜 후백제를 정복하고 삼한을 통일하였다. 그의 삼한 통일은 당나라의 힘을 빌렸던 신라와는 달리 자주적인 통일이었다.

태조 왕건은 국가를 안정하기 위해 북진정책, 민족융합정책, 숭불정책을 기본 3대 정책으로 삼았다. 먼저 북진정책으로 서경을 제2의 수도로 삼고 고토 회복을 내세우며 여진을 공략했다. 지역 호족을 융합하면서 동시에 견제하기 위해 호족의 딸들을 후궁으로 삼고, 아들들을 송도에 머물게 하는 기인제도를 실시해 지방 호족의 반란을 막았다. 이로써 왕권의 안전장치가 마련되었으나 한편으로 왕위 승계 다툼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숭불정책은 불교로 민심을 달래기 위해 추진되었으며 곳곳에 절을 짓고 연등회와 팔관회를 국가적 행사로 성대하게 치렀다. 한평생을 삼한을 통일하고 화합하는 데 바친 태조는 나이가 들어 병석에 드러눕자 고명대신 박술희를 불러 후대의 왕들이 귀감으로 삼을 유훈으로 <훈요십조>를 내렸다. 훈요십조는 생을 마무리하는 태조가 고려 왕조의 통치 방향으로 제시한 것이다. 불교를 중시하되 정치와 결탁하지 못하게 하고, 사찰이 비대해지거나 난립하지 못하게 했으며, 자주적 풍습을 지키고, 덕이 있는 후계자를 왕으로 세우도록 했다. 943년 태조는 67세의 나이로 임종을 하였다.



3장 호족을 견제하며 왕좌를 잇다



태조와 장화왕후와의 사이에 태어난 장남 왕무가 고려의 제2대 왕 혜종이다. 외가가 미천한 집안 출신이었던 왕무는 어린 시절부터 왕위 승계를 둘러싸고 이복동생들의 위협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왕무는 늘 불안해하면서 자기 연민에 빠져 지냈다. 이런 왕무를 달래준 유일한 희망이 어머니의 태몽이었다. 왕무의 어머니 장화왕후는 태조 왕건을 만나기 전 바다의 용이 자기 뱃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그녀는 왕위계승에 대한 불안을 달래기 위해 틈만 나면 아들에게 태몽을 들려주며 용의 후손이라고 이야기했다. 대부분의 부모는 아이가 보채면 곧바로 달래면서 욕구를 채워준다. 이것이 반복되면 아이는 자신이 무력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환상, 즉 ‘전능 환상’을 품게 된다.

왕이 되어서도 혜종은 위태로운 나날을 보냈다. 막강한 동생들이 왕의 자리를 넘보고 있는데도 그는 왕권 강화를 위한 노력을 피했다. 대신 물이 담긴 세숫대야를 들여다보면서 마음을 달랬다. 이는 프로이트가 보호적 망상이라 일컫는 것으로, 현실성이 없고 실제와 유리된 환상을 붙들고 집착하는 형태다. 당시 조정 세력은 개경파와 서경파로 나뉘어 있었다. 혜종은 개경파의 도움으로 왕이 되었고, 이복동생 왕요는 서경파의 지지를 받으면서 왕위를 노리고 있었다. 서경 세력을 장악하지 못한 혜종은 매일 밤 침소를 옮겨 다니며 잠을 자고 항상 호위 병사를 데리고 다닐 만큼 불안에 떨어야 했다. 자아가 위축되어 좌불안석이던 혜종은 병상에 눕고 말았고, 34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만다.

혜종의 이복동생 왕요가 고려 제3대 왕 정종이다. 그는 즉위 과정에서 개경파를 지나치게 제거하는 바람에 개경 사람들의 인심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기로 하고, 수많은 백성들을 강제 동원하여 궁궐공사를 시작했다. 정종은 고집이 세고 강인한 성격으로 고구려의 고토를 수복하겠다는 신념이 강했고, 불심도 깊었다. 이는 자아가 강한 동시에 그 자아를 감시하는 초자아도 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종이 무리해서 서경 천도를 추진하자 민심이 사나워지면서 결국 서경 천도는 무산되고 말았다. 그는 민심 이반에 대한 두려움을 종교에 의지하고자 했다. 공적인 일을 개인적 종교 행위로 해소하려 할수록 그의 초자아는 관습과 도덕으로 심판관 역할을 하며 자아를 한층 더 위축되게 하였다. 이렇게 정종은 점점 겁이 많아지더니 병에 걸려 재위 4년 만인 27세에 붕어했다.

고려는 제4대 광종이 즉위하면서 대전환기를 맞이했다. 광종은 초자아에 휘둘린 정종이나 전능 환상에 빠진 혜종과는 달리 비교적 탄탄한 자아를 형성한 자아중심적인 왕이었다. 광종은 즉위 초기에 여우처럼 조용히 지내며 친위 세력을 기른 다음, 사자처럼 호족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그는 고려의 대외 위상 확립과 왕권 강화를 추구했다. 우선 중국의 연호를 따르지 않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여 주권국의 면모를 과시했다. 그리고 노비안검법과 과거제 도입을 추진하여 고려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호족들을 혁파했다. 하지만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확보한 다음에는 무자비한 공포 정치를 시행하면서 집권 말기를 호족들의 피로 물들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왕이 호족들의 세력 관계로 인해 고심하는 것을 보았다. 이복형인 혜종이 호족들의 다툼에 희생되고, 정종은 개경 세력과 부딪쳤다. 이런 과정을 겪으며 호족이 왕실에 위협적인 대상이라는 생각을 굳힌 것이다. 이는 확증 편향의 일종으로 자신의 가치관에 부합하는 확증적인 것만을 받아들이고 그 반대되는 증거는 무의미하게 여기는 경향을 말한다. 이러한 확증 편향이 왕권 강화를 위한 살육으로 나타난 것이다.



4장 왕권을 바로 세우고 국난을 극복하다



고려 제6대 왕 성종은 태조의 손자다. 그는 22세에 왕위에 올라 16년간 많은 업적을 쌓아 고려 시대의 명군으로 기록되었다. 그는 어머니 선의왕후가 일찍 죽자 할머니인 신정왕후의 손에 자랐다. 신정왕후는 손자가 유교 경전을 많이 읽고 좋은 인품을 기르며 세상을 신분으로 구별해 질서 있게 보도록 길렀다. 그 덕분에 성종은 즉위하자마자 충효와 계급 질서 확립을 강조했다. 성종은 숭유정책을 펴면서 문물을 정비하고 중앙집권적 봉건체제를 확립했다. 성종은 외세의 침략도 잘 막았다. 거란이 대군을 보내 침략하자 서희를 보내 외교적 담판으로 물리치고 오히려 강동 6주를 차지하였다.

성종의 뒤를 이어 목종이 고려의 제7대 왕이 되었다. 목종은 나이가 어려 어머니인 천추태후가 섭정을 하였다. 천추태후는 김치양이라는 승려와 눈이 맞아 불교와 도교, 토속 신앙이 함께 어우러지는 팔관회를 열었다. 김치양은 천추태후를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두르며 재물을 쌓았다. 이에 좌절한 목종은 정사를 멀리하고 동성애에 빠졌다. 목종의 동성애 상대였던 유행간과 유충정은 목종의 총애를 바탕으로 나랏일을 쥐락펴락하면서 목종을 허수아비 왕으로 만들어 버렸다. 목종의 동성애는 타고난 것이라기보다 환경 탓이라고 볼 수 있다. 프로이트는 아버지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적대적인 파괴적 부성애를 겪고 자란 아들의 경우 동성애자가 되기 쉽다고 보았다. 목종은 2살 때 아버지를 잃었고, 이후 그의 어머니인 천추태후는 김치양과 사통에 빠져 어린 목종을 돌보는 데 소홀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목종은 동성애에 빠진 것으로 추정된다.

강조의 정변이 일어나 목종이 물러나고 성종의 사촌동생인 왕순이 왕위에 올랐다. 그가 고려 제8대 왕 현종이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왕위계승자로서 목숨에 위협을 받으면서 성장한 현종은 고려 역사상 가장 덕이 많은 왕이 되었다. 현종이 즉위한 뒤 얼마 되지 않아 거란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세 차례에 걸쳐 쳐들어왔다. 고려는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으로 거란을 물리쳤다. 전란을 수습해 사회가 안정되자 현종은 고려 최초로 대장경 6천여 권을 펴내게 했다. 이후 만들어진 <팔만대장경>은 이 대장경을 표본으로 한 것이다. 현종은 호화로운 의식과 사치스러운 제도를 폐지하고 관료나 승려가 백성들에게 횡포를 부리지 못하도록 하였다. 현종은 개인적인 고난을 딛고 왕이 되었듯이, 엄청난 국난을 수차례 이겨내고 고려의 위상을 드높이고 백성들을 평안하게 만든 성군이었다.

현종의 뒤를 이어 제9대 왕이 된 덕종은 현종의 유업을 유지하였다. 덕종은 대내적으로 화합정치를 펴면서 군사력을 신장하여 거란에 강경하게 대응했다. 또한 국자감시라는 입학시험제도를 설치해 실력을 갖춘 학생들이 국자감에 들어올 수 있게 함으로써 국자감을 명실공히 고려 최고의 인재 산실 기구로 만들었다. 덕종의 뒤를 이은 제10대 왕 정종은 거란에 대해 강온 양면책을 구사하고 사회안정책으로 노비종모법과 장자상속법을 실시하였다. 덕종과 현종의 통치시기에 고려는 강성하고 민생이 안정되었다. 이는 성종 때부터 배출된 과거 출신의 신진 관료들로 인해 정치적 기반이 다져지고, 현종이 국난을 이겨 내고 국력을 키운 덕분이다.



5장 국력을 키우고 치세를 이어가다



고려의 제11대 왕 문종은 태평시대를 구가한 성군으로 칭송받는다. 선왕인 두 형은 덕을 갖췄으나 병약했던 데 비해 문종은 궁술을 즐기는 등 건강하고 문무의 재능을 갖추었다. 그는 왕이 된 후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선조께서 쓰시던 금은으로 장식된 용상과 답두(디딤판)는 동철로 바꾸고, 금은 실로 짠 이불과 요는 비단과 무명으로 바꿔라.” 문종이 취한 사치 풍조 개선은 심리학적으로 아버지와 형들에 대한 열등감의 보상이라 볼 수 있다. 열등감은 모든 인간이 경험하는 것으로 인간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우월성 혹은 자기완성을 추구하게 된다.

문종은 왕실부터 소박한 환경으로 만들어 놓은 다음 곧바로 법률 개정에 착수했다. 그는 올바른 법률이야말로 사회 통합과 발전의 으뜸 요건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송과 국교를 정상화하여 선진문물을 수입하였다. 이 시기에 송의 영향을 받아 고려청자가 탄생하였다. 문종 시대에는 정치, 외교뿐만 아니라 학문도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불교를 신봉하던 문종의 열세 아들 중에서 세 명이 출가했는데, 그중 넷째 아들인 왕후가 바로 대각국사 의천이다. 의천은 송나라로 유학을 떠나서 천태사상과 화엄사상을 공부했고 고려로 돌아온 후에 흥왕사의 주지가 되어 천태종을 개창했다.

문종의 뒤를 이은 제12대 왕 순종은 몸이 약해 재위기간이 3개월에 불과했다. 순종의 뒤를 이어 제13대 왕이 된 선종은 문종의 정치를 그대로 답습했다. 그는 학문으로서의 유학과 종교로서의 불교를 조화시켜 사회 안정을 유지했다. 하지만 집권 말기에 이르러 감성적으로 국정에 임했고, 선위하는 과정에서 현실적인 판단을 하지 못해 11살짜리 어린 아들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고려의 전성기는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11살에 등극한 제14대 왕 헌종은 선종의 동생 왕희가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자 1년 만에 왕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헌종은 지병인 당뇨에 숙부에 대한 두려움까지 겹쳐 14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제15대 왕인 숙종은 어릴 때부터 자신이 형의 뒤를 이어 왕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갑자기 병든 어린 조카(헌종)가 왕이 되고, 이어서 더 어린 조카를 왕위에 앉히려는 음모가 진행되자 엄청난 인지부조화와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다. 이러한 심리상태는 나중에 숙종이 쿠데타를 일으켜 형의 네 아들을 모질게 쫓아내는 동기가 되었다. 이렇게 정권을 잡은 숙종은 왕위에 오르자 정국을 안정하며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겼다. 우선 법으로 6촌 이내의 족내혼을 금하여 가족제도의 기틀을 마련하고, 해동통보를 만들어 국가의 재정을 정비하였다. 하지만 당시 득세한 문벌귀족과 여진족의 침략 때문에 숙종이 기울인 노력만큼 태평세대는 되지 못하였다.



6장 태평성대가 저물고 난세가 시작되다



제16대 예종은 숙종의 맏아들이다. 예종이 즉위할 즈음 여진은 거란을 압박하고 중국 전체를 불안에 떨게 할 만큼 세력이 강성해졌다. 왕자 시절 예종은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해 동생에게 밀리고, 종친 때문에 애를 먹었다. 이렇게 힘든 날을 보내고 왕이 되면 자신의 등극에 방해가 되었던 사람을 먼저 정리하는 것이 고금의 관례이다. 그러나 예종은 이런 공격 에너지를 사회적으로 승화하였다. 밖으로는 거란을 상대로 영토 확장을 추진하면서, 안으로는 백성들의 민생안전이라는 목표에 매진했다. 예종은 거란과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펴면서 개인적 욕망을 줄이고 왕으로서 국가를 돌보는 데 온 힘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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